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 이후의 사회,
    어디로 어떻게 이행할까②
    계급과 사회의 위기, 지대공유 동맹
        2020년 10월 23일 10: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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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 가을호에 게재된 한지원 씨의 “코로나 19 이후의 사회…어디로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를 동의를 얻어 3차례 나눠 게재한다. 1회 ‘최근 유행하는 포스트 코로나 대안들’ 2회 ‘계급과 사회의 위기’ 3회 ‘이행의 문제 : 봉건제 변혁의 시사점’을 싣는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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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의 사회,어디로 어떻게 이행할까① “최근 유행하는 포스트-코로나 대안들”

    3. 계급과 사회의 위기

    코로나19 대유행은 현 사회가 가지고 있는 기저질환을 밖으로 드러냈다. 또 그 기저질환을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치명적 병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의 내적 모순과도 연결되어 있다. 비대해진 중앙은행 대차대조표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증가한 정부 부채는 현대 경제의 기저질환을 잘 보여준다. 방역의 과학성을 부정하고 대내외 갈등을 키우는 포퓰리즘 정치인들의 작태 역시 현대 정치의 기저질환을 제대로 보여준다. 경제와 정치가, 즉 그야말로 사회가 위기에 빠졌다.

    이번 장에서는 사회의 위기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본다. 현 사회가 예전 상태로 복구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볼 것인데, 현 위기의 진행 방향을 점쳐보기 위해 분석의 대상을 중세 봉건제까지 넓혀보겠다.

    (1) 계급사회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 선언』(공산당선언)에서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이 계급투쟁이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는 것으로, 혹은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하는 것으로” 나아갔다고 말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회의 위기란 바로 이 두 가지 상황과 관련된다. 혁명적 개조 외에는 답을 찾을 수 없는데, 아직 그런 개조가 시작되지 못했거나, 또는 개조의 방향을 아예 찾지 못하고 사회 전체가 몰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상황 말이다. 이 두 가지가 바로 사회의 위기이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먼저 계급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계급은 간단하게 말해 지배하는 집단과 지배당하는 집단 사이의 구분이다. 이때 지배하는 계급은 잉여노동을 배타적으로 취득할 힘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다. 지배당하는 계급은 그 잉여노동을 제공하는 집단이다.

    여기서 노동은 사회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기 위해 사용되는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노력을 의미하며, 잉여노동은 생산자가 지출한 노동 중에 생산에 소모된 것들을 복구하는 데 필요한 노동을 제외한 나머지를 의미한다. 잉여노동은 생산과 무관한 욕구 충족에 이용되거나, 아니면 생산 확대를 위한 축적에 이용될 수 있다. 참고로, 이런 잉여노동은 봉건제에서는 “곳간에 가득한 쌀가마니”처럼 지주의 잉여생산물로, 자본주의에서는 “삼성전자 순이익 40조 원”처럼 자본가 또는 기업의 이윤으로 나타난다.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에서 잉여노동을 더 많이 추출하기 위해 노력한다. 피지배계급의 몫을 줄이는 방법도 있겠고, 몫은 그대로 두더라도 더 열심히 일하도록 만드는 방법도 있겠다. 조선 시대로 예를 들어보면, 농민의 공납이나 군역 부담을 늘리는 ‘가렴주구’ 정책이 전자의 사례, 노비를 소작농으로 만들어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할 동기를 준 후 지대를 걷는 것이 후자의 사례이다. 현대의 한국 사회에서는 1960~1980년대 수익성 낮은 수출 대기업들이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장시간 저임금 노동조건을 유지한 것이 전자의 사례, 1990년대 이후 대기업들이 대규모 자동화 투자와 노동시장 유연화로 생산성과 노동강도를 높인 것이 후자의 사례이다.

    그렇다면 지배계급은 어떻게 피지배계급에서 잉여노동을 추출하고 착취할 수 있는가?

    기본은 가장 원초적인 힘, 즉 사람을 해칠 수 있는 폭력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현대 이전의 사회에서 노예는 주인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목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소작농은 지주가 요구하는 지대를 지급하지 않으면 공적, 사적으로 폭행을 당할 수 있었다. 이런 폭력은 전통적으로 가문으로 불린 소수의 혈통 집단이 보유했는데, 이들은 국가의 군대나 가문의 사병을 이용해 천년 넘게 한반도에서 지배계급으로 대대손손 군림할 수 있었다. 이런 지배계급의 구성은 천년 넘게 큰 변화도 없었는데, 예로 조선의 핵심에 있었던 가문들(전주 이씨, 안동 권씨, 파평 윤씨 등)은 그 뿌리가 통일신라 시대 귀족이나 고려 개국 공신이었다.

