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 마침내 하야하다
[국공내전-53] 광시계 리쫑런이 총통직 대리하고 장은 대륙철수 지휘
    2020년 09월 16일 11: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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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하이 전역과 핑진전역에서 잇따라 패배하여 장제스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양쪽 전장에서 백만명이 넘는 병력을 한꺼번에 잃은 것이다. 화이하이 전역에서는 자신의 직계 정예 병력을 거의 잃었다. 중일전쟁과 내전에서 용맹을 떨치던 치우칭첸, 황바이타오, 황웨이 등 맹장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으며 동북과 중원을 오가며 고군분투하던 두위밍도 포로가 되었다. 고도 베이핑과 텐진 등 화북지역을 잃은 것은 정치적 아픔이 더 컸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수십만 병력이 해방군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화이하이 전투가 끝난 것이 1949년 1월 10일, 베이핑에 해방군이 입성한 것이 1월 31일이니 장제스로서는 결정타를 잇따라 맞은 셈이었다.

미국은 공공연하게 장제스의 하야와 국공 간의 회담을 표명하였다. 1948년 연말 쑹메이링의 미국 방문은 전혀 효과가 없어서 트루먼의 차가운 시선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중국에 있는 장제스는 더욱 쓰라린 나날의 연속이었다. 1948년 12월 23일, 그는 미국에 있는 쑹메이링에게 전문을 보냈다. “미국이 중국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성명을 내었소. 하지만 대사의 언행을 보면 달라진 게 전혀 없소. 나보고 하야하라고 하니 통분하기 그지없소.” 미국의 태도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1948년 6월, 미국의 주중대사 스튜어트는 미국정부에 중국 원조를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하였다. 그해 10월에는 아예 장제스의 은퇴가 필요하다고 보고하였다. 1948년 12월 스튜어트는 국민정부 관련 인사들에게 중공과 회담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 장제스가 하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징정부의 유일한 출로는 공산당과 회담하는 것이다. 장제스가 하야하는 것이 회담의 전제 조건이다.”

중국 국내에서도 내전 종식과 평화를 향한 열망이 점점 강해졌다. 중공도 회담을 원한다고 밝혔는데 장제스가 하야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공산당이 진실로 평화회담을 원하는지는 시간이 밝혀줄 일이지만 장제스의 하야에는 강력한 지렛대가 되었다. 국민당 안에서는 광시계 특히 부총통 리쫑런과 화중 초비사령관인 바이충시가 공공연하게 장제스의 하야를 요구했다.

좌로부터 허잉친 장제스 바이충시

광시계 인사들, 가운데가 이쫑런이다.

장제스는 1948년 연말부터 하야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해 12월 17일, 그는 리쫑런에게 사람을 보내어 하야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리쫑런의 태도를 보려고 한 것이다. 리쫑런은 분명한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자신이 회담을 이끌며 정치를 주도하겠다는 어떤 의사도 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쫑런은 장제스의 하야를 피부로 느끼고 그 후를 대비해야 하겠다고 판단하였다. 리쫑런은 바이충시와 매일 전화하며 장제스 이후의 정책과 방침을 연구하였다.

미국은 일찌감치 부총통인 리쫑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48년 12월 18일 미국 UPI 통신은 상하이발 기사를 타전하였다. “트루먼은 12월 장제스에게 직접 서신을 보내어 사직할 것인지 계속 집무할 것인지를 물었다.”

광시계, 장제스의 하야를 압박하다

안팎의 압력에 직면한 장제스는 부득이 하야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광시계에게 정권을 넘기고 싶지 않았지만 시세가 불리하였다. 정계에서 은퇴를 한 뒤 적당한 시기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중국 정치의 커다란 특징이었다. 1927년에도 장제스는 정계에서 잠시 물러나 재정비를 한 일이 있었다. 그때 쑹메이링과 재혼하는 등 배후에 재계 인맥을 쌓아두고 다시 권력으로 진출했던 것이다. 그는 은퇴 전에 인사 안배를 하는 등 긴박하게 움직였다. 막후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준비를 한 것이다.

장제스는 심복인 천청을 타이완성 주석 겸 경비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자신의 큰아들인 장징궈는 국민당 타이완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그밖에 푸젠성 주석으로 저우샤오량(朱绍良)을 임명하고 팡티엔(方天)을 장시성 주석으로 새로 임명하였다. 위한무는 광저우 수정공서 주임에, 쉐웨와 장췬을 광둥성과 충칭 수정공서 주임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그래도 국민정부의 동요는 피할 수 없었다. 12월 19일 행정원은 원장인 쑨커를 필두로 “무조건 정전”이라는 결의를 하더니 각국 대사관에 광저우로 이전하라고 통보하였다.

