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궁화=일본꽃'이란 주장을 비판한다③
    [푸른솔의 식물생태] 『두 얼굴의 무궁화』 단상 세 번째
        2020년 09월 03일 10: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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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 회의 글 ‘무궁화=일본꽃’이란 주장을 비판한다 1편 / 2편 

    무궁화가 ‘나라꽃’이라는 과잉된 이데올로기의 껍질을 벗고, 식물로서 우리의 역사에서 부딪겼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조속히 성찰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사진1. 무궁화(경기도)

    ​8. 일본이 한반도에 암암리에 무궁화를 심었다고?

    (식물사에 대한 무지와 왜곡)

    (1) 서론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는 말한다. “영국은 미국 동부 13개 식민지와 캐나다 영국령에 자국의 나라꽃 장미를 이식했다. 현재 미국의 동부 뉴욕주와 조지아주, 캐나다 앨버타주의 주화(州花)는 장미다. 프랑스도 캐나다 프랑스령에 자국의 문양 백합을 이식했다. 현재 캐나다 퀘벡주의 주화는 백합(Madonna lily)이다. 부상(扶桑=무궁화나무)국 일본도 한국에 자국의 혼네(本音)의 나라꽃 무궁화를 이식했다. 현재 한국의 나라꽃은 무궁화다.”(p.176)

    ​맞다. 제국주의는 자국의 문화를 식민지에 이식시킨다. 꽃도 그 문화의 하나이므로 제국주의 본국이 좋아하는 꽃을 식민지에 이식하는 일은 흔했고,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고 그 꽃이 무엇인지도 다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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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두 얼굴의 무궁화』 저자의 주장과 달리 옛 문헌상의 부상(扶桑)은 현재의 하와이무궁화(Hibiscus rosa-sinensis)를 말하며, 무궁화(Hisbiscus syriacus)와는 전혀 다른 종의 식물이라는 점을 앞서 살핀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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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2. 동아일보 기사, 「창경원 야간공개」, 『동아일보』(1930.4.10.) 2면 중에서

    ​그 꽃은 다름아닌 일본이 실질적으로 나라꽃(국화)로 인식하는 벚꽃(쇼메이요시노자쿠라=일본왕벚나무)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왕이 기거하던 창경궁에 사쿠라를 심고 그것을 일반인에게 공개해서 봄마다 벚꽃놀이를 벌였으며 전국의 고적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꽃이 무궁화라니? 도대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에 반하는 그러한 주장을 펼치는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얼굴의 무궁화』 전체를 통틀어 일제가 한반도에 무궁화를 식재(이식)했다는 근거(인용 문헌)를 달아 기록한 것은 책 전체에서 5곳으로 파악된다. 하나씩 살펴보자.

    (2) 논거(인용문헌)에 대한 검토

    <논거1>

    [두 얼굴의 무궁화] “야마구치(山口)에서 (한국으로) 무궁화를 이식했지만, 잘 자라지 않고 시들어 버렸다. 무궁화는 간단한 꽃이지만 토양이 맞아야 한다. 무궁화는 일본에 한한다.*각주150) – 松原益太,『小學植物敎材硏究』, 1935(p. 182)

    *각주150) 山口から ムクゲを したが, うまく育たず. 枯らしてしまった. ムクゲ, 簡単な花てすが, 土が合わんかったんでしよう. ムクゲは日本に限ります. 松原益太,『小學校植物敎材硏究』, 1935, 126쪽 (p.406)

    무궁화라는 식물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무궁화는 중국 남부가 원산으로 알려져 있지만 온대 지역 전체에 잘 자라기 때문에 동북아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북미 대륙에도 적응을 잘하는 식물이기도 하고, 국내에서도 노지에서 씨앗의 자연적 발아가 매우 잘되며 가지를 꺾어 삽목하는 방식으로도 쉽게 잘 자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신화(神花)로 여기는(?) 무궁화를 한반도에 이식을 시켰다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일본어 원문, 그에 대한 번역문 그리고 그 출처를 *각주150)과 같이 밝혀 놓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松原益太,『小學校植物敎材硏究』, 東京 培風館(1935)는 한반도에 식물 이식이나 한반도 식물 분포와 파악을 위해 작성한 책이 아니다. 일본 소학교에서 식물을 가르칠 때 학습 범위에 포함시켜야 하는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에 무궁화를 비롯한 일체의 식물을 이식하는 내용은 당연히 포함되어 않았다.

