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만 해방군, 목선으로
    일제히 창장 건너 남하하다
    [국공내전-57] 국민정부, 22년간의 수도 난징을 내주고 일패도지하다
        2020년 10월 14일 12: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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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회담이 결렬되자 마오쩌둥과 주더는 즉각 도강명령을 하달하였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명령을 기다리던 인민해방군 100만 대군이 한꺼번에 출격했다. 해일처럼 밀어닥치는 해방군의 기세에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는 국군의 방어선은 맥없이 허물어졌다. 천험의 방벽이라던 창장 방어선이 왜 그렇게 간단히 돌파되었을까? 창장을 둘러싼 국공의 공방전과 도강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민폐의 대명사가 된 탕언보 부대

    3대 전역에서 패한 뒤 국민당의 정치, 경제, 군사는 붕괴상태에 이르렀다. 장제스는 시간을 벌어 권토중래를 하고자 하였다. 은퇴를 선언하여 리쫑런에게 대리하게 하고 중국 공산당과 평화회담을 하게 하였다. 창장의 천험을 이용하여 인민해방군의 도강을 막으려는 준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국민당 총재 신분으로 정치와 군사를 사실상 움직였다.

    창장 방어선은 후베이성 이창(宜昌)에서 상하이(上海)까지 1800킬로미터 거리에 걸쳐 있었다. 국군은 이곳에 115개 사단 70만명의 병력을 배치해 두고 있었다. 그중 징후항 경비총사령관인 탕언보 집단군이 75개 사단 45만명을 차지하였다. 징후항이란 난징과 상하이, 그리고 항저우를 함께 일컫는 말이니 탕언보가 국민정부 통치지역 중 요지 대부분을 수비하게 된 것이다. 탕언보 집단군은 장시성 후커우(湖口)에서 상하이까지 800킬로를 맡고 있었다. 화중 군정공서의 바이충시 집단군은 40개 사단 25만명으로 후커구에서 이창까지 1,000킬로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해군 2개 함대와 공군 4개 대대가 육군의 작전을 지원하고 있었다.

    해방군의 창장도하 작전을 막을 국군의 주장은 탕언보였다. 중국 지도를 보면 우한은 창장의 중류에 위치해 있다. 난징이나 상하이 등 국민정부 중심지와 우한과 주장(九江) 등 중류지역은 너무 멀다. 따라서 장시성에 있는 주장 동부에서 하류지역까지가 해방군의 공략대상이었다. 병력과 장비에서 열세일 무렵 해방군은 우회, 기만, 양동, 운동전 등 책략을 즐겨 사용하였다.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100만 대군이 움직이는데 그런 작전이 통할 리 없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국군에 비해 병력과 사기 면에서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한의 바이충시는 별명이 ‘작은 제갈량’으로 그의 기량은 공산당에서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가 자신을 은퇴에 이르게 한 바이충시에게 중책을 맡길 리는 없었다.

    탕언보

    탕언보는 장제스가 충성심 하나만 보고 기용한 지휘관으로 안팎의 평이 좋지 않았다. 중일전쟁 때 탕언보도 열심히 싸워 훈장을 받은 일이 있었다. 타이얼좡 전투와 우한 전투에서 그는 일본군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 허난성에 주둔하였을 때 그의 부대는 군기가 엉망인 부대로 악명을 떨쳤다. 당시 “허난성에 네 가지의 재앙이 있는데 홍수와 가뭄, 메뚜기와 탕언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탕언보의 부대는 주둔하는 곳마다 무슨 명목으로든 장정을 끌어내어 다른 곳에 수용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남자가 없는 집에 들어가 가축이든 부녀자든 약탈하고 강간을 일삼았다. 오죽하면 백성들이 “탕언보의 부대가 주둔하느니 차라리 일본군이 들어와 죽이는 것이 낫다.”고 할 지경이었다.

