• “민주당은 참 좋겠다”
    [기자생각] 생색내기용 당헌의 운명
        2020년 11월 03일 01:4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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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이 2015년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국민들에게 자신들의 도덕성과 책임정치를 강조하며 만들었던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가 부정부패 사건 등 중대한 잘못으로 그 직위를 상실해 재·보궐선거를 실시하게 된 경우 해당 선거구에 후보자를 추천하지 아니한다’는 당헌 96조 2항, 소위 문재인 당헌을 폐기했다.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재보궐 선거를 후보를 공천할 수 없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 당헌은 실제 현실에서 적용된 적은 없다. 생색내기용 장식품 당헌으로 존재하다가 실제 현실에서 무공천을 적용할 때가 되니까 그마저도 용도 폐기한 것이다.

    비례대표 위성정당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래통합당(국민의힘)의 온갖 방해와 저지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구국의 의지를 피력하며 패스트트랙까지 발동하여 통과시켰던 선거법 개정의 취지를 자기 스스로 부정하고 파괴했던, 소위 비례대표용 위성정당도 전당원 투표라는 퍼포먼스를 벌이면서 강행했다. 그리고 총선 이후 민주당의 위성정당은 검증도 제대로 거치지 않았던 몇몇 당선자들의 자질 시비를 남겨두고 해산했다. 다음 총선에서도 또 필요하면 급조해서 위성정당을 출진시킬 것인지 궁금하기는 하다. 그런데 아마도 그때 가면 또 민주당이 필요로 하는 이러저러한 핑계와 사정이 생길 거다.

    민주당이 이번에 이렇게 문재인 당헌을 용도 폐기한 것에는 서울시장 부산시장 재보궐 선거 외에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의원들 문제도 있을 것이다. 지난 10월 15일 21대 총선 출마자들의 공직선거법 공소시효 만료일을 앞두고 여야 의원 27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국민의 힘 11명 민주당 9명 정의당과 열린민주당 각 1명, 무소속 5명이다. 특히 이 중에서 이미 민주당 정정순(충북 청주 상당) 의원은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구속이 된 상태이다. 이렇게 선거법으로 기소된 의원 중 당선무효 판결을 받으면 재선거가 치러지는데, 민주당의 문재인 당헌에 따르면 여기에도 공천을 할 수 없다.

    말은 뱉었고 당헌에도 번듯하게 새겨넣어서 나름 도덕적이고 책임을 지는 정당이라는 이미지는 챙겼는데, 2020년 지금은 감당해야 할 정치적 손실이 적지 않다는 판단에 기존 당헌의 말미에 “단, 전당원투표로 달리 정할 수 있다”는 한 구절을 넣어 사실상 폐기한 것이다.

    또 시작된 민주당의 남 탓

    민주당의 서울시장 부산시장 재보궐 선거 공천을 위한 당헌 개정에 정치권뿐 아니라 여론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자, 민주당은 또 남 탓을 시작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음에도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은 대선에 후보를 냈다며, 국민의힘이 비판할 자격이 있느냐고 대응한다. 또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법원 유죄 확정판결 이후 사과도 없었다는 점과 과거 오세훈 서울시장의 사퇴로 치러진 보궐선거까지 거론한다.

    뭔가 기시감이 느껴진다. 지난 총선 때의 위성정당 파동 때도 똑같았다. 한계가 많았지만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 개정을 민주당이 주도하고 정의당, 시민사회 등이 협력하여 통과시켰을 때도, 국민의힘이 위성정당 꼼수와 편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위성정당 창당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자기 정당화의 논리를 폈다.

    냉정하게 묻자. 국민의힘은 당헌에 부정부패 등 중대한 귀책사유가 있을 때 무공천한다는 규정이 있나? 또는 그런 주장을 국민 앞에서 공언해왔었나? 국민의힘은 절대 그런 도덕과 윤리, 책임정치의 잣대에 엄격한 정당이 아니다. 그래서 민주당은 국민의힘을 수구정당, 기득권 정당, 반성과 성찰이 없는 정당이라고 비판을 하지 않았나? 그런 국민의힘과 차별화를 위해서, 국민의힘과는 다른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민주당 스스로 책임이 있을 때 책임을 지겠다는 당헌을 만들지 않았나? 지지를 호소하고 국민의힘과 차별화가 필요할 때는 그 당헌이 필요하고, 이제 당헌이 필요 없어지니 국민의힘 탓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거지 논리이다.

    위성정당 때도 마찬가지였다. 국민의힘이 위성정당 만드니 민주당도 어쩔 수 없이 선거법 개정의 취지와는 다르지만, 위성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이거 또한 분명히 하자. 국민의당은 선거법 개정을 비판하고 입법 과정에서 불참했다. 그러기에 개정된 선거법에 대해 법 테두리 내에서 저항할 수 있는 나름의 정치적 근거가 있다. 그런데 민주당은 그런 국민의힘의 논리와 정치를 비판하면서 개정 선거법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위성정당 베끼기로 스스로 만든 개정 선거법 무력화에 앞장을 선 것이다.

    입법을 추진한 최초의 사람이 그 법을 준수하는 최초의 준법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법을 둘러싼 논란과 비판 등이 있을 수 있지만 그 법의 최초 옹호자는 그 법을 만든 입법자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이 만든 법을 자신이 어기고 무력화하고 파괴한다면 법치주의가 설 자리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건 법률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정당의 당헌당규에도 유효하다.

    “민주당은 참 좋겠다. 국민 앞에 약속했다가 사정이 생기면 또 바꾸고, 전당원 투표해서 바꾸고 하면 되니까. 당헌이나 규정, 나아가서 국가의 법률까지도 필요할 때는 쓰고 또 필요하면 바꾸면 되니까”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의 말이다. 얄밉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

    하나 더 짚고 넘어가자. 민주당의 내년 재보선 후보 공천을 위한 당헌 개정에 대해 소위 진보적이라는 시민사회의 쓴소리가 거의 없다. 위성정당 때는 시민사회 일각이 민주당과 공조를 할 때 그래도 다수의 시민사회가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런데 이번 당헌 개정 논란에는 침묵이 다수이다.

    그마나 참여연대의 논평이 있지만 이것 또한 기괴하다. “집권여당의 이번 결정에 대한 심판은 유권자들의 몫일 수밖에 없고, 집권여당으로서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자리를 포기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를 인정하더라도, 공당이라면 응당 자신의 약속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것을 뒤집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진솔한 반성이나 사과가 선행되어야 마땅하다.” 논평의 마지막은 “제대로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거듭 사과”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서울시장 부산시장 재보궐 선거를 치르게 된 이유를 보건데, 그게 상처 입은 피해자들과 국민에게 필요한 사과는 아니다. 필요한 사과는 말이 아니라 책임지는 행동이다.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가 부정부패 사건 등 중대한 잘못으로 그 직위를 상실해 재·보궐선거를 실시하게 된 경우 해당 선거구에 후보자를 추천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실천하는 게 사과이고 책임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장, 전 진보신당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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