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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태사회주의 정치 가능할까?② : "경부고속도로를 태양광 도로로!"
        2020년 10월 06일 05: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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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 창립포럼] 생태사회주의 정치 가능할까?①

    기후위기와 산업자본주의

    기후변화는 오래 전부터 예견되었다.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기후 변화에 관한 유엔 기본 협약(UNFCCC; United Nations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 약칭 유엔기후변화협약)이 맺어지며 기후위기가 전세계적으로 공식화된 지도 거의 30년이 가까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대응이 미뤄진 것은 왜일까?

    일본의 마르크스엥겔스전집MEGA 편집위원회 편집위원인 사이토 고헤이는 저서인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심층 생태학’은 환경보호의 중요성을 전파하는데 효과가 없다. 자연이 인간 존재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생태 운동의 바탕을 이룰 수 없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다음 세대를 위해 환경을 보호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음에도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아래에서 환경 파괴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묻는다.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현재의 환경 파괴 사이에 내재하는 관계를 이해한 이후에야 비로소 더 지속가능한 생산 양식을 구축할 수 있는 구체적인 조건에 대한 탐구가 가능해질 것이다.

    미국의 오리건 대학 사회학과 교수인 존 벨라미 포스터 역시 “사회적·생태적 생산 관계(social and ecological relations of production)가 반드시 변화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12)며, 기후위기의 문제가 자본주의의 생산구조의 문제임을 명확히 한다.

    전 세계적으로 그러하듯이 우리나라에서도 마치 환경 갈등이 환경과 경제의 대립처럼 묘사되기 일쑤였으며, 최근에는 재생에너지 입지 갈등을 보도하며 마치 환경과 환경의 대립처럼 프레이밍 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모든 갈등들은 환경과 경제의 대립도, 환경과 환경의 대립도 아닌, 자본과 삶의 대립이었다. 새만금 반대운동도, 방폐장 저지 투쟁도, 4대강 사업도, 또한, 탈석탄 운동도 모두 그러하다. 새만금의 어민, 부안 주민, 4대강 주변 지역의 농민, 어민 등이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건, 그 공간이 주민들의 삶의 터전임과 동시에 생존의 수단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공간을 빼앗고 난 후 누가 풍요로워졌는가? 경제적인 이익을 미끼로 사람들을 이간질시켜 분열과 싸움을 조장하고 사업 추진 측은 결국 원하는 바를 이뤘지만, 사업을 반대했던 공동체가 파괴되고 삶의 터전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사업에 찬성했던 지역 주민들이 바랬던 장밋빛 미래 역시 결코 찾아오지 않았다.

    에너지 전환과 관련된 기후운동 내부의 논쟁도 ‘화석연료 대 재생에너지’라는 하나의 축으로 바라봐서는 안된다. 재생에너지는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최근 미국의 썬라이즈 무브먼트가 업데이트한 ‘썬라이즈의 정치적 지지(Sunrise Political Endorsements)’(13)페이지에는 지지하는 정치인 명단과 함께 중요한 지지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가장 먼저 제시된 기준은 당선되었을 시 각 지역에서 필요한 유의미한 변화를 실현할 사람들이란 기준이다. 덧붙여 이 변화는 각 지역별로 다른데, 이를테면 ‘석유 산업의 공공 구제 금융에 반대하는 루이지애나의 정치인’, ‘버지니아 주에서 가장 강력한 기업인 Dominion이 개발 중인 파이프 라인에 반대하는 정치인’, ‘미네소타 주에서 100% 재생 가능 에너지로의 빠른 전환을 지원하는 정치인’, ‘기후 문제에 대해서는 적당히 강한 입장을 가지고 있더라도 최악의 화석 연료 꼭두각시 정치인 중 하나와 대결하고 있는 정치인’ 등이다.

    두 번째로, 화석 연료 산업이 아닌 ‘우리’를 대표 할 정치인을 지원한다는 원칙이다. 후보자가 석유, 가스 및 석탄 산업에서 돈을 받을 의향이 있는지 여부는 정치인이 누구의 이익을 대변할 것인지에 대한 상당히 명확한 시험대라며, “석유, 가스 및 석탄 산업의 기여를 거부하고 대신 화석연료 산업의 이익보다 우리 가족의 건강, 기후 및 민주주의를 우선시하는 후보자만을 지지”한다고 기준을 밝혔다.

    세 번째 기준은,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으며, 썬라이즈 무브먼트의 영원한 기준은 우리 지역사회, 공동의 지구와 미래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정치적 힘과 지원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얻어낸 것이며, 과거에 지지했다는 사실이, 더 가치 기준과 정책에 잘 부합하고 헌신적인 후보가 등장하는 경우에도 여전히 지지할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썬라이즈 무브먼트의 정치적 행보는 민주주의와 녹색이라는 가치 모두를 담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석연료 산업과 그에 포섭되어 있는 정치인들이 현재의 적임을 명확히 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적인 기준이 지역사회와 지구의 미래에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렇기에 획일적인 목표나 기준이 아니라 각 지역별로 중요한 이슈가 다르다는 것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생태사회주의 정치는 가능할까?

    탄소 예산과 지구생태용량 초과의 날만 봐도 경제의 규모가 축소될 수밖에 없음은 명확하다.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선택함에 있어, 가치의 재구성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의 삶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을 제대로 치러내기 위해서 인간 공동체와 시스템 자체를 먼저 복원해야 가능할 것 같다.

