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공 평화회담 결렬되다
    [국공내전-56] 난징정부, 공산당 최종안 거절···창장(양쯔강) 도강 임박
        2020년 10월 07일 10: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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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당, 공식회담과 비공식 접촉을 병행

    1949년 4월 1일, 난징정부 회담대표인 장즈중(張治中), 샤오리즈(邵力子), 장스자오(章士釗), 황샤오홍(黄紹竑), 리정(李蒸), 류페이(劉斐) 일행이 베이핑으로 떠났다. 공산당의 회담대표는 저우언라이였다. 양쪽 대표단은 베이핑에서 4월 1일에서 15일까지 보름간 ‘평화협정안’에 대하여 논의했다. 저우언라이는 국민정부 대표단 수석이라고 할 수 있는 장즈중에게 따져 물었다. “시커우에 가서 장제스를 만났으니 그가 배후에서 회담을 조종하는 것 아니오?” 장즈중은 “떠나기 전에 인사를 하러 간 것 뿐”이라고 해명하였다.

    1949년 4월 4일, 마오쩌둥은 신화사에 ‘난징정부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평론을 발표하였다. “난징 국민당 정부와 군정인원들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장제스 전범 집단과 그 주인인 미 제국주의에 의지하여 계속 인민의 적으로 남는 것이다. 그래서 장제스 집단과 동귀어진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 및 장제스와 결별하여 공을 세우고 속죄하는 길이다. 그리하여 인민의 관용과 용서를 구하는 길이다.”

    중공은 4월 6일에도 신화사 통신을 통해 이 사실을 지적하였다. “리쫑런 정부가 회담을 통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지만 주전론자인 장제스와 마찬가지로 인민해방군의 전진을 반대하고 8개항도 반대한다.” 마오쩌둥과 공산당의 이런 태도는 회담을 앞두고 리쫑런 정부를 압박하며 신경전을 펼친 것이었다.

    국공평화회담을 그린 만평

    1949년 4월 2일부터 12일까지 국공 양쪽은 개별적인 접촉을 통해 의견교환을 하였다. 난징 대표단은 리지선, 황옌페이, 푸쭤이, 덩바오산 등과도 만나 의견을 나누었다. 리지선과 황옌페이등은 제3세력의 대표격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장제스의 탄압을 피해 홍콩에 있다가 베이핑으로 와 있었다. 특히 리지선은 푸쭤이와 공산당의 베이핑 평화회담에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공산당이 난징 대표단과 이들의 만남을 주선한 것은 회담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안배라고 할 수 있었다.

    4월 8일 오전,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베이핑의 샹산에서 장즈중과 네 시간 동안 접견하며 대화했다. 마오쩌둥은 난징 대표단의 곤경을 줄이기 위해 협정안에 전범의 명단을 싣지 않는 것을 양해한다고 하였다. 마오는 “중공측이 회담 초안을 낸 뒤에 정식 담판을 하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장차 서명할 때에는 리쫑런, 허잉친, 위유런(于右任), 쥐정(居正), 통관셴(童冠賢) 등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마오쩌둥이 점심을 함께 하자고 하였으나 장즈중은 사양하였다. 마오쩌둥이 밤새 한잠도 자지 않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949년 4월 13일 저녁, 국공 양당대표는 베이핑 중난하이(中南海) 근정전에 모여 정식 회담을 열었다. 중공쪽은 저우언라이를 필두로 린보취, 린비아오, 네룽전, 예젠잉, 리웨이한(李维漢) 등이 참여하였다. 예젠잉은 베이핑 시장이었으나 린비아오와 네룽전 등 대표적인 지휘관들이 참가한 것은 화전 양면에 대한 중공측의 의지로 읽을 수 있다. 공산당은 회담이 결렬되면 창장을 건너 남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우언라이가 먼저 전쟁의 책임문제를 거론하였다. “난징의 국민정부가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협정 전문에 책임문제를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 “중공은 모든 전범에 대하여 시비를 분명히 가릴 것이다. 누구든 잘못을 뉘우치고 진심으로 성의를 다한다면 전범의 죄를 취소할 수 있으며 관대하게 처분할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다시 협정 초안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 초안은 모두 실현 가능한 것들이다. 난징쪽도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공산당, 정권의 접수와 국군 개편을 고수하다

    공산당측에서 ‘8항 조건’을 기초로 한 ‘국내화평협정’ 초안을 설명했다. 공산당측은 “난징 정부가 8항 조건을 받아들이면 모든 것을 논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저우언라이는 “그중에서도 핵심문제는 접수와 개편”이라고 덧붙였다. 저우언라이는 두 가지 핵심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우리가 도강하여 국민당 군대를 접수하는 것이다. 난징쪽은 ‘획강이치’를 꾀하는데 분명히 밝히겠다. 인민해방군은 반드시 도강하여 국민당 정권을 접수할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또 이런 말도 덧붙였다. “현재의 혁명을 신해혁명과 북벌전쟁처럼 생각하면 안된다. 그때는 도중에 타협한 결과 반동파가 승리하였다. 우리는 혁명을 끝까지 진행할 것이다.”