    또한 松原益太,『小學校植物敎材硏究』, 東京 培風館(1935)에는 일본의 소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 식물의 내용 중에 ムクゲ(무궁화)를 아예 목록에 포함시키지도 않았다. 저자가 인용한 p.126은 콩의 일종인 ソラマメ(蠶豆: 잠두)에 관한 내용으로 ムクゲ(무궁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용 전체를 살펴보아도 무궁화에 관한 내용은커녕 언급조차 없었다. 거짓의 인용으로 마치 일제가 한반도에 무궁화를 이식하는 작업을 했는데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처럼 기술한 것이다. 이 문헌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비치되어 열람이 가능하므로 궁금하신 분들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3. 松原益太,『小學校植物敎材硏究』, 東京 培風館(1935); 국립중앙도서관 보관 목차 안내

    <논거2>

    [두 얼굴의 무궁화] ‘대일본제국’은 선배 제국주의 대영제국이나 프랑스제국의 본을 받아 자국의 혼네 나라꽃 무궁화를 식민지 한국에 이식하기 위해 갖는 애를 썼다. 한반도 강점 초기 조선총독부는 헌병과 일본인 관리를 동원하여 암암리에 마을 입구마다 무궁화를 심었다.*각주 151) (p.182)

    *각주151) 佐佐水正太, 『朝鮮の實情 』, 帝國地方行政學會, 1924, 133쪽(p.405)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무궁화를 한반도에 헌병과 일본인 관리를 통해 몰래(암암리)에 식재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상식에 조차 부합하지 않는 황당한 이야기이다.

    – 일제강점기 이전에 이미 한반도에는 무궁화가 상당히 식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이를 식재할 이유가 없었다. 19세기 초에 정약용은 자신의 고향인 마재마을(현재 경기도 남양주)에서 생울타리로 식재된 무궁화를 소재로 하여 시를 짓기도 했고(후술 참조), 서유구가 저술한『임원경제지』(1842년 저술 추정)는 무궁화의 재배법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 일제는 이미 우리의 국권 찬탈하여 벚꽃(사쿠라)를 자신의 마음대로 식재했는데 무궁화는 왜 몰래 식재해야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뜬금없는 주장이다.

    – 일제는 식민지 초기부터 조선총독부 산하의 산림과와 영림창 등에서 조선에서 행해지는 수목의 식재와 관리를 전문적으로 다루도록 했고, 1922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직속기관으로 ‘임업시험장’을 정식으로 설치하여 이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산림과나 임업시험장을 통하지 않고 헌병과 관리가 동원되었다는 주장은 일제강점기의 식민통치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 것에서 비롯한 주장이다.

    – 무궁화는 관목이기는 하지만 높이 3~5m까지 자라는 목본성(나무) 식물이다. 그러한 무궁화를 마을 입구에 몰래(암암리)에 식재했다는 상상 자체가 망상에 가깝다.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가 근거로 제시한 1924년에 저술된 『조선의 실정(朝鮮の實情) 』은 조선에 파견된 일본인 관리 사사키 쇼타(佐佐木正太)가 자신이 조선에서 온 때로부터 1924년까지 기간 동안의 조선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자연에 대해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을 일본인들에게 전달해서 식민지 조선을 보다 잘 통치하려는 목적에서 쓰인 책이다. 따라서 일본인의 한반도 무궁화 식재에 관한 내용이 실릴 여지가 없는 책이다.

    사진4. 佐佐木正太,『朝鮮の實情』, 帝國地方行政學會(1924)

    그가 인용한 p.133은 ‘神敎'(신교=종교)에 관한 것으로 무궁화와 관련이 없다. 문헌 전체에 무궁화의 ‘무’자도 보이지 않으며, p.119에는 임산물(林産物)에 대해서 적고 있지만 무궁화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 책을 개요라도 살펴보았다면 이 책에 『두 얼굴 무궁화 』. p.182에 기록된 내용이 있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도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고 방문하면 언제든지 열람과 등사가 가능하다.