시일이 지나도 장제스는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1948년 12월 24일, 바이충시는 참지 못하고 이른바 ‘해경(亥敬)’ 전문을 발송하였다. ‘해경’이란 12월 24일을 뜻하는 말이다. 해월은 12월을 뜻하고 경일은 24일을 말한다. 바이충시가 한커우에서 장제스에게 보낸 이 전문을 역사에서는 ‘해경’ 전문이라고 한다. 바이충시는 화중 초비사령관이었다. 수십만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어 화이하이 전역과 핑진전역에서 주력을 모두 잃은 장제스에게는 무시 못할 실력자였다.

바이충시의 글씨 책략을 세운 뒤 움직이라는 뜻.

12월 30일 바이충시는 다시 장제스를 압박했다. 이른바 ‘해전’ 전문을 발송한 것이다. “오늘의 형세는 전황이 어렵고 대화도 곤란합니다. 시일이 촉박하니 방심할 수 없습니다. 지략과 성의를 가지고 우방에 알려야 할 것입니다. 공은 나라 밖의 지지와 평화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민중들은 평화를 지지합니다. 상대방이 받아들여 곤경을 벗어난다면 새로운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일거양득이 아니겠습니까?… 시절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빠른 시일내 영단을 내리실 것을 간청합니다.”

1948년 12월 31일 밤, 장제스는 난징의 정계 요인 40여명을 관저로 불러 만찬을 베풀었다. 파티홀은 등이 휘황하였고 성탄절 장식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것이 장제스가 난징에서 베푼 최후의 만찬이었다. 연회는 시종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장제스가 의연히 미소를 띠고 있어 사람들은 더 견디기 힘들었다. 건배할 때 그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연회가 끝난 뒤 장제스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현재의 국면이 엄중하다. 당내 어떤 사람은 평화를 주장한다. 이런 중대한 문제를 말로 하기 어렵다. 글을 준비했으니 원단에 발표할 것이다. 원고를 장췬 선생이 낭독해 주기를 청한다. 그것에 대하여 여기 계신 분들이 의견을 주시기 바란다.”

장췬이 장제스의 손에서 원고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삼년 이래 정치회담을 하였던 것은 평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적 토벌과 반란을 평정해 온 것도 역시 평화를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시국은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해야 하였습니다. 인민들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야 하나 그 열쇠는 정부에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 동포의 정부에 대한 단편적인 희망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의 결정은 완전히 공산당에게 달려 있습니다. 국가가 위기에서 평안해 지느냐, 인민이 화에서 복으로 가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공산당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중공이 평화에 성의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분명하게 표시한다면 정부도 마음을 열어 진심을 다할 것입니다. 전쟁의 중지와 평화의 회복을 위해 구체적인 방법을 상의하기를 원합니다. 국가의 독립이 완성되는 데 해로움이 없다면, 인민들의 휴양과 생업에 도움이 된다면, 신성한 헌법을 위반하지 않는다면, 민주헌정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중화민국의 국체를 확보할 수 있다면, 중화민국의 법통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군대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있다면, 인민들의 자유로운 생활방식을 보장하고 최저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면 평화를 조기에 실현할 수 있다면, 저는 곧 용퇴하여 은거할 것입니다. 이런 점을 명심하여 국민들의 공의에 따를 뿐입니다.” (요약 발췌)

장췬이 장제스가 하야 성명인 ‘원단 연설’낭독을 마치자 실내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장제스가 오른쪽에 앉아 있던 리쫑런에게 물었다. “더린(德鄰) 형(1), 이 원고에 대한 의견이 있소?” 리쫑런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총통과 의견이 다르지 않습니다.” CC계(2)의 구정강(谷正綱), 장다오판(張道藩) 등이 분개하여 외쳤다. “총재는 절대 하야하시면 안됩니다. 반드시 민심이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사기도 떨어져 후과를 수습할 수 없습니다.”

장제스는 정복을 입고 있는 황푸 출신 장교들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장제스는 크게 실망하였다. 입만 열면 “교장”(3)을 찾던 무리들이 가장 중요한 순간 가만히 앉아 만류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구정딩(谷正鼎)(4)이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총재는 절대 하야할 수 없습니다.” 장제스는 구를 바라보며 “나도 떠나고 싶지 않소. 당신들 당원들이 나보고 용퇴하라고 요구하는 거요. 내가 하야한다면 공산당 때문이 아니라 우리 당의 어느 일파 때문이오.”

