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군, 드디어 베이핑에 입성하다
[국공내전-52] 푸쭤이, 평화회담으로 베이핑 내주다
    2020년 09월 09일 11: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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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군, 베이핑 약법 8장을 발표하다

사람의 마음은 한번 기울면 되돌리기 힘들다. 장제스는 동북에서 웨이리황을 압박하여 선양의 주력을 진저우로 철수시키려고 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베이핑에서는 푸쭤이가 장제스의 남하 지시를 계속 거부하였다. 그것도 대놓고 거부하는 것도 아니어서 장제스는 더욱 애가 탔다. 푸쭤이는 겉으로 장제스에게 공순하였다. 처음에는 베이핑과 화북을 고수하는 것이 전황에 유리하다고 하였다가 나중에는 베이핑과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푸쭤이는 자신에게 철수를 권하는 누구에게도 노골적으로 반박을 한 일이 없었다. 이런 저런 상황을 핑계로 들어 완곡하게 거절할 뿐이었다.

마오쩌둥도 푸쭤이의 입장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푸쭤이가 얼마나 어려운 처지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다그쳐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평화적 담판으로 푸쭤이의 기의를 압박하지만 쫓아 버리거나 망가뜨리면 안된다는 것이 공산당 수뇌부의 판단이었다.

핑진전역 전선사령부의 모습

작전을 숙의중인 해방군 지휘부 좌로부터 네룽전 린비아오 뤄룽환

1948년 12월 22일 인민 해방군 핑진전선 사령부는 약법 8장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각 도시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2. 민족공업과 상업을 보호한다.
  3. 관료자본을 몰수한다.
  4. 학교, 병원과 문화 교육기관을 보호한다. 체육시설 및 기타 모든 공공시설등을 보호하며 누구도 이를 파괴할 수 없다.
  5. 국민당 소속 성, 시, 현의 각급 정부기관의 관원, 경찰및 구와 진 향의 보갑인원중 총을 들고 저항을 하지 않은 자, 음모를 꾸미지 않은 자에 대하여 우리 군은 일체 체포하거나 포로로 잡지 않을 것이다.
  6. 도시의 치안과 사회질서의 안정을 위해 국민당의 모든 패잔병과 탈영병은 우리 군의 당지 경비사령부나 공안국에 투항 신고하라.
  7. 외국 교민의 생명 안전과 재산을 보호한다.
  8. 우리 군이 입성하기 전이나 후에 도시의 모든 시민과 각계 인사들은 사회질서의 유지와 파괴 방지에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 유공자는 상을 줄 것이고 음모자나 파괴분자는 징벌할 것이다.

약법 8장의 발표는 해방군의 베이핑 입성을 기정사실로 한 것이었다. 입성하기 전에 이런 포고문을 발표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푸쭤이,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쓰다.

1948년 12월 23일, 푸쭤이는 붓을 들어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써서 전문으로 보냈다. (괄호안은 필자의 첨가이다.)

           마오 선생에게

  1. 금후 건국의 길은 마땅히 귀측이 맡아야 하며 함께 달성해야 할 정치적 목적입니다.
  2. 인민들을 구하기 위해 전국에 (평화담판에 대한) 전보를 쳐야 합니다. 전투를 중지하고 평화통일을 촉성해야 합니다.
  3. 우리는 군대를 유지하려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정치적 기도도 없습니다.
  4. 일이 잘못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전보를 보낸 뒤에 국군은 어떤 공격행동도 하지 않을 것이며 현상유지를 할 것입니다. 귀측 군대 역시 잠시 후퇴하여 교통을 회복하고 질서를 안정시켜야 합니다. 자세한 문제는 대표를 파견하여 협상으로 해결합시다. (평화담판 및) 조정기간에 무장해제를 하는 것은 책임지기 어렵습니다. 이 단계가 지난 후에 군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모두 선생이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현실을 살펴서 잘 처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선생의 정치적 주장과 풍도를 믿습니다. 전국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12월 23일 푸쭤이

