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식아동 조사서’에 담긴 가난의 흔적
[역사의 페이지] 에베레스트보다 높았던 보릿고개
    2020년 09월 08일 10:06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에베레스트는 아시아의 산이다
몽불랑은 유럽
와스카라는 아메리카의 것
아프리카엔 킬리만자로가 있다
이 산들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누구도 뼈를 묻지 않았다
그런데 코리아의 보릿고개는 높다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울며 갔다
굶으며 넘었다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
코리아의 보릿고개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 …..

황금찬 시인의 시 [보릿고개]의 일부이다.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보릿고개를 겪어 보지도 못했고, 심지어 들어보지도 못했을 수도 있다. 보릿고개라고 하면 보리가 자라는 고갯마루를 상상하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전 해에 수확한 쌀은 다 떨어지고 아직 보리가 수확되기까지의 몇달간의 공백기를 보통 ‘보릿고개’라 하는데, ‘춘궁기’라는 말로도 쓰였다. 대략 봄철에서 초여름으로 이어지는 5∼6월경에 해당한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으니 시인이 보릿고개를 에베레스트보다 높은 산이라고 노래한 것은 비극적이긴하지만 매우 실감나는 표현이었다. 이 춘궁기를 견디지 못하고 실제로 많은 한국인들이 고갯마루에서 굶어 죽었다.

얼마 전 브라질 여학생이 집에 홈스테이 한 적이 있다. 그 아이에게 한국에서 뭐가 제일 좋으냐고 물었더니 길거리에서 핸드폰을 자유롭게 들고 다닐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처음에 그 말이 무슨 말인가 했다. 나중에 브라질 수도 상 파울로의 대낮 거리에서 벌어지는 소매치기와 물건 강탈을 담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서야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실제 외국인들에게 한국은 치안이 매우 훌륭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낮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밤에도 큰 걱정 없이 거리를 배회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나라다. 그러나 한두 세대 전에는 우리도 상 파울로의 상황보다는 나았지만 그리 안전한 나라가 아니었다. 길거리와 지하철, 버스에 수많은 소매치기가 있었다. 신문에는 연일 소매치기 소탕을 외치는 정부의 대책이 실리곤 했다. 그 동안 국민 교육 수준이 높아져서인지, CC-TV의 광범위한 설치 때문인지, 정부의 강력한 치안 정책이 주효했던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북한 리스크는 제외하고 우리 사회 내부만 놓고 보자면 매우 안전한 나라가 된 것이다.

그 많고 많은 소매치기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우리들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다만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그 한두 세대 전의 일을 망각하고 있을 뿐이다. 가난과 굶주림도 그러하다. 한국인의 역사를 길게 보면 풍요보다는 가난이 더 일반적이었다. 우리가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한 것도 실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결식 아동 조사서

이렇게 보릿고개와 가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2019년 4월에 수집한 어느 학교의 옛 조사서 한 장 때문이다. 가로 25cm, 세로 18.5cm 크기의 이 문서는 1962년 3월 말 성대국민학교에서 작성된 것이었다. 문서에 실린 표의 제목은 ‘결식아동조사서’로 되어 있다. 성대국민학교는 충남 금산군 추부면에 소재한 농촌 학교이다. 지금은 학생 수가 40여 명밖에 안되는 작은 학교지만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조사서에 의하면 1962년 3월 말 기준으로 당시 전교생의 수는 390명으로 지금보다 10배가 많았다. 이촌향도 현상이 본격화되기 이전이라 농촌 인구가 꽤 많았던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사진] 1962년 3월 말 작성된 ‘결식아동조사서’로 충남 금산의 성대국민학교의 조사이다. (박건호 소장)

이 조사서가 작성되던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한국은 세계 최빈국이었다. 일제 강점기를 겪은 데다가 해방 후 몇 년만에 ‘미니 3차 세계대전급’이었던 한국전쟁으로 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 이런 나라가 부유하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한국은행 통계자료에 따르면 1960년 79달러, 1961년 82달러, 1962년 87달러, 1963년 100달러. 이것이 1960년대 초반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GNP) 수준이었다. 방글라데시, 토고, 우간다, 인도 등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성대국민학교에서 결식 아동을 조사한 1962년은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장군이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던 첫 해였다. 경제개발정책의 효과가 나타나기 전임을 전제하고 조사표를 들여다 보자.

1962년 학기 초인 3월 말에 작성된 이 결식 아동 조사서에는 당시의 궁핍함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성대국민학교 학생 390명 중 1끼를 굶고 2끼만 먹는 학생이 176명, 두 끼를 굶고 1끼만 먹는 학생이 1명으로 합쳐 177명이 하루 세끼 식사를 제대로 못했다는 이야기다. 비율로는 대략 45% 정도이다. 아이들이 이 정도였으니 어른들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과장하자면 전교생 중 거의 절반이 결식 아동이라는 이야기인데, 이 통계는 당시 주변 학교와 비교해서 특수한 것이었을까?