    내전에서 탕언보는 장제스에게 직위해제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1947년 국군의 산둥성 중점 공격 때 그는 장링푸 부대를 구원하라는 장제스의 명령을 받았으나 미적거렸다. 그 결과 멍량구에서 포위된 장링푸 부대가 전멸당하고 장링푸도 전사하였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장제스는 무릎을 꿇은 탕언보의 머리통을 지팡이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탕언보의 머리가 깨져 유혈이 낭자했다고 한다. 탕언보는 구원 실패의 책임을 지고 직위해제를 당했다. 하지만 곧 징후항 경비사령관에 기용되어 장제스의 신임이 여전함을 증명하였다.

    엉망이 된 국민정부 작전회의

    장제스는 “해방군이 천험의 방벽인 창장을 몰래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중국 군사과학원 연구부 부부장인 왕부이(王輔一) 소장은 내전 당시 제3야전군 정치부 주임인 탕량의 비서였다. 그는 장기간 내전사를 연구했는데 도강전역과 관련하여 의미있는 증언을 하였다. 그에 따르면 장제스도 병력 부족으로 창장의 전 방어선을 지킬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다. 왕부이는 “장제스가 반드시 지키고자 한 곳은 상하이와 항저우이지 난징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장제스의 이런 생각을 탕언보가 앞뒤 가리지 않고 밀어 붙였다. 국민정부 총통 대리였던 리쫑런은 회고록에서 국방부 회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949년 3월초, 난징 국민정부 국방부에서 군사회의가 열렸다. 리쫑런, 허잉친, 구쭈통, 탕언보, 차이원즈(蔡文治) 등 정치 군사의 고위인사들이 공산군의 도강작전 방어를 검토한 것이다. 리쫑런이 먼저 말하였다. “지금은 창장을 지켜야 한다. 우리의 운명을 창장의 천험에 맡길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강력한 공군과 수십척의 군함이 있다. 강점을 잘 이용하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공산군이 창장을 날아서 건널 수는 없다.”

    참모총장 구쭈통이 국방부 작전청장인 차이원즈에게 재촉했다. “작전청의 계획을 이야기해 보시오.” 차이원즈는 방어지도 앞에 서서 설명하였다. “아군의 방어 주력은 난징 주변의 창장 상하류에 걸쳐야 합니다. 이곳은 강폭이 비교적 좁고 북안에 지류가 많지요. 공산군이 징발한 민간의 도선을 감추기에 좋습니다. 장인(江陰) 아래쪽은 강폭이 매우 넓은데다 강북에 지류가 없어 공산군이 몰래 건너기 어렵습니다.”

    그때 징후항 경비사령관인 탕언보가 차이원즈의 말을 자르고 끼어 들었다. “그 방안은 총재의 뜻에 어긋나오. 실행할 수 없소.” 탕언보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장인 하류쪽에 집중하여 상하이를 거점으로 해야 하오. 난징 부근에는 소수 부대만 남겨두면 되오.” 탕언보의 말이 끝나자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구쭈통이 “하책이오. 창장이 아니라 상하이를 지키다니.” 하고 반대하였다. 리쫑런도 “탕 사령관, 재고할 수 없소?” 하고 답답해 하였다. 그러자 탕언보가 잘라 말했다. “이것은 총재의 방안이오. 나는 그대로 따를 것이오.”

    탕언보는 45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장시성 후커우(湖口)에서 상하이에 이르기까지 국군 수비군이 전부 그의 휘하였다. 장제스는 탕언보에게 이렇게 지시하였다. “창장 방어선을 외곽으로 하여 상하이와 항저우의 삼각지역을 중점 방어해야 한다. 상하이가 핵심이다. 지구전 방침으로 상하이를 마지막까지 사수해야 한다. 타이완에서 상하이를 지원하며 반격 기회를 노려야 한다.” 장제스는 이런 방침을 탕언보에게만 이야기하여 리쫑런 등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차이원즈가 탕언보를 보고 말했다.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 그건 옳지 않소. 중국 내외 어떤 군사가라도 창장을 포기하고 상하이를 수비하는 것을 옳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오. 총통 대리도, 그리고 참모총장도 작전청의 방안에 동의하고 있소. 어째서 당신 혼자 다른 의견을 고집하는 거요?” 탕언보는 “나는 누가 뭐라고 하든 총재의 분부대로 할 것이오.”하고 고집을 세웠다. 차이원즈가 격앙해서 따졌다. “총재는 이미 하야했소. 여전히 총재를 들어 압박하려는 거요? 참모총장의 작전계획을 어겨서 적이 강을 넘어오면 당신이 상하이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소?” 탕언보는 본래 차이원즈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탁자를 탕 치더니 큰소리로 일갈했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무슨 강을 지키네, 지키지 않네 하고 떠들어? 당신을 먼저 쏘고 나서 말할까?” 탕언보는 회의 문건을 손에 쥐더니 자리를 박차고 가버렸다.