    무궁화에 대한 왜곡도 문제이거니와 『두 얼굴의 무궁화』는 이 과정에서 일제의 식민 지배의 교묘함을 고발하는 듯하지만, 실제 내용은 우리 민족 전체를 모욕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가 있다. 마을 입구에 모르는 나무가 심어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우리 민족 모두를 그저 바보 무지렁이로 취급하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모두 눈먼 장님이었단 말인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무가 식재되고 있는데 그것에 항의하지도 제거하지도 않았다는 말인가? 심지어는 그러한 내용을 기록하지도 않아 그 내용이 하나도 남아 있지도 않다는 것인가?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가 우리 민족 전체를 얼마나 우스운 존재로 보는지는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하는 주장하는 것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또한 1919년 3.1 운동의 여파로 시작된 ‘문화통치’ 이후 일제는 무궁화 정책 역시 ‘문화적’으로 전환했다.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무궁화를 심는 대신에 한국인의 손으로 무궁화를 심게 하는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남에게 시켜서 누굴 죽인다는 차도살인(借刀殺人) 책략을 구사했다.”(p.184) 일본이 그러한 책략을 구사했으면 조선인은 꼭두각시처럼 그렇게 따라가서 그렇게 실현되었는가?

    아니, 바로 직전까지 낯선 식물이 마을 입구에 몰래(암암리)에 심어졌는데 이제는 낯선 식물을 마치 우리의 나라꽃으로 인식하고 일제가 의도하는 대로 바로 자기 손으로 심기 시작했다면 도대체 우리 선조들은 바보 무지렁이에다가 간도 쓸개도 없는 존재라는 말인가? 이것은 그나마 왜곡된 근거(문헌 출처)조차도 없이 주장만 있다.

    <논거3>

    [두 얼굴의 무궁화] 그리고 차령산맥 이남에서만 재배 가능했던 무궁화를 조선총독부 식산국을 중심으로 영림청, 권업모범장, 농업시험장(농촌진흥청의 전신), 수원고등농림학교(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의 전신) 등 총독부 산하의 기관들의 연구와 보급 노력으로 황해도 이남까지 무궁화 재배가능 북방한계선을 확장하도록 품종을 개발했다.*각주152) (p.183)

    *각주152) 小田省吳, 『施政 30年史』, 朝鮮總督府, 1940, 174~175쪽. (p.406)

    여기서『두 얼굴의 무궁화』의 주장은 구한말 이전까지 차령산맥 이남 지역에서만 무궁화 재배가 가능했는데 일제가 무궁화 보급을 위해 품종 개발을 해서 재배의 북방한계선을 황해도 이남까지 확장했고, 그 내용이 조선총독부가 1940년에 편찬한 『시정30년사』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우리의 옛 문헌에서 나타나는 식물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할 수 없는 것이다.

    ​- 정약용(1762~836)의 『여유당전서』에는 1820년대 초반경 유배지에서 풀려나 그의 고향 마재마을(경기도 남양주)에서 울타리용으로 식재된 무궁화(槿花)를 시로 지어 기록한 바 있다.