이 자료가 작성되기 5년 전인 1957년 6월 6일자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충청도 지역의 결식 아동 수가 전체 학생의 80∼90%에 이른다는 통계가 보인다. 대부분의 학생이 결식 아동이라는 이야기다. 거기에 비하면 계절적 요인 때문인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경제 사정이 나아진 때문인지 결식 아동 비율은 많이 낮아져 있다. 조사 자료와 비슷한 시기의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당시 성대국민학교가 있던 충청남도의 전체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성대국민학교 통계 조사로부터 10개월 뒤인 1963년 1월 30일자 「경향신문」 기사이다.

결식 아동 10만 여명이나.

충남의 4백 80여개 국민학교의 32만여명의 아동 중 지난해 12월 말일 현재 점심을 먹지 못하는 결식 아동 수가 총수의 3할이 넘는 10만 9백 48명에 달하고 있다… 지역별로 본 결식 아동 상황은 대전의 대흥국민학교의 경우 4천 7백 75명 중 1천 3백 50명이나 점심을 못먹고 있으며 심한 경우는 연기군 연봉국민학교 같은 경우 5백 79명의 전교생 중 6할 이상인 3백 70명이 점심을 못먹고 있다…….

이 신문 기사를 종합하면 사정이 좀 좋은 대전 대흥국민학교의 경우는 28.27%, 사정이 제일 나쁜 연기군의 연봉국민학교는 63.9%였다. 그러니 45% 학생이 결식 아동으로 조사된 충남 금산의 성대국민학교 통계는 아주 특별한 결과는 아닌 것이다. 다른 지역의 사정은 어땠을까?「경향신문」 1963년 4월 26일자 기사에는 경상도 지역 국민학교 결식 아동에 대한 통계 보도가 실려 있다. ‘어린이들에게 심각한 춘궁’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서 경상도 내 전체 학생 527,386명 중 결식 아동은 94,180명(17.8%), 결식 가능 아동은 58,276명(11%)이다. 결식 아동과 결식 가능 아동을 더하면 28.8%, 충청도보다는 사정이 조금 좋기는 하지만 대략 3분의 1 정도의 학생이 제대로 식사를 못하고 학교를 다녔다는 것이다.

다시 성대국민학교!

결식 아동 조사는 학급별로 조사해서 그 수를 합친 것이다. 반별로 결식 아동을 조사할 때는 지금과 같지 않아서 공개적으로 손을 들라고 해서 수를 세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민망하게 보이겠지만 그때는 그게 문제되지 않았다. 워낙 밥 굶는 사람들이 많아던지라 조사하는 교사도 손을 드는 학생들도 그렇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가난은 그들의 ‘친구’이자 자연스런 일상이었으며 좀 불편한 것일 뿐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물로 배를 채우든, 먹을 것이 없어 손가락을 빨든 아이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그들의 생활을 채우고, 우정을 만들고 미래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조사된 결식 학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교육당국도 이렇게 조사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힌트는 이 조사서의 뒷면에서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교직원 1일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사들이 하루 동안 해야 할 들이 깨알같이 인쇄되어 있다. 그러니 실제로는 ‘교직원 1일 생활’이 이 문서의 본 내용이고, ‘결식아동조사서’는 그 이면지에 인쇄된 것이었다. 물자가 귀했던 시절이라 뒷면도 꼼꼼히 활용한 것이다.

‘교직원 1일 생활’의 4번 ‘학습지도(學習指導)’ 항목에는 ‘1교시 종료 후 출결 기입’과 함께 ‘급식자수 기입’이라고 적혀 있다. 또한 7번 항목의 ‘주식(晝食)’ 즉 점심시간에 할 일로 ‘식사 예절 지도’와 함께 ‘급식과 혼식 상황파악·검사’라고 적혀 있다. 그러니까 결식 아동으로 조사된 학생들에 대한 급식이 학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도시락을 제대로 싸올 수 있는 학생들의 경우에는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해 쌀과 보리의 혼식을 계몽하고 검사했다는 것도 동시에 유추해 볼 수 있다.

당시 정부는 쌀 부족 때문에 혼식과 분식을 권장했다. 그래서 도시락 검사로 쌀밥을 싸온 아이들은 선생님한테 혼이 났고, 63년에는 ‘양곡관리법’이라는 법을 제정하여 아예 쌀막걸리 제조를 금지해버렸다. 또한 모든 음식점에서는 밥에 25퍼센트 이상의 보리쌀을 섞는 등 잡곡과 면류를 25퍼센트 이상 혼합해 팔아야 했다. 정부는 부족한 쌀을 아끼기 위해 혼분식이 애국이 길이라는 캠페인을 전개하였고 심지어는 1960년 중반에는 [혼분식의 노래]까지 만들어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197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닌 필자도 이 노래를 배웠고 지금도 가사를 기억하는 걸 보면 이후 상당 기간 보급된 노래로 보인다. 노래가사는 이렇다.

