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오쩌둥·주더 명의로
    ‘약법 8장’을 선포하다
    [국공내전-59] 공산당, 항저우·타이위안·우한·시안 등 요지를 점령하다
        2020년 10월 28일 11: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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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공내전의 네 단계

    국공내전은 처음에 국군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시작되었다. 내전의 추이를 시기별로 나누면 대체로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945년 2차 대전 종전부터 1946년 내전 발발 시기 전까지는 전초전으로 볼 수 있다. 전쟁이 끝나자 국공은 일본군 점령지역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이때는 아직 국공합작 분위기가 남아 있어 공산당 부대를 팔로군이라 불렀다. 동북과 화북, 산둥지역과 중원에서 국공은 요지를 점령할 목적으로 대규모 전투를 마다하지 않았다.

    1946년 6월, 국군이 공산당의 중원 해방구를 침공하여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1947년 3월까지 전투는 국군의 일방적인 우세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국군은 중원 해방구에서 공산당을 밀어내었으며 산둥 해방구 깊숙이 밀고 들어갔다. 동북에서 공산당은 만주를 선점했지만 전격전의 명수 두위밍에 밀려 북만주의 하얼빈까지 후퇴하였다.

    화북에서 주도권을 쥔 국군은 공산당의 수도였던 옌안을 점령하며 기세를 떨쳤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는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지도부를 둘로 나누었으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 핵심 지도부는 섬북을 전전하며 전쟁을 지도하였다. 이 시기를 공산당에서는 전략적 후퇴 시기라고 부른다. 이때 마오쩌둥은 “도시나 지역에 연연하지 말고 최대한 적을 소모시키라.”는 방침으로 공산당 부대의 사기를 유지했다. 자신은 고난에 찬 피난길에서 국군에 쫓기며 섬북을 전전하였다. “전황이 호전되기 전까지 황허를 건너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지도력을 강화하였다.

    공산당은 1947년 3월부터 1948년 9월까지를 전략적 대치 시기로 규정하였다. 이 시기에 해방군은 후퇴와 유인, 운동전 등으로 국군을 소모시키며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였다. 섬북에서 펑더화이의 서북 해방군은 소규모 부대로 후쫑난 부대를 유인하며 각개격파에 성공했다. 산둥에서도 천이와 쑤위는 해방구로 밀고 들어오는 국군을 운동전과 유인 등으로 각개격파하여 해방구를 지켰다. 이 가운데 마오쩌둥은 류보청과 덩샤오핑의 진기로예 야전군에게 황허를 건너 따베산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화북과 섬북에 대한 국군의 군사적 압력을 줄이고 반격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대담한 작전이었다. 동북에서는 쓰핑에서 밀려 하얼빈까지 후퇴했던 린비아오의 동북 민주연군이 치고 빠지기식의 공격으로 국군을 소모시켰다. 이 시기 도시에서 밀려난 공산당은 농촌 지역 곳곳에 해방구를 건설하며 오히려 힘을 비축했다. 도시와 철도교통에 의지하는 국군은 점점 병력 소모가 심해지며 기동성을 잃어갔다.

    1948년 10월부터 1949년 신중국 성립 시기까지를 공산당은 전략적 공격 시기라고 부른다. 타이완의 역사교과서에는 ‘대륙변색’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륙의 색깔이 붉게 물들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공산당은 전략적 결전 방침으로 대규모 회전을 추구하였다. 동북에서 린비아오 휘하의 동북 야전군이 국군 50만명을 섬멸하자 공산당은 승기를 휘어잡게 되었다. 이어서 가장 중요한 결전인 화이하이 전역에서 덩샤오핑과 류보청, 천이와 쑤위의 연합군은 국군 80만명을 격파하고 장제스 직계 부대 주력 대부분을 섬멸하였다. 이어 60만 국군이 수비하던 베이핑과 텐진 등 화북지역에서 소규모 전투 끝에 베이핑을 점령하고 50만 국군을 해방군으로 편입하였다.

