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해 울릉도민의
    닻이 된 신앙공동체
    [그림 한국교회] 저동침례교회
        2020년 09월 07일 09: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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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한국교회가 공공의 적으로 여겨져서 부끄럽고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질곡에서 벗어나 교회다움을 되찾기 위한 결단이 필요한데, 지난 9월 2일자 한겨레신문에서 좋은 글을 발견했습니다. 전정윤 국제부장은 “교회와 하나님의 거리두기”라는 글에서 미국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의 저서 『기독교의 발흥』(좋은 씨앗)을 소개합니다.

    그는 2천년 전 로마제국 변방에서 태동한 미약하기 그지없던 예수운동이 어떻게 제국을 복음화했는지를 사회과학적 방법론으로 분석하여, 기독교인이 1천명이던 주후 40년부터 매 10년간 40%씩 성장, 350년에 3388만 2천명으로 발흥한 배경을 규명하였습니다. 여기서 한국교회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165년부터 로마에 천연두로 추정되는 치명적 역병이 돌았다. 인구 4분의 1 내지 3분의 1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251년 또다시 비슷한 치사율을 가진, 홍역 추정 역병이 로마를 휩쓸었다. 속수무책 재앙 속에서 기독교 교리는 기성 종교에 없던 두 가지를 제공했다. 급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인생에 의미를 부여했고, 무엇보다 ‘행동을 위한 처방’을 제공했다. 스타크는 비기독교인의 눈에 “기독교인의 방식이 효과가 있어 보였다”고 설명했다. 로마의 다른 신들은 제물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여겨졌지만, 죽음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하거나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내세와 천국, 사랑이라는 교리가 없었던 비기독교도에겐 죽음을 무릅쓰고 타인을 치료할 이유가 없었다. 역병이 돌자 병자를 내다버렸고, 매장하지 않은 주검이 쌓여갔다. 천국을 믿고,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교리로 삼은 기독교는 달랐다. 기독교 공동체는 목숨 걸고 병자를 간호했고, 남의 주검을 매장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교리의 차이는 현격한 사망률 격차로 나타났다. 스타크는 “약물을 쓰지 않고도 성실한 간호만으로 사망률을 3분의 2 이하로 낮출 수 있다”는 의학적 설명을 동원한다. 가령 물과 음식만 제공해도 쇠약한 환자들이 사망하는 대신 회복하도록 도울 수 있다. 비기독교도의 사망률이 30%로 추산될 때, 기독교인 사망률을 10%로 가정한 이유다. 병자 간호에 적극적인 기독교인은 초기 발병에서 회복돼 면역력을 보유했을 개연성이 높다. 당시엔 죽음을 불사하는 방역 역량을 발휘하고, 사망률도 낮은 기독교인들이 ‘기적’으로 보였고 개종의 큰 원인이 됐을 것이다.

    목회데이터연구소는 지난 8월 29일,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실시한 종교에 대한 대국민 인식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분석에 따르면 천주교와 불교인은 ‘온화한’, ‘따뜻한’과 같은 긍정적인 이미지가 우세했는데, 개신교인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싶은(32.2%)’, ‘이중적인(30.3%)’, ‘사기꾼 같은(29.1%)’과 같은 부정적 이미지가 컸습니다. 교회에 대한 비난과 분노가 커진 지금은 묵묵히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 점에서 울릉도의 교회들이 110년 이상 뿌리를 내린 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코로나 확산으로 탐방을 포기하고, 저동침례교회 최성환 담임목사께 부탁하여 홈페이지에 있는 사진을 확보했습니다. 교회그림을 그리다가 동해의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넣고 독도도 그렸습니다.

    그림=이근복

    저동침례교회는 1909년 김창규 씨가 울진에서 김종희 전도인을 초청하여 주체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울릉도에 석포교회, 평리교회, 서달교회도 설립되었습니다. 부산에서 사역하던 호주장로교 매견시(J. N. Mackenzie)선교사가 1910년부터 5회 방문해 교회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1913년 4월 그가 남긴 기록에 당시 울릉도 주민들의 상황이 드러나 있습니다.

    “(울릉도에) 7천 명의 조선인과 1천500명의 일본인이 있다. 조선인들은 정말 비참하게 살고 있다. 작년에 들었는데 곡물의 흉작으로 1년에 석 달은 들에 난 야생뿌리와 나물 등을 먹으며 산다고 한다. 그들은 거의 일본 상인에게 빚을 지고 있는데 땅에서 난 모든 수확물을 빚을 갚는 데 다 바친다. 그러면 다음 해의 경작과 생계를 위해 더 많은 빚을 내야 되고, 이런 과정이 반복된다. 조선인은 자기네 땅에서 마치 귀양 온 사람처럼 멀리 떨어져 살게 되니 그들은 위로와 소망을 안겨주는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비참한 식민지 상황에서 도민들이 마음을 기댈 곳은 신앙뿐이었고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입니다. 현 울릉도 41곳의 교회 중 10여 교회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것은 고단한 삶을 신앙으로 이겨내려 했던 당시 도민들의 삶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2005년 인구주택 센서스에 의하면 경북의 복음화율은 11.6%인데 비해, 울릉도는 31.7%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항구에서는 어선이 출항할 때 바다 용왕신에게 고사를 지내는 것이 보통인데, 울릉도는 이런 일이 없는 것은 교회의 영향이 큰 까닭입니다.

    지금 9월에 제가 섬기는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가 기독교고전읽기를 줌으로 진행하여 서울, 부산, 대전, 인천의 목회자들과 본회퍼 목사의 저서 『나를 따르라』를 같이 읽고 있는데, 이 시대에 가장 도전적인 글인 것을 깨닫습니다. 이번에도 강사 강치원 박사의 탁월한 발제문을 받았는데, 5쪽에 인용한 본회퍼 목사의 편지(1944년 7월 18일자)는 코로나19 시대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왜 지탄받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세상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지. 이것이 바로 회개(μετάνοια), 즉 먼저 자신의 곤궁, 문제, 죄, 불안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예수의 길로 몰아넣는 것이지.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메시아적 고난에 이끌려 들어가는 것이 신약성서에서는 다양하게 이루어졌지. … 그들 모두에게 유일하게 공통적인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했다는 것이야. 이것이 ‘그들의’ 신앙이지. 여기서 종교적인 방법은 아무것도 아니라네. ‘종교적인 행위’는 항상 부분적인 것이지만, 신앙은 항상 전체적인 것, 곧 삶의 행위라네.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향해 부르지 않았고, 삶을 향해 불렀지. 그런데 이러한 삶이란 어떤 것일까?”

    (『저항과 복종』, 682-685쪽)

    모두가 힘겨운 시대라서 그런지 함민복 시인의 시 “닻”이 가슴으로 다가옵니다. 저동침례교회는 111년 동안 울릉도 주민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영혼을 지탱하는 닻으로 존재했습니다. 거센 파도에서 배를 꽉 잡아주는 닻처럼, 배의 어부에게 작은 마을에 있는 작은 집이 마음의 닻인 것처럼, 저동침례교회는 앞으로도 계속 닻으로서 진리와 생명이 될 것입니다.

    파도가 없는 날 / 배는 닻의 존재를 잊지도 하지만
    배가 흔들릴수록 깊이 박히는 닻 / 배가 흔들릴수록 꽉 잡아주는 닻밥
    상처의 힘 / 상처의 사랑
    물 위에서 사는 / 뱃사람의 닻
    저 작은 마을 / 저 작은 집 – 한민복, ‘닻’ 전문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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