    리쫑런은 장제스의 개입에 대하여 이렇게 비판하였다. “장선생은 국민정부의 작전계획에 참견하는 것도 부족하여 방어계획을 어지럽혔다. 장선생은 직접 지휘한 동북과 쉬벙결전에서 참패하였다. 나와 바이충시가 창장을 지키려면 화이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지금 장선생은 창장을 지킬 생각이 없고 상하이만 사수하려 한다. 탕언보는 장선생의 생각을 맹목적으로 따를 뿐이다.”

    부득이 리쫑런은 난징 위수사령부에 방어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국방부에 방어공사에 필요한 비용을 지출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탕언보는 비밀리에 장닝(江寧)(난징시의 동남부에 있는 구로 난징 8대구의 하나) 요새의 대포를 상하이로 실어가 버렸다. 뿐만 아니라 난징의 탕언보군 지휘소도 트럭 이백여대를 준비하여 언제라도 상하이로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쨌든 탕언보는 창장 방어를 위하여 수비 병력을 배치하였다. 창장은 중국에서 가장 큰 강이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대륙의 중간을 가로지르고 있어 역사 이래 병법가들이 천험의 방벽으로 일컬어 왔다. 강 하류의 폭은 2킬로미터에서 10킬로미터에 이를 정도로 넓었다. 창장은 4월에서 5월 사이에 물이 불어 수위가 크게 올라간다. 5월이 되면 수위가 최고조에 이르고 바람과 파도도 거세어져 뱃길에 큰 어려움이 따른다. 창장 주변에는 광활한 논과 거미줄같은 수로망이 펼쳐져 있어 대병이 작전하기에 불리하였다. 탕언보 집단군은 강북과 강심주에 최소한의 병력만 배치하고 주력을 모두 남안에 배치하였다. 남안 배치병력은 18개군 54개 사단에 이르렀다. 탕언보 집단군의 작전은 해방군이 도강할 때 강 중간에서 해군과 협력하여 배를 격침시키거나 도강한 해방군이 남안에 확보한 교두보를 집중 공격할 계획이었다.

    덩샤오핑, 도강 및 남하작전을 총지휘하다

    이에 비해 해방군은 일찌감치 창장 도강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8년 12월 화이하이 전역이 한창일 무렵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천이는 이미 해방군의 창장 도강과 남하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 2월과 3월 사이에 중공 중앙군사위원회는 창장 남쪽으로 진격할 방침을 수립했다. 중앙군사위는 류보청, 천이, 덩샤오핑, 쑤위, 탄진린으로 총전적위원회(약칭 총전위)를 구성하고 덩샤오핑을 서기로 임명하였다. 화이하이 전역의 인사배치를 그대로 연장한 것이다. 덩샤오핑은 화이하이 전역에서도 총전위 서기를 맡아 부대배치와 작전, 보급등 전투에 필요한 조정과 안배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마오쩌둥은 1949년 3월, 7차 2회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때 덩샤오핑과 천이를 직접 불렀다. 마오는 그 자리에서 덩샤오핑에게 “도강작전을 당신이 지휘하라.”며 총전위 서기직을 부여하였다.