    거듭되는 오판과 전략적 착오로 전쟁 지도에서 실패한 장제스는 리쫑런에게 대리하게 하고 자신은 총통직에서 물러났다. 수세에 몰린 국민정부는 평화회담을 통해 시간을 벌고자 하였으나 냉정하고 과단성있는 마오쩌둥과 공산당 지도부에게 통하지 않았다. 사실상 투항을 요구하는 평회담이 결렬되자 해방군은 단숨에 창장을 건너 국민정부 수도인 난징과 상하이로 치고 들어갔다. 난징에 무혈입성한 해방군은 치열한 시가전 끝에 상하이를 점령하고 국민정부 기관은 광둥성 성도인 광저우로 피난하게 되었다.

    약법 8장을 메모한 마오쩌둥의 필적

    약법 8장 선포를 보도한 런민일보

    이제 공산당에게 내전의 승리는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점령지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통치질서를 세우기 위해 고심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인민해방군 약법 8장’이다. 1949년 4월 25일,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인 마오쩌둥과 총사령인 주더 명의로 발표된 약법 8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전체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2.민족의 공업과 상업, 농업과 목축업을 보호한다.

    3.관료자본을 몰수한다.

    4.모든 공사립학교, 병원, 문화교육기관, 체육시설과 기타 공익사업을 보호한다.

    5.악질적 전쟁범죄자와 악질 반혁명분자를 제외한 모든 국민당 정부의 대소 관원, 총을 들고 저항하지 않고 음모를 꾸미지 않는 자는 포로로 하지 않으며 모욕도 하지 않는다.

    6.모든 패잔병과 소속을 잃은 국민당 병사는 현지 인민해방군 또는 인민정부에 투항하여 신고할 것.

    7.순차적으로 준비하여 농촌의 봉건 토지소유제를 철폐한다.

    8.외국 교민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한다.

    인민해방군의 약법 8장은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선포한 일이 있었다. 첫 번째는 린비아오 휘하의 동북 야전군이 선양을 점령하였을 때이며 두 번째는 베이핑을 점령하기 직전이다. 내용은 대동소이하며 상하이 점령 직전에 선언한 것이 가장 간결하다. 약법 8장답게 간명하고 이해하기가 쉬우며 특히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내용을 더하였다. 신중국 성립 후의 국제관계를 염두에 둔 조항이라 할 수 있다.

    쉬샹첸, 타이위안 점령을 펑더화이에게 양보하다

    해방군이 창장을 건너 난징과 항저우 등으로 물밀듯이 밀고 내려갈 무렵 산시성 성도 타이위안이 공산당의 수중에 떨어졌다. 1949년 4월 24일, 쉬샹첸 휘하의 해방군이 타이위안성 전역을 점령하여 산시성을 평정하였다. 쉬샹첸은 1948년부터 산시성을 차근차근 공략하여 1948년 7월에는 성도 타이위안을 제외한 전 지역을 점령하였다. 쉬샹첸은 국군보다 적은 병력으로 싸우느라 언제나 노심초사하였다. 산시군벌 옌시산은 ‘수성전의 대가’라고 할 만큼 축성과 보루를 이용한 전술에 뛰어났다. 쉬상첸은 원래 수염을 길게 길러 ‘쉬후즈’라는 별명이 있었다. ‘쉬후즈’를 우리말로 하면 ‘서수염’이 된다. 그런데 산시성 린펀 싸움 때 그의 상징이던 수염이 하얗게 세었다고 한다. 린펀 싸움은 이 내전기에서 이미 상세하게 다룬 일이 있다.

    타이위안성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병약한 쉬샹첸은 이미 들 것을 타고 지휘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마침내 복막염이 터져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마오쩌둥은 인민해방군 부총사령인 펑더화이에게 대신 지휘하라고 지시하였다. 쉬샹첸은 타이위안 함락을 눈앞에 두고 대공을 펑더화이에게 양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펑더화이는 병사들의 사기를 염려하여 모든 전투명령을 쉬샹첸의 명의로 하달하였다.

