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은 부모님을 제대로 미워할 줄 알게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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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0월 17일 10:3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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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성장한 주제에 성장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혹은 성장하지도 못한 주제에 성장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전자건 후자건, 우리는 기억을 헤집어야 한다는 일종의 통행료를 지불하지 않고는, 그것을 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영화가 이미지이고, 하나의 거대한 기억이라는 점에서, 그 분명함 만큼이나 영화가 그러한 임무를 떠맡아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극장에 가기 싫다면, 단지 카페에서 혹은 제사상 앞에서, 심지어는 화장대 앞에서 성장한 주제에 성장을 돌아보고 싶다면, 적어도 자신의 뇌수를 하나의 스크린으로, 자신의 머리를 하나의 극장으로 삼아야 한다면, 나는 너무 닫힌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성장의 조건: 깜깜함. 죽음

성장한다면, 불안해야 한다. 혹은 불안하지 않는다면 성장이 아니다. 불안을 머리 속에 표상해보면, 그것이 왜 그토록 성장하는 이들을 괴롭혀 왔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온통 새까만… 그래서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이러한 먹칠된 어둠은, 이삿짐을 풀다가 느끼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지 않은 혼돈감과는 다르다. 그것은, 다음 달에 계약만기인데, 아직도 이사 갈 집 분양이 ‘깜깜 무소식’인, 말 그대로 ‘깜깜한’ 느낌이다.

바로 이러한 절대적인 <깜깜함> 때문에, 성장영화는 성장통, 즉 불안을 죽음에 비유한다. 그도 그럴 것이, 눈을 감고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 그것은 내가 죽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대표적인 성장영화인 <스탠 바이 미>(이 영화는, 정말 단독자로 죽어간 리버 피닉스의 젊은 영혼을 볼 수 있는 영화이다)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믿고 따르던 형의 죽음 때문에 괴로워하고, 영화 <가위손>은 가위손을 만든 그의 아버지(과학자)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며, <판타스틱 소년 백서>(원제는 <Ghost World>인데, 영화의 원래 제목만큼이나, 아무리 숨기려고 해봐도 이 영화는 죽은 유령들의 이야기이다)에서 여주인공이 마지막 탄 버스는 아무도 없는 밤거리, 그 숭고한 어둠 속을 외롭게 달린다.

   
  ▲ 영화 "스탠 바이 미" 포스터와 주인공들
 

에잇, 이러한 깜깜함 혹은 죽음의 이미지들이 결코 현학적인 코드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히든 카드: 우리의 달려라 하니는 자신의 출생과 맞바꾼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한강에게 고백하지 않는가: 내가 엄마를 죽였어…

성장통은 믿고 의지할 나침반이 없을 것 같은… 불안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성장의 해결: 죽음으로의 돌진

다행히 성장영화는, 이 역시 공식대로지만,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 죽지 않으려면 죽음을 직시하라고, 즉 그 깜깜함 이면에 있는 무엇을 확인하러 발걸음을 떼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스탠 바이 미>에서 주인공은, 형의 죽음을 껴안고, 또 다시 그 죽음을 확인하듯이, 시체를 찾으러 여행을 떠난다.

아이들이 바로 그 깜깜함을 향해 떠나는 여정, 모든 성장영화가 일종의 로드무비인 이유(심지어는 모든 로드무비가 일종의 성장영화인 이유): 즉 그를 무섭게 했던 그 깜깜함으로 그는 돌진하는 것이다.

<스탠 바이 미>가 시체를 확인하러 떠나는 아이들이 숲길(‘숲’은 한자문화권에게는 없는 독특한 공포의 이미지를 앵글로 색슨에게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귀신은 대들보에 살지만, 영국에서 유령은 숲에서 산다)을 통과하는 로드무비인 것과 똑같은 이유로, <달려라 하니>는 어머니의 죽음을 긍정하러 달리는 하니가 육상 트랙을 통과하는 로드무비라면, 이건 지나친 해석일까.

로드 무비가 아니래도 좋다! 어쨌든, 어머니의 부재를 짊어진 하니가 성장통에 복수하기 위해, 역시 아버지의 부재를 짊어진 이선희의 울분으로 정제된 샤우트에 맞추어, 트랙을 ‘질주’하는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내가 만약 <달려라 하니>의 제작자였다면, 그녀가 계주 선수로 출전하는 속편을 계획하다가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바통을 주고받으며 이어달리기할 때, 하니는 죽음 앞의 단독자가 될 수 없고, 따라서 성장의 문제설정이 애초부터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장의 결론: 죽음과 사랑 사이

길을 떠나기 전, 끝이 없는 것 같은 길의 끝에 소실점을 응시해보자: 검은 머리, 표정 없는 얼굴, 그림자뿐인 형체, 비어버린 마음…. 무엇보다도 동공 없는 시선, 그것은 내가 친해질 수 없는, 나에게 전혀 익숙하지 않은 어떤 낯선 것, 이방인이다(<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영화에서, 바로 이 낯선 자들의 사회학적 버전을 잠깐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단 한 번의 시선만으로도 이질감을 느끼는 ‘이주노동자’들이다).

