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인 것’은
지배권력이 허용한 한도 내의 것?
[적녹연대] 한국의 시민운동, 여전히 진보적인가
    2020년 09월 13일 12:2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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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는 탈핵과 탈석탄을 천명했다. 집권 초기 청와대는 이런 기조를 강한 어조로 밝혔다. 하지만 탈핵과 탈석탄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 산업통상자원부와 정부정책을 주도하는 기획재정부가 굳건히 시장맹신주의와 개발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탈핵과 탈석탄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탈핵노선에 자신이 없어진 정부는 형식뿐인 공론화에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 여부를 떠넘기면서 정부의 정책적 책임을 회피했다. 슬그머니 탈핵은 정책 의제에서 사라졌다. 탈석탄은 미세먼지 저감 정책의 차원에서 고려될 뿐 적극적인 에너지전환 계획을 제시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에너지 전환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경제패러다임으로의 전환과 민주주의가 결합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정부의 계획과 개입, 다양한 에너지원의 믹스의 단계별 계획 등 매우 복잡한, 그리고 미세한 부분까지 고려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태양광과 풍력을 산업으로만 간주하며 사회 전체의 녹색전환에 필요한 많은 과제들에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한국전력의 시장주의적인 운영방식을 어떻게 개혁할지, 불필요한 경쟁 때문에 자원의 낭비를 초래하는 5개의 발전자회사로의 분할을 어떻게 극복할지, 그리고 주로 천연가스발전부분에 진출한 민간발전업자(대기업)들의 이기적인 행태를 어떻게 통제할지에 대한 계획도 없다. 정부의 관료적인 통제와 시장원리가 왜곡되어 누더기가 된 전력거래시장 제도에 대한 개혁방안도 없다. 고작해야 재생에너지 시장 활성화와 전기자동차, 수소자동차 기술 개발 지원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문재인 정부의 녹색뉴딜이 녹색전환에 턱없이 부족한 변형된 ‘녹색성장전략’으로 전락한 데는 녹색 시민운동의 책임도 크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시장자유주의세력인 민주당과 극우보수정당인 한국당(너무 자주 바뀌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난감하다. 지금의 ‘국민의힘’)은 서로를 진보(심지어는 좌파)와 보수로 호명하면서 허구적인 진보/보수의 대립구도를 형성했다. 실제로는 부동산개발과 토건산업을 통한 이익을 공유하면서 선거정치에서는 허구적인 진보-보수 대립을 부각시켰다. 그 결과는 비판적인 정치세력의 입지를 잠식하는 것이었다. 진보정당을 자처했던 정치세력들은 이 틈바구니 사이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좌파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진보-좌파의 입장을 천명하기보다는 시장자유주의자들의 모호한 진보에 편승함으로써 그들의 ‘사이비’ 진보를 승인하는 역할을 했다.

허구적인 진보-보수 대립 구도에 편승하는 세력들

시민운동진영도 이러한 진보-보수의 허구적 대립에 편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시민운동의 유력한 활동가들은 소위 시민사회가 선거정치에 빨려 들어가는 것을 방조했다. 시민사회는 권력블록의 들러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과거 좌파임을 자처했던 시민운동가들의 ‘전향’은 이념적 지향(목표)과 현실적 수단 사이의 혼란을 초래했다. 한편으로 그들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녹색사회를 열망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과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시장의 힘을 수용하고 그들이 원하는 사회를 가로막는 관행과 제도를 ‘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인다.

경험이 실증하는 사회주의권의 몰락 앞에 자본주의 비판을 포기하는 지극히 경험주의적 태도로 일관하면서 자본주의가 낳고 있는 파국적 사실들에 대해서는 관념적으로 부정한다. 기껏해야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적 증상에 대해서 이런 저런 논평을 할 뿐이다. 한편으로 원하고 갈망하는 사회가 이미 많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윤곽이 제시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가능하게 할 이론적, 기술적 토대가 갖추어져 있음에도 이 또한 애써 외면한다.

