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산당, 난징에 이어
    경제수도 상하이 점령하다
    [국공내전-58] 해방군, 난징 총통부의 청천백일기를 끌어 내리다
        2020년 10월 21일 10:5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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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해방군이 도강하여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자 국민정부 총통 대리인 리쫑런은 4월 23일난징에서 탈출하였다. 쑤위는 여러 부대의 보고를 듣고 지시하였다. “닌징의 적이 매우 혼란할 것이다. 남은 부대도 신속히 도강하라. 35군은 난징을 점령하고 질서를 유지하라. 적이 버리고 간 모든 재산을 보호하고 기율을 강화하라.”

    4월 24일 새벽, 인민해방군 제3야전군 8병단 35군 104사단 휘하 312연대는 난징 총통부에 걸려 있는 청천백일기를 끌어 내리고 홍기를 내걸었다. 이 대오를 인솔한 이는 사단 참모장 장샤오안(張紹安)이었다.

    총통부 건물에 오른 해방군 병사들

    총통부 사무실에 대형 유리탁자가 있었다. 탁자 위 일력은 4월 23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점령하기 전날 리쫑런과 국민정부 군정요원들이 황급히 난징을 탈출하였다. 24일 밤 8병단 사령인 천스지(陳士榘)가 지휘하는 부대가 난징에 진주하여 경비 임무를 맡았다.

    총통부를 점령한 해방군 병사들은 양탄자가 무엇에 쓰는지도 몰랐다. 어떤 병사는 잘라서 잠자는 데 깔개로 쓰기도 하였다. 총통부 화원 연못에서 말을 씻기는 병사도 있고 꽃병을 가져다 침을 뱉는 타구로 쓰는 병사도 있었다. 화원은 순식간에 말똥으로 가득 찼다. 병사들의 숙소를 배정할 때 미국 대사관에 들어간 병사도 있었다. 대사관인 것을 모르고 배정한 것이었다. 미국대사 스튜어트가 펄펄 뛰었다. “당신들, 여기서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그날 저녁 ’미국의 소리‘ 방송에 “인민해방군이 미국 대사관을 수색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4월 27일 마오쩌둥이 전보를 치라고 지시했다. “난징 진주부대의 기율이 엄정하여 내외의 반응이 좋다. 하지만 미국 대사관에 들어간 일은 잘못되었다. 조사하여 적절히 처리하라.” 그후 당 중앙에서 외사처장이 달려와 미국 대사관과 교섭하여 일을 매듭지었다.

    4월 27일, 덩샤오핑과 천이가 안후이성 허페이의 총전위 본부에서 총통부로 넘어왔다. 덩샤오핑은 지휘관들에게 지시했다. “총통부는 문물이다. 잘 보호해야 한다. 우리는 리쯔청(리쯔청은 명나라 말기 농민 반란군 수령)이 되어서는 안된다. 총통부에 있는 부대는 모두 철수하라. 한 사람도 남기면 안된다.”

    중공 중앙은 난징의 접수와 관리를 위해 2,440명의 간부를 파견하였다. 당샤오핑과 류보청, 천이는 총통부 사무실에서 장제스의 물품들을 보았다. ‘쩡궈판 전집’이 눈에 띄었다. 쩡궈판은 청조말의 문신으로 태평천국 봉기를 진압한 인물이었다. 장제스는 쩡궈판을 줄곧 숭앙해 왔다. 덩샤오핑은 한참 둘러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장 위원장, 우리가 왔소. 오랫동안 우리를 잡으려 애 많이 썼소. 여기 왔지만 큰소리치지는 않겠소. 우리가 허풍 떨 일이 뭐 있겠소?” 류보청은 탁자 위의 일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보시오. 장 선생의 일력이 아직 23일이오.” 천이는 마오쩌둥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석, 나 천이요. 지금 장 총통 의자에서 당신한테 보고하는 거요.”

