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급 흉작, 농부의 마음
    [낭만파 농부] "쌀값은 실존이구나!"
        2020년 10월 29일 02:48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혹시나’ 하는 기대도 없었고 짐작했던 대로 역대급 흉작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은 칙칙한 빛으로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태초의 공허로 돌아가 텅 비어버린 땅, 거기서 쉼과 희망을 끄집어내던 심성은 메말라 버렸다. 그야말로 ‘슬픈 가을걷이’.

    수확기(콤바인)를 기다리며 소출을 어림하는 마음 졸임은 아예 없었다. 일주일 남짓 이어진 추수기간은 마치 ‘애도주간’이나 되는 듯 착 가라 앉았다. 얼굴마다 흐뭇하게 묻어나던 웃음기도, 탁배기 몇 순배에 흥청이던 거나한 추임새도 싹 가셨다. 작업자는 묵묵히 기계를 몰 뿐이고, 농사꾼은 허허롭게 뜬구름만 바라볼 뿐. ‘반타작’이네, ‘폭망’이네 하는 지경을 면한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심란하고 맥 빠지는 상황이라 ‘황금들녘 풍년잔치’는 결국 급조된 ‘풍상들녘 위로마당’으로 바뀌었다. 장마에, 태풍에 모진 풍상을 겪은 ‘농심’들끼리 서로 다독이는 손길이 아쉬웠음이다. 선뜻 품을 내주고 성원을 마다하지 않은 이들 또한 그런 마음으로 함께 어울렸다. 그리하여 끝내 기가 꺾이지 않고 내년을 기약할 수 있으리라.

    ‘풍상들녘 위로마당’에서 생기 일

    2020 가을걷이 기념…”김치!”

    우리 고산권 벼농사두레에는 “내가 먹을 쌀, 내가 짓는다”고 나선 이들이 스무 명 남짓이다. 저마다 한 두 배미 농사에 지나지 않아 소농도 못 되고 ‘마이크로 농’이라 불린다. 이따금 나 같은 생계형 농사꾼한테 ‘레저농’이라 핀잔을 듣기도 한다. 경작 규모가 워낙 영세하다 보니 올해 같은 대흉작에는 경비를 빼고 나면 적자를 면할 수 없다. 그래도 식구들이 한 해 먹을 쌀은 너끈히 건진다. 게다가 친지들한테 쌀 봉지 건네며 “내가 손수 농사지은 쌀”이라 생색도 낼 수 있다. 멋지지 않는가.

    나락을 담은 마대자루가 저울대에 오르고 처참한 소출량이 숫자로 드러나는 순간 속이 상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래도 레저농은 역시 레저농. 수확작업 중인 콤바인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찍기에 바쁘다. 온갖 그럴듯한 포즈를 취하며, 마치 꽃다발이라도 되는 양 볏 다발을 한 움큼 품에 안고서.

    레저농

    곧 첫 방아를 찧게 된다. 이번에도 대흉작이라는 참사를 까맣게 잊은 채 다들 ‘햅쌀밥 잔치’에 빠져들 것이다. 겉절이와 김 말고는 반찬이 필요 없다는, 아니 반찬이 없어야 그 황홀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햅쌀밥 말이다.

    여기까지, 그것으로 잔치는 끝이다. 방아 찧은 쌀, 언제까지 햅쌀밥 잔치만 벌일 순 없는 노릇이고 어서 팔아넘겨야 생계를 꾸릴 수 있다. 이미 직거래 방식으로 소비자망이 꾸려져 있으니 이변이 없는 한 모두 처분이 될 것이다. 그런데 머리가 좀 복잡하다.

    역대급 흉작으로 산지쌀값이 30% 남짓 폭등했다. 우리는 현재 ‘시장상황과 상관없이 생산비에 기초한 고정 가격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슨 상관이냐 싶지만 그리 간단치가 않다. 내가 짓는 논은 모두 임차농지다. ‘도지’라는 이름으로 임대료를 내는데 아직도 현물(쌀)로 책정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1마지기 당 쌀1가마’ 식이다. 보통은 현물 대신 당시의 ‘현지쌀값’으로 환산해 임대료를 지급한다. 올해는 현지쌀값이 30% 올랐으니 임대료 또한 30% 오른 셈이 된다. 결국 우리 쌀의 소비자 공급가 또한 그에 비례해 인상요인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인상요인을 반영해 공급가 또한 올리면 되지 않느냐고? 솔직히 그러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가뜩이나 초유의 흉작인데 쌀값마저 동결하면 수입이 크게 줄어드리란 걸 누가 모르겠나. 평년작이어도 빠듯하게 생계를 꾸릴 수준의 소득인데… 아, 쌀값은 실존이구나!

    사실이 그러하고, 명분도 뚜렷한데 왜? 우리 사회의 유기농 쌀값 책정구조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공생’의 가치 때문이다. 코로나19로 많은 이가 어려운 국면을 지나고 있다. 함께 견뎌야 하지 않겠나. 밥 한 끼라도 맘 편히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말이다.

    오늘 저녁 단골 소비자에게 보낼 ‘햅쌀주문 안내’ 문자메시지에 마침표를 찍는다.

    [차남호-햅쌀주문 안내]

    많이 기다리셨죠? 햅쌀이 나왔습니다. 오랜 장마와 태풍 피해로 역대급 흉작. 그래도 햅쌀밥, 그 아찔한 풍미를 나눌 수 있어 다행입니다. 현지쌀값 30% 급등(임대료 동반상승)으로 인상요인이 생겼지만 코로나 국면, 기왕이면 좋은쌀로 집밥 해드시라고 공급가는 그대로 두었습니다. 아, 밥맛 없으면 무료!^^*

    ◇백미/현미(신동진) 5Kg=3만원. 10Kg=4만5천원. 20Kg=8만원 ◇백찹쌀/찰현미(동진찰벼) 5Kg=3만5천원. 10Kg=5만원. 20Kg=9만원(택배비 포함)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