    타이위안은 ‘산시왕’이라고 일컫던 군벌 옌시산의 근거지였다. 옌시산은 신해혁명에 뛰어든 이래 38년간이나 산시성을 통치해 왔다. 1930년에는 펑위샹과 함께 장제스에 대항하여 ‘중원대전’을 치러 패배하기도 하였다. 내전이 시작되자 옌시산은 산시성에서 공포정치를 통해 공산당원이나 동조하는 군중들을 학살했다. ‘특경대’ 등 특무기구를 신설하여 잡아들인 사람들을 곤봉 등으로 타살했는데 1947년 11월과 12월 두 달간 죽인 이가 3,000여명에 이르렀다. 옌시산은 공산당에 대항하기 위해 장정을 징집하고 식량을 공출하는 등 전투준비에 열심이었다. 그만큼 옌시산은 반공의식이 강하여 공산당과 끝까지 해볼 생각이었다. 이런 영향으로 공산당과 싸우다 함께 ‘살신성인’하기로 한 사람이 500명이 넘었는데 옌시산 자신도 싸우다 죽겠노라고 공언하였다.

    1949년 3월 25일, 총통대리인 리쫑런이 국정을 논의하자며 옌시산을 난징으로 초청하였다. 옌시산은 즉시 난징으로 곧바로 날아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중일전쟁 때에도 푸쭤이에게 타이위안성을 맡겨두고 성을 나간 일이 있었다. 옌시산이 전쟁 준비를 열심히 하였지만 전투는 4일 만에 끝이 났다. 1949년 4월 24일 격렬한 시가전 끝에 해방군은 수비군을 모두 섬멸하고 전투를 끝냈다.

    타이위안 전투에서 승리하고 환호하는 해방군

    타이위안 전투에서 포로가 된 국군장교들

    타이위안 전투는 저항하던 국군의 처절한 최후가 눈길을 끈다. 해방군이 타이위안 성을 점령하였을 때 산시성 주석 대리 량화즈(梁化之)를 비롯한 옌시산의 여동생 옌후이칭(閻慧卿) 등 죽음을 미리 결의했던 사람들이 집단 자살하였다. 서로 죽이는 방식으로 자살했다고 하는데 특무기관의 지휘관과 헌병 등 그렇게 죽은 사람이 4백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집단자살을 주장했던 옌시산은 난징에서 광저우로 피난을 갔다. 그는 리쫑런 정부에서 국방부장 겸 행정원장을 맡았다. 그는 “공산당에 대항하여 휘하 수백명이 살신성인하였다.”며 그것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다고 한다.

    타이위안 전투에서 특기할만한 일은 일본군의 존재이다. 옌시산은 일본군 4,000여명을 받아들여 해방군에 대항하였다. 타이위안이 점령되었을 때 옌시산의 일본 고문 이마무라(今村)는 독약을 먹고 자살했으며 일본군 1,000여명은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옌시산은 학정에다 군중학살, 일본군 패잔병 기용 등 온갖 오명을 썼다. 그중 가장 치사한 일은 부하들과 여동생을 집단 자살하게 해놓고 자신은 피난한 일이다. 그는 내전 후 타이완으로 건너가 한직을 전전하다 병사하였다.

    해방군, 항저우와 우한, 시안을 순조롭게 점령하다

    1949년 4월 하순, 인민해방군 제2, 제3야전군이 창장을 도하하여 난징을 점령하였다. 린비아오 휘하의 제 4야전군은 후베이성 성도인 우한에 접근하였다. 화북 군구는 타이위안을 점령하였으며 18병단과 19병단은 제1야전군의 지휘를 받아 산시성에서 섬서성(중국 발음은 산시성이나 구분하기 위해 섬서성으로 표기한다.)으로 진입하였다.

    1949년 5월 3일, 저장성 성도 항저우가 해방군에게 점령되었다. 해방군이 항저우에 접근하자 국군 수비군은 소수의 병력만 남겨둔 채 철수하였다. 해방군은 약간의 총격전을 치른 뒤 쉽게 항저우시와 그 주변을 석권하였다.

    한편 창장 중류의 요지인 우한은 1949년 5월 15일 해방군에 싱겁게 점령되었다. 우한은 본래 화중 초비총사령부가 위치하였다. 화중 사령부 총사령관 바이충시는 별명이 ‘작은 제갈량’으로 지모와 용병이 탁월하여 공산당에서도 가장 꺼리는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바이충시가 이십오만 병력을 거느리고 있어 해방군은 한바탕 전투를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 화중 초총 부총사령관겸 5수정구 사령관 장쩐이 부대를 이끌고 우한 부근에서 기의하자 상황이 급변하였다. 장쩐은 허난성 난양 동부전투에서 천겅을 골탕먹인 인물로 국군 안에서 지장으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본래 광시계 직계로 바이충시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는데도 기의를 선택하였다. 국군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판세가 요인이었을 것이다.