장제스는 말을 마치자 분연히 일어나 연회장을 떠났다. 사람들이 모두 리쫑런을 바라보았다. 리쫑런은 똑바로 앉아 묵묵할 뿐이었다.

다음날인 1월 2일, 장제스의 ‘원단 연설’이 신문팔이 소년들에 의해 곧바로 알려졌다. 난징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란 것은 물론 외신을 타고 세계 각지를 진동시켰다. 같은 날, 장제스는 리쫑런을 초청하여 대화하였다. “지금 국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떠나기 전 몇가지 안배를 하였소.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승계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오. 당신에게 청하는데 바이충시가 이것을 이해하면 좋겠소. 후베이, 허난 두 성의 참의회가 다시 전문을 발표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그렇지 않으면 민심이 동요하오.” 장제스가 후베이와 허난성을 이야기한 것은 두 성이 광시계의 기반이었으며 바이충시의 영향권 아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신년 첫날, 난징과 상하이 일대에 장제스의 하야가 광시계의 압박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장제스, 하야하다

1949년 1월 21일, 마침내 장제스가 은퇴를 선언했다. 화이하이 전역과 핑진전역의 패배로 장제스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그 전날인 1월 20일은 트루먼이 대통령 선서를 한 날이었다. 그리고 21일 당일은 애치슨이 미국 국무장관으로 취임한 날이었다. 애치슨은 자신의 취임식 날 하야한 장제스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는 사직하기 전에 중국의 외화와 화폐를 모두 타이완으로 가져갔다. 미국의 군사원조 장비도 모두 가지고 갔다. 리장군이 쓸 수 있는 경비도, 사용할 수 있는 군사장비도 남아있지 않았다.” -애치슨 회고록

21일 정오, 장제스는 총통관저에서 군정요원을 불러 오찬을 함께 했다. 그 자리에서 장제스는 하야를 선언하였다. 장제스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군사, 정치, 재정, 외교가 모두 절박한 처지입니다. 인민들의 고통도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소. 나도 대화를 하려는 뜻이 있지만 중공의 독단 때문에 어쩔 수 없었소. 지금 상황에서 나는 은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더린형이 총통직무를 집행하고 중공과 회담을 진행하시오. 나는 5년 안에는 절대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다만 옆에서 협조하겠소. 동지들은 일심으로 더린형을 지지하여 당과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 주시오.”

장제스는 써 가지고 온 ‘은퇴하며 평화를 위해 드리는 글’을 꺼내어 리쫑런에게 서명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 원고가 장제스의 하야 선언이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평화의 목적은 아직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인민의 도탄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공산당을 감화시키고 인민을 구하기 위하여 (은퇴를 선언합니다.- 글쓴이 추가) 중화민국 헌법 제 45조에 ”총통이 직무를 보기 어려울 때 부총통이 대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오늘 21일부터 리 부총통이 총통의 직무를 대행할 것입니다.”

은퇴를 선언한 뒤 장제스는 그날로 난징을 떠났다. 리쫑런과 군정요원들이 장제스를 배웅하려 하였지만 그는 처리할 일이 있고 비행기 이륙시간도 정해지지 않았다며 사양하였다. 장제스의 자동차는 총통부를 나와 곧바로 쑨원의 묘가 있는 중산릉으로 향했다. 그는 쑨원의 묘를 참배하였다. 지팡이를 짚고 쑨원의 조각상 앞으로 가서 세 번 절한 다음 돌아 나왔다. 그는 중산릉에서 난징을 한참 바라보다가 계단을 내려왔다. 장제스는 아들인 장징궈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항저우로 향했다. 그는 고향인 저장성 펑화현 시커우로 돌아가 막후 정치에 들어갔다.

펑화현 시커우 장제스의 옛집 모습

장제스가 떠나자마자 리쫑런은 마오쩌둥에게 평화협상을 타진했다. 이틀 뒤인 1949년 1월 22일, 베이핑 평화협상이 최종 타결되어 고도 베이핑과 수비병력이 공산당에게 넘어갔다. 장제스는 하야를 선언했지만 그는 여전히 국민당 총재이자 국군의 총사령관이었다. 성명에서는 리쫑런이 “본인을 대리하여 집행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그가 실제로 하야했는지 의론이 분분하였다.