    반면, 피지배계급인 노비나 농민이 조직적인 폭력을 장기간 보유한 사례는 없었다. 지배계급에 대규모로 편입되거나 아예 지배계급의 교체에 성공한 사례도 없었다. 예로 고려 말 망이·망소이의 난부터 조선 말 갑오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농민이 난을 일으키는 경우는 대부분 가혹한 세금으로 생존권이 벼랑 끝에 내몰렸을 때였는데, 이들은 훈련된 지배계급의 군대를 당할 만큼 제대로 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없었고, 민란의 기간도 길어야 수개월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현대에 이르러 착취하는 힘은 물리적 폭력에서 경제적 방법으로 바뀌었다. 노동자가 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능력과 임금을 자유롭게 교환하는 과정이 바로 착취였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는 노동생산물을 배타적으로 소유하며 노동한 시민에게는 임금을 보상으로 지급한다. 그런데 노동생산물의 가치는 항상 임금의 가치보다 크기 때문에 이런 소유법칙을 통해 경제적 방법으로 잉여노동을 취득할 수 있다. 이런 경제적 방식에서 기업은 노동자의 인신을 구속하지 않는다. 해고할 권리로 노동자의 노동능력을 통제할 뿐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의지로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말처럼 임금으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노동자에게 해고는 생존과 직결된 위협이 된다. 인신적 구속이 아니라 자발적 근로계약으로 노예와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경제적 방법에 따른 착취 체계에서 폭력은 국가에 의해 독점된다. 대외적 폭력은 군대가, 대내적 폭력은 경찰이, 그리고 그 폭력의 집행은 법으로 정해진다. 법은 재산의 소유를 절대적으로 보호하며,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노동생산물을 소유하고 노동하는 사람은 임금으로만 보상받는다는 자본주의적 소유법칙을 수호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폭력을 사용하는 대상을 “소유법칙 수호”에 집중하고 나머지를 모두 시장 법칙에 맡긴다. 이전 사회보다 폭력의 범위와 잔혹성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유와 평등의 영역도 시장으로 인해 이전보다 넓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지배계급의 잉여노동 추출과 착취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방법이 좀 덜 폭력적으로 진화했을 뿐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피지배계급 저항 역시 이전처럼 직접적 폭력 충돌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법의 제정이나 집행 과정에 노동자의 이해를 반영하도록 개입하거나, 매일 매일의 분배를 둘러싼 현장 투쟁에서 임금소득자의 힘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저항한다. 정당과 노동조합이 이런 역할을 하는 대표적 조직이다. 물론 소유권 자체를 흔드는 저항(점거 파업에서부터 급진적 사상의 선전에 이르기까지)에 대해서는 국가가 예전 같은 물리적 폭력을 쓰기도 한다. 폭력이란 지배의 코어는 현대에도 유효하다.

    요약해보자. 지금까지의 인간 사회 역사(정확히는 기록된 역사)는 곧 계급사회의 역사였다. 폭력을 보유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고, 잉여노동을 추출, 착취한다는 근본 원리는 노예제든, 봉건제든, 심지어 현대의 자본주의든 같다. 계급사회의 법칙이 곧 역사의 법칙인 셈이다.

    (2) 사회의 위기

    사회의 위기는 이런 역사법칙하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계급사회의 위기란 간단히 말해 지배계급이 ‘지배’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그렇다면 지배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폭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거나, 잉여노동을 충분하게 추출, 착취하지 못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노스(Douglass C. North)는 지배계급의 속성을 폭력(violence)과 지대(rent)의 교환으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 사회에서는 폭력이 사라질 수 없다. 인간 욕구보다 자원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일부가 자원을 충분히 누리기 위해 다른 일부를 자원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즉 무한한 자원이 존재하지 않는 한 인간 사회는 폭력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폭력이 난무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발발하면, 사회는 존속할 수 없다. 폭력을 관리해야만 사회가 지속될 수 있다. 그렇다면 폭력은 어떻게 관리될 수 있는가? 노스는 사회의 해체보다 존속이 누구에게나 이득이기 때문에, 폭력에 우위를 갖춘 사람들 또는 집단들이 폭력을 내려놓는 대신 지대를 공유할 수 있는 질서(social order)를 수립한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여기서 지대는 토지 임대료만이 아니라 경쟁이 아닌 방법으로 얻는 모든 이득을 지칭한다. 경쟁을 통해 얻는 이득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와 관련되지만, 지대로 얻는 이득은 일종의 제로섬 게임과 비슷하다. 지배계급의 지대는 피지배계급의 손해와 크기가 같다.