꼬꼬댁 꼬꼬 먼동이 튼다 / 복남이네 집에서 아침을 먹네
옹기종기 모여앉아 꽁당 보리밥 / 꿀보다도 더 맛 좋은 꽁당 보리밥
꿀보다도 더 맛 좋은 꽁당 보리밥 / 보리밥 먹는 사람 신체 건강해

[사진] 1960∼70년대 학급에 게시되었던 혼식 장려 포스터이다. 7:3 비율이면 쌀과 보리의 비율이었을까? 아니면 보리와 쌀의 비율이었을까? 그림을 잘 보시면 답이 보일 것이다. (박건호 소장)

그렇다면 결식 아동들에게 어떤 음식이 제공되었을까? 옛 신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결식 아동에 대한 기사에는 거의 대부분 이 급식 이야기가 같이 실려 있다. 점심시간 급식은 ‘케어(CARE)’라는 국제원조기구에서 제공하는 우유죽과 옥수수가루로 만든 빵이 제공되었다. 당시 신문에는 점심시간에 우유를 단번에 마시지 않고 아껴 먹느라고 숟가락으로 떠먹는 학생들의 사진도 보인다. 이 점심 급식과 관련하여 「동아일보」에는 급식으로 변질된 빵이 제공되어 문제가 된 재동국민학교 이야기가 실려있다. 1964년 3월 24일자 기사로 당시 급식과 관련된 학교 생활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 시내 결식아동과 허약아동에게 급식되는 빵 중 돌덩이처럼 굳어지고 변질 단계에 있는 것이 섞여 있어 어린이 위생관리에 이상을 일으키고 있다. 시내 137개 국민학교 어린이 50만 7천명 중 결식아동과 허약아동 8만 1천여명에게 급식되는 옥수수가루빵 중 23일 하오 시내 재동국민학교 어린이 5백명에게 나누어 준 빵의 일부가 돌덩이처럼 굳어졌고, 냄새가 몹시나 학부형이 시교육당국에 항의 했다……..서울시 교육국은 옥수수가루와 분유를 「케어」로부터 받아 명성제과로 하여금 124g짜리 빵을 만들도록 계약을 맺고 있는데 1개당 제빵 수수료는 41전 8리 8푼이다……

이렇게 전체 학생의 대략 절반이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하고, 국제 원조기구에서 제공하는 빵과 우유를 먹으면서 허기진 배를 채웠던 것이 고작 두 세대 전의 우리 처지였다. 당시 생활수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수집 자료가 있다. 성대국민학교가 아닌 다른 농촌 지역 학교의 ‘각종 통계 조사표’라는 제목이 조사 자료인데 시기는 1960년대로 보인다.

부락별 학생수가 조사된 항목이 있는데 거기 나오는 부락명들을 통해 경기도 안성의 죽산면에 있었던 학교로 추정된다. 이 안성의 어느 국민학교 제3학년 1반 학생 57명은 같은 3학년인데도 9세부터 12세까지 다양한 연령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 통계 자료의 마지막 조사 항목은 ‘가정별 문화 시설 현황’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계 17명, 책상 25명, 신문 (구독) 3명, 라디오 3명, 재봉기 8명, 목욕탕 0명, 전화 0명, 축음기 0명’이다. 시계나 라디오를 문화 시설로 분류한 것도 놀랍지만, 아예 ‘텔레비전’은 조사항목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다. 물론 이 조사표로 그 시대 전체의 생활상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시절의 궁핍함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료로서 손색이 없다.

[사진] 1960년대 경기도 안성의 어느 국민학교에서 조사한 조사 자료로 붉은 색 테두리로 표시한 제일 왼쪽 마지막 부분이 가정별 문화 시설을 조사한 항목이다. (박건호 소장)

가난이 우리 말에 새겨놓은 흔적들

북한의 어느 협동농장에서의 일이다.

두 사람이 일을 하고 있는데, 앞에 가는 한 사람이 밭에 구멍을 내고 가면 뒷사람이 따라가면서 구멍을 흙으로 덮고 있다. 그들의 행동이 이상했던 남한의 방문자가 그 이유를 물었단다. 그랬더니 그들이 대답하길,

