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장경제와 이별하기
    인류 생존 위협하는 자본주의의 한계
    [평등의 길] "욕망이 아니라 필요에 바탕을 둔 경제"
        2020년 09월 30일 10:5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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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조운동 현장활동가들의 조직 ‘노동자가 여는 평등의 길’의 소식지 9호에 실린 칼럼을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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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경제는 두 가지를 전제로 한다. 자원은 한정돼 있으며, 경제주체는 능력에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같은 자원으로 더 큰 성과를 내려면 능력이 낮은 사람이 아니라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누가 능력이 뛰어난지 어떻게 확인하나? 그래서 자유경쟁과 자유시장이 필요하다. 자원을 시장에 내놓으면 더 비싼 값을 지불하는 자가 가져갈 것이다. 그럼 비싼 값을 지불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무한경쟁에 살아남은 능력자이다. 이들은 경쟁을 통해 능력이 검증됐기 때문에 확보한 자원을 가지고 인류에 유용한 것을 만든다. 그 대가로 능력자는 많은 이익을 얻고 능력이 없는 자는 이들이 만든 성과로 혜택을 입게 된다. 당연히 경쟁의 승리자는 소수다. 사회의 다수는 능력이 없는 패배자일 뿐이다. 가뜩이나 한정된 자원이 능력 없는 이들에게 골고루 돌아가 봐야 결과는 빈곤의 평등일 뿐이다. 이것이 시장경제 논리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평등과 엘리트주의를 합리화한다. 그리고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와 같은 이름이다.

    시장경제 논리가 지닌 허점만으로 책 한 권을 풀어 쓸 수 있다. 경쟁의 승리자가 아닌 재벌2세가 자원을 독식하는 것만 봐도 말이 안 된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시장경제가 여러 결점에도 유일하게 가능한 대안이라는 주장이 옳다고 가정하자. 시장경제의 은총으로 인류가 풍요와 진보를 이뤘다는 주장이 맞는 말이라고 하자. 그러나 21세기의 2할을 마감하려는 지금 우리가 겪은, 겪고 있는 경험은 그런 가정이 타당한지 의문을 던진다. 기후재앙, 감염병의 지구적 창궐, 성장의 한계라는 현실을 마주한 인류가 과연 시장경제체제와 함께, 다음 세기는 고사하고 이번 세기조차 살아남을 수 있을까?

    기후재앙이 된 기후위기

    누구는 54일이라고 하고, 누구는 55일이라고 한다. 올해 장마 기간이다. 어디를 기준으로 잡건 기상관측 이래 최장기간의 장마였다. 기상현상으로의 장마만 따져서 그렇고 바로 이어진 태풍의 연속까지 더하면 6월에 시작해 9월에 끝난 비의 연속이었다. 안 그래도 코로나로 우울한 사회를 더 우중충하게 만들었다. 피해도 컸다.

    50일이 넘는 장마는 한국인이 기후위기의 실체를 처음 경험한 사건이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위기에 관한 전망과 보도가 줄을 이어도 한국인은 남의 나라 이야기 취급했다. 그레타 툰베리는 외신에 나오는 이상한 아이였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일반의 이해는 “지구가 더워졌다더니 왜 눈이 많이 오냐” 수준이었다. 위험은 먹고사는 문제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 여름을 거치고 기후위기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과 위기감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올라갔다. 먼나라 탁상공론이 아니라 내 눈앞의 문제임을 절감했다. 한겨레는 기후변화팀을 공식편제로 꾸렸고 환경운동만이 아니라 진보정당, 노동조합, 사회운동이 기후위기대응을 의제의 윗자리로 밀어 올렸다.