    후난성 주석 청첸. 장쩐과 함께 기의

    장쩐의 기의에는 국민당 원로이자 퇴역군인인 청첸과 민주인사인 리지선의 고무가 큰 역할을 하였다. 청첸은 1948년 국민대회에서 리쫑런, 쑨커 등과 부총통 경선에 나서 낙선한 인사였다. 장쩐은 청첸과 함께 기의하기로 모의한 뒤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기의를 선언하였다. 해방군이 우한을 공격하려는 찰나 수비군을 이끌고 귀순한 것이다. 장쩐의 가족에도 공산당원이 있었는데 바로 그의 사위였다. 공산당 지하당원인 사위는 장쩐에게 계속 기의를 권했다고 한다.

    장쩐의 기의에는 위기도 있었다. 기의 하루 전인 5월 14일, 국군 참모총장 구쭈통이 바이충시에게 전보를 보내어 장쩐을 체포하라고 지시하였다. “장쩐은 공비들과 연결된 것이 확실하다. 장쩐을 체포하고 휘하 부대는 해산하라.” 바이충시는 전보를 받고 장쩐을 억류하는 한편 부하 지휘관들을 소집하라고 지시하였다. 직접 장쩐의 부대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장쩐은 태연하게 웃으면서 “내가 사령관에게 숨긴 일이 없는데 무엇을 의심합니까? 부하들에게 전화하라고 지시하니 전화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여럿에게 전화하기는 어려우니 부대에 돌아가 하도록 해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 바이충시는 망설이다가 장쩐의 귀대를 허락하였다. 지모가 뛰어난 바이충시가 왜 장쩐을 놓아 보냈을까? 장쩐은 귀대 즉시 지휘관들을 모아 기의를 감행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파견하여 해방군의 우한 진입을 영접하였는데 그때는 해방군이 막 공격을 시작하였을 무렵이었다.

    1949년 5월 15일, 장쩐은 5개 사단 2만여 병력을 이끌고 기의를 선언하였다. 바이충시는 소식을 듣고 병력을 동원하여 장쩐의 기의부대를 포위 섬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세가 불리하였다. 해방군 선봉부대가 이미 창장을 건넜으며 후속부대가 창장을 속속 도하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이충시는 퇴로가 끊길 것을 걱정하여 부득이 부대를 이끌고 광저우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그러자 장쩐은 허성차오(賀勝橋) 서북지역에서 바이충시의 퇴각부대를 저지하여 일부를 포로로 잡았다. 어제의 동료가 오늘은 적으로 서로 총부리를 겨누게 된 것이다. 장쩐이 기의한 날 해방군은 우한에 입성하였다. 장쩐의 기의부대는 얼마 후 4야전군 휘하 부대로 개편되었다. 장쩐이 마오쩌둥과 주더에게 전보로 기의사실을 전하니 마오쩌둥이 크게 기뻐하였다. 마오쩌둥은 기의부대를 1개 군으로 편성하여 장쩐에게 도로 사령을 맡도록 지시하였다.

    한편 펑더화이가 이끄는 서북 지역의 제1야전군은 후쫑난이 수비하는 섬서성 성도 시안(西安)을 공격하였다. 마오쩌둥과 주더의 전국 진군 명령이 하달되자 펑더화이, 장종쉰, 쉬중신이 이끄는 제1야전군은 서북지역 전 전선에서 출격했다. 국민정부 시안공서 주임인 후쫑난은 형세가 좋지 않은 것을 알고 전략적 퇴각을 실시하였다. 간쑤, 칭하이, 닝샤에 주둔하고 있는 마부팡, 마홍쿠이 부대와 함께 산시성 중부지역으로 물러나 인민해방군의 서진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후쫑난은 전황이 불리할 경우 섬서 남부와 쓰촨 북부로 물러날 생각이었다. 인민해방군 제1야전군은 후쫑난 부대가 전 전선에서 퇴각한 것을 확인하고 5월 15일 여러 길로 섬서 중부지역으로 진격하여 후쫑난 부대를 추격하였다. 시안에는 소수의 수비병력만 남아 있었다. 해방군은 1949년 5월 19일 센양(咸陽)을 함락하고 20일 시안을 점령하였다.

