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모두의 간절함
    김진숙의 복직을 염원하는 사람들
    “35년 기다렸는데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2020년 10월 16일 10: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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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작가 장영식 님이 35년이 넘은 해고 생활, 이제는 환갑을 넘겨버린 김진숙 한진중공업 해고자의 원직복직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마음을 담아서 레디앙에 기고 글과 사진을 보내주어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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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푸른 여명이 걷히는 시각이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노동자들에서부터 각자의 사연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 달려옵니다.

    작년에 정년 퇴직을 했던 노동자도 매일 자전거를 타고 영도조선소로 출근합니다. 어떤 이는 김진숙 지도위원을 껴안습니다. 눈물을 훔치는 이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손편지를 전달합니다. 또 어떤 이는 빨간 사과를 놓고 갑니다. 어떤 이는 수줍어서 말도 붙이지 못하고 피켓을 들고 서 있습니다. 오랜 동무인 박문진 지도위원은 자신이 고공농성 때 “따뜻하게 지내라”라며 가지고 왔던 빨간 잠바를 깨끗이 세탁해서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따뜻하게 입어라”라며 되돌려주는 풍경도 있었습니다. 월요일에서부터 금요일까지 늘 새로운 사연들이 영도조선소 앞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85호 크레인’과 ‘소금꽃나무’로 잘 알려진 김진숙 지도위원은 해고자입니다. 올해 해고된 지 35년이 되었습니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해고되었기 때문에 내일이면 공장으로 돌아가리라 믿었습니다. 그 내일이 35년이 되었습니다. 이 35년 동안 네 명의 열사를 겪었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네 명의 열사 중에 첫 번째 희생자였던 박창수 열사의 사진과 함께 영도조선소 정문 앞에 서 있습니다.

    노무현 변호사가 노동자들과 근로기준법 공부를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노무현 변호사가 김진숙에게 “다음 지회장은 저 사람을 시켜라”고 권유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김진숙은 문현동 꼭대기에서 살고 있던 박창수를 찾아가 지회장을 맡아 달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지회장이 된 박창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구속되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 시신마저 장례식장 벽을 뚫고 들어온 백골단에게 강탈 당했습니다. 그때 박창수 열사의 아들은 여섯 살이었습니다. 벌써 29년이 지났습니다.

    박창수와 김진숙은 대한조선공사 입사 동기였습니다. 박창수는 기타를 치며 노래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김진숙은 기타를 치는 사람을 박창수를 통해 처음 보았다고 합니다. 김진숙이 해고되어 있을 때, 조합원들 스스로가 “진숙이는 빨갱이”라며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다가와서 “고생한다”라며 박카스를 주고 갔던 특이한 사람이었습니다. 1987년 파업투쟁과 1988년 해고자 복직을 위한 단식 투쟁 때도 박창수는 곁에 있었습니다. 박창수는 결핵이 있었던 것도 모르고 단식 투쟁을 하다가 각혈을 하며 쓰러져 부산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되기도 했습니다. 김진숙은 그 박창수와 함께 매일 아침 영도조선소 정문 앞에 서 있습니다.

