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위기의 억울함에 대해서
    [에정칼럼] '당위' 아닌 '사회적 힘'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2020년 10월 12일 10:1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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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는 올해 54일의 긴 장마, 그리고 뒤늦은 가을 태풍을 겪으면서 절감했을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2018년의 여름, 폭염으로 쓰러지고 열대야로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은 하늘을 붉게 물들인 채 6개월 이상 지속된 호주의 산불 영상을 보며 점차 다가올 재앙을 상상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코로나19 재난을 견뎌 내는 많은 이들은 기후 재앙이 어떻게 오게 될지 앞서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과학자들과 기후운동가들이 통계나 그래프, 혹은 사진을 통해서 기후위기를 경고할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느끼고 있다. 이제 기후위기는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본격적으로 실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탓인지 혹은 그것을 앞당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침내 국회도 기후위기 비상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작년 9월 21일에 기후위기 비상행동을 시작한 것을 생각하면, 얼마간의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게다가 국회의 비상선언이 얼마나 진정성과 실효성이 있는 것인지는 의심스럽기도 하다.

    국회 비상선언에 정부의 화답은 없었다. 오히려 한전은 국제적 비난을 받는 베트남 붕앙2 석탄발전소의 투자를 결의하였고 삼척 등지에서 건설되는 신규 석탄발전소의 공사는 멈추지 않았다. 국회 비상선언 결의안은 채택되자마자 그렇게 조롱받고 있다. 비상선언은 왜소한 문자로만 남고, 어디에도 그에 상응하는 행동은 찾기 힘들다. 정부의 무시만큼이나 이를 지키려는 국회의 결기도 싸구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정부와 국회만을 비난하기도 힘들다. 국회의 비상선언을 실질화하도록 압박할 사회적 힘도 여전히 취약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한국 사회 엘리트들의 ‘기후침묵’을 고발했었다. GDP 성장률 혹은 부동산 경기에는 목을 매지만 기후변화라 제대로 말하지 못해 ’푸른 하늘‘이니 눙치고 있는 엘리트들의 무지 혹은 자기기만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기후 침묵이 완전히 깨진 것도 아니며, 엘리트들의 시야가 현실 권력과 부에 함몰되어 위기를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은 것에 분노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기후위기를 넘어설 사회적 힘은 엘리트들에 대한 분노로부터만 오지 않는다. 인민(people)들이 이 위기를 넘어서려는 의지를 모으고 연대하며 대안을 탐색하려는 노력으로부터 만들어지고, 또 뿌리내려야 한다.

    아마도 이런 사회적 힘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기후위기의 억울함’이라는 사회적 감정을 잘 다루어야 할 것이다. 기후위기를 유발한 책임이 크지 않은 이들이 대전환의 과정에서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존하고 삶을 살아야 하는 상황, 아니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것에 대해 느끼는 억울함. 이들이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슬로건 아래에 모이기 위해서 잘 보듬고 ‘창조적 파괴’를 위한 강력한 힘으로 전환시켜 내야 할 사회적 감정들이다.

    9월 기후위기 비상행동 퍼포먼스(사진=환경운동연합)

    장면 1.

    5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연령과 나이, 직업을 고르게 선발한 시민들 15명이 모여서 핵에너지와 화석연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사회의 에너지 시나리오를 함께 작성해본 일이 있다. 한 번은 1박 2일로 진행된 3차례의 워크숍에서 시민들은 2050년의 바람직한 ‘에너지 미래’를 구상해보았다. 기후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우리가 쓸 수 있는 에너지는 얼마일지, 또 그 소비를 어떤 에너지원을 통해서 공급하는 것이 타당한지 등을 토론하였다. 시민들은 지금 쓰고 있는 에너지 소비량은 훨씬 적어져야 하며, 그리고 대부분 재생에너지를 통해서 공급해야 한다는 대체적인 합의를 얻을 수 있었다.

    에너지 소비를 크게 줄어야 한다는 원칙에는 동의하였지만 어느 부문에서 이를 줄일 것인지에 대한 토론은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수송 부문, 그 중에서도 항공 부문의 에너지 소비를 어느 정도로 허용해야 할지 세대 간 입장 차이가 드러났다. 이미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해볼 수 있었던 장년층 참가자들은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항공 부문의 에너지 소비를 과감히 줄여도 별 문제가 없다는 쪽이었다. 그러나 해외 여행을 해보지 못했거나 소망하고 있었던 청소년과 청년들은 달랐다. 다른 부문은 몰라도 항공 부문의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것에 상당한 저항감을 표시했다. 그들에게 비행기는 자신들이 살아가야 할 시간과 세상 속의 자유와 관련된다고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게다가 앞선 세대들이 저질러 놓은 일 때문에, 내가 누려야 할 혹은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제약되는 일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장면 2.