    5월 1일, 중공 중앙은 인민해방군 도강부대에 전보를 보냈다. “난징을 해방하였으니 국민당 반동파의 통치는 이것으로 멸망하였다. 현재 형세는 인민과 인민해방군에 매우 유리하다. 전사들은 계속 공격하기 바란다. 반혁명 세력의 잔당을 소멸하고 전국 인민들을 해방하기 바란다. 통일되고 민주적인 신중국을 위해 분투하자.”

    이때 장제스는 저장성 펑화현 시커우에서 아들인 장징궈와 함께 있었다. 그는 장징궈에게 “배가 준비되었으면 가자.”하고 말했다. 일가가 모두 타이완으로 갈 셈이었다. 장징궈는 그 당시를 이렇게 썼다. “부친은 침통함을 억누르고 있었다. 어떤 말도 하기 힘들었다.”

    난징에 입성하는 해방군 병사들

    난징 점령을 알리는 공산당쪽 신문

    마오쩌둥, 기쁨에 못 이겨 7언 율시를 쓰다.

    4월 22일, 해방군의 도강이 순조롭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오후에 마오쩌둥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소식을 들었다. 마오는 옷을 입으며 기쁨에 차 중얼거렸다. “장제스가 시간을 끌고 싶었지. 군대를 정비하여 권토중래하려고 했지. 우리가 그동안 준비한 것을 몰랐던 거야. 부대를 이동시키고 배를 만들고, 대포를 끌어오고 얼마나 바빴나? 그 결과가 어떤가? 그들은 평화협정을 깨뜨렸다는 죄명만 얻은 거지. 장제스 군대는 무너졌어. 우리 군대가 바로 난징을 칠 거야.”

    과연 첩보가 왔다. 4월 24일 오전 마오쩌둥은 자리에서 일어나 후원에 있는 정자로 갔다. 경호원들이 ‘런민일보(人民日報)’ 호외를 가지고 왔다. 인민해방군이 난징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실려 있었다. 마오쩌둥이 신문을 읽는데 역사적인 순간을 담기 위해 기자들이 연신 셔터를 눌러 대었다. 마오쩌둥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했다. “난징이 해방되었다. 나 혼자 기뻐할 일이 아니다. 자, 모두 이리로 와라. 같이 찍자.” 마오쩌둥은 사람들을 불러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마오쩌둥은 그날 난징 점령을 기념하여 칠언 율시를 한편 지었다.

    種山風雨起蒼黄 종산에 비바람 몰아치니 창황하구나.
    百萬雄師过大江 백만 대군이 이미 창장을 건넜네.
    虎踞龍盘今勝昔 웅크린 범 숨은 용이 오늘 승리하니
    天翻地覆慨而慷 하늘과 땅이 뒤집혀 감개하기 짝이 없다.
    宜將剩勇追穷寇 남은 힘을 쏟아 궁한 도적을 끝까지 뒤쫓으리니
    不可沽名学霸王 패왕에게 배워 헛된 이름을 좇지 말라.
    天若有情天亦老 하늘에도 정이 있다면 그 역시 늙어갈 터
    人間正道是滄桑 사람의 바른 길은 상전벽해를 이루는데 있네.

    (해설)

    種山(종산)은 난징의 진링산(金陵山)으로 제갈량이 동남풍을 빌었던 산이라 한다. 이 시에서는 난징을 상징한다. 창황하다는 것은 국민정부를 가리키는 것이고, 웅크린 범이나 숨은 용은 공산당을 가리킨다.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는 것은 혁명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국민정부와 공산당의 처지가 근본적으로 뒤바뀐 것을 의미한다. 패왕은 초패왕 항우를 가리키는 것으로 홍문의 잔치에서 궁지에 몰린 유방을 살려준 것을 의미한다. 하늘의 정 운운하는 구절은 자연이나 사회과학의 법칙을 의미한다. 중국 사람이 “자연은 무정하여 법칙대로 흘러간다.”고 해설하였다. 그 속에서 사람은 최선을 다하여 혁명에 일로매진해야 한다는 뜻이다.

