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전에 죽었지만,
    아직도 반짝이는 별처럼
    [그림책] 『마지막 여름』(토마스 폰 슈테이네커. 바바라 엘린/ 이숲)
        2020년 09월 03일 10: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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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전화

    며칠 전 몸이 불편한 아버지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구십이 가까운 아버지는 ‘이제 네 엄마도 늙어서’ 자신을 돌보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남은 시간을 요양원에서 마무리하고 싶다며 엄마와 상의해서 자신을 요양원에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이미 자신이 들어갈 요양원까지 정해놓았다고 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달리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사무실로 출근했습니다. 사무실 책상에는 여러 출판사에 보내준 신간 도서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 가운데 그래픽 노블 『마지막 여름』을 만났습니다.

    요양원에서

    “그럼 집에 가서 전화할게요, 엄마.”

    “그래. 어서 가거라. 필요한 건 다 챙겼지?”

    독일 어느 요양원에서 딸과 엄마의 평범한 대화가 들려옵니다. 아마도 딸은 요양원 마당에 세워 놓았던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윽고 다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자주 생각한다…. 난 이미 죽었다고. 그리고 이것은 영원이다.’

    양로원에 살고 있는 벤트 부인은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조만간… 시간은 모든 걸 내려놓을 것이다. 하지만 난 요즘 더 자주 예전의 시간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그러면 난 느낄 수 있다. 아직 살아있다는 걸.’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예감한 벤트 부인이 지나온 날들을 돌아봅니다. 누군가의 딸이나 아내나 엄마로서보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랑받고 사랑했던 한 사람으로서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수학 천재 게르다

    벤트 부인의 시간 여행은 학창시절로 거슬러갑니다. 학교에서의 어느 날입니다. 아마도 수학시험을 치른 다음인 모양입니다. 이번에도 ‘게르다’가 수학시험에서 1등입니다. 옛날 세대인 선생님은 남학생들에게 분발하라며 게르다를 칭찬합니다. 친구들은 이런 게르다를 정상이 아니라고 놀려댑니다.

    이어서 벤트 부인의 시간 여행은 그날 밤 게르다의 집으로 옮겨갑니다. 엄마는 게르다가 가져온 수학 시험지를 보고 자신은 숫자엔 젬병인데 딸이 수학 천재라며 놀라워합니다. 심지어 아빠는 아인슈타인과 결혼할 생각이냐며 게르다를 놀립니다.

    하지만 벤트 부인의 시간 여행은 언제나 현재와 겹쳐서 진행됩니다. 웃으며 가볍게 달려가던 수학 천재 게르다는 어느덧 늙고 병든 벤트 부인이 됩니다. 벤트 부인은 보행기를 밀고 요양원 이곳저곳을 헤매고 있습니다. 부인은 자신이 어디를 가려고 방을 나섰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벤트 부인의 목소리, 소녀 게르다의 목소리

    지금 벤트 부인의 목소리는 무겁고 슬픔에 차 있습니다. 늙고 병들고 죽음을 예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시간 여행 속 소녀 게르다의 목소리는 밝고 유쾌하며 희망에 차 있습니다. 소녀 게르다는 어리고 총명하고 기대되며 앞날이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여름』은 희망찬 과거의 목소리와 절망 끝에 서 있는 현재의 목소리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독자의 가슴에 감동을 일으킵니다. 독자는 소녀 게르다와 함께 웃고, 벤트 부인과 함께 울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소녀 게르다와 벤트 부인의 목소리가 하나로 만나게 됩니다. 누구나 어린 나의 목소리와 지금 나의 목소리가 만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별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태양은 8분 20초 전의 태양입니다. 태양의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데 8분 20초가 걸리기 때문입니다. 1광년은 빛이 1년 동안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만약 우리가 1억 광년이 떨어진 별을 보고 있다면 그 모습은 이미 1억 년 전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고 합니다. 언젠가 별이 된 우리 영혼의 빛을 멀리 있는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별이 되어 우주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우리는 영원을 체험할지도 모릅니다.

    벤트 부인의 시간 여행을 함께 하면서 저는 아버지의 시간 여행을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시간 여행 속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고, 어머니가 있고, 저와 형제들과 손녀와 고양이가 있을 겁니다. 물론 무엇보다 소중한 아버지의 꿈과 사랑이 있겠지요.

    결국 벤트 부인의 삶, 아버지의 삶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삶을 영원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함께 나눈 사랑의 추억입니다. 벤트 부인의 삶도, 아버지의 삶도 헛되지 않습니다. 추억 속에 담긴 사랑의 에너지가 우주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도 우리가 만든 사랑의 추억은 별이 되어 누군가에게 희망을 전할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죽었지만, 아직도 반짝이는 별처럼.

    필자소개
    세종사이버대학교 교수. 동화작가. 도서출판 북극곰 편집장. 이루리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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