    총전위는 제2야전군 및 제3야전군, 중원군구와 화동 군구부대 등 총 100만 대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공산당은 1949년 2월 인민해방군 편제를 4대 야전군으로 개편하였다. 서북 야전군을 제 1야전군, 중원 야전군을 제 2야전군, 화동 야전군을 제 3야전군, 동북 야전군을 제 4야전군으로 이름을 바꿨다. 화북 야전군은 화북 군구로 개편하여 중앙군사위가 직할 지휘하였다.) 총전위는 강물이 범람하는 5월 이전에 창장을 건너려고 작전준비를 서둘렀다. 창장을 건너면 탕언보 집단군을 섬멸하고 국민정부 수도인 난징과 경제 중심지인 상하이, 그리고 장쑤, 안후이, 저장성 등을 일거에 석권할 예정이었다. 중앙군사위는 제4야전군 12만명으로 선봉 병단을 편성하고 핑진지역에서 후베이성 우한의 북쪽과 동쪽 지역으로 진출시켰다. 이 부대를 제2야전군이 지휘하여 바이충시 집단군을 견제하게 하였다.

    3월 31일, 총전위는 서기인 덩샤오핑이 기초한 ‘징후항 전역 실시요강’을 제정하였다. 총전위는 제2야전군과 제3야전군으로 동쪽과 중앙, 그리고 서쪽 돌격 집단군을 편성하고 정면지역을 맡게 하였다. 서쪽 집단군은 35만명으로 2야전군 사령인 류보청과 부정치위원 장지춘(張张隮春) 참모장 리다(李達)가 총괄 지휘하게 하였다. 이 부대는 장시성 주장 동쪽부터 창장을 도하할 예정이었다. 중앙 집단군은 30만명으로 탄전린이 지휘하여 안후이성 유시커우(裕溪口)에서부터 도강하게 하였다. 동쪽 집단군은 35만명으로 3야전군 사령원 대리인 쑤위와 참모장 장쩐이 지휘하게 하였다.

    해방군은 도강을 위하여 배를 징발하는 한편 목선을 제조하기로 하였다. 3야전군이 징발한 배는 8,000여척에 이르렀으며 배를 수리하고 개조하거나 제조하는 데 19만명의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해방군이 먹을 군량과 물자 수송을 위해 동원한 노무자가 332만명이었다. 인력에 의존하여 수송하던 시절이라 하여도 엄청난 인력동원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해방군은 배를 준비하는 외에도 도강훈련, 선상사격 등 필요한 훈련을 하며 도강전투를 준비하였다.

    해방군 공격부대는 본래 1949년 4월 15일 일제히 도강작전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국공 간 평화회담이 열리는 관계로 시기를 조금 늦춰 두었다. 총전위가 지휘하는 해방군 100만 대군은 당겨놓은 활시위처럼 모든 준비를 마치고 도강 명령을 대기하였다. 그 사이 공산당은 마오쩌둥 명의로 ‘평화회담 8항 조건’을 발표하는 한편 회담과 도강을 병행하고 있었다. 1949년 4월 20일 난징의 국민정부에서 화평협정에 서명을 거절하자 마오쩌둥과 주더는 4월 21일 ‘전국 진군 명령’을 하달하였다.

    해방군, 일거에 국군 방어선을 돌파하다

    “창장을 건너 전중국을 해방하라.”는 명령이 라디오, 신문, 전단을 통하여 창장 전선의 모든 해방군 진지에 하달되었다. 4월 20일 저녁부터 21일 저녁까지 제2, 제3야전군 100만 대군은 일제히 도강작전을 일으켰다. 해방군은 목선 만여척을 동원하여 서쪽의 후커우에서 동쪽의 장인(江陰)(장쑤성의 창장 삼각주에 있는 도시)까지 천리가 넘는 전선에서 일거에 국군의 창장 방어선을 돌파했다. 해일처럼 밀어닥치는 해방군의 기세에 국군의 방어선은 맥없이 허물어졌다.