    장제스, 상하이 사수를 결심하다

    장제스는 국민정부 수도인 난징보다 상하이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탕언보와 함께 상하이를 방어할 대책에 골몰하였다. 난징은 수도로 상징성이 있었지만 비중에서는 상하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당시 난징의 인구가 130만명인데 비해 상하이의 인구는 호적 인구만 520만명이었다. 상하이는 경제 중심지로 중국 경공업이 대부분 상하이에 집중되어 있었다. 상하이에 거주하는 외국인도 많았으며 외국인의 투자도 가장 많았다.

    장제스가 상하이 고수를 결심한 데에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장제스는 상하이를 최소 6개월에서 1년 정도 지키면 중대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1949년 4월, 세계 정세는 이미 동서 냉전이 한창 고조되고 있었다. 장제스는 국제도시 상하이의 공방전이 국제전으로 비화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직접 군사개입을 하면 전세를 일거에 뒤집을 수 있었다. 장제스는 그런 희망을 국군 지휘관들에게도 심어주려 노력하였다.

    1949년 4월말에서 5월초까지 장제스는 상하이의 푸싱다오(復興島)(상하이 황푸강 하류에 있는 섬)에서 연대장 이상 장교들을 모아놓고 세 차례나 연설했다. “공산당의 확산은 국제적인 문제이다. 우리 한 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므로 국제 역량에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동맹국인 미국이 준비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일년만 버티면 된다. 귀관들이 상하이를 6개월만 사수하면 임무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사이 우리는 2선 병단을 건설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귀관들은 임무교대하여 휴식하며 부대정돈에 들어갈 것이다.”

    장제스는 이런 한탄도 늘어놓았다. “다이롱광 이 한심한 자가 포 한 번 쏘지 못하고 적에게 요새를 바쳤다. 그 결과 적이 창장을 쉽게 건너오고 우리 부대들이 싸움 한 번 없이 후퇴해야 하였다. 우리의 원래 계획은 틀어지고 전략적으로 좌절을 겪었다. 귀관들은 승리해도 교만하면 안되고 패배하더라도 용기를 잃으면 안 된다고 배웠을 것이다. 귀관들은 나를 믿어 달라. 광둥에서 북벌에 나선 이래 나는 전략적으로 실패한 일이 없다. 북벌 때 우리는 얼마나 곤경에 처했던가, 그래도 우리는 끝내 승리하였다. 시안사변에서도 나는 최악의 고비를 넘었다. 항일전쟁에서 우리는 외부원조도 차단당한 채 시련을 겪었다. 그래도 우리는 승리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이 어려움을 이기고 견디기만 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러자 감격한 어느 지휘관이 외쳤다. “총재 어르신, 미국하고 잘 상의하여 주십시오. 미국이 나서면 승산이 있을 것입니다.”

    며칠 뒤 탕언보도 경찰부대에 훈화하였다. “총재께서 우리에게 6개월만 고수하라고 하셨다. 상하이는 국제도시이고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6개월만 고수하면 미국이 직접 지원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3차 대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국제 공산주의 문제가 해결되면 중국 문제도 함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장제스와 탕언보 등 국민정부 인사들이 이런 희망을 갖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스탈린도 미국과 3차 대전을 벌이는 것이 두려워 마오쩌둥에게 여러 번 휴전할 것을 제의하였다. 1945년에도 중공에게 내전을 벌이지 말라고 하였으며 1949년 평화회담 때에도 창장을 경계로 휴전할 것을 제의하였다. 장제스와 스탈린이 간과한 것은 혁명과 통일을 향한 마오쩌둥과 중공의 견결한 의지였다.

    장제스와 리쫑런은 공군에도 기대를 걸고 있었다. 리쫑런은 작전 훈련반 장교들에게 이렇게 훈화하였다. “항일전쟁과 비교하면 상하이 방어는 강점이 있다. 8·13 사변(중일전쟁 때 일본이 상하이를 침공했던 상하이 사변을 가리킨다) 때 일본은 해군과 공군의 우세를 믿고 단시간에 상하이를 점령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3개월이나 버텼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강력한 해군과 공군이 있지만 공산당은 해·공군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상하이를 6개월에서 일년 정도 고수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유리한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공산군 병사들은 모두 북방 사람들이다. 그들은 강남에서 오랫동안 지구전을 할 수 없다. 우리 남부 병사들이 동북에서 고생한 것과 매한가지이다.”