녹색시민운동은 공적(public), 공동적(commons), 사적(private)의 의미를 혼동한다. 녹색전환은 공적소유, 공동체적 소유, 사적 소유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녹색시민운동의 핵심 활동가들은 공동체적 소유를 주장하면서 그것을 지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공적 소유에 대해서는 적대적이다. 종종 공동체적 소유를 주장하면서도 시장 기제를 옹호함으로써 시장의 경쟁원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발상은 전혀 새롭지 않다.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와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의 신자유주의 정부가 동원했던 공적 부문 파괴의 근거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많은 나라들이 이러한 논리에 의해 파괴된 공적 부문 때문에 고통 받고 있으며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사회운동의 중요한 목표다. 그런데 한국의 시민운동가들은 녹색전환이 사회전반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오직 재생에너지 부분의 확장만을 생각하면서 시장의 활성화를 외치고 있다. 목표와 수단 사이의 혼동과 괴리는 ‘현실적인’ 수단이 주는 달콤한 이익 앞에 목표를 상실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현실적이지 않다’, ‘실현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하는 이들

녹색 시민운동은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제기하는 급진적 이론들과 애써 거리를 두려 한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급진적 비판이론은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지적하면서 모순의 우발적(contingent) 성격을 강조하고 사회적 과정이 불확정적(uncertain)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속류화된 마르크스주의 결정론과 환원주의를 극복하려 했다. 사회주의는 페미니즘과 생태주의와 대화함으로써 차이와 다양성을 포괄하기 시작했고 생산력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왔다. 그런데 정작 속류화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진보를 표방했던 시민운동은 매우 경직된 태도로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현실적이지 않다’, ‘실현가능성이 없다’는 근거로 비난한다. 이런 관점에서 ‘현실적인 것’은 언제나 지배 권력이 허용한 것일 뿐이다. 지배 권력과 타협하고 권력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는 것만이 ‘현실적인 것’으로 허용된다. 이런 기준에서 ‘현실적이지 않은 것’을 배제하는 것은 다양성과 차이를 부정하는 태도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 대한 상상을 억압하는 것이다.

녹색 시민운동이‘새로운’ 사회운동이기 위해서는 지배 권력이 허용하는 것을 넘어 지배 권력을 비판하는 정치적 의제를 제기해야 한다. 사회가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적대(antagonism)가 명확해져야 한다. 녹색 시민운동은 진보적 정치의 핵심인 이러한 적대의 선긋기를 포기하고 있다. 이제 시민운동은 진보를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할 뿐인 정치인들과의 파트너 관계를 만들고 그들의 지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국가의 자원을 후원으로 제공받는 대가로, 자본주의 원리에 따른 목표 달성을 향해 맹렬하게 질주한다. 목표 달성은 성과를 보여주는 것이고 성과는 수치로 나타나야 한다. 시민운동단체는 예산을 책정 받고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경제학적 패러다임을 강요하는 기획재정부의 기준에 맞추어 사업을 계획한다. 시민운동가는 이런 기준에 따라 계획서를 작성하는 것을 상담하는 컨설턴트가 되어 간다. 비판이 대상이 되어야 할 지배적인 패러다임의 포로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녹색 시민운동이 공적 부문에 남아 있는 발전부문의 해체와 시장을 통한 재생에너지활성화를 주장하는 것은 실효성 있는 기후변화 대응이 마련되고 있는 못한 현실이 초래한 조급성이다. 개혁되어야 하지만 지켜야 할 공적 발전부문을 공격하고 시장친화적인 관행을 강제하고 관료성을 강화하고 있는 정부와 정치인에게는 관대한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관료적 국가(공기업)보다는 시장이 더 낫다는 이미 현실에서 파탄난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시민운동이 옹호하는 것이다. 달콤한 ‘권력의 맛’에 도취되어 한때 가졌던 도덕적 우월성마저 상실한 시민운동은 기후변화에 맞선 녹색사회로의 진보적 전환의 역사적 임무를 직시해야 한다.

필자소개
제주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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