    도강 전역 1호배의 깃발

    만여척의 배로 창장을 도하중인 해방군

    배를 창장에 띄우는 해방군 병사들

    중앙 집단군 30만 대군은 4월 20일 저녁, 모두 도강에 성공하였다. 21일 오후 서쪽 집단군이 도강을 시작하였다. 이 부대의 손실은 더욱 적어서 첫 번째 도강에서 10여명이 사상했을 뿐이었다. 그날 저녁 동쪽 집단군도 도강을 시작했다. 십몇분이 흐르자 돌격대가 남안에 상륙하였다. 본래 동쪽 집단군에 대한 저항이 가장 강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난징과 상하이, 그리고 항저우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인 요새에서 기의가 발생하여 70여문의 포가 숨을 죽였다. 난징과 상하이의 중간에 위치한 장인 요새는 7,000여명의 수비군이 기의를 일으켜 사령관인 다이룽광(戴戎光)을 체포하고 대포를 국군쪽으로 돌렸다. 장인 요새의 기의와 함께 국민정부 해군 제 2함대 사령관인 린준(林遵)이 25척의 함정을 이끌고 기의했다. 린준은 아편전쟁의 시발이 되었던 린저쉬(林則徐)의 조카이다. 린준이 기의한 장소는 난징 동북쪽 4킬로미터 지점인 빠투산(笆斗山) 부근이었다. 23척은 난징의 오른쪽 하류도시 쩐장(鎭江)에서 투항하였으며 나머지 함정은 상하이로 도주하였다.

    장인 요새는 창장 하류 중 가장 강폭이 좁은 곳으로 창장을 수비하는 중요한 요지였다. 장인 요새와 난징을 수비하던 해군이 함정 대부분을 이끌고 귀순했으니 국군은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본래도 사분오열된 국민정부 군정요인과 국군 지휘관들이었다. 평화회담이 결렬되자마자 도강이 시작될 줄은 생각하지도 못하였으며 100만 대군이 일천킬로미터의 전선에서 목선으로 도강할 줄은 더욱 몰랐다. 기나긴 전선에서 1만척이 한꺼번에 도강하면 공군의 존재란 별로 의미가 없게 된다. 오직 전투함의 화력과 진지의 화력으로 저지해야 하는데 해군 방어부대 대부분과 장인 요새가 기의하자 국군의 전투의지는 완전히 허물어지게 되었다. 4월 22일, 징후항 경비사령관 탕언보는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국군은 저장성과 장시성, 항저우와 상하이로 각각 후퇴하였다.

    오른쪽 빨간점 부근이 장인, 왼쪽 빨간점이 후커우

    도강전역 상황도 화살표는 모두 해방군의 공세를 표시한 것이다.

    장제스, 국군에게 난징 철수를 명령하다

    해방군이 도강작전을 시작한 뒤 1949년 4월 21일, 리쫑런은 허잉친, 바이충시, 구쭈통 등 고위 군정인사들과 회의하며 전략을 숙의했다. 이 자리에서 바이충시는 난징과 상하이를 포기하고 탕언보 집단군의 주력을 저간철도(浙赣鐵道: 저장-장시성을 잇는 철도)와 난쉰철도(南潯鐵道: 장시성 북부지역의 철도) 지역으로 이동시키자고 주장하였다. 자신이 거느린 화중지역의 40만 병력에 의지하여 후난성과 장시성을 고수하고 해방군의 서남지역 진격을 저지하자는 것이었다. 바이충시의 의견에 참석자들은 대체로 동의하였다.