마오쩌둥은 푸쭤이의 전보를 받은 뒤 오히려 신바오안과 장자커우의 푸쭤이계 국군을 섬멸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보기에 푸쭤이는 아직도 엄중한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푸쭤이의 협상 밑천을 털어 버리면 태도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1949년 1월 1일, 중공 중앙은 베이핑 지하당에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1. 현재 전보를 발송하지 마라. 이 전보도 (공개적) 합법적 지위를 얻기 어렵다. 그와 그의 직계는 모두 장제스계의 압박을 받고 있다. 우리는 푸가 생각한 제안을 받기 어렵다. 푸의 생각은 현실에 맞지 않으며 위험하다.
  2. 푸가 반공을 한 지 오래되었다. 우리는 그를 류즈, 바이충시, 후쫑난과 함께 일급 전범으로 선포할 것이다. 그래야 푸가 장제스 직계 군에 대하여 입장이 강화될 것이다. (겉으로) 푸는 이것을 섭섭하게 여겨 계속 싸우자는 쪽으로 갈 것이다.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와 담판을 하려고 할 것이다. 안팎이 잘 호응하여 베이핑을 평화적으로 해방해야 한다. 그러면 푸는 대공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의 전쟁범죄를 사면할 이유가 되고 휘하 부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된다. 베이핑 성안에는 모두 푸쭤이계 직속부대들이다. 모두 무장해제를 하지 않아도 되고 1개군으로 개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3. 푸가 주석에게 전문을 보내어 마오 주석이 이미 받았다. 마오 주석은 푸쭤이가 전보에서 보인 태도가 실제라고 생각한다. 1, 2항의 방법은 실제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여 접수할 수 있다고 본다.
  4. 푸가 담판 대표로 보낸 추이다이즈 선생의 태도는 좋다. 이후로도 추이 선생이 다시 연락을 맡아 쌍방의 의사를 전해도 좋다. 우리는 푸가 책임질 수 있는 대표로 추이 선생과 엔징대학 교수 및 민주동맹 부주석인 장동쑨 선생이 맡기를 희망한다.
  5. 푸씨가 난징에 가지 않는 것이 옳다. 앞으로도 난징에 가지 말아야 한다. 장제스에게 억류될 위험이 있다.
  6. 펑쩌샹은 리지선 선생의 대표이다. 푸쭤이에게 반장 독립을 건의했으며 제3의 노선을 가라고 하였다. 하지만 펑은 중공의 반역자이다. 과거 장제스를 위해 모종의 특무공작을 한 일이 있다. 이 자는 거래를 하려고 하는 것이고 우리 편이라고 믿을 수 없다. 푸씨도 이 사람을 신임하지 않도록 하라.

이런 것을 보면 푸쭤이는 참으로 처지가 어렵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공산당은 푸쭤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장제스와 미국은 어떻게든 푸쭤이와 휘하 부대를 남쪽으로 끌고 가려 하고 있었다. 푸쭤이 휘하 국군도 절대 다수가 장제스의 중앙계였다.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실력행사를 먼저 한 뒤에 회담을 계속하려고 하였다.

1948년 12월 21일, 화북군구 제2병단의 9개 여단이 먼저 포위된 신바오안의 국군에 대하여 공격에 들어갔다. 해방군은 당일로 외곽거점을 모두 소탕했다. 12월 22일 새벽에 성 공격을 시작하여 10시간의 격전 끝에 푸쭤이의 ‘왕패군’인 제 35군과 2사단 등 1만 6천명을 모두 섬멸하였다. 군단장 궈징윈(郭景云)은 자살했다.

장자커우에서도 해방군은 만반의 대비를 갖추고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처음부터 베이핑을 제외한 국군 거점들을 맹공하여 푸쭤이를 압박해갈 계산이었다. 마오쩌둥은 동북 야전군 41군을 이동시켜 장자커우 공격에 가담하게 하였다. 화북 해방군 3개 종대와 동북 야전군 41군 등 해방군 부대가 공격에 나서자 국군은 서쪽 방향으로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해방군은 즉시 추격에 나서 12월 24일 16시에 국군 7개사단(여단) 5만 4천명을 장자커우 동북서쪽 방목지 차오티엔와(朝天洼) 일대에서 섬멸했다. 해방군의 손실은 사상자 900여명이었다. 국민당군은 11병단 사령관 쑨란펑(손蘭峰)이 인솔하는 극소수 기병만 탈출에 성공했다.

신바오안과 장자커우에서 자신의 직계 주력을 잃은 푸쭤이의 충격과 상심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내전 드라마에서 소식을 들은 푸쭤이는 한참 머리를 감싸쥐고 통곡한다. 쑤이위안성 시절부터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던 지휘관과 병사들을 하루아침에 모두 잃은 것이다. 푸쭤이는 울면서 한탄한다. “마오쩌둥, 참으로 대단하구나. 공들여 키운 부대를 하루 아침에 먹어 치우다니.”