    8항조건 거부시 도하강행을 보도한 일본 매일신문

    도강문제에 대하여 저우언라이는 솔직하게 이야기하였다. “난징대표단은 도강에 반대하거나 좀 늦추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우리가 도강을 늦추면 광저우나 시커우쪽에 한숨 돌릴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담판 기간에 우리는 잠시 도강을 늦출 것이다.” 저우언라이가 거론한 광저우는 쑨커의 행정원과 입법원을 말한 것이었다. 시커우는 말할 것도 없이 장제스를 가리킨 것이었다. 즉 국민정부 주류파이자 강경파들을 거론한 것이었다.

    저우언라이는 국민당 군대의 개편문제도 언급하였다. “난징 대표단은 양측 군대가 각 주둔지에서 각자 개편하자고 희망한다. 이것은 군대를 사실상 보유하겠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민주원칙에 의거하여 국민당 반동군대를 개편할 것이다. 원래 편제대로 집중해 정리했다가 인민해방군으로 다시 개편할 것이다.” 난징 대표단은 군대 개편안에 대하여 나중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개편을 두 단계로 나누자고 제안했다. 연합정부가 성립하기 전에는 국민당이 스스로 처리하고 정부가 성립한 후에는 위원회에서 처리하자고 하였다. 공산당은 정권과 군대의 접수에 대하여 인민혁명의 기본문제로 결코 양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밖의 다른 문제에 대하여 공산당측의 표현을 빌면 “많은 양보를 하였다.”

    국민정부 대표인 장즈중이 의견을 밝혔다. “초안 중에 국민당이 받아들이기 힘든 점들이 있다. 전범의 문제, 헌법의 폐지, 가짜 법통, 토지개혁 문제 등이 그렇다.” 그 외에도 장즈중은 “표현이 너무 자극적이다. 완화시켜 달라.”고 하였다.

    공산당이 제출한 초안에 대하여 난징 대표단은 40개항의 수정안을 제기하였다. 그중 20개항은 공산당이 받아 들였다. 전범의 처리 문제는 난징쪽에 민감한 항목이었다. 난징쪽은 전범문제를 협정에 쓰지 말자고 하였다. 이에 관하여 마오쩌둥은 회담 전 4월 8일 리쫑런에게 전문을 보냈다. “귀측이 8개항의 조건을 기초로 회담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전범문제의 해결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중국 인민해방 사업에 유리하다면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을 표준으로 삼을 것입니다.”

    공산당은 난징쪽 의견을 받아 수정안을 제출하였다. 전범을 두 종류로 분류하고 참회하지 않는 자는 엄중하게 처벌하기로 하였다. “모든 전범은 누구를 막론하고 시비를 분명히 가린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이를 분명히 표현한다면, 그래서 인민해방 사업에 유리하고 평화적 해결에 도움이 되는 자라면 전범 명단에서 지우고 관대하게 처분할 것이다. 전범 외에 국민당 군대의 장병과 정부에서 근무한 자는 이 협정서 수정안에 표현한대로 관대하게 처리할 것이다.”

    공산당측은 그 후의 정치일정도 밝혔다. “만약 리쫑런 정부가 화평협정을 접수한다면 중국 공산당이 각 민주당파와 먼저 협상할 것이다. 그후 난징정부 인사 약간 명과 민주당파 인사들로 새로운 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고 연합정부에도 참가하게 할 것이다.”

    4월 14일 공산당은 저우언라이의 의뢰로 베이핑의 일부 ‘민주인사’-공산당의 표현이다- 들에게 1차 회담의 경과와 난징 대표단의 입장을 보고하였다. 선쥔루(沈鈞儒), 황옌페이(黄炎培), 탄핑산(谭平山), 펑쩌민(彭澤民), 차이팅카이(蔡廷鎧) 등 ‘민주인사’들의 의견도 경청하였다. ‘민주인사’들은 공산당이 적지 않은 양보를 하였으며 최종안이 충분히 관대하다고 이야기하였다. 따라서 도강하여 국민당 반동정권을 접수하는 문제와 군대 개편, 그리고 전범의 처리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는 양보하지 말라고 의견을 모았다. 결국 공산당은 난징 대표단이 제기한 수정안 중 20여개 조항을 수정한 뒤 8개조 24항의 ‘국내화평 협정안’을 제출하기로 하였다.