    그밖에도 국민정부 인사들은 상하이의 견고한 방어설비에도 기대를 걸고 있었다. 상하이는 바다를 끼고 있어 대부대를 철수시키기에도 유리하였다. 당시 국군 37군 사령관 뤄쩌허(羅澤闔)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상하이는 지난이나 선양, 쉬저우, 핑진 등과는 다르다. 아군을 차단할 수도, 포위할 수도 없다.”고 자신하였다.

    심지어 장제스는 일본에도 기대를 품고 있었다고 한다. 국민정부는 1949년 2월 중일전쟁 말기 중국 파견군 사령관이던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또한 전범 430명을 주일 연합군 사령부에 인도한 일이 있었다. 장제스는 푸싱다오 연설에서 일본과 관계를 이렇게 언급하였다. “우리가 전범들을 연합군에 인도한 것을 두고 말이 많은 것을 안다. 그 일은 심모원려에서 진행한 일이다. 공산주의에 대항하는데 일본은 장차 우방이 될 것이다.” 장제스는 그해 5월 국방부에 징후항 경비총사령부 참모장인 차오스덩(曹士澄)을 대표로 ‘주일본 군사대표단’을 보내어 자신의 심모원려를 증명하였다.

    탕언보, 10대 살계명을 선포하다

    1949년 1월부터 장제스는 창장 방어와 상하이 방어준비를 병행하여 왔다. 부대를 집결시키고 방어설비를 증강하는 외에도 군기를 엄정히 세우려고 하였다. 특무로 하여금 물자유출과 지휘관의 여색 등을 엄중히 감시하게 하였다.

    징후항 경비사령관인 탕언보는 우선 진지 보강작업을 강화하였다. 그는 상하이 시정부와 경비사령부에 ‘상하이 공사구축위원회’를 구성하여 설비를 전담하게 하였다. 1949년 1월부터 시작된 공사는 대량의 강철과 시멘트를 사용하여 ‘철강진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탕언보는 상하이가 ‘제2의 스탈린그라드’가 될 것이라고 호언하였다. 스탈린그라드는 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이 독일군의 공세에 끝까지 저항하여 대반격의 시발이 된 도시이다. 난공불락의 상징이자 처절한 시가전의 상징으로 일컬어 왔다. 방어진지 구축으로 인한 시민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진지 부근 3킬로 이내에는 모든 가옥, 논밭, 묘지를 청소하였다. 가옥을 불태우는 데 절망한 노파가 불붙은 집에 뛰어들어 죽은 일도 있었다. 탕언보는 이에 대하여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일이다. 내가 모두 책임질 테니 부담을 가질 필요없다.”고 독려하였다.

    탕언보는 또 ‘고급인력 작전 훈련반’을 설치하여 상하이의 모든 당정군 인사들이 수료하도록 하였다. 그곳에서 참가자들은 ‘공산당 비판’ 등을 학습하게 하고 군인들은 작전계획을 학습하게 하였다. 이 훈련반 책임자는 탕언보 자신이었고 여기에 공군 사령관인 저우즈루(周至柔)와 해군 사령관인 구이잉칭(桂水清), 장제스의 둘째 아들인 장웨이궈까지 참가할 정도였으니 이에 대한 장제스의 관심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정신교육에는 총통대리인 리쫑런을 비롯하여 주미대사이던 후스(胡適)와 국민당에서 장제스의 대리인이라 할 수 있는 구정강(谷正綱) 등 요인들이 직접 나섰다.