    인류가 이미 회복가능한 선을 넘어버렸는지 아니면 아직 아슬아슬한 기회가 남았는지는 논란 중이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과 해법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원인은 늘어난 온실가스가 부른 온실효과고, 해법은 인류의 탄소배출 감소다. 미국의 트럼프가 딴소리를 해도 이 진단이 틀릴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다. 탄소배출의 감소는 시장경제 논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탄소배출은 산업의 발전, 생산의 증대, 소비의 대중화와 같은 말이다. 지속가능한 발전은 허구다. 파국을 막으려면 산업의 후퇴를 각오해야 한다. 친환경적인 생산과 윤리적인 소비, 기술의 발전도 모두 필요하지만 지구 평균기온의 상승속도를 늦출 뿐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로 돌아가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과학계가 제시한 파국의 임계점까지 앞으로 지구 평균기온 0.5도가 남았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0.5도 상승을 막으려면 인류가 매년 탄소 소비를 7.6%씩 줄여야 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지난 IMF 위기 시절 한국의 탄소소비가 14% 줄었다는 기록이 있다. 거칠게 말하면 절멸을 막기 위해서는 인류 전체가 IMF경제위기 절반 수준의 고통을 앞으로 계속 되풀이해야 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가장 많은 양의 온실가스를 뿜어내는 것은 선진국이다. 선진국이라는 지위를 포기하면서 탄소배출을 줄일 수 있을까? 개발도상국은 선진국의 과오를 용서하고 연대해서 성장을 포기할 수 있을까?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규제할 국제 권력이 존재하는가? 개인들은 소비의 감소 수준이 아니라 지금 누리는 물질소비 총량의 감소를 감내할까?

    쉽게 말해 우리 각자가 오늘 하루 쓴 전기의 총량을 7.6% 줄이지 않으면 우리는 이 별에서 전기를 쓴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올해의 생산이 지난해보다 늘지 않으면 위기가 발생하는 시장경제의 구조에서 소비의 감소는 자원의 절약이 아니라 경제의 고통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고통은 가진 자보다 못 가진 자에게, 선진국보다 저개발국에게 먼저, 그리고 더 강하게 다가온다.

    바이러스로 뒤덮인 지구

    코로나는 진정한 인류 경험이다. 두 번의 세계전쟁도 모든 나라가 뛰어들진 않았다. 대공황은 자본주의에 편입하지 못한 세계에는 영향이 없었다. 코로나야말로 인류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함께 목격하고 경험한 사건이다.

    코로나 이전에도 인류는 감염병의 범유행(팬데믹)을 경험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흑사병(페스트)의 세계 유행은 특히 유럽에서 노동인구의 감소를 불러오고 이것이 자본주의 출현을 앞당겼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시장경제체제가 감염병으로 인해 지구적으로 가동을 멈출 것이라는 상상은 드물었다. 의학, 약학,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발생 자체를 막진 못해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는 그런 자신감을 무너트렸다. 인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저 스스로를 가두거나 속절없이 바이러스를 퍼트리고 있다.

    일등공신은 바로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통합, 하늘의 고속도로,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국경이동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것이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세계로 퍼질 감염의 전달통로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의료의 시장화로 공공의료체계를 무너트리고, 작은 정부론으로 국가의 대응력을 줄였으며, 사회안전망을 꾸준히 해체했다. 감염의 확산이 발생했을 때 이에 대항할 무장을 해제해버린 것이다.

    인류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지금 유행하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뻘인 바이러스가 바로 사스와 메르스의 병원체다. 그러나 어느 제약사도 사스와 메르스의 백신을 개발하지 않았다. 유행이 예상보다 빨리 끝났고, 결정적으로 서구선진국의 발병률이 낮아 백신을 만들어도 개발비조차 못 뽑을 상황, 즉 시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무리를 해서라도 백신을 개발했으면 지금 맨땅에 헤딩하는 상황은 겪지 않을 것이다. 시장경제는 생명과학을 거래와 이윤의 영역으로 만들었고 그 대가를 이제 모든 인류가 치르고 있다.

    지금이라도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이게 또 문제다. 대규모 감염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공공의료, 생계지원과 같은 국가지출을 늘려야 한다. 그러나 코로나로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니 신자유주의가 강요한 ‘긴축’국가는 재정을 늘릴 수가 없다. 악순환이다. 도대체 언제 코로나 상황이 끝날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이것이 인류의 마지막 팬데믹 경험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 유행은 극복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시장경제 체제 아래서 다음 유행을 극복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코로나 상황이 2021년까지 지속한다면 자본주의가 더 버틸 수 있을까? 요즘 서구의 운동진영이 외치는 구호 “자본주의가 바이러스다Capitalism is a virus”는 그래서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일상이 된 저성장

    시장경제 외부의 문제만 쌓인 것이 아니다. 경제체제 내부의 문제도 심각하다. 시장경제는 성장해야만 살아남는 체제다. 그런데 성장이 막혔다. 장기 저성장 세계 경제, 바로 뉴노멀의 시대다.