    지배계급은 이런 지대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동맹이다. 지대를 얻는 대가로 폭력을 규제하는 규칙에 합의한 집단이다. 예를 들면, 조선 초기 왕족과 공신들이 보유한 사병이 삼군부로 귀속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들이 사병을 포기하는 대가로 수조권, 노비, 관직 등의 특권을 충분하게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지배계급인 양반은 군대를 거느리는 비용을 지출하지 않고도, 왕의 군대와 관료제로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국가가 폭력을 독점한 현대에 와서도 이런 폭력과 지대의 교환은 지속됐다. 예로 와인게스트(Barry R. Weingast)와 모종린은 20세기 중반 이후 한국의 지대공유 동맹을 약탈국가, 발전국가, 경제 포퓰리즘, 금권정치로 나누어 분석했다.

    약탈국가 동맹에서 이승만 일파, 친일파, 경찰, 반공 깡패 등은 적산과 미군 지원품을 약탈하며 지대를 공유했다. 발전국가 동맹에서는 박정희부터 전두환 정부에 이르기까지 폭력을 유보한 대가로 정부를 독점한 군부와 경제적 힘을 폭력으로 전용하지 않은 대가로 독점을 보장받은 재벌이 지대를 공유했다. 1987년 민주화부터 시작된 경제 포퓰리즘 동맹에서는 군부에 억압당한 일부가 지대를 공유할 자격을 얻은 것이 특징이었는데, 지역개발이나 복지자금 배분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일부 지역 및 계층의 유권자, 그리고 임금인상의 대가로 급진적 행동을 포기한 대기업 노동조합 등이 지대를 공유하는 동맹에 새로 포함됐다. 군부가 정치에서 제거된 후 본격화 된 금권정치 동맹에서는 이전의 동맹에서 재벌이 정부를 포획한 것이 특징이었다. 재벌들은 유력 정치인에게 선거자금을 제공했고, 언론을 이용해 여론도 조작했다. 하지만 재벌의 방종이 도를 넘어 1997년 국가가 부도나 버리자, IMF에 의한 강제 개혁이 진행돼 경제 제도의 신자유주의적 합리화가 어느 정도 이뤄졌다.

    두 학자가 분석하지는 않았지만, 노무현 이후 지대공유 동맹은 정치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면 타당할 것이다. 재벌의 금권정치 일부분을 개혁/보수 같은 허구적 진영이 가져갔고, 반일민족주의, 권력기관 개혁 같은 내용 없는 선정적 구호를 앞세워 386세대 정치인이 새로운 엘리트 그룹으로 성장했다. 정경유착으로 탄핵당한 박근혜가 금권정치의 유산을 보여줬다면, 촛불시위와 적폐청산으로 권력을 잡은 집권 386세대는 포퓰리즘 정치의 정수를 보여줬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새로운 정치 엘리트들은 개혁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부동산이나 자녀교육 같은 문제에서는 기득권층의 전형적 부도덕함을 가지고 있다.

    폭력과 지대를 교환하는 지배계급의 동맹 맞은 편에는 당연히 그 지대를 공급해야 하는 피지배계급이 존재한다. 조선 시대에는 인구의 30~40%에 달한 노비와 군역과 공납의 짐을 짊어져야 했던 40~50% 상민이 그러한 피지배계급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는 경제활동인구의 70%를 차지하는 영세자영업, 비정규직, 특수고용, 하청기업 노동자 등이 지대동맹을 떠받치는 집단이다. 조선 시대 피지배계급은 신분제로 재생산되었는데, 현대의 피지배계급은 소득 격차와 자산 격차를 확대하고 고착화하는 다양한 경제적 제도로 재생산되고 있다.

    이러한 계급사회의 위기는 지배계급이 폭력의 규제에 실패할 때이다. 폭력과 지대의 교환 메커니즘이 원활하지 않아 동맹 내부에서 이익을 둘러싼 폭력이 증가하거나,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대해 무차별적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 사회의 존속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폭력과 지대의 교환이 실패하는 상황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폭력이 급증해 기존 제도가 규제에 실패하는 경우이다. 전쟁과 부패가 대표적이다.