    – 유박(柳璞, 1730~1787)은 황해도에서 기거하면서 『화암수록』(18세기 말)에 화훼식물로 무궁화(蕪藭花)에 대해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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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두 얼굴의 무궁화』, pp.282~283는 정약용의 한시 『송파수작』(松坡酬酢)에서 울타리용으로 식재된 무궁화(槿花)에 대한 언급을 왜곡하여 마치 무궁화를 비하한 것처럼 인용하면서, 해당 한시가 전라남도 강진의 유배시절에 적혀진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松翁'(송옹)과 ‘淞翁'(송옹)으로 기록된 그의 벗 윤영희(尹永僖, 1761~1828) 사이의 교류과정에서 저술된 『송파수작』의 연작시는 1820년대 즉, 그가 유배시절을 마친 1818년 이후에 저술된 한시들이고, 정약용은 당시 그의 고향인 마재마을에 기거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또한 사실(fact)과 전혀 다른 왜곡된 주장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심경호, 「다산시집 해제」,『한국문집총간해제』, 고전번역원(20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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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가 굳이 무궁화의 북방한계선을 확장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기관 이름도 다른 영림청-1910년대에 산림경영을 담당하던 조선총독부의 기관은 영림청이 아니라 영림창(營林廠)이다-이나, 산림의 식수나 조림 사업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농업 관련 기관인 권업모범장과 농업시험장이 무궁화의 품종 개량에 나설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따라서 그가 각주에 언급한 『시정30년사』뿐만 어떠한 책에도 그러한 내용이 기록될 리가 만무하다.

    조선총독부에서 1940년에 발간한 『시정30년사』는 1910년에서 1940년까지의 기간 동안 조선총독 6인의 재임 시기별로 여러 정책들에 대내적으로 뒷받침하여 합리화하고, 대외적으로 미화하고 선전하기 위하여 쓰인 책으로, 총독의 재임 시기별로 정책의 일반적 방향을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각 총독별로 임업 정책의 일반적 방향을 기술할 뿐 구체적 수목의 식재 또는 개별 품종 개발에 대한 내용은 아예 기록이 되지 않았다.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언급된 『시정30년사』, pp.174~175는 제3대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850~1924) 총독의 재임 동안(1919~1927)에 있었던 임업 정책의 일반 내용이 기술되어 있을 뿐 그 어디에도 무궁화의 재배품종 개발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해당 페이지의 내용은 <사진5>에 있는 바와 같다. 또한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시정30년사』는 현재 번역이 완료된 책이며, 박찬승 외 3인 역주, 『조선총독부 30년사』, 민속원(2018), p.388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와 대조하여 살펴보아도 무궁화 식재가 전혀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 관한 그의 주장도 인용 문헌에 없는 혼자만의 생각을 마치 존재하는 객관적 사실인양 왜곡하여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5. 小田省吾,『시정30년사』(施政三十年史), 朝鮮總督府(1940), pp.174~175; 일본국회도서관 소장본의 해당 페이지 캡쳐

    <논거4>

    [두 얼굴의 무궁화] 테라우치 치하의 조선총독부 식산국은 1912년 12월 다이쇼(大正원년) 조선총독부 관할 국유림 일부를 도쿄제국대학, 교토제국대학, 큐수제국 등 내지(일본)의 제국대학들에 연습림으로 대부해 주었다. 도쿄제국 대학에는 전라남도 순천군 구례군과 광양군 백운산·감토봉·지리산 일대에 총 46,685정보를 연습림으로 할당하여 이듬해부터 금송(고야마키, 高野槇), 적송(아카마쓰), 낙엽송(카라마츠), 편백나무(히노키), 삼나무(스기), 무궁화, 황매화 등 총 3만 3천 주를 식수하게끔 했다.*각주107) (p.154)

    *각주152) 小田省吳, 『施政 30年史』, 朝鮮總督府, 1940, 88~89쪽. (p.401)