장제스, 아들을 보내어 푸쭤이를 압박하다

푸쭤이가 자신의 직계 주력부대를 잃고 의기소침해 있을 때 장제스도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는 베이핑의 푸쭤이 부대를 어떻게든 남하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장제스는 국민정부 군령부장 쉬용창(徐永昌)을 푸쭤이에게 보내어 포위망 돌파를 설득하게 하였다. 쉬용창은 산시성 출신 원로 군인으로 푸쭤이와 막역한 사이였다. 쉬는 푸쭤이에게 두 갈래 길로 포위망을 벗어나라고 설득하였다. 하나는 해로를 통해 칭다오로 가는 것이고 다른 노선은 허베이성을 거쳐 칭다오로 가는 후퇴로였다. 그러나 푸쭤이는 현실적으로 후퇴가 불가능하다며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그러자 장제스는 푸쭤이가 공산당과 회담에 나설 것을 더 걱정하였다. 장제스는 다시 국방부 차장인 정지에민(鄭介民)을 보냈으나 효과가 없었다. 초조해진 장제스는 마침내 둘째 아들인 장웨이궈(將偉國)에게 친필 편지를 들고 푸쭤이에게로 보냈다.

장웨이궈는 독일에 유학하여 육군사관학교학교를 졸업한 뒤 독일군 기갑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귀국 후 중일전쟁과 내전에 참전하였으며 기갑부대 연대장 등을 지냈다. 1948 12월 23일 베이핑으로 떠난 장웨이궈는 푸쭤이를 만나 장제스의 편지를 건네었다. 편지에는 “천군을 얻기는 쉬우나 장수를 얻기는 어렵다.”고 쓰여 있었다. 그만큼 푸쭤이를 신뢰하니 부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라는 것이었다. 푸쭤이는 장웨이궈에게 “우리는 지금 사면초가요. 베이핑 밖이 모두 해방군 천지인데 남하가 가능하겠소? 오직 베이핑과 존망을 함께 하는 수밖에 없소. 총통에게 사정을 잘 보고해 주시오.”하고 대답하였다. 칭다오에 주둔 중이던 미국 해군 7함대 사령관인 벳저(Oscar C. Badger II)도 베이핑으로 푸쭤이를 찾아 자신의 함대로 철수를 돕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푸쭤이는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나는 난징정부의 지방 관리요. 호의는 감사하나 직접 귀국의 지원을 받기는 어렵지요.” 푸쭤이는 남하하여 장제스에게 부대를 빼앗기기보다는 베이핑에 남아 공산당과의 평화회담을 하는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푸쭤이, 회담에 적극적으로 응하다

12월 25일, 마침내 푸쭤이는 장제스와 국민정부를 벗어나 공산당과 회담을 성사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의 결심에는 은사인 류호우통(劉後同)의 권고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중장 계급의 참의이던 류는 푸쭤이에게 간곡히 권하였다. “회담을 성사시켜 베이핑을 전화에서 구하면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게 된다. 그걸로 인심을 얻을 수 있으니 새로운 정치생명을 구하도록 하라.”

그날 푸쭤이는 측근인 화북 초비사령부 정공처장 왕커준(王克俊)에게 자신의 결의를 밝혔다. “나는 목숨을 걸고 이 일을 성사시키겠다. 나의 결심을 부하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죽을 것이다. 이 사실이 장제스에게 알려지면 나를 반역죄로 몰아 죽일 것이다. 일이 잘 되지 않으면 공산당도 나를 전범으로 몰아서 죽일 것이다. 그래도 회담은 계속 할 수밖에 없다.”

12월 28일, 푸쭤이는 바오터우(包頭)로 전용기를 보내어 덩바오산을 베이핑으로 데려왔다. 덩은 화북 초비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쑤이위안성 바오터우에서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덩은 푸쭤이가 깊이 신뢰하는 친구였는데 공산당 인사들과 친분이 깊었다. 푸쭤이는 회담에 관한 일을 주로 덩바오산과 의논하였다. 푸쭤이는 1949년 1월 6일, 자신의 참모인 저우베이펑(周北峰)과 민주동맹 베이핑 책임자인 장동쑨(張東蓀)을 핑진전선 사령부에 보내어 교섭하게 하였다.