    예로 진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중국의 봉건 국가가 무너질 때는 대부분 세 가지 사건이 동시에 발생했는데, 만주나 서역에서 외적의 침입이 강해져 군비가 급증했고, 환관과 외척의 권력이 강해지며 부패가 심각해졌으며, 군비 부담과 부패로 생존위기에 닥친 농민들이 여러 지역에서 봉기했다. 대외 전쟁과 부패가 많아지면, 기존에 유지되던 지대와 폭력의 교환 방식에 교란이 발생한다.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폭력이 난무하는 혼란의 시대를 거쳐, 새로운 국가가 폭력과 지대의 교환 방식을 다시 세팅해야만 한다. 이것이 2천 년 넘는 중국 봉건제의 역사였다. 물론 현대 국가에서도 남미나 아프리카에서 보는 것처럼 천연자원 또는 마약 등의 이권이 생길 때 폭력이 급증하며 사회 질서가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멕시코와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이나, 콩고와 코트디부아르의 천연자원을 둘러싼 내전이 대표적 사례이다. 노스는 21세기에도 국가가 공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는 나라들이 절반 이상이라 분석했다.

    둘째, 가장 중요하고 장기적 변화와 관련된 것으로, 잉여노동을 충분하게 착취하지 못해 지배계급이 공유할 수 있는 지대 자체가 감소하는 경우이다.

    봉건제 농업경제에서 잉여생산물은 기본적으로 인구증가, 토지증가, 토지의 생산성에 따라 결정된다. 만약 토지가 그대로인 조건에서 인구만 증가하면, 인구 유지를 위해 필요한 식량이 증가해 잉여생산물이 감소할 것이다. 지배계급이 잉여생산물을 그대로 유지하면, 굶어 죽는 피지배계급이 증가하는데, 이런 경우 보통 민란이 발생해 사회가 혼란해진다. 식량을 생산하는 토지 면적이 증가하거나 농법 개선으로 토지당 식량 생산(토지 생산성)이 증가하면, 잉여생산물도 증가한다. 그런데 이렇게 식량 사정이 나아지면 인구도 보통은 함께 증가하게 되는데, 식량 생산의 증가보다 인구의 증가가 빨라질 경우 잉여생산물이 다시 감소하고 나중에는 인구도 정체 또는 감소하게 된다. 이렇게 인구압력이 증가해 사회적 위기가 닥치는 상황이 바로 이른바 ‘맬서스 함정’이다.

    봉건제 농업경제에서의 인구압력은 서유럽에서 16~17세기에 심각했다. 14세기 중반 흑사병 창궐로 인구가 대폭 감소한 이후 14세기 말부터 인구와 1인당 소득이 모두 빠르게 증가했는데, 15세기 말에 이르면 인구는 증가하지만, 농업 생산성이 정체해 1인당 소득이 급격히 감소했다. 맬서스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이때부터 유럽 봉건제는 위기에 직면했는데, 백년전쟁 같은 봉토를 둘러싼 전쟁이 발발했고, 동로마제국이 멸망했으며, 종교개혁 운동, 농민전쟁 등도 유럽 전역에서 발생했다. 이후 유럽은 두 세기 넘게 이어진 봉건제 붕괴를 거쳐 현대로 이행을 시작했다. 봉건적 관계로는 지대를 공유하는 동맹을 더는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는 잉여노동을 늘리기 위해 아메리카 식민지를 만들어 원거리 무역의 새로운 단계를 열었고, 네덜란드는 독립전쟁 이후 발트해 곡물 운송을 시작으로 상업혁명을 일으켰다. 봉건제 변혁의 거대한 물줄기가 이렇게 열리고 있었다.

    중국의 경우 중세 유럽 같은 인구압력은 없었다. 논의 쌀 생산이 밭의 밀 생산보다 훨씬 생산성이 좋았고, 13~14세기(송나라 말기부터 원나라까지)에 유럽의 흑사병 창궐 시기와 비슷한 인구 감소가 있기도 했지만, 명청 시기에 농법 혁신, 수리시설 건설 등이 꾸준하게 이어져 6백 년 넘게 인구가 연평균 1% 가까이 지속해서 증가할 수 있었다. 물론 15세기 이후 중국의 1인당 소득은 서유럽보다 낮아지기 시작했는데, 인구증가만큼만 딱 국내총생산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봉건적 지속성장 상태라고 보면 되겠다. 전쟁과 부패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변화를 겪기도 했지만, 19세기 중반 서유럽의 침략을 받기 전까지 당대 지배계급의 동맹이 근본적으로 변할 만큼 잉여노동의 감소도 발생하지 않았다.

    한편, 자본주의적 산업경제에서는 기술혁신과 자본축적을 통해 인구증가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경제를 장기간 성장시킬 수 있다. 인구압력은 중요한 변수가 아니다. 오히려 경제성장 이후 인구 감소 또는 고령화가 급속히 발생할 때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자본주의에서 지배계급의 잉여노동 착취와 관련한 문제는 이윤율의 변화로 나타난다. 그런데, 자본주의 이윤율 경제의 특징은 상승의 힘과 하락의 힘이 같다는 모순이다. 이윤율 상승의 동력인 기술혁신과 자본축적은 혁신의 곤란이 누적되면서 이윤율을 끌어내리는 힘으로 작동한다.