쑹메이링, 장제스에게 외유를 권하다

장제스가 은퇴를 선언한 날 , 쑹메이링은 미국에서 장제스에게 전보를 쳤다. “형께서 오늘 고향으로 갔다고 들었습니다. 형의 건강과 안녕이 염려스럽습니다. 누이는 이미 징궈에게도 전보를 보냈습니다. 형과 함께 캐나다로 오시기 바랍니다. 누이는 캐나다에서 형을 기다리겠습니다. 만나서 모든 것을 의논하였으면 합니다.”

전보에서 징궈라고 부른 이는 장징궈였다. 다음날, 쑹메이링은 장제스에게 다시 전보를 쳐서 외유할 것을 권하였다. “형이 환향하셨으니 쉬면서 생각해 보시지요. 형이 나라를 위해 애쓴지 이미 이십여년, 한번도 제대로 쉰 일이 없고 매일 고생만 하셨습니다. 형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안팎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근래 구미 제국들은 군사와 경제, 과학분야에서 일로 맹진하고 있습니다. 형이 이 기회에 외유를 한번 하셔서 안목을 넓히시고 기력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1월 24일 장제스는 쑹메이링에게 답신 전보를 쳤다. “고향에 드니 매우 편안하오. 형은 고향에서 정양하기로 하였소. 한동안 밖에는 나가지 않기로 하였소.”

쑹메이링이 왜 장제스를 형이라고 불렀는지 의문이 생긴다. 쑹메이링은 평소에 장제스를 “달링”으로 불렀다고 한다. 장제스는 쑹메이링을 ‘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셋째 누이’ ‘셋째 아우’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쑹메이링이 세 자매중 막내였기 때문일 것이다.

쑹메이링은 장제스가 외국으로 나가 휴양하며 안목도 넓히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쑹의 생각은 단순하였다. 당시 중국 정국이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한지 깨닫지 못한 것이다. 장제스는 은퇴후 국민정부의 대륙 철수와 당과 정부 그리고 군대의 재정비를 도모하고 있었다. 장제스의 출국은 국민당 내 반장 세력이 가장 원하는 일이었다. 출국만 하면 국민당과 정부, 군대에 그의 연결이 끊기기 때문이었다. 1949년 3월 12일 난징의 ‘구국일보’는 “장제스의 출국 없이 나라를 구할 희망이 없다.”는 글을 게재하였다. 총통 대리인 리쫑런이 원하는 글이었다. 얼마 후 국민정부 회담대표인 장즈중(张治中)이 시커우로 가서 장제스를 만났다. 장제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나를 출국시키려 하고 신문지상에 이미 게재도 하였다. 당신들이 나를 하야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나를 망명시킬 수는 없다.”

1949년 장제스는 대륙 철수를 지휘하느라 분주하였다. 쑹메이링은 미국에서 1년 넘게 기다린 뒤 1950년 타이완으로 돌아왔다. 비로소 장제스와 만난 것이다.

유물과 황금을 타이완으로 가져간 장제스

장제스가 대륙에서 타이완으로 철수할 때 대륙에서 많은 물건을 가지고 갔다. 이 물품들 가운데 가치가 높은 것이 두 종류 있는데 하나는 황금이고 하나는 고궁의 문물이다.

장제스는 일기 가운데 황금에 대한 집착을 선연히 드러냈다. 장제스는 상하이에서 ‘혁명자금’을 모금하고 주식시장 투자에도 열심이었다. 일기에 따르면 장제스는 중앙은행 총재인 유홍쥔(兪鴻鈞) 등과 만났다. 1948년 12월 27일과 29일 두 차례 만나고 1949년에도 1월 4일부터 다섯 차례나 만나 상의하였다.

장제스는 이 회견 내용을 일기에 모호하게 썼다. 그러나 ‘자금의 이동’ ‘외환 및 현금(금궤)의 처리 등 표현이 등장한다. 황금은 푸젠성 샤먼으로 운송했다가 타이완으로 운송하게 하였다. 장제스는 1949년 1월 21일 하야를 선언하고 총통직을 사임하였다. 장제스는 총통 대리인 리쫑런이 이 황금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도록 직접 편지를 측근에게 주어 중앙은행에 보냈다.

장제스는 이 내용을 일기로 썼다. “저우홍타오가 상하이에서 왔다. 중앙은행의 황금 대부분을 이미 샤먼과 타이완으로 운송했다고 한다. 남은 것이 20만량이 채 안되므로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것은 인민들의 피땀이 어린 것이다. 적당한 방법으로 지켜서 소인배(리쫑런을 가리키는 것이다. 글쓴이)가 가볍게 낭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월 10일, 장제스는 자기가 가장 신임하는 큰아들 장징궈에게 황금 운송의 책임을 맡겼다. 장징궈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중앙은행의 금은을 안전지대로 운송했다. 중요한 임무를 마친 것이다.”