“아. 원래 3명이 한 조로 농장일을 하는데, 한 명이 구멍을 내고 앞서 가면 두번째 사람이 뒤따르면서 구멍에 씨앗을 파종하고, 마지막에 가는 사람이 흙으로 그 씨앗을 덮지요. 그런데 오늘 두 번째 작업자가 몸이 아파 결근하는 바람에 우리 둘이서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이다. 이것이 실화인지 아니면 북한의 사회주의 경제 체제의 비효율성을 비판하기 위해 허구로 꾸민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은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의 본질적 의미를 간과한 채, 그냥 습관적으로 행동을 하는 경우가 꽤나 많다는 것이다. 구멍을 내고 구멍을 덮는 행위는 중간에 씨앗을 넘는 행위를 포함해야 온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인데, 파종 행위가 빠져버리니 똑같은 작업이라도 그 일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말도 마찬가지다. 즉 어떤 말이 특정한 상황과 역사를 반영하여 만들어지고 쓰이게 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적 상황은 탈각되고 사람들은 그 의미에 대해 잘 모른 채 그냥 관용적으로 그 말들을 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 혹독한 가난의 역사를 겪어왔던 우리 역사에서는 유난히 가난에서 파생된 말들이 많다. 가난과 굶주림은 우리 말에도 깊은 흔적을 새겨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생활이 점차 풍요로워지면서 그 말들 속에서 가난이 만들었던 본래 의미는 덜 절박하게 변하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의미로 소비된다. 그것이 말의 필연적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그 말들의 유래 정도는 알고 쓰는 것이 어떨까 하여 그런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식사하셨습니까?”, “진지 잡수셨습니까?”

우리의 독특한 인사말이다.

한국인들의 행복을 가장 잘 압축해서 표현한 말이 있다.

‘등 따시고 배부른 것!’

‘등 따시고’라는 말은 추위를 피할 집 하나를 마련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그 집은 우리의 전통 가옥으로 온돌장치를 가진 집이다. 그리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여유 역시 한국인들이 꿈꾸었던 또 하나의 행복이었다. 그런데 이런 말은 그저 나온 게 아니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다수의 한국인들은 굶주렸고, 물로 배를 채우고 초근목피로 허기를 달랬다.

이런 상황에서 그날그날의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했는지를 확인하는 말이 하나의 인사말로 자리잡은 것이다. 하루 하루 생존을 고민하던 시대가 낳은 인사말인 것이다. 곡식이나 찬거리 떨어지니 않고 밥을 해결했는지를 물어보는 인사라니…..

“식사하셨습니까?”

참으로 슬픈 인사법이다. ‘굿모닝’이라는 서양 인사말, ‘곤니치와’라는 일본 인사말, ‘니하오’라는 중국 인사말과 비교해보라. 이렇게 우리에게는 식사했는지의 여부를 물어보는 것이 인사법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식사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인사라고 하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인사법은 그 절박성은 사라지고, 점차 소멸되고 있는 중이다. 나이 좀 먹은 세대 일부만 이 인사의 흔적을 붙잡고 있다. 곧 국어사전에만 남을 것이다.

둘째, 가난을 표현할 때 흔히 쓰는 ‘찢어지게 가난하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에서 생략된 단어가 있다. ‘똥구멍’이다. 그 단어가 별로 점잖치 못하니 그 단어를 보통 빼버리고 쓰니 대다수가 뜻도 잘 모르고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것은 어떤 가난일까? 춘궁기에 한국인들은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1963년 5월 17일자 「경향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보릿고개의 참변

아침에 쑥범벅을 먹은 일가족 5명 중 4명이 중독, 이 중 2명이 사망한 사건이 충북 중원군 상모면 토계리 2반 김운모(41)씨 집에서 발생했다. 지난 9일 앞에서 말한 김씨의 딸 옥선(12)양이 뜯어 온 쑥으로 범벅을 만들어 10일 아침 식사 때 가족 5명이 나누어 먹었는데 4명이 앓다가 11일에 금선(4)양, 13일에는 옥선(12)양이 각각 죽고 나머지 가족은 소생했다. 상모면 서울의원 윤창룡씨의 시체검진결과 영양실조와 관격으로 인한 급성위장염으로 판명됐다.

영양실조 상태에서 쑥범벅을 먹다 일가족 2명이 죽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고작 두 세대 전의 우리 이야기다. 이보다 더한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일제 강점기 기록에는 흙은 파먹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동아일보」 1927년 6월 8일 기사다.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계정리는 빈한한 농촌으로 춘궁을 당하여 초근목피까지 먹어버리고 먹을 것이 없어서 뒷산에서 나는 흰 진흙을 파서 거기다 좁쌀가루를 넣어 떡을 만들어 먹었다.

기근이 들면 풀뿌리 외에도 사람들은 목피(木皮; 나무껍질)도 벗겨 먹었는데, 특히 소나무 속껍질이 대표적이다. 물론 소나무의 겉껍질은 너무 딱딱해서 먹을 수가 없다. 소나무의 속껍질은 다른 말로 송기(松肌)라고 불렸는데, 이 송기에는 탄닌 성분이 많아 먹고 나면 변비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러다보니 변비로 변을 보기도 어려웠고, 또 어렵게 변을 보고 나면 항문이 찢어지는 일이 많았다. 이게 바로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 송기를 먹어야만 했던 시절의 아픈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앞의 세 자를 탈락시켜 우아하게 말을 세탁해 버렸으니 그 정확한 의미는 모른 채, 그냥 가난을 강조하는 관용구처럼 쓰고 있는 것이다.