    자본주의적 착취는 모든 자원을 소모하는 봉건적 착취와 달리 오히려 자본과 인구를 놀리면서, 즉 과잉자본으로서 금융화, 과잉인구로서 실업자를 만들면서 위기에 봉착한다는 특징도 있다. 마르크스는 이런 특징을 분석하며 자본주의적 성장의 필연적 결과가 인류의 비참함(misery)이라고 지적했다. 2008-09년 금융위기에서 경험했듯 금융화는 경제 제도의 혼란을 심화한다. 2020년에는 최악의 감염병 사태 속에서도 주식시장과 부동산 시장이 투기의 전장이 되어 경제적 혼돈을 키우고 있다. 실업자와 반(半)실업자(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 등)의 증가는 시민 간 경쟁을 격화시켜 인천국제공항 정규직화 갈등 사태(이른바 인국공 사태) 같은 도덕적 타락을 심화하고, 빈부격차로 표현되는 상대적 빈곤, 그리고 꼰대, 7포 세대 등으로 표현되는 세대적 불공평을 키운다.

    요즘 문제가 되는 포퓰리즘 정치는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주의적 발전의 비참함(통상 궁핍화 경향이라고 번역된다)을 성장의 토대로 삼는다. 포퓰리즘 정치는 내적 모순에 눈을 감고 내외부에 가상의 적을 만들어 공격하는 행태를 일컫는데, 인종주의, 민족주의, 지역주의, 세대적 갈등, 입법부 무력화, 사법부 장악, 탄핵의 일상화, 팬덤 정치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지배계급의 현대적 동맹은 18세기 이래 자유주의 민주정의 다양한 제도와 조직을 통해 유지됐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이윤율 하락으로 사회 불안이 커지면서, 자유주의적 동맹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늘어나다 보니 아예 기존 제도를 해체하는 포퓰리즘 정치가 확대되는 중이다. 미국의 트럼프나, 한국의 문재인이 하는 정치가 정확히 이러하다. 브렉시트를 이끈 영국의 보리스 존슨, 이탈리아의 2천 년대를 망쳐놓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금융위기 이후 정치위기를 상징하는 오성동맹 등도 이윤율 위기가 지배계급의 현대적 동맹의 위기로 이어진 사례이다.

    (3) 소결

    계급사회의 위기는 지배계급의 위기이다.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은 폭력을 보유한 집단들의 동맹이다. 이 동맹은 폭력을 규제하는 대가로 지대를 공유하는 사회 질서를 수립한다. 그런데 이 질서는 외침과 부패로 폭력이 과잉되는 조건이나, 잉여노동 자체가 충분하게 추출되지 않는 조건에서는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중국에서 수천 년간 여러 국가가 흥망성쇠를 겪었을 때의 조건이 전자였다. 그리고 서유럽 봉건제가 몰락하고 현대로 이행을 시작할 때 조건이 후자였다.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잉여노동을 충분하게 추출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윤율이 하락으로 나타난다. 이런 이윤율 하락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할 때, 지배계급의 동맹을 현대적으로 제도화한 자유주의 정치체제도 몰락할 수밖에 없다. 포퓰리즘은 자유주의 정치체제가 타락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포퓰리즘은 폭력과 지대의 교환이라는 지배계급의 사회 질서를 허구적 진영의 투쟁, 모호한 외부의 악마를 상대로 한 투쟁으로 변질시킨다. 인종주의적 린치, 경찰폭력의 확대, 이해관계자들의 직간접적 폭력 행위 등으로 여러 형태의 폭력이 선진국에서조차 크게 확대되고 있다.

    코로나19 위기가 심화시킨 것은 현대 사회의 이윤율 하락과 포퓰리즘 정치라는 기저질환이다. 한국의 이윤율은 1990년대 폭락했고,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하락 속도가 느려졌는데, 2010년대 세계금융위기에 이은 코로나19 위기로 다시금 하락이 빨라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 이후 본격화된 포퓰리즘 정치는 박근혜 탄핵으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서 만개했고, ‘내로남불’로 상징되는 현 집권세력은 국민을 진영 간 내전 상태로 내모는 상황이다. 지배계급의 질서가 무너지며 증가하는 폭력은 피지배계급이 계급지배를 지양하는 대안 사회를 건설하지 않는 한, 마르크스가 말했던 투쟁하는 계급들의 공멸로 사회를 이끌 뿐이다. <계속>

    필자소개
    |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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