    몇 주 전, 보령의 한 카페에서 회색 작업복을 입은 세 명의 남성들과 마주 앉았다. 그 고장에서 태어나서 공부하고 잠시 외지로 나갔다가 되돌아와 발전소에서 20년 가까이 일하고 있는 노동자. 외지 출신이지만 발전소에서 일자리를 얻고 결혼도 하여 정착한 8년차 젊은 노동자. 역시 외지 출신이지만 여기서 정착하여 일한 지 20년이 넘고 이제 얼마 후 은퇴를 앞둔 노동자. 그들 머리 위로 난데없이 날벼락이 떨어졌다. 보령 1, 2호기가 올해 말에 폐쇄된다는 소식 때문이다. 그들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이 결정에 대해서 미리 들어본 적도 의견을 낼 기회도 없었다. 지금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어, 그 답답함을 호소하기 위해서 낯선 이 앞에 모여 앉은 것이다.

    이들은 태안 석탄발전소의 협력업체 노동자로서 배로부터 하역된 석탄을 발전 설비까지 운송하거나 태우고 남은 석탄재 등을 처리하는 업무를 하고 있었다. 발전소는 “더럽고 위험한 곳”이지만, 그들에게는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기대고 또 지역 경제를 지탱하는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고된 노동과 노력으로 원활히 가동되는 설비들과 그 덕에 산업과 가정에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자부심도 채워주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석탄발전소와 그리고 자신들까지도 환경오염의 원인으로 취급받아 억울하기도 하다. 대안으로 거론되는 LNG 발전소가 기후위기의 해결책이 되는지도 의문일 뿐만 아니라, 정규직은 몰라도 자신들의 일자리를 지키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이었다. 기후위기라지만 석탄발전소를 꼭 폐쇄해야 하는지 묻고 싶을지 모른다.

    장면 3.

    당진 석탄발전소 옆 교로2리 들판의 노란 벼들은 추석이 지났어도 수확되지 않고 그대로였다. 애초에 황금어장이었던 대호만을 1980년대부터 간척하여 얻어낸 들판은 엄청나게 넓었다. 많은 어민들이 바다를 떠나 농사를 짓게 되었다. 갓 따낸 단감을 건네며 웃던 주민들은 당진 석탄발전소에 대해 묻자 막막한 표정으로 억울한 이야기를 끝도 없이 꺼내놓았다. 1999년 1, 2호기를 시작으로, 정부는 더 짓지 않겠다는 약속을 계속 어겨가며 무려 10기의 석탄발전소를 가동 중이다. 계속 날라는 석탄 가루와 석탄재,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냄새, 뜨거운 온배수로 죽어가는 바다, 거대한 송전탑의 위압감과 습기찬 이른 새벽의 괴상한 소리. 발전소 주변지역 지원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석탄발전소만 폐쇄한다면 없어도 그만이란다.

    교로2리 주민들은 2010년대 중반 민간 회사가 또 석탄발전소를 짓겠다고 하자 다시 반대운동에 나섰다. 재정 지원 약속에 석문면의 모든 마을이 찬성으로 돌아섰을 때도 반대를 굽히지 않자, 석문면 개발위원회에서 교로2리 대표가 제명되는 일까지 겪었다. 그러나 당진시장까지 광화문 단식 농성으로 반대에 나서니 문재인 정부는 건설을 취소했다. 고립된 투쟁이었지만 결국 승리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미 구축된 송전 인프라를 보고 대규모 풍력발전소를 짓겠다는 업자들이 뻔질나게 찾아오고 있다. 기후위기 때문에 석탄발전소를 없애야 하고 재생에너지도 필요하다 인정하지만, 왜 또 우리 마을이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다. 특히 간척된 넓은 들판에 헬기나 드론을 띄워 농사를 짓고 있는데 풍력발전기가 들어오면 힘들어질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식량 생산은 어찌할 것이냐고 되물었다.

    여기에서 비행기, 석탄발전소, LNG 발전소 그리고 풍력발전소에 대해 규범적인 판단을 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기후위기에 직면하면서 다양한 사람의 여러 삶들이 이런 기술들과 연계되거나 혹은 분리되면서 심대한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며, 이는 상상하지 못했거나 원하지 않은 일일 수 있다. 어떤 경우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것일 수 있다. 아무리 기후위기에 대응한다고 하더라도,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불거지는 억울한 감정을 외면할 수 없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다시 말하건데 그 감정이 정당한지 아닌지 혹은 그 무게가 어떤지 여기서는 묻지는 않겠다. 하지만 기후위기와 함께 곪아가는 이 감정을 사회적으로 제대로 들여다보고 다룰 수 있어야만, 대전환을 위한 사회적 힘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필자소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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