[사진] 현재는 ‘똥구멍 찢어질 듯 가난’이라는 표현을 줄여 ‘찢어질 듯 가난’이라고 쓰는 것이 일반적이라 원래 의미를 알기 쉽지 않다. (TV화면 캡쳐)

셋째.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는 말이다. 지금 이 말은 보통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쓴다. 죽을 만큼 맛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에도 아픈 역사가 담겨있다. 원래는 그런 의미로 만들어진 말이 결코 아니었다.

조선시대 큰 기근이 들었던 때의 일이다. 어느 부부가 먹을 게 없어 고향을 떠나 유랑민으로 떠돌아 다니다가 어느 부자 양반집에서 죽을 쑤어 공짜로 나누어준다는 소리를 듣고 허겁지겁 그 집으로 가게 되었단다. 며칠을 굶은 아내는 죽을 보기가 무섭게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이 삽시간에 허겁지겁 자기의 죽그릇을 다 비웠다. 그리고 얼핏보니 옆에 앉은 남편이 죽을 남긴 것을 보고 그마저도 끌어당겨 다 먹었다. 그제사 겨우 정신을 차리고 옆에 있던 남편을 바라보았더니 놀랍게도 남편이 죽어 있었다. 오랫동안 굶다가 갑자기 음식을 먹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며 너무 탈진한 때문인지 죽도 얼마 먹지도 못한 채 남편은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다. 아내는 남편이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서 게걸스럽게 자기 배만 채운 자신을 책망하며 남편의 시신을 끌어안고 목이 터저랴 통곡했고, 주변에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들을 매우 불쌍하게 여겼다.

대략 이런 슬픈 이야기에서 파생된 말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도 세월이 지나면서 비참했던 가난의 역사는 탈락하고 어느 순간 ‘너무 맛있어서’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는 말로 변형되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 말 속에 담긴 가난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두 절량민 부부의 굶주림과 그들의 죽음과 통곡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껴야한다. 그게 바로 우리 조상들의 역사이므로.

마지막 “개판이다”라는 말이다. 이 말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에 어긋나거나 질서가 없는 판국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사람들은 개판의 ‘개’를 ‘개(犬)’로 해석해 마치 개 여러 마리가 음식을 차지하려고 다투거나 아니면 노느라고 난장판을 벌인 장면을 연상한다. 그러나 이 말도 원래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한국전쟁의 아픈 역사가 여기에 담겨있다.

[사진] TV 강연 프로에서 ‘개판이네요!’라는 말의 자막을 ‘개(犬)’로 연결시켜 표현하고 있다. 단순히 재미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개판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저렇게 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TV화면 캡쳐)

전쟁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피란 생활로 밥을 먹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그 때문에 피란민 수용소 같은 곳에서는 이 피란민들을 위해 거대한 솥에다 밥을 지어 제공했는데 밥을 나눠주기 전에 사람들에게 크게 소리치는 말이 있었다. 그게 바로 “개판 오분전!”이다. 즉 밥이 거의 다 되었고 이제 솥뚜껑을 5분 후에 열겠으니 준비하라는 뜻이다. 바로 ‘개판’의 ‘판’은 나무로 만든 솥뚜껑이었던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계속해서 걸어서 굉장히 굶주린 상태의 피란민들은 이 소리를 들으면 누구랄 것 없이 배식받기 위해 몰려들어 밥솥 주변이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해서 생긴 “개판 5분전”은 이후 “5분전”이라는 말이 생략된 채 쓰이게 되고, 세월도 흘러 전쟁의 시간도 먼 과거지사가 되어 버리면서 그 정확한 의미 파악이 어렵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처음 ‘개판’이란 말을 듣는 사람이 ‘개(犬)’를 연상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고, 거기서 솥뚜껑을 연상한다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렵게 되어 버렸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우리 역사에서 ‘개판 5분전’과 그 의미가 매우 유사한 표현이 있다. 바로 ‘엉망진창’이라는 말이다. 조선시대 큰 흉년이 들어 줆어주는 사람이 속출하면 조정에서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무료로 죽이라도 끓여 먹이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 ‘진장(賑場)’이라는 구휼장소를 마련하였다. (어떤 이들은 진장이 아니라 진창(賑倉), 즉 백성을 구휼하는 곡식을 보관해두는 창고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장에서 죽을 끓여 나누어 줄 때마다 굶은 사람들이 워낙 많이 모여들어 서로 먼저 죽을 받겠다고 거세게 밀고 당기며 싸우는 바람에 진장은 늘 엉망이 되곤 하였다. 여기서 나온 말이 ‘엉망진장’ 또는 ‘엉망진창’이라는 말로 ‘개판 5분전’과 매우 비슷한 정황을 묘사한 것이다. 조선시대와 한국전쟁이라는 시공간만 다를 뿐이다.