    난징정부, 공산당의 최종안을 거절하다

    4월 15일 저녁 9시, 양측 대표단은 2차 회담을 시작하였다. 먼저 공산당이 수정안을 제출한 뒤 저우언라이가 발언했다. “이것이 최종안이다. 우리는 최대한 동의를 원칙으로 합리를 추구하여 난징 대표단이 난징정부를 설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는 협정의 빠른 서명으로 화평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난징쪽 대표 장즈중은 간단히 소감을 말한 뒤 원칙적으로 초안을 접수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다음날 난징에 사람을 보내어 재가를 받은 후 답변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저우언라이가 공산당의 입장을 밝혔다. “중공 대표단은 가능한 난징 정부 대표단의 의견을 충분히 받아 들였다. 하지만 국민당 군대 개편과 인민해방군의 도강하여 정권과 지방정권을 접수하는 문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 저우언라이의 어조는 정중했으나 내용은 통첩이었다. 저우언라이는 마침내 난징 대표단에게 잘라 말했다. “우리는 난징정부가 4월 20일 안에 답변해 주기를 바란다. 난징이 최종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20일에 반드시 강을 건너겠다.” 4얼 15일 회담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공산당의 평화협정 초안 왼쪽에 주더의 이름이 보인다.

    공산당은 1949년 4월 16일부터 20일까지 난징정부에 시간을 주었다. 그만큼 회담 분위기는 공산당측에 일방적으로 유리했다. 황샤오홍과 취위(屈武) 등이 공산당의 최종안을 가지고 닌징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협상 최종안을 보고하자 국민정부에 대파란이 일었다. 바이충시는 협상안을 일별한 뒤 분격하여 황샤오홍에게 외쳤다. “이걸 안이라고 가지고 돌아 왔는가? 투항하자는 게 아닌가?” 다음날 광시계 인사들이 모여 안을 본 뒤에 여전히 황샤오홍을 질책하였다.

    장제스는 탁자를 내리치며 화를 내었다. “원바이(文白: 원바이는 장즈중의 자이다.), 무능하구나. 나라를 욕되게 하다니.” 장제스는 리쫑런을 제쳐두고 아들인 장징궈에게 전방 지휘관들에게 전화를 걸게 하였다. “탕언보에게 전하라. 창장의 천험에 의지하여 싸울 준비를 철저히 하라.” “바이충시에게 전하라. 회담은 이미 결렬되었으니 화중지역을 굳게 수비하라고 하라.”

    1949년 4월 20일, 심야에 안팎으로 몰린 리쫑런은 허잉친과 상의한 뒤 장즈중에게 지시했다. 난징정부 대표단 명의로 공산당의 최종안을 거절할 것이며 해방군의 도강에도 반대하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국공간의 평화회담은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

    1949년 4월 21일, 리쫑런이 ‘국내평화협정’ 접수를 거절한 다음날이었다. 중국 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 마오쩌둥과 중국 인민해방군 총사령 주더는 전국에 진군 명령을 하달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용감하게 전진하라. 견결하고 철저하게, 그리고 깨끗하게 저항하는 중국안의 모든 국민당 반동파를 섬멸하라. 전국 인민을 해방하고 중국 영토주권을 보위하며 독립을 완성하라.”

    회담이 결렬된 뒤 저우언라이는 베이징반점에서 각 정치세력을 소집하였다. 단체와 민주인사 데표회의를 열고 저우언라이가 보고했다. 난징정부가 화평을 거절했으며 시국의 발전방향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 자리에서 회의 참석자들은 “중공이 제기한 화평방안은 매우 관대한 것이다. 남쪽 인민들도 누가 옳은지 시비를 가릴 것이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들은 또 “인민해방군이 속히 전 중국을 해방하기를 희망한다. 중국 공산당이 이후 각 민주당파와 진정한 합작을 할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평화회담의 여파, 장제스 반대 세력에 명분을 주다

    협상은 결렬되었지만 공산당은 내전을 회담으로 끝내고자 하는 나름의 노력을 선보였다. 난징 대표들이 공산당의 최종안에 동의한 것은 가장 큰 성과였다. 상대방 사절단도 동의했는데 장제스와 리쫑런이 거부했으므로 “부득이 도강할 수밖에 없다.”는 국면이 만들어진 것이다. 리지선, 장란, 황옌페이 등 국공을 제외한 제3세력의 대표인사들이 공산당의 최종안에 동의한 것도 중요한 성과였다. 국공 양당은 이들 ‘민주인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리쫑런은 총통대리로 취임한 뒤 일련의 민주화 조치를 취하였다. 우선 불법화하여 활동이 금지된 사회 정치단체들의 활동을 보장하였다. 장제스 치하에서 수감된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정간된 신문들을 복간하게 하였다. 대표적 민주인사인 리지선과 장동쑨 등을 난징으로 초청하기도 하였다. 이런 조치에 대하여 리쫑런은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그들도 나에게 우호적이었다. 나는 이들의 지지를 얻어 반공 여론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자 공산당은 이들에게 접근하며 내전을 끝까지 치르려는 노력을 더욱 기울이게 되었다.”