1월 7일 열린 담판은 분위기가 좋았다. 린비아오, 뤄룽환, 네룽전, 유야러우 등 핑진전선 사령부 수뇌부들이 모두 출석하여 회담에 대한 공산당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 해방군측은 베이핑 등 국군의 개편방안, 즉 해방군으로 접수하는 방안을 제출하였다. “푸쭤이와 휘하 장교들의 반공 행적을 문제 삼지 않겠느냐?”는 푸쭤이측 질문에 “기의에 참가하는 사람은 이전의 일을 문제 삼지 않겠다. 전범에서 면하는 것은 물론 사유재산도 보호하겠다. 정치적으로 일정한 지위도 보장한다.”는 해방군측 답변이 있었다. 또 해방군은 장자커우, 신바오안에서 붙잡힌 포로들도 석방하여 같은 대우를 할 것임을 언명하였다.

1월 10일, 양측 대표들은 ‘회담기요’를 작성하고 서명했다. 양측 대표들은 서명한 안에 대하여 1월 14일까지 가부 의사를 서로 답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푸쭤이는 이 안을 보고 망설였다. 그는 대표들이 돌아와 회담내용을 보고하자 고개를 흔들었다. “내용이 아직 구체적이지 않다.”

별 표시 지역이 왼쪽이 신바오안 오른쪽이 탕구

핑진전역 상황도 푸른색 청천백일기가 국군이다

해방군, 29시간만에 텐진을 점령하다

1949년 1월 14일, 이날은 해방군과 푸쭤이 간에 회담기요에 동의하는지 응답하기로 한 날이었다. 핑진전선 지휘부는 1월 14일까지 응답이 없으면 즉시 텐진을 공격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1949년 1월 14일, 푸쭤이는 덩바오산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다시 협상에 나서게 하였다. 덩바오산은 저우베이펑과 함께 핑진 전선사령부에 갔다. 협상은 타결 직전이 가장 중요하다. 서로 실력을 바탕으로 협상하는 것이므로 군사적 행동도 가장 첨예하고 격렬하게 진행되는 예가 많다. 핑진전선 사령부 참모장 유야러우는 1월 14일 텐진에 대하여 총공격 명령을 각 부대에 하달하였다. 푸쭤이는 텐진의 국군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전화로 텐진 경비사령관인 천장지에를 불러 며칠만 버텨달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면 자신이 협상에서 유리한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해방군 핑진 지휘부쪽은 텐진쯤은 마음만 먹으면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텐진, 탕구를 놓고 중공 중앙군사위는 원래 탕구를 먼저 공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선 지휘관의 보고를 받고 방침을 변경하였다. 탕구가 동쪽에 바다를 끼고 있고 다른 삼면은 수로와 소금 호수여서 적에 대한 포위가 불가능했다. 대부대가 전개하기도 불리했다. 베이핑, 텐진의 국민당 군대도 포위망을 돌파할 가능성이 있었다. 따라서 전선지휘부는 소수 병력으로 탕구을 감시하고 텐진에 병력을 집중하여 공격하자고 건의했다.

12월 29일, 중공 중앙군사위는 동북 야전군의 작전계획을 승인했다. 그리고 화북 군구 제2, 제3병단과 41군으로 하여금 베이핑 포위를 증원하였다. 1949년 당시 텐진의 인구는 200만명이었다. 화북 최대의 공업도시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텐진은 베이핑과 120킬로 거리에 있었으며 탕구와는 50킬로가 떨어져 있었다. 텐진의 시가지는 좁고 길었다. 하이허(海河)가 시가지를 거쳐 보하이(渤海)만으로 흘러들었다. 텐진은 장기간 공사를 거쳐 방어설비와 진지가 튼튼하였다. 텐진 경비사령부 사령 천장지에(陳長捷)가 지휘하는 62군과 86군 등 10개 사단과 비정규군을 더해 모두 13만명의 수비병력이 있었다. 장비로는 산포, 야포, 유탄포가 60여문 있었는데 동북 야전군의 화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동북 야전군은 5개 군 22개 사단에 특종병까지 합쳐 모두 34만명을 텐진작전에 투입하였다. 장비도 중포 538문과 탱크 30량 등 국군을 압도하였다.