[사진] 한국전쟁 당시 개성지역에서 피란민들에게 배급되는 지원품을 받으러 몰려든 피란민들의 아비규환을 담고 있는 프랑스 주간지이다. 비록 밥을 먹기 위해 몰려든 것은 아니지만, ‘개판 5분전’과 ‘엉망진창’은 저와 비슷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코베이 사진)

어디 이뿐이겠는가? 별로 씹을 것 없는 상으로 식사를 해왔던 탓에 아주 드물게 고기가 밥상에 올라오면 오랫동안 씹어가면서 그 맛을 음미해야했던 데서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고기는 씹어야 맛’이란 말도 그렇고, ‘국물도 없다’는 말도 그렇고…….

또 어떤 말들이 있는지 독자들께서 한번 찾아보시길. 분명 더 많이 있을 것이다.

1970년대의 민중사적 의미

한국현대사 특히 경제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 교과서에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나 ‘경부고속도로 건설’, ‘한일 협정 체결’, ‘베트남전 파병’, ‘새마을 운동’, ‘금융실명제’ 등은 크게 기술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의 기아 극복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너무 가볍게 다루고 있다. 바로 1960년대 말 ‘기적의 볍씨’로 불린 ‘통일벼’의 개발이다. 이 ‘통일벼’는 단군 이래 한국인에 숙명과도 같았던 굶주림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버렸다. 나는 이 통일벼의 개발이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민중 생활사의 관점에서 1970년대는 ‘통일벼’ 하나라도 위대한 시대였다. 통일벼의 개발은 1960년대 경제개발 정책, 한일국교 정상화, 베트남 전쟁 파병으로 인한 베트남 특수 등으로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상황과 시기적으로 맞물리면서 한국인의 경제적 수준을 크게 높히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통일벼 이전에도 벼 증산을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집트에서 중앙정보부가 몰래 들여온 자포니카 벼의 일종인 ‘나다(Nahda)’가 있었는데, 이 품종은 이집트에서 생산력을 높이는 데 큰 성공을 거둔 벼품종이었다. 박정희는 여기에 자기 이름의 ‘희’자를 따서 ‘희농 1호’라는 이름까지 붙였지만, 이집트와 한반도의 기후가 너무 달랐기 때문에 결과는 대실패였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개발된 것이 바로 ‘통일벼’였다.

이 통일벼를 개발한 주역은 육종학자 허문회 박사(1927~2010)였다. 그는 오랜 연구 끝에 1960년대 말 TN1과 유카리, 그리고 IR8을 가지고 삼원 교잡을 통해 다수확 품종 ‘IR667’을 개발했다. 허문회의 IR667 개발 소식은 곧바로 농촌진흥청에 알려졌고, 이는 박정희의 귀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IR667의 개발 소식에 박정희는 곧바로 시험 재배를 지시했다. 그리고 시험 재배 끝에 IR667은 한국에서 잘 자라는 다수확 벼로 확인되었고, ‘통일벼’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후 통일벼는 197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대·보급되었다. 1972년 12월에 새로 발행된 50원 주화에 도안으로 들어간 것도 통일벼였다. 벼이삭이 28개나 달려있는 볏단을 통해 이 통일벼가 다수확 품종임을 드러내고자 했다.

[사진] 1972년 12월 첫 선을 보인 50원 주화의 앞면과 뒷면이다. 비록 통일벼 도안이 1960년대 후반 UN 식량농업기구가 ‘FAO Coin Plan’으로 주요 나라에 농업(특히 식량작물) 소재의 주화 제작을 권장함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지금은 잘 쓰이지 않게 된 이 50원 동전은 통일벼의 화려한 등장을 증언해주는 기념비적인 동전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개발·보급된 ‘통일벼’는 당시 다른 품종들보다 20∼30% 정도 생산성이 높은 다수확 품종이었고, 병해충에도 강했다. 그래서 정부는 이 통일벼를 시장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수매함으로써 신품종 재배를 촉진시켰다. 1976년에 ‘통일벼’의 재배 면적은 전체의 44%로 확대되면서 평년보다 21.8% 증가한 521.5만 톤의 쌀을 생산해냈고, 역사상 최초로 쌀의 자급자족을 달성하게 되었다. 1977년에는 600.5만 톤(4천만 석)의 쌀을 생산했으며, 생산성은 현미 기준으로 헥타르(ha)당 5.31톤으로서 세계 1위에 이르게 되었고, 쌀의 자급률은 113%를 기록했다. 게다가 77년 말에는 남아도는 쌀 7만 톤을 인도네시아에 꿔주기도 했다. 드디어 한국역사상 최초로 쌀의 안정적인 자급자족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를 당시 사람들은 “녹색혁명”이라고 표현했다. 1970년대 한국은 통일벼가 보급된 지 5년 만에 고질적인 식량 부족 문제를 떨쳐내고 식량자급 국가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사진] 농촌 진흥청에 제작한 기념 동판 두 점으로 모두 녹색혁명의 성공을 기념하고 있다. 왼쪽은 1976년에 제작된 것으로 “쌀 혁명의 성공”이라는 뜻의 영문이 크게 박혀있고, 가운데에는 통일벼와 이를 개량한 유신벼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은 1977년 쌀 4000만석 돌파와 1헥타르 당 쌀 생산 세계 최고 기록 달성을 기념하고 있다. 두 점 모두 1970년 중후반의 녹색 혁명을 반영해주고 있다. (두 점 모두 박건호 소장)