    ​이에 대한 『두 얼굴의 무궁화』의 주장도 일제강점기 이전에 이미 한반도에는 무궁화가 상당히 식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이를 식재할 이유가 없었으며, 산지에 무궁화와 황매화 등의 원예식물을 심는다는 것도 그 자체로 상식에조차 어긋나기 때문에 식물과 산림에 대해 조금의 지식만 있어도 이치에 닿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가 문헌 출처로 언급한 조선총독부가 출간한 『시정30년사』, pp.88~89는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1852~1919)가 초대 조선총독을 지낼 때 ‘민생의 향상’이 있다고 주장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무궁화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사진6>에서 보이는 것처럼 실제 『시정30년사』, pp.174~175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시정30년사』는 현재 국역이 완료된 책이다. 박찬승 외 3인 역주, 『조선총독부 30년사』, 민속원(2018), p.202에 해당하는 부분이므로 이와 대조하여 살펴 보아도 무궁화와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그가 언급한 국유림의 일부를 일부 제국대학에 양여하여 연습림으로 경영하도록 한 것은 <사진7>에 확인되는 것처럼 『시정30년사』, p.46에 나온다. 연습림으로 양여했다는 사실만을 간략하게 소개하여 기록하고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식재한 수종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이 역시 이미 번역 작업이 완료된 것으로 박찬승 외 3인 역주, 『조선총독부 30년사』, 민속원(2018), p.103에 자세히 나와 있으므로 이와 대조하여 살펴 보아도 무궁화 식재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왜곡된 주장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없는 사실을 있는 사실로 만들려다 보니, 인용 문헌의 페이지조차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진6. 小田省吾,『시정30년사』(施政三十年史), 朝鮮總督府(1940), pp.88~89; 일본국회도서관 소장본의 해당 페이지 캡쳐

    사진7. 小田省吾,『시정30년사』(施政三十年史), 朝鮮總督府(1940), p.46; 일본국회도서관 소장본의 해당 페이지 캡쳐

    ​<논거5>

    [두 얼굴의 무궁화] 1974년 일본의 도이임학진흥회(土井林學振興会)는 『한반도의 산림(韓半島の山林)을 펴냈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이 헐벗은 한반도의 산을 녹화시켜 주었다고 자랑하고 있다. 1918년(大正 7년)~1942년(昭和 18년) 25년간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에 약 17만 7300헥타르(제주도 전체 면적 상당)에 6억 662만 4000주를 심었다. 주요 식수 수종은 아까시나무, 싸리나무(하키), 고야마키(금송), 적송, 편백나무, 삼나무, 가이즈까 향나무(龍柏), 홍단풍, 벚나무, 낙엽송, 무궁화, 황매화 등 거의 일본산 나무들이다.*각주110) (p.156)

    *각주110) 土井林學振興会, 『朝鮮半島の山林』, 土井林學振興会, 1974, 63~65쪽 (p. 401)

    일본의 도이임학진흥회(土井林學振興会)의 연구 논문에, 일제강제기에 한반도 산림지에 대한 조림 사업의 일환으로 일제가 무궁화를 식재했다는 내용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주장 역시 일제의 산림 조림 사업의 목적이 꽃놀이를 하자는 것도 아닌데 화훼용 식물인 무궁화, 황매화, 벚나무, 금송, 카이즈카향나무와 홍단풍을 산지에 식재했다는 것이므로 상식에 조차 맞지 않는다. 다행히 일본 중고서점을 뒤졌더니 해당 서적이 남아 있어 주문을 해서 살펴보았다.

    -​ 도이임학진흥회(土井林學振興会)가 1974년에 『朝鮮半島の山林-20世紀前半の狀況と文獻目錄』이라는 책을 출간했고, 그 내용으로 p63.과 p.65에 당시 식재한 식물의 목록을 기록했다는 것만 맞았다.

    – 나머지는 실제 기록되지 않은 내용을 마치 기록이 있는 것처럼 왜곡한 것이었다.

    – p.63에 기록된 조림 수종 중 주요한 것으로 기록된 나무는 “소나무(アカマツ), 잎갈나무(チョウセンカラマツ), 곰솔(クロマツ), 잣나무(チョウセンマツ), 독일가문비나무(トウヒ), 전나무류(モミ類), 졸참나무(ナラ), 녹나무(クスキ), 호두나무(クルミ), 박달나무(オノオレカンバ), 느티나무(ケヤキ)”이었다.

    – p.65에 기록된 국유림 조림 수종 중 주요한 것으로 기록된 나무는 “잎갈나무(チョウセンカラマツ), 잣나무(チョウセンマツ), 소나무(アカマツ), 가문비(エゾマツ), 분비나무(トウシラベ), 종비나무(チョウセンハリモミ), 신갈나무(モンゴリナラ), 굴참나무(アベマキ), 상수리나무(クヌギ), 가래나무(マンシュウクルミ), 들메나무(ヤチダモ), 물푸레나무(トネリコ). 황벽나무(キハダ), 박달나무(オノオレカンバ), 느티나무(ケヤキ), 일본잎갈나무(カラマツ)”이었다.