    항암으로 병세가 확연한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내일 당장 회사로 돌아간다면 어떤 심정이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김진숙은 “현장도 많이 달라졌겠지만, 내 눈앞의 현장은 변함이 없습니다. 박창수도 있고, 김주익과 곽재규도 있고, 최강서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며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김진숙은 복직을 하면 “단 하루만이라도 작업복을 입고 용접을 하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끌려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발로 걸어 나오고 싶습니다. 내 의지로 내 발로 당당하게 공장 정문을 걸어 나오고 싶습니다. 35년의 꿈이며 희망이며 마지막 소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는 매년 만 60세가 되는 해의 12월 31일을 ‘정년 퇴직의 날’로 정하고 있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올해 환갑을 보냈습니다. 이제 정년을 두 달 남짓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 시간 안에 김진숙의 복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김진숙은 영원히 해고자로 남게 됩니다. 김진숙의 복직은 한 개인의 복직이 아닙니다. 김진숙의 복직은 잘못된 시대에 대한 복원이며, 진실과 정의의 복직입니다. 굴절된 그 시대에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복직입니다. 시대의 복직입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지난 10월 13일 오전 10시,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에서 있었던 “해고자 김진숙을 복직시켜라”라는 기자회견에서 자필로 쓴 발언을 통해 “35년을 기다렸는데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일곱 번의 정권을 거치고, 촛불 정부라는 지금의 정부에서조차 정년퇴직이 두 달 남은 단 한 사람의 복직이 왜 이다지도 힘든 걸까요. 경영진이 여러 번이 바뀌도록 왜 저들에겐 사람의 마음이 안 통할까요. 왜 저들에겐 사람의 말이 안 들릴까요.”라며 “자산승계, 고용승계 사실마저 부정하는, 정부기관의 두 번의 복직 권고조차 무시하는 저들의 귀에 들리게 하려면 도대체 뭘 더해야 할까요. 35년 동안 저의 존재를 부정해온 저들의 눈에 보이게 하려면 전 어디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부 국책은행인 산업은행과 한진중공업이 벌이는 핑퐁게임에 한 노동자가 불면의 밤들을 보내고 있습니다.”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제 김진숙 지도위원은 국회 국정감사장에 한진중공업 이병모 대표이사와 함께 서게 됩니다. 이 사실에 대해 김진숙 지도위원은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장님을 국회에서 보게 되었네요. 반갑습니다.”라며 해학적인 감회를 남겼습니다. 이번 국정감사가 김진숙 지도위원의 마지막 소원인 복직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가 되길 빕니다. 매일 아침 순례자의 마음으로 영도조선소 정문 앞으로 달려오는 이들의 비손을 들어주는 계기가 되길 빕니다.

    이하 사진은 장영식

    김진숙 지도위원은 지난 6월 23일 <김진숙조합원 복직 촉구 기자회견>에서 “스물여섯 살에 해고되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어용노조 간부들, 회사 관리자들, 경찰들에게 그렇게 맞고 짓밟히면서도 ‘저 좀 들어가게 해 주세요.’ 울며 매달리던 저곳으로 이제는 돌아가고 싶습니다. 감옥에서 시신으로 돌아온 박창수 위원장은 얼마나 이곳으로 오고 싶었겠습니까! 크레인 위에서 129일을 깃발처럼 매달려 나부끼던 김주익 지회장은 얼마나 내려오고 싶었겠습니까? 인간답게 살고 싶었던 꿈이 있는 곳, 우리 조합원들이 있는 곳, 그곳으로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김진숙 지도위원과 함께 복직 투쟁 선전전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모습

    강정에서 달려온 활동가가 눈물을 쏟자 오히려 김진숙 지도위원이 위로하고 있다

    한 시민이 병환중의 백기완 선생이 “김진숙 힘내라”는 글을 남긴 것을 피켓으로 만들어 김진숙 지도위원과 함께 서 있다

    직장암 투병 중인 시민도 영도조선소 앞을 찾았다. 그는 85호 크레인 고공 농성 때, 희망버스를 타고 연대했었다.

    비가 쏟아져도 영도조선소 정문 앞은 연대의 시민들이 함께 하고 있다.

    이주민 노동자들이 영도조선소를 찾아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 투쟁을 지지하며 연대했다.

    문규현 신부가 영도조선소 정문 앞에서 김진숙 지도위원과 함께 복직 투쟁 선전전을 하고 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 고공 농성을 하고 있을 때, 매일 85호 크레인 맞은 편에서 100배 서원의 절을 바쳤던 시민이 영도조선소 앞을 찾았다.

    가톨릭노동상담소 소장 이영훈 신부가 김진숙 지도위원이 용접공 때의 모습을 담은 피켓을 들고 서 있다.

    김용균 열사 어머니가 영도조선소 앞을 찾아 복직 투쟁 선전전에 함께 했다.

    갑장인 친구를 위해 쌍용자동차 김정우 씨가 영도조선소 앞에서 김진숙 지도위원과 만나고 있다

    영남대의료원 해고자 박문진 지도위원이 영도조선소 정문을 찾아 김진숙 지도위원과 재회했다.

    부산시의원들이 만장일치로 결의한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 결의문’을 갖고 연대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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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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