1949년 1월 2일, 각 공격부대가 텐진 주위에 도착하였다. 1월 13일이 되자 외곽 거점 소탕이 완료되었다. 텐진 공략을 지휘하던 동북 야전군 참모장 류야러우가 천장지에에게 투항을 권했다. 창춘 수비사령관 정동궈처럼 무기를 내려놓고 텐진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천장지에는 투항을 결연히 거부하였다. 텐진의 국군 수비군은 북쪽의 병력을 강화하고 남쪽의 공사를 견고히 했다. 그러나 중앙부 병력과 공사는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동북 야전군 지휘부는 동서로 대진하여 허리쪽을 자른 뒤 분할 섬멸하는 작전방침을 수립했다. 부대를 서쪽 집단군과 동쪽 집단군으로 편성하여 동서 양쪽에서 돌격하게 하였다. 일부 부대는 북쪽에서 양공(佯攻)을 맡았다.

49년 1월 14일 텐진을 공격하는 해방군

1월 14일 해방군은 텐진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했다. 500문이 넘는 대포가 40분간 맹렬한 포격을 가하자 수비군 방어체계가 허물어졌다. 공병이 해자에 부교를 설치한 뒤 해방군이 동서 양쪽에서 돌격하자 겨우 한 시간만에 시내까지 뚫렸다. 해방군과 국군 수비군은 격렬한 시가전을 펼쳤다. 국군은 29시간 동안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1월 15일 해방군은 방어하던 국군을 모두 섬멸하고 텐진 전지역을 점령하였다. 수비군 13만명은 전부 섬멸되었으며 경비사령관 천창지에는 포로로 잡혔다. 해방군이 텐진을 점령하자 탕구를 수비하던 국군 5개 사단 모두 5만명이 배를 타고 남쪽으로 도주했다. 둥북 야전군이 추격에 나서 후미 3,000명을 섬멸하고 탕구를 점령하였다.

해방군, 베이핑에 입성하다

텐진이 쉽게 허물어지자 협상에 속도가 붙었다. 푸쭤이가 의지할 군사적 자본을 모두 탕진한 것이다. 중공 중앙도 속전속결로 베이핑 회담을 타결하고자 하였다. 마오쩌둥은 베이핑 회담에서 쑤이위안 문제를 제외하라고 지시하였다. 쑤이위안 때문에 베이핑을 지연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해방군이 텐진을 점령한 다음날인 1월 16일 협상 양측은 ‘베이핑 평화 해결에 관한 초보협의 14조’에 서명하였다. 1월 19일에는 쌍방대표가 베이핑 성안에 있는 화북 초비총사령부에서 18개 조항과 부속 4조등 모두 22개 조항에 합의하고 서명했다. ‘베이핑 평화해결 문제에 관한 협의서’가 바로 그것이다.

공산당과 푸쭤이 사이에 기본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마지막 몇 가지 예민한 문제들이 남았다. 푸쭤이는 초비총사령부는 취소하고 병단, 군, 사단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방안을 중공측에 전달하였다. 즉 자신의 병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안 될 일이어서 중공은 당연히 받지 않았다. 중공은 푸쭤이의 부대를 모두 재편할 것을 통보하였다. 푸쭤이는 다시 연합 판사처를 설립하여 쌍방이 인원을 파견하여 군정 및 기업, 은행, 학교문제를 처리하자고 주장하였다.

마오쩌둥은 1월 15일 린비아오 등에게 “푸쭤이가 연합 판사처를 두자는 것은 우리하고 정권을 나누어 갖자는 것이다.”고 일러두었다. 그래도 중공은 판사처 설립안은 수용하였다. 판사처의 역할은 중공측이 마음먹는 대로 정해질 것이었다. 1949년 1월 29일, 베이핑 연합 판사처 회의에서 중공측 대표인 예젠잉은 푸쭤이쪽 대표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이 기구는 핑진 전선사령부가 지휘하는 사무기구이다. 정권기관이 아니다. 이 기구 명칭은 앞으로 ‘베이핑 연합인수인계처’로 하자.” 이미 부대를 중공측에 넘겨준 푸쭤이가 이를 거부할 힘은 없었다.