해협을 건너간 고궁 문물은 얼마나 되나?

고궁문물은 본래 베이징 고궁 박물원에 안치되어 있었다. 고궁의 역사는 청조가 와해되면서 시작되었다. 고궁이란 말 그대로 ‘옛날 궁전’이며 청조의 황궁인 것이다. 자금성을 성의 박물원으로 개조하였고 그 안에 수장된 물품은 절대 다수가 청조 황제의 소유물이었다.

1925년 고궁박물원이 자금성에 탄생하였다. 그것은 혁명의 상징이 되어 수맣은 백성들이 참관하였다. 1931년 일본이 유조호(柳条湖) 사건이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9.18 사변이라 부르는 만철 폭파사건이 발생하였다.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고 동북 침략에 나설 때 국민정부는 고궁의 문물을 남쪽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1933년 고궁의 문물은 상하이로 옮겨졌다가 난징으로 이송하였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폭발한 뒤 상하이 전투가 격렬해지자 난징도 위태롭게 되었다. 그때 고궁 문물도 중국 서부로 운송되어 쓰촨성 등에 보관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이 문물들은 다시 난징으로 돌아왔다.

장제스는 이 문물을 타이완으로 옮기게 하였다. 대략 3,000상자에 이르는 양이었다. 이 문물은 1948년말에서 1949년 2월까지 세 번에 걸쳐 타이완으로 이송되었다. 본래는 7번 운송할 예정이었으나 대량의 문물을 옮기기에 전황의 악화가 너무 빨랐다. 운송작업이 도중에 중단되어 계속 진행하지 못한 것이다. 고궁의 직원들은 귀중한 문물을 상자에 넣어 하나씩 타이완으로 운송하였다. 중화문명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진품이 허다하였다. 이 진품들이 베이징의 고궁에 있지 않고 장제스가 타이베이에 건립한 고궁 박물원에 있다.

장제스는 전쟁이 가장 격렬한 시기에 군함을 동원하여 이 문물들을 운송하였다. 정치적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역사에서 권력의 계승자는 통상 문물의 계승자였다. 장제스는 이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중국 역사에서 권력은 신흥세력이 구세력을 타도하며 형성되었다. 신왕조가 반복하여 세워진 것이다. 신왕조는 국정을 안정시키는 한편 전왕조의 문물를 그들의 수중에 넣었다. “권력의 정통성은 문물의 확립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이 중화민족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데 장제스도 이 가치에 매우 민감했던 것이다.

타이완에 운송된 물품은 어떤 작용을 하였나?

이 황금과 물품은 타이완으로 철수한 장제스에게 크게 공헌하였다. 국민당 및 다른 자료에 따르면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운송한 금궤는 227만량에 이른다.(1량은 약 37.5그램) 현재의 가치로 2500억위안(2017년 기준)에 이른다. 당시의 가치로는 엄청난 것이었다.

장제스는 일기 중에 이렇게 썼다. 1952년 타이완의 국민당 정부가 예산부족일 때 일이었다. “10만량의 황금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였다. (1월 11일자 일기)” 공산당은 장제스의 행위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중국 인민의 재산을 절도하였다.” 이 황금의 상당 부분은 1948년 8월에 국민정부가 발행한 금원권으로 교환한 것이었다. 그때 국민정부는 민간이 가지고 있던 황금을 금원권으로 바꾸도록 강압하였다. 당시 금원권 1원당 황금 0.22217그램으로 환산하여 교환해 주었다. 그러나 금원권 발행 후 가치가 급격하게 하락하여 1949년 7월에는 유통이 정지되었다. 결국 금원권으로 바꾼 황금은 대부분 타이완으로 운송되었다. 1949년 6월 타이완에서 발행한 새 화폐는 이 황금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담보가 충분하므로 물가와 민심이 안정될 수 있었다. 장제스의 입장에서는 대륙에서 가져간 황금이 타이완에서 재기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군자금이었던 셈이다.

<주석>

1. 더린(德鄰)은 리쫑런의 호이다.

2. CC계란 국민당의 한 파벌로 센트럴 클럽(Central Club)의 약칭이다. 정치, 정보, 군사, 학교등에 광범위하게 포진되어 있었다.

3. 장제스가 황푸 출신들과 대화할 때 자칭 타칭 교장으로 통하였다.

4. 구정딩(谷正鼎)은 국민당 요인으로 조직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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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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