    난징이 함락당하는 등 정세가 엄중해지자 탕언보의 대응도 더욱 각박해졌다. 난징 점령 다음 날 탕언보는 이른바 ‘10대 즉결처분 전투명령(十殺戰令)을 발령하였다. 그 내용은

    1.명령을 위반하거나 전투에서 뒤로 물러서는 자는 죽인다.
    2.의지가 굳지 못하여 적과 내통하거나 매국한 자는 죽인다.
    3.허가 없이 직무에서 이탈한 자는 죽인다.
    4.진지를 포기하고 수복하지 못하는 자는 죽인다.
    5.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적에게 동요하거나 합류하는 자는 죽인다.
    6.군사기밀을 누설하는 자는 죽인다.
    7.전투를 관망하거나 서로 구원하지 않는 자는 죽인다.
    8.통신을 게을리하거나 연락이 끊긴 자는 죽인다.
    9.무기와 탄약을 소중히 하지 않거나 군수물자를 착복하는 자는 죽인다.
    10.군기를 어지럽히거나 나태한 자는 죽인다.

    탕언보는 이 전투명령을 인쇄하여 각 대대에 보내게 하였다. 그 외에도 3월과 4월 중에 ‘장병 연좌법’ ‘기밀유지법’ ‘방첩법’ 등을 제정하여 비적과 연결하거나 내통한 자는 부대장이 즉결처분하도록 하였다. 탕언보는 또 감시 부대를 강화하였다. 국민정부군에는 본래 ‘독전조’ ‘총통파견 시찰조’ ‘국방부 시찰조’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하이 전투를 앞두고 각 군에 시찰조를 파견하였으며 전투 직전에는 탕언보가 직접 총사령부 고급 참모들을 각 군과 사단에 파견하였다. 그밖에도 장제스는 “공을 세우면 그간의 허물을 씻고 승진시키겠디.”고 약속을 하였다. “탐관오리로 낙인이 찍힌 사람도 공을 세우고 새로 거듭나면 된다.”고 하여 다급한 심사를 드러내었다. 장제스가 그런 지시까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록에 있기에 남겨둔다.

    심지어 탕언보는 ‘영웅관’과 ‘기녀대대’을 설치하게 하였다고 한다. 영웅관은 전투에서 공을 세운 장교나 병사들을 포상하고 기리기 위해 건립하게 하였다. ‘기녀대대’는 상하이의 모든 기생들과 무희들을 모아 3개 대대를 설치했다고 한다. 장병들의 욕구를 풀어주기 위해서였는데 전황이 급박하여 실제 운영은 되지 않았다. 이외에도 탕언보는 부식을 개선하고 군인들의 월급을 은화로 지급하는 등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애를 썼다. 국군이 상하이를 사수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썼다고 할 수 있다.

    해방군, 도자기 가게에서 쥐를 잡는 전략을 세우다

    1949년 5월 12일, 천이와 쑤위가 지휘하는 제3야전군 30만 병력이 상하이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류보청이 지휘하는 제2야전군은 ‘제국주의의 간섭’을 견제하기 위해 대기하며 휴식하고 있었다. 당시 공산당이 표현하는 제국주의 군대란 당연히 미국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거기에 적지만 홍콩을 통치하는 영국의 군대도 포함되었다.

    천이와 쑤위 등 제3야전군 지휘부는 상하이 공략을 놓고 고심을 거듭했다. 상하이는 인구도 많을 뿐 아니라 경제와 산업의 중심지였다. 공산당은 야전군 지휘부에 “건축물과 공장, 전력, 교통설비를 보호하라.”는 지시를 해두고 있었다. 상하이를 수비하는 20만 국군도 만만치 않은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탕언보 집단군은 도시 곳곳에 3,000개의 미국식 토치카를 설비하였다. 뿐만 아니라 4,000여개의 콘크리트 구조물과 1만개의 진지를 구축하고 2만개의 지뢰를 매설해 두었다. 징후항 경비총사령관 탕언보는 이런 설비를 해두고 “스탈린그라드 진지보다 삼분의 일은 더 강력하다.”고 호언할 정도였다. 상하이 진지 건설작업은 장제스가 수시로 독려할 만큼 심혈을 기울인 것이었다.

    상하이 전투 상황도. 붉은 화살표가 해방군의 공세이다.