그것은 무섭지만(증오), 그래도 성장하기 위해서 과감히 다가가야 할(사랑) 깜둥이다(이 <깜둥이>는, 미국에서 낯선 이, 따라서 경계해야 될 의미로 쓰이는데, 그것은 정말이지 이방인에 대한 보편적 이미지인 것이다)

그는 죽음과 사랑 사이에 언제나 끼여 있으면서 우리의 존재론적 항문을 간지럽힌다. 간질간질… 날 사랑할 거니, 아니면 날 혐오할 거니? 난 미운 만큼 난 사랑스러워, 날 혐오하지 않는 방법은 날 혐오하는 수밖엔 없을 껄?

혹은 반대로, 날 사랑하는 방법은 날 사랑하지 않는 수밖에 없을 껄? 존재론적으로 얄미운 그를 질식시키기 위해, 우리가 뀌어야 할 실존론적 방귀는 무엇일까? 사랑의 죽음의 교차로에서(확실한 것은, 만약 당신이 진다고 해서, 전투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족의 구멍, 가족 내의 <깜둥이>(타자)에 미쳐 있다가, 많이 미친 작가들이 내리는 결론들이 해괴망측할 때가 많다. 예컨대 존 카사베츠의 <얼굴들>을 보면, 거기엔 감정의 수평선(그것은, 타자에 대한 완전한 부정으로 말해질 만한 반복되는 일상적 삶일 것이다)도 아니고, 감정의 수직선(그것은 타자에 대한 완전한 긍정으로 말해질 만한 비일상적 절멸 혹은 비범한 죽음일 것이다)도 아닌,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미분화된 변곡점들만이 남아있다.

물론 신경쇠약에 걸려버리는 것도, 더 이상 <깜둥이>를 무서워하지 않는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스탠 바이 미>의 리버 피닉스가 제안하는 방법은 그다지 미쳐있진 않은 것 같다: 그가 유령들이 뛰노는 숲 속에 모닥불을 하나 피워놓고 우리에게 들려주는 지혜, 그리고 자신의 사망선언으로 끝끝내 전달하려고 하는 지혜는, 희생이다.

하지만, 그것은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나 칼 드레이어가 선택한 것과 같은 종교적인 희생은 아니다(<희생>과 <잔다르크의 수난>이 성장영화가 아닌 이유). 우리의 하니가 기도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트랙을 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하니는 어머니의 사진을 한강에 띄워야 한다. 리버 피닉스가 우리에게 제안하는 ‘희생’이란, 잔다르크의 희생과 다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 반대의 희생이다. 그것은 타자를 향한 나의 희생(나의 죽음이 타자를 완성한다: 잔 다르크는 희생당한 것이지 성장한 것은 아니다)이 아니라, 나를 향한 타자의 희생(타자의 죽음이 나를 완성한다: 하니는 성장한 것이지 희생당한 것은 아니다)이다.

깜둥이의 그 <깜깜함>을 역이용해서, 그 깜둥이의 동공 없는 얼굴을 덮어버리는 테크닉은, 말로 하면 어렵지만, 우리가 성장의 마디마디마다 줄 곧 잘 써온 테크닉임에는 분명하지 않나? 우리가 초상집에 가서 흔히 말하듯: “잘 살아주는 게 편히 죽게 하는 거야” 또는, 첫사랑의 아픔은, 그 첫사랑 자체가 나의 다음 완성을 위해 남겨준 교훈들을 긍정할 때, 치유된다.

따라서 이것은 단지 관점의 변화가 아니다. 이것은 나 자신의 존재를 구축하는 기술의 변화이다: 리버 피닉스가 모닥불 앞에서 유령들에게 선언하길: “네 아버지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냐. 단지 널 사랑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지” 아버지나 아들이나, 성장과 미성숙의 차이는 정말 기술, 방법, 테크닉 등이다.

그의 사악한 죽음이 나에게로 마수를 뻗칠 때, 나는 그것을, 마치 배구에서 그렇게 하듯, 토스해서 나의 구멍을 향해 스파이크하는 것이다(우리의 첫사랑을 떠올려보면, 이 토스하는 느낌이 분명하게 상기될 지도 모른다. 단 첫사랑을 힘들게라도 ‘잘’, 리시브, 토스, 스파이크했었다면). 요컨대 성장이란, 아버지(혹은 어머니)를 미워하다가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성장이란, 아버지(혹은 어머니)를 제대로 미워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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