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우파 중도 수렴 이상한 정치 만들어”
    By
        2006년 10월 19일 09:28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이 글은 10월 14일자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실린 것으로, 세인트마틴대학 철학신학 교수인 필립 블론드와 유럽국제학 룩셈부르크 연구소 연구원인 아드리안 파브스트가 쓴 “Centrism that leads to decay"를 번역한 것이다.

    중도주의와 실용주의라는 미명 하에 ‘이데올로기 투쟁’과 ‘정치적 논쟁’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영국 정치를 비판하고 있는 이 글은 동일한 문제를 갖고 있는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 데도 유용한 틀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가족’과 ‘문화’ 그리고 ‘지역사회’에 대한 강조는 정치적 대안을 고민하는 이들이 유념할 대목이다. <편집자 주>

    영국 정치는 중요한 시점에 있다. 수십 년에 걸쳐 격렬한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인 바 있는 좌익의 노동당과 우익의 보수당은 이제 중도(center ground)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두 당 모두 자신들의 전통적 가치를 동시대의 현실에 적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실용주의 가면은 영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비전과 변화의 정치가 부재함을 고백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1997년 이래 권력을 잡아온 노동당의 정치는 중도주의적 합의로 요약할 수 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을 뒤따라가면서 토니 블레어 수상과 고든 브라운 재무상은 이데올로기적 태도와 기득권을 뛰어넘은 새로운 정치를 약속했다. 그들은 이전의 사회주의 대중정당을 엘리트가 주도하고 소비자단체가 움직이는 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당은 복지와 공공부문 개혁을 위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껴안았다.

    그들의 ‘제3의 길’ 철학은 기괴한 조합을 만들어냈다. 국가는 시장의 최고 보증자가 되고, 시장은 국가가 정한 기준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주요 집행기구가 된다. 이 조합은 경영자와 회계사의 무적함대를 필요로 한다.

    슬프게도 보수당은 진정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열 달 전에 당 지도자가 된 데이비드 카메론은 자신의 당을 중도로 확실하게 이동시켰다. 그는 마가릿 대처의 유산을 버리는 대신, 이를 공공부문 개혁과 환경이라는 방향으로 재포장했다. 그의 우선순위는 블레어가 이루지 못한 약속인 국가보건서비스(NHS)의 현대화를 실행하는 것이다.

       
    ▲ 영국 보수당 당수 데이비드 카메론(左),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수상(右)

    최근 들어 영국 좌우파 간에 이뤄지는 수렴은 이상한 정치적 반전을 만들어내고 있다. 좌우파는 자신의 핵심적인 신념을 변경하지 않고서도 반대당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노동당은 열정적으로 시장을 옹호하면서도 중앙집중화된 관료 국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보수당은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굳건한 지지자로 남아있으면서도 주제넘게 늘어나는 공공부문을 최상의 서비스 제공자로 찬양한다.

    결국, 두 당은 관리 국가(managerial state, 어떤 정당이 잡더라도 현재의 체제가 변하지 않는 국가-역자)와 고삐 풀린 시장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카메론이 블레어와 브라운보다 효율적인 관리 스타일을 약속한다는 점뿐이다.

    정치적 논쟁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는 두 당이 자신들이 포용하고 있는 사상과 버리지 않고 있는 도그마에 대해 자기비판할 필요가 있다. 노동당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지 못했다. 불평등은 대처 시절 이래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자산 불평등은 전후 최고이며, 영구적인 하층계급이 늘어나고 있다. 중산층은 중과세를 당하는 반면, 대기업과 억만장자들은 미국과 영국의 후원을 받는 해외의 조세 피난처를 찾아냈다.

    한편, 대처와 그 후계자들의 집권기에 이뤄진 신자유주의를 향한 보수당의 화끈한 전향은 보수당이 가족과 시민사회의 해체에 저항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가족과 시민사회는 오늘날 카메론이 회복하기를 원하는 바로 그 제도들이다.

    그 결과, 노동과 보수 두 당은 영국의 해체된 사회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편부모 가정, 이혼과 낙태가 빠르게 늘고 있다. 노인들은 소외되고, 인종적 종교적 차이에 따른 배제가 확산되고 있다.

    게다가 젊은이들 사이에선 음주와 향락 문화가 늘고 있다. 영국에 있는 대부분의 도시들은 해가 진 다음에는 대단히 불쾌한 곳으로 바뀌어 버린다.

    좌파와 우파는 진보와 변화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지만, 영국의 현실은 사회적으로 정체되고, 문화적으로 퇴보하고 있다.

    빈곤을 뿌리 뽑고 사회 조직을 되살리려면 전혀 다른 종류의 정치와 문화가 필요하다. 노동당은 중앙정부의 관료주의에 비판적이어야 하며, 지역사회의 자치권과 시민 역량을 발전시켜야 한다. 보수당은 신자유주의와 결별하고 자유 시장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현재 영국 정치가 봉착한 위기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두 당 모두 중도주의적 접근법(centrist consensus)을 버려야 한다.

    두 가지가 가장 시급하다. 첫째,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지방에 이양해야 한다. 이를 통해 시민들의 조직을 만들고 이를 통해 시민들이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정치는 관리주의(managerialism)를 삼가야 하고 대중문화의 상업화 추세를 뒤집어야 한다.

    영국은 구속력 있는 시민적 사회적 협약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던 수준 높은 문화를 상실해왔다. 현대 속물들의 신념은 자본주의의 가장 파괴적인 면과 결부되어 있으며, 좋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사회적 응집력을 침식하고 있다.

    문화의 재생과 더불어 권력을 (지역사회와 시민에게) 근본적으로 이양하는 것이야 말로 좌파와 우파간의 결탁이라는 현상태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 될 것이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