    사진8. 土井林學振興会編, 『朝鮮半島の山林-20世紀前半の狀況と文獻目錄』, 土井林學振興会刊(1974), p.63

    사진9. 土井林學振興会編, 『朝鮮半島の山林-20世紀前半の狀況と文獻目錄』, 土井林學振興会刊(1974), p.63

    이 책 전체를 살펴보았으나 일제가 산지를 비롯한 한반도 그 어디에도 조림사업의 일환으로 무궁화를 식재했다는 내용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 역시 없는 것을 있는 사실로 만들기 위해 인용 문헌에 기록된 나무와 전혀 다른 무궁화 및 기타 다른 수종을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일제가 무궁화를 식재했다는 전혀 사실과 다른 왜곡 뿐만 다른 중대한 문제도 있다.『조선반도의 산림(朝鮮半島の山林)』에 기록된 주요 조림 수종은 독일가문비나무와 일본잎갈나무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한반도 고유종이다. 그리고 『조선반도의 산림(朝鮮半島の山林)』을 살펴보면 기존 산림과 조림된 산림을 벌채를 수행한 방식과 내용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이에 언급된 주요 조림 수종은, 일제가 목재 수탈 정책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대한제국을 강제합방 하기 직전에 발표한 『화한한명대조표』(1910.5.)를 비롯하여 강제합방 이후 조선총독부 명의로 1912년 및 1915년에 3차례에 걸쳐 고시한 『조선주요삼림수목명칭표』(1912~1915)에 기록된 한반도에 분포 주요 수목의 명칭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이러한 점은 일제의 한반도의 산림지에 대한 조림 사업의 목표가 이미 다 자란 나무를 벌채하거나, 한반도 기후에 맞는 수종을 식재하여 키운 후 그 목재를 수탈하는 것에 있었음을 드러내어 준다.

    그런데 『두 얼굴의 무궁화』는 무궁화를 일본의 나라꽃으로 만들기 위해 일제가 조선의 산림지에 관목류인 싸리나무, 화훼용 식물인 무궁화나 황매화 또는 벚나무 그리고 관상용 식물인 금송, 카이즈카향나무와 홍단풍을 식재했다고 하여 일제의 산림 정책의 본질이 목재 수탈에 있었음을 은폐하고, 일제의 식민 지배를 조선 민중을 대상으로 한 꽃놀이 쯤으로 희화화한다.

    (3) 소결론

    ​이상을 통해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일제가 일제강점기에 의도적으로 한반도에 무궁화를 식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논거(인용 문헌)가 정확한지를 살펴보았다. 앞서 살핀 『두 얼굴의 무궁화』의 문헌 인용은 일정한 공통점이 있다. (i) 모두 오래된 일본 문헌으로 일반인의 접근이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다. (ii) 접근이 가능하더라도 식물학이나 수목학을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의 입장에서 진위 여부를 판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iii) 그리고 그 일본 문헌에서 인용된 내용은 실제 기록과 전혀 관련이 없거나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살펴보았듯이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일제가 무궁화를 한반도에 식재했다는 주장을 하면서 인용한 문헌의 실제 내용을 살펴 본 결과, 문헌에 전혀 실리지 않아 근거가 없거나, 주장과 실제 내용은 전혀 달라 왜곡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억지 주장을 꿰어 맞추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을 일본제국주의가 시키는 대로 따라 가는 바보 무지랭이로 비하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산림과 조림에 대한 정책이 식민지 수탈에 있다는 본질마저 흐리고 있다는 것도 살펴보았다.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는 끊임없이 일본 군국주의의 꽃이기 때문에 국가상징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국가상징을 바꾸고자 하는 자신의 신념과 욕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거짓과 왜곡에 근거하여 악의적으로 무궁화를 일본 군국주의의 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무시하고 선조들을 비하하면서까지 그의 신념을 달성하려는 강한 욕망이 읽히고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없이 자신이 애국한다고 외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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