    시안에 전차를 몰고 입성하는 해방군

    중공, 주중 미국대사 스튜어트와 회견하다

    1949년 5월 13일, 미국의 주중국대사 스튜어트와 중공 난징 군사관리위원회 외사처 주임은 황화(黄華)가 처음으로 접촉하였다. 4월 21일 해방군이 창장을 도하하자 국민당 정부는 광저우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미국 대사 스튜어트는 난징에서 중공과 접촉을 시도하였다. 스튜어트는 일찍이 옌징대학에서 오랫동안 교무처장직을 맡았다. 그런데 옌징대학의 학생이던 황화가 난징 군사관제위원회 외사처장으로 선임된 것이다. 스튜어트는 즉시 황화에게 비서를 보내 어 만나자고 요청하였다. 5월 13일 저녁 스튜어트와 황화가 처음으로 만났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하였다. 스튜어트는 중국의 통일과 평화, 민주를 희망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황화는 미국이 중공 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외국과 상무 및 기타 관계를 원만히 맺고 싶다고 밝혔다. 스튜어트는 “중공이 미국의 승인을 얻고 싶다면 중국과 미국 간에 맺은 현행 조약을 준수해야 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1949년 6월 6일, 황화와 스튜어트가 두 번째로 회합했다. 황화는 다시 중공이 미국 및 다른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고 이야기했다. 황화는 “외국 정부 특히 미국이 국민당 정권과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스튜어트는 미국이 장제스에 대한 원조를 중지할 것이라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는 중공이 외국 대사관을 난징에 계속 있도록 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발전”이라고 이야기했다. 스튜어트는 민혁(국민당 혁명위원회의 약칭으로 국민당 안에서 장제스에게 반대하였다.) 인사인 천밍슈(陳銘樞)를 통해 미국의 다섯 가지 의견과 문건 4개를 전달하였다. 이때 전달한 미국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1) 미국인의 믿음이나 생각과 다른 형태의 국가와 평화공존할 수 있다.

    2) 미국은 장차 중공이 장악할 정부에 대하여 특히 두가지 점에 관심이 있다. 첫 번째는 그 정부가 인권을 존중할 것인지, 아니면 독재 경찰국가가 될 것인지이다. 두 번째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세계혁명을 추구할 것인지이다.

    3) 대체로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우호적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중공 외교정책의 현상에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4) 경제관계에서 중공 관원이나 언론들은 미국과 통상을 부추기지(강조하지) 않는 것 같다.

    5) 미국의 입장에서는 중공이 스튜어트 대사 및 다른 나라 사절단 대표들을 난징에 그대로 둘 것인지 지켜보고 있다. 4개 문건은 중공이 미국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며 또 중요하다고 설명하였다.

    미국대사 스튜어트

    11일 천밍슈는 베이핑으로 가서 중공 지도부에게 이런 의견과 문건을 전달하였다. 23일, 그는 스튜어트에게 마오쩌둥 및 저우언라이와 접견하였으며 만족할만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했다. 6월 중순, 스튜어트는 황화에게 베이핑에 가서 옌징대학교의 졸업식에 참석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6월 28일, 스튜어트는 미국 국무부에 자신이 베이핑에 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을 설명하고 비준을 요청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 미국의 정책을 이해시키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미국의 우려와 중국의 앞날에 대한 희망을 전할 것이다. 그리고 중공 영도자의 의사를 워싱턴에 가지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베이핑행은 미중관계에 유리한 영향을 가져오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스튜어트는 불리한 조건에 대하여 분석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베이핑 행은 미국 국내의 강력한 비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국무부가 곤경에 처할 수도 있으며 동맹국들은 미국이 친구를 버리고 중공을 승인하는데 앞장섰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베이핑에 가는 것은 폐단보다 이익이 클 것이다 .”

    사흘 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스튜어트의 베이핑행을 불허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 국무부는 스튜어트에게 언론과의 인터뷰는 물론 언행에 각별히 조심하라고 통보하였다. 이때는 이미 동서 간 냉전에 시작되어 스튜어트의 제안이 통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미국의 이런 냉전 분위기는 일년 뒤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더욱 찬바람이 불게 되었다.

    <국공내전>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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