    시장경제론자에게 성장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다. 경제규모가 커져야 소득도, 일자리도 늘어난다. 인구나 지출이 고정되면 성장의 필요가 덜할 수도 있으나 그런 사회는 어디에도 없다. 경제규모가 그대로인데 경제인구는 계속 늘고 소비수준도 올라가면 사회는 영합경쟁(제로섬)의 지옥이 된다. 그런데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에서 유를 만들 수 없다. 자원이라는 기반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쓸 수 있는 자원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이 전부다. 시장경제론자도 이 자원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유한한 정도가 아니다. 학자들에 따라 계산이 다르긴 하나 대체로 현재 세계 경제의 규모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지구 1.4개가 필요하다고 본다. 말하자면 시장경제는 이미 빚을 내듯 자원을 댕겨 쓰고 있다. 60억 인류가 현재 미국인 평균 수준의 삶을 누리려면 지구 4.8개~5개가 필요하다.

    로마클럽이 성장의 한계를 예언한 것이 이미 40년 전 일이다. 그러나 시장경제 전도사들은 양적 성장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제기하는 목소리에 오히려 세계 경제가 성장해야 제3세계의 발전도 가능하다고 핏대를 세운다. 이들의 논리는 이거다. 경제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서구의 경제는 유지상태로 가고 제3세계만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후퇴한다. 선진국이 성장해야 그나마 제3세계의 발전도 가능하다. 이른바 낙수효과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는 낙수효과는 고사하고 모든 단위의 양극화를 통해 선진국, 상류층, 대기업만 살아남는 전략을 추구했다. 그마저도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통해 더는 지속할 수 없음이 확인됐다.

    장기 저성장 국면에서 당장 시장경제체제가 붕괴하지는 않는다. 양극화는 더 벌어지고 자본은 생명 연장을 위해 새로운 축적의 수단을 찾으려 발버둥칠 것이다. 그러나 성장하지 못하는 시장경제를 하루 더 연장하면 노동자와 빈곤층의 고통은 딱 그만큼 늘어나게 된다.

    노동을 중심에 둔 사회재편

    장하준은 예측은 힘들어도 코로나 위기 이후 각 나라가 경제와 사회를 재조직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위기를 통해 인류가 인간 사회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 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노동의 가치와 사회적 공헌은 그들이 노동 시장에서 받는 보수에 비례한다는 것을 당연시했으나, 이번 위기를 통해 전혀 보수를 받지 않는 가사 및 육아 노동, 의료(의사는 제외), 교육, 식자재 생산과 배달 등의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노동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며, “이들 대부분은 임금이 그리 높지 않은 분야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행하는 노동이 우리 사회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데 얼마나 필수 불가결한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번 위기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공동 운명체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고 보았다. 그는 “미국처럼 복지가 잘 되어 있지 않고 건강권이 약한 나라에서 아파도 휴가를 낼 수 없는 하층 노동자나 플랫폼 노동자들이 어쩔 수 없이 매일 일을 하면서 코로나 19가 확산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적었다. 이번 위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안전하지 않으면 아무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이다(오마이뉴스 인용 omn.kr/1oybf).

    장하준의 전망은 예측이라기보다 충고에 가깝다. 케인즈주의자로서 시장경제 맹신론자에게 던지는 경고이다. 이 정도의 사회재편과 구조개혁 없이는 코로나 이후 자본주의 자체가 끝장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경고다.

    대량소비와 성장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성장 없는 경제의 유지라는 과제를 마주한 인류. 그러나 이제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욕망이 아니라 필요에 바탕을 둔 경제’를 실현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시장경제는 답이 아니다.

    필자소개
    민주노조 현장활동가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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