1970년대 중반은 한국 역사에서 에베레스트보다 높았던 보릿고개를 극복한 최초의 시기였다. 이는 빈말이 아니다. 당시 신문 기사를 하나 보자. 1977년 6월 15일에 실린 독자 김우평(전남 여수시)의 다음 글은 그런 시대상을 잘 증언해주고 있다. 식량 사정이 좋아진 것을 실감하면서, 그들 스스로 보릿고개를 과거의 일로 추억하고 있다. 역사는 그렇게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국민학교에 다니는 딸애가 신문에 실린 보릿고개의 뜻을 물어온다. 나는 문득 지난 어린시절 수차례에 걸쳐 보고 겪은 보릿고개가 새삼 생각났다. 그때의 참상이 눈앞에 스치고 그때 먹던 초근목피며 해초 밀기울 따위의 깔깔한 맛이 혀끝에 느껴지는 듯하다. 20∼30년전만해도 어쩌다가 가을농사가 흉년이 되면 이듬해 4,5월쯤에는 식량이 바닥이 난다. 소위 절량농가가 한집두집 생겨나는 것이다. 배고픔을 달래려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닥치는대로 먹으며 힘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오직 한가닥 희망, 보리가 하루빨리 영글어 식량이 되어 주는 것이다………

지난해 겨울 심한 한파로 보리가 얼어죽어 봄에 다시 파종한 것이 일기가 아직까지 순조로와 가냘프나마 그런대로 영글어가고 있다. 그러나 수확은 제대로 될 것 같지 않다. 그래도 옛날같이 큰 걱정은 없다. 우리나라도 이젠 식량이 넉넉해서 보릿고개란 단어를 들어본지도 오래인 것이다. 고개 중에서 가장 길고 험해서 넘기 어려운 고개, 보릿고개의 쓰라린 경험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자라나는 우리들의 2세는 우리가 닦아놓은 풍요의 터전 위에서 밝고 건강하게 자랄 것이리라.

통일벼 그 후…….

그런데 이 통일벼는 치명적 단점이 있었다. 밥맛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었다. 통일벼는 일반미에 비해 푸석하고 찰기가 적어 한국인들 입맛에 맞지 않았다. 당시 농촌에는 “보리밥맛이 통일쌀보다 낫다”는 유행어가 돌 정도였다. 이미 개발 초부터 정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전 부처 장관을 소집한 자리에서 ‘미질(米質)보다 먹고 사는 게 먼저’라며 ‘통일벼’의 보급을 주장했고, 허문회 박사는 농촌진흥청의 연구원들과 통일벼의 문제들을 개선하는데 주력하며 그것의 보급을 도왔다. 연구자들은 통일벼가 지닌 단점을 개선하기 위해 후속 품종 개발을 추진했는데, ‘유신’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미질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지는 못했다. 미질도 미질이지만 1978년부터 1980년까지 통일벼는 큰 시련에 봉착했다. 새로 개발한 품종들이 각종 병충해에 큰 타격을 입으면서 농민들의 신뢰를 잃었고, 1980년에는 이상저온으로 인한 전국적 흉작 속 더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농촌 민심을 달래려 했던 전두환의 신군부는 통일벼를 퇴출시켰고, 정부 지지를 잃은 통일벼는 1980년대 후반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완전히 사라졌다.

위에서 살펴본 바 1970년대 중반은 한국사에서 획기적인 시기였다. 그것은 우리가 보릿고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수출 주도의 성장 전략을 택한 남한의 비약적인 경제 성장 결과 북한과의 경제 전쟁에서 북한을 추월한 시기이기도 했다. 학자들은 1975년 혹은 1976년을 분수령으로하여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을 추월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70년대 중반 한국은 보릿고개에서도 벗어났고, 북한과의 오랜 경제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던 것이다.