장제스도 마지막까지 푸쭤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1949년 1월 21일, 쉬용창은 장제스의 명령을 받고 다시 베이핑에 왔다. 쉬는 푸쭤이와 덩바오산을 찾아 국군 철수에 관한 장제스의 뜻을 전하였다. 푸쭤이는 철수에 관해서는 대답을 흐리는 한편 평화협상에 관한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다. 베이핑과 화북지역을 잃는 것은 커다란 정치적 타격이었다. 그러나 화이하이 전역에서 패배한 후 장제스는 푸쭤이를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미국은 물론 국민당 안에서도 그의 지도력이 약화될 대로 약화되었던 것이다.

1949년 1월 21일, 푸쭤이는 화북 초비총사령부 기관 및 군사령관 이상이 참가하는 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푸쭤이는 베이핑 성내 국군 수비군이 해방군으로 개편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모든 베이핑 수비부대가 성밖으로 나가 개편통고를 받을 것에 관하여”를 전문으로 발송하였다. 협의사항은 국민당 언론 기관인 중양쓰(中央社) 베이핑 지사를 통해 전국에 발표하였다.

1월 22일 푸쭤이는 마침내 협의서에 서명하고 방송으로 발표하였다. 그리고 베이핑 성안의 국군 수비군은 성밖의 지정된 장소로 이동하여 개편에 대비하였다. 1월 31일 수비군 모두가 성밖으로 이동을 완료하였다.

베이핑에 입성하는 해방군

1949년 1월 31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베이핑에서 입성 의식을 거행하고 베이핑이 평화적으로 해방되었음을 선포하였다. 2월 3일에는 치엔먼(前門) 망루에서 인민해방군 입성 의식이 진행되었다. 노동자와 학생, 시민들이 인민해방군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마오쩌둥과 주더의 초상을 앞세우고 장갑차, 포차, 기병대와 보병이 뒤를 이었다. 입성대회에서 주 연설자는 예젠잉이었다. 그는 이미 베이핑 시장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예젠잉은 “우리는 오늘 자유로운 도시의 자유로운 하늘 아래 인민의 위대한 승리를 경축한다.”고 말하였다.

핑진전역 기념관

푸쭤이, 22년간 수리전력부장으로 일하다

핑진전역은 군사적 공격과 정치공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전역이었다. 해방군은 푸쭤이 휘하의 화북 초비사령부 주력과 베이핑은 그대로 둔 채 텐진과 장자커우, 신바오안 등의 외곽을 철저하게 두들겼다. 푸쭤이의 결심을 앞당기는 한편 푸쭤이 부대에 속한 장제스계 중앙군의 기를 꺾기 위해서였다. 창장 이북의 중심도시 베이핑을 얻어 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는 상징성을 더하였다.

2월 22일, 푸쭤이와 덩바오산은 시바이포로 갔다. 그들은 중공 중앙 총사령부에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주더 등을 만났다. 푸쭤이는 마오쩌둥을 보더니 첫마디가 “저는 죄가 큽니다.” 하였다. 마오쩌둥은 웃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 큰일을 했잖소. 인민들이 잊지 않을 거요.” 마오쩌둥은 다시 푸쭤이에게 “포로로 잡은 당신 부하들은 모두 돌려주겠소. 그들을 보고 싶으면 만나시오. 우리는 그들을 고향으로 보내 주겠소.” 푸쭤이는 마오쩌둥에게 사례했다. 마오쩌둥이 다시 푸쭤이에게 물었다. “푸 장군, 당신은 어떤 일을 하고 싶소?” 푸쭤이가 대답했다. “군대에서 일할 수는 없지요. 수리건설쪽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마오쩌둥은 “군대에서 일해도 무방하지만 수리쪽을 원한다고 했소? 수리전력부장으로 일할 수 있소?” 하고 물었다.

푸쭤이는 신중국에서 22년간 수리전력부장으로 일하였다. 그는 싼원샤(三門峽)댐 건설 때에는 황허 모래톱에서 노숙하며 과로하다 심장병이 발작하였다고 한다. 저우언라이가 전용기를 보내주어 간신히 목숨을 살린 일이 있었다. 그는 전국 정치협상회의 부주석과 국방위원회 부주석도 역임하였다. 마오쩌둥과 중공 중앙이 푸쭤이를 매우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오쩌둥은 푸쭤이를 이렇게 평하였다. “당신은 베이징의 대공신이다. 천단(베이징의 고궁 영정문(永定門)안에 세운 제단으로 명 황제가 매년 동지(冬至)날에 친히 천제(天祭)를 봉사(奉祀)하던 곳)처럼 큰 휘장을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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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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