    4월 22일, 장제스가 항저우 공군학교에서 리쫑런, 허잉친, 바이충시, 장췬 등을 불렀다. 장제스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양옆에는 큰아들 장징궈와 국민당 선전부장인 타오시성(陶希聖)이 시립하였다. 장제스는 좌중을 둘러보더니 쓴 웃음을 지었다. “지금 상황은 여러분이 목도하는 바와 같소. 나는 더 이상 관계치 않으려 하였지만…” 장제스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이야기하였다. “우리에게는 아직 서남부에 대후방이 있소. 아직 몇백만의 병력이 있고 정예 해공군이 있소. 공산군이 옌안에 있던 것과 비교하면 훨씬 양호하오. 미국의 지원도 있으니 낙심하지 않아도 되오.” 그러나 사람들은 묵묵히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이윽고 난징을 지킬 것인지 하는 문제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의론이 분분해지자 장제스가 입을 열었다. “난징은 지키기 쉽지 않소. 하지만 상하이는 고수해야 하오. 상하이는 방어설비가 잘 되어 있어 공산당 300만명이 들어와도 막아낼 수 있소. 상하이는 물론 상하이-항저우 선은 반드시 지켜야 하오.” 장제스는 잠시 쉬더니 말을 이었다. “창장은 이미 내주었소. 하지만 첸탕장(錢塘江 : 안후이성에서 발원하여 저장성 항저우만으로 유입되는 강이다.)은 반드시 사수해야 하오. 저간철도가 우리의 주요 방어선이오. 여러분들 의견은 어떻소?”

    허잉친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우리는 끝까지 저항해야 합니다.” 장제스가 대꾸했다. “공산군에게 저항이라니 옳지 않소. 반란을 평정하는 거요.” 리쫑런도 입을 열었다. “나는 과거에 우리가 거점을 고수하던 전략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봅니다. 과연 오늘에도 그것이 옳을까요? 거점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지만 상대가 모두 먹어 치웠소. 우리 전략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공산당과 기동작전을 펼쳐야지 진지에서 싸우면 안됩니다. ” 그러자 허잉친이 리쫑런의 주장에 호응하였다. 앞으로는 운동전이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장제스가 리쫑런에게 물었다. “그럼 난징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오?” 리쫑런이 오히려 장제스에게 되물었다. “포기하지 않으면 탕 사령관이 만회할 묘산이 있나요?” 장제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오늘 개인의 일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오. 총통 대리가 창장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면 탕 사령관은 더욱 그렇게 생각할 것이오.”

    회의에서 설왕설래하는 사이 전방에서 계속 보고가 들어왔다. 해방군이 난징과 상하이를 잇는 철도를 이미 차단했다는 것이었다. 국군은 이미 서쪽의 후커우에서 동쪽의 장인에 이르기까지 창장의 천리 전선에서 후퇴하여 난징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즉시 명령했다. “난징의 기차역, 부두, 수력발전소를 모두 폭격하라. 모든 부대는 상하이와 항저우 일대로 후퇴하라.”

    오후 2시 국민 정부군은 창장 방어선에서 급히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류루밍 집단군은 저간철도쪽으로 철수하였고 1수정구와 7수정구, 난징 방어사령부 병력도 국도를 통해 항저우로 향했다. 그밖의 부대도 상하이로 후퇴하기 시작하여 23일까지 난징-진장(金江)선에 있는 국군은 모두 철수를 완료하였다. 4월 23일 국군은 우후(蕪湖)지역의 부대까지 철수하여 모든 부대가 상하이와 저간철도의 수비에 들어갔다.

    난징 국민정부 관원들은 황급하게 가족들을 이끌고 피난에 나섰다. 22일 국민정부의 각 원과 부 등 각 기관은 모두 광저우로 후퇴했다. 총통부도 상하이로 철수했으며 23일 새벽에는 행정원장 허잉친이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로 떠났다. 리쫑런은 광저우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비행기를 타고 구이린(桂林)으로 갔다. 구이린은 광시좡족 자치주의 성도로 리쫑런의 근거지였다. 그는 그곳에서 국세를 관망할 예정이었다.

    23일 오전 국군이 난징을 철수하며 성안의 수많은 건물에 불을 질렀다. 22년 동안 국민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이 짙은 연기와 불길에 휩싸였다. 그날 오후 해방군 전초부대인 35군이 난징 동쪽 허핑먼(和平門)으로 입성하였다. 24일 오전에는 해방군 대부대가 난징시로 들어왔다. 난징 시민과 학생들이 열렬히 환영하는 가운데 남녀 학생들이 해방군에게 꽃을 가져다 주었다. 도강전역이 시작된 지 3일 만에 국민정부 수도인 난징이 떨어진 것이다.

    <국공내전>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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