이런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1977년 1월 12일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식량을 원조할 용의가 있음을 공개 천명했다. 이 회견에서 그는 “최근 외신보도를 보거나 검거된 간첩들의 말을 들으면 북한의 식량 사정은 매우 악화된 것이 사실”이라고 밝히고, “우리 정부는 순수한 인도적 입장에서 북한 동포들을 위해 식량원조를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14년 전의 일에 대한 통쾌한 반격의 의미가 있다. 박정희는 분명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14년 전인 1963년에는 거꾸로 북한의 김일성이 남한 정부에 대해 식량 원조를 제의하였다. 당시는 남한의 경제 상황이 북한에 비해 열악한 상황이었다. 김일성은 1962년 신년사에서 “머지않아 모든 인민들이 이팝(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고래등같은 기와집에 살게 해 주겠다”고 호언했다. 그러면서 내세운 구호가 “쌀은 공산주의다”라는 구호였다. 이런 구호 아래 쌀 증산을 독려하던 김일성은 1963년에는 식량부족에 허덕이고 있던 남한 정부에 대해 식량 원조를 제안한다. 당시 남한은 태풍 ‘셜리’로 인해 농작물이 큰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김일성은 1963년 10월 5일 남한은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들여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달리 자신들은 이미 5∼6년 전부터 쌀을 자급자족하고 있다며 식량원조를 제안했던 것이다. 남북은 1960∼70년대 쌀을 가지고도 치열한 체제 경쟁을 벌였던 것이다.

[사진]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에 식량 원조 용의가 있음을 표방한 연두 기자회견을 보도하고 있는 경향신문. 1977년 당시는 경제력이 북한을 갓 추월한 상황이었고, 이와 같은 대담한 대북 제안은 이런 경제적 성취에 대한 자신감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남북의 ‘쌀 전쟁’은 이후 어떻게 되었던가?

남한은 70년대 이후 쌀은 늘 부족함이 없었다. 지금도 쌀이 남아도는 실정이다. 쌀이 애물단지 취급을 받게되자 급기야 정부는 2015년부터 쌀의 소중함을 알리고 소비 촉진을 위해 8월 18일을 ‘쌀의 날’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생산도 생산이지만 소비 자체가 많이 줄었다. 2019년 기준 우리 국민의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59.2kg에 그쳤다. 1인당 쌀 소비량이 정점을 찍었던 1970년 1인당 쌀 소비량이 136.4kg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43% 수준이다.

이에 비해 북한은 만성적인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다. 그 정점은 1995년부터 99년까지의 대기근이었다. 이를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인한 고립에 연달아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북한은 최악의 식량난에에 빠졌다. 이 가혹한 시기를 1930년대 말 김일성의 항일 활동에 빗대어 위기를 극복하자는 의미로 채택한 구호가 바로 ‘고난의 행군’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굶어죽은 아사자의 수는 수십만 명이었다. 극단적으로 보는 이들은 당시 북한에서 200만 명이 굶어죽었다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한 세대가 멸종했다고도 한다. 200만 명이면 북한 인구의 대략 10분의 1에 해당되는 셈이다. 이와 달리 미국 통계청에서는 1995년에서 2000년까지 경제난에 의해 직간접적 영향으로 사망한 인구를 50만 명에서 6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고, 대한민국통계청은 1996∼2000년 간 아사자 수를 33만 명으로 보고 있다. 정확한 통계야 북한 정권에서만 알겠만 통계 자료를 종합해보면 최소 30만에서 최대 200만 명 사이의 북한 주민들이 대명천지 20세기 말에 굶어죽었다는 이야기다. 남한에서는 쌀이 남아도는데………

지금 현재도 남한은 쌀이 남아돌고 있고, 북한은 연례적으로 식량난을 겪고 있다. 통일은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핵문제나 정치·군사문제는 그것대로 풀어나가면서, 인도주의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해야되는 것이 아닌가? 남아도는 우리의 쌀을 그들에게 주는 것은 어떤가? 이미 체제 경쟁은 끝났다. 국민 총소득은 우리가 북한에 비해 53배, 1인당 국민소득은 우리가 북한의 26배, 무역액은 우리가 북한의 401배, 수출은 우리가 북한의 2489배, 수입액은 북한의 206배이다. 발전 전력량 기준으로는 우리가 북한의 23배이다. (2018년 통계청 발표 기준)

전쟁으로 저쪽 체제를 완전히 말살하는 방식의 통일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면 결국 친선과 평화를 모색할 수 밖에 없다. ‘남북의 밥상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결국 통일의 과정이고 연대와 협력의 과정이다. 차근 차근 상호 신뢰를 쌓는 과정을 밟아 나가야 할 것이다. 허겁지겁 자기 배 채우다가 옆에서 남편이 죽는 줄도 몰랐다는 그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의 그 아내가 갑자기 생각나는 건 왜일까?

결식 아동 조사서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통일벼를 거쳐 너무 멀리까지 와 버렸다.

[역사의 한 페이지]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박건호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