    최근 폭우와 함께 기후운동 그룹 내에서도 논쟁이 된 임야태양광 문제는 제대로 된 시스템의 부재를 반증한다. 그 논쟁 안에 태양광 발전 확대를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또한, 각종 태양광 괴담 등을 믿는 사람도 없다. 다만 숲을 밀고 추진되는 태양광 사업의 불가피성에 대한 판단 기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 편에서는 태양광의 빠른 확산에 더 무게를 두고, 한 편에서는 숲의 가치와 지역 주민들의 수용성에 더 큰 무게를 둔다. 이 논쟁의 답은 단 한그루의 나무도 태양광을 위해 베어선 안된다와 임야를 없애고 태양광 발전설비를 설치하는 게 탄소배출량 저감을 위해 무조건 나은 방안이다는 양 대립점 사이 어디 즈음에 있을 것이다.

    임야 태양광 규제가 과도하다, 나아가서는 다른 개발사업과 비교해도 역차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도시지역에서도 태양광 사업 허가를 받는 것이 쉽지는 않으며,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충분히 속도를 낼 수 없다는 것이 주요하다. 그러나 임야태양광은 주소비처인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 부당한 부담을 지움으로서 다른 발전시설과 마찬가지로 지역간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 기후변화 적응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야태양광이 정말로 불가피한 것일까?

    여기서는 이 논쟁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그 논쟁이 어쩔 수 없다고 전제하는 조건들을 변화시킬 것을 제안한다. 임야 태양광 논쟁이 있기 바로 한달 전 즈음, 정세균 국무총리는 경부고속도로 개통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경부고속도를 지하화하고 지상 녹지공간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한 편에서는 숲을 없애 태양광 사업을 하며, 이미 도로가 되어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은 막대한 돈을 들여 지하화하고 녹지로 되돌리겠다는 것은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논쟁해야 할 것은 왜 산에 집은 지을 수 있으면서, 태양광 시설은 설치할 수 없는지(14)를 따지고, 태양광 발전시설 설치를 반대하는 주민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고속도로 건설과 지하화에는 막대한 세금을 쏟아 부을 수 있으면서, 태양광 사업에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가가 되어야 한다.

    이에 이런 제안을 하나 하고 싶다. 정부가 나서서 경부고속도로를 태양광 도로로 만들자. 도로는 태양광 발전 시설을 설치하기에 더 없이 좋은 장소다. 도로의 LOS(Level Of Service) 등급을 높이기 위해 절성토 작업이 완료되어 있으며, 완충녹지 덕분에 음영지역이 많지 않다. 또한, 주변으로 소음도 차단되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누릴 수 있다. 주변 부지와 사면까지 활용하면, 더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 실제 사례도 있다. 올해 6월 서울시는 동부간선도로 노원구 상계 8동부터 의정부까지 480m 구간에 태양광 방음터널을 설치했고, 발전설비 용량은 연간 83만 kW(약 300가구 사용량)에 달한다.(15)

    경부고속도로의 전체 길이는 416km에 달하고, 서울-경기 구간만도 70km, 면적으로는 3.8㎢에 해당한다. 설비 비용이 임야에 설치하는 것보다는 분명 많이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와 같은 세상을 전제로 기후위기가 급박하니 건물과 도로보다 더 경제성이 있는 숲에 태양광 발전시설을 짓는 게 불가피하다고 얘기해선 안된다. 세로운 세상에서는 새로운 경제성의 기준이 필요하다. 기존의 경제성을 넘어서는 가치를 지키는 역할은 공공의 영역, 즉 정부가 나서야 한다.

    이현정(2015)은 녹색정치의 전면화를 향한 전망에서 네 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회귀주의가 아닌 생태적인 미래시대로의 전환(반회귀주의/반봉건주의), 시스템의 한계 인식을 통한 능동적인 전환(세대간 분배정의), 녹색과 경제의 대립이 아닌 ‘다른’ 경제로의 전환(반자본주의 녹색노동정치), 지역 자립과 다원적 가치 체계로의 전환(세대내 분배정의) 등이며, 이 네 가지 방향에 모두 부합하는 정치의 다른 이름은 생태사회주의 정치라고 부를 수 있다.

    기후위기가 지금 당장의 문제가 되고, 사람들의 일상이 무너지고 있는 지금, 정부는 더 이상 에너지 전환과 사회의 변화를 시장과 기업에 떠 넘긴채 재벌 대기업을 지원하는 한국형 뉴딜을 고집해서는 안된다. 국민의 힘과 같은 수구 정당이 기본소득을 논하고 있는 재난 시대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태계의 한계를 적극적으로 사고하는 ‘좌파’이면서 동시에 체제의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는 ‘생태주의자’가 되는, 생태사회주의가 그리 먼 얘기만은 아니지 않을까?

    <주석>

    12. https://monthlyreview.org/2019/11/01/on-fire-this-time 

    13. https://www.sunrisemovement.org/endorsements/

    14. 이 또한 정확한 사실은 아니다.

    15. 2020년 6월 18일 YTN 뉴스:

    https://www.youtube.com/watch?v=iTlZZhHdXoQ

    필자소개
    녹색정치LAB '그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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