    이런 강력한 수비군과 싸우는데 도시를 상하게 하지 말라고 지시하니 천이의 머릿속은 복잡하였다. 천이는 “이것은 도자기 가게에서 쥐를 잡으라는 것”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도자기를 깨뜨리지 않으려면 쥐를 내보내는 수밖에 없다. 공산당은 중화기와 중포 공격을 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개인 화기에 의지하여 수비군인 국군과 격렬한 시가전을 벌이는 수밖에 없었다. 시가전 초기에 해방군은 국군의 강력한 반격에 부딪혀 고전을 거듭하였다. 토치카 하나를 확보하는데 며칠이 걸리기도 하였으며 고층건물에 설치한 토치카를 공격하다 무수한 병사가 쓰러져 갔다. 일선 지휘관들이 중화기를 쓰자고 건의하였으나 쑤위는 견결하게 거절하였다. “도시와 인민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와 쑤위의 이런 방침 때문에 해방군 공격부대는 연대장 3명, 대대장 37명, 중대장 204명이 전상하는 피해를 입었다.

    전투가 교착되자 부사령원인 쑤위가 책략을 쓰기 시작하였다. 내전 이래 3야전군은 늘 쑤위가 직접 전투를 지휘해 왔다. 그는 우선 공격부대를 집게형으로 배치하여 수비군을 포위하였다. 해방군은 토치카 점령작전을 바꿔서 진지나 토치카를 우회하여 시가로 진입하였다. 그후 수비군을 분할 포위하였다. 포위하되 포위망을 좁히지 않고 차근차근 섬멸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뒤 해방군은 갑자기 돌격하여 국군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분할한 뒤 우회하여 포위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국군은 토막토막 분할 당한 채 시가전에 돌입했다. 5월 24일 자정 무렵이 되자 쑤저우허(蘇州河) 남쪽의 시구역을 해방군이 장악하였다.

    5월 27일 정오가 되자 우쑹커우(吳淞口)에서 저항하던 국군이 투항했다. 공산당 상하이 지하당이 각종 공작으로 정치공세를 펼치자 수비군의 전열이 급격히 흐트러졌던 것이다. 해방군이 상하이를 공격할 때 공산당 지하당원 8,000여명이 암약했다고 한다. 그러지 않아도 사기가 떨어진 국군은 공산당 지하당원과 노동자 학생들의 정치공세에 더욱 사기가 가라앉았다.

    이날 상하이 전 구역이 해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제2의 스탈린그라드가 되기를 희망했던 장제스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국군은 고작 15일을 버텼을 뿐이었다. 국군 수비군 20만명 가운데 15만 3천명이 섬멸당하고 나머지는 탈출했다. 격렬한 전투 중에도 상하이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해방군이 주로 경화기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상하이를 점령한 당일 인민해방군 상하이시 군사관제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천이가 주임을 맡았다.

    1949년 5월 27일, 중국 인민해방군 전사들이 상하이에 입성하였다. 병사들은 ‘3대 규율, 8항 주의’를 철저히 준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민가에 들어가지 않고 길거리에서 숙영하게 되었다. 때마침 날씨가 초여름에 접어들고 있어 노숙을 하여도 별 어려움은 없었다.

    상하이에서노숙하는 해방군 병사들

    천이, 상하이 시장에 임명되다

    상하이 공격을 맡은 3야전군 사령원은 천이였다. 천이는 상하이 점령 후 시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중국 최대 도시의 시장은 위험도 컸다. 천이는 개봉 시 총알이 발사되는 총을 우편으로 배달 받은 일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천이 등 상하이에 있는 공산당 요인을 암살하기 위해 국민당 정보당국이 파견한 자객이 28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은 폭약이나 폭탄, 수류탄과 독약, 독침 등을 써서 목적을 이루려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비밀공작과 자객 체포에서 공산당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3야전군은 예전부터 천쑤 부대로 불려왔다. 사령원인 천이는 상하이에 남아 도시를 관리하고 쑤위는 계속 3야전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3야전군 사령원 천이 맨 오른쪽

    <국공내전>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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