    리쫑런이 회고록에 쓴 대로 공산당은 심혈을 기울여 이들 ‘제3세력’들을 끌어 들였다. 공산당은 리쫑런의 노력에 대하여 성명을 내고 “국민당의 위선을 사람들이 모두 깨닫고 있다.”고 혹평하였다. 공산당은 홍콩의 지부에 지시하여 리지선과 궈모로우, 그리고 ‘민주인사’들을 중심으로 성명을 내도록 공작하는 등 중간파들을 끌어들이려 하였다. 또 상하이 공산당 지부에 장란, 황옌페이 등 인사들의 의견을 경청하라고 지사하였다. 결국 중간파들은 대부분 공산당의 입장에 동조하게 되었다. 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실해 보이는데다 리쫑런보다는 장제스가 국민당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민주인사’들은 장제스로부터 지속적으로 탄압을 받아온 반면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 인사들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쌓아왔다.

    이들 민주당파와 무당파 인사들은 적극적으로 공산당에 동조했으며 난징의 회담 대표들을 설득하였다. 마오쩌둥은 회담 전에 리지선(李濟深)과 선쥔로우(沈钧儒) 등 여러 사람을 면담하였다. 마오는 공산당의 복안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였다. 회담기간에도 계속 진행상황을 보고하며 의견을 듣고 난징 대표들과 대화하는 자리를 주선하였다. 4월 2일 난징 수석대표인 장즈중과 회담대표들은 ‘민주인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쑨원 총리의 삼민주의와 3대 정책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공산당은 반제, 반봉건, 반관료자본주의를 실현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손중산의 주장이 일치합니다. 우리가 틀렸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난징대표들은 리지선 등에게 “중공이 다른 당파를 인정합니까?” 하고 물었다. 리지선 등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리지선 등과의 면담은 난징 대표들이 공산당의 최종안을 수용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리지선은 류중룽과 주윈산(朱蘊山) 등을 난징의 리쫑런과 바이충시에게 보내어 의견을 피력하게 하였다.

    그후 인민해방군이 도강하자 난징대표들은 처지가 곤란해졌다. 자신들이 동의한 최종안을 난징 국민정부가 거부한데다 도강까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장제스는 물론 리쫑런 정부에게 배신자로 심판받을 위험이 컸다. 국민정부가 비행기를 보내어 난징 회담대표들을 맞으려 했으나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공산당은 장즈중 등 회담 대표들의 귀환을 적극 만류하였다. 저우언라이는 도강 전날인 4월 20일 밤중에 장즈중과 샤오리즈 등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오쩌둥과 중공 중앙이 난징 대표 모두 베이핑에 남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도 적극 요청하였다. “대표단은 협정을 협의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귀환하면 위험하니 남아 달라.”

    내전 드라마속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주요 역사사건에 대한 중국의 시각

    평화회담에서 공산당은 마오쩌둥의 주도 아래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였다. 중간파들을 설득하여 공산당의 입장에 동조하게 만들었으며 난징 회담대표들을 환대하며 설득작업을 펼쳤다. 국민정부는 회담대표와 정부의 의견이 점점 벌어지게 되었다. 특히 총통 대리인 리쫑런과 광시계 지휘관의 맏형인 바이충시마저 의견 차이를 보였으며 장제스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회담이 결렬된 뒤 평소 국민정부의 앞날에 비관적이던 지휘관들과 당정 고위 인사들의 기의가 잇따랐다. 회담 분위기가 무르익던 1월 하순 푸쭤이가 가장 먼저 공산당에게 베이핑과 군대를 넘겨주었으며 1949년 8월에는 부총통 선거에서 경선했던 청첸과 쓰핑전투의 영웅인 쑨밍런이 ‘국내 화평협정’ 최종안을 인정한다며 기의했다. 청첸과 쑨밍런은 후난성 창사에서 린비아오와 ‘창사 평화협정’을 맺은 뒤 국군 7만 7천명을 이끌고 기의했다. 그해 9월에는 신장성의 국군 사령관이던 타오즈웨(陶峙岳)가 병력 10만명을 이끌고 기의했다. 공산당은 이들 기의가 모두 4월의 ‘국내 평화협정’의 결과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귀순은 내전 상황과 강약이 확실히 갈린 정세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 객관적인 시각일 것이다.

    평화회담을 통해 시간을 벌고 창장을 경계로 ‘획강이치’를 하려던 리쫑런과 장제스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평화회담을 통해 국민정부의 당정군은 모두 혼란에 빠졌으며 오로지 인민해방군의 도강 저지에 운명을 걸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국공내전>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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