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쑹메이링, 트루먼 정부에
    지원을 호소···거절 당하다
    [국공내전 ㊿] 점점 더 악화되는 장제스 정권과 미국의 관계
        2020년 08월 26일 09: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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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이하이 전역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여 내전의 저울추가 한 쪽으로 확연히 기울었다. 사람들은 국민정부의 패배를 기정사실처럼 여기고 있었다. 국민당이 정치적 위기에 이어 군사적 실패를 거듭하자 파벌 간의 권력쟁탈전이 격화되었다. 바이충시(白崇禧)는 장제스 정권이 극히 불리한 정세를 이용하려 하였다. 그는 1948년 12월 25일, 내전의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여 참의회(참의회参議会는 국민당 통치지역의 의회)에서 후베이, 후난, 허난성의 지지를 얻었다. 이런 형국에서 장제스는 1949년 첫날 신년 문서를 발표하고 중공과 평화적 담판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평화와 전쟁의 주도권이 국민당에 있지 않았다. 행정원장 쑨커는 장졔스의 허락도 없이 행정원을 이끌고 광저우로 갔다. 그는 일방적으로 “정부를 광저우로 이전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중공과의 담판에 반대를 표시하고 계속 전쟁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외국 세력의 지지를 얻어 화남(華南)(화남지역은 주장(珠江) 유역으로 광둥성과 광시·하이난(海南)성을 포함한 지역을 말한다)을 경영하려고 한 것이었다. 국민당 통치 중심지인 난징, 상하이는 이미 인심이 요동치고 공황상태에 빠졌다. 각 기선회사는 명령을 받고 난징, 상하이에 배를 집중시켰다. 국민정부가 긴급하게 징발한 것이었다. 각급 정부 관원들은 다투어 홍콩, 타이완으로 달아나려고 하였다. 고궁 박물관 문물도 난징에서 타이완으로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 1945년 중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베이핑을 수복했을 때 국민정부는 다시 고궁박물관을 접수했다. 남쪽 세 곳으로 옮겼던 문물도 충칭으로 모았다가 1947년에 난징으로 보냈다. 화이하이 전역에서 패배한 뒤 국민정부는 중요 문물을 난징에서 옮겨갔다. 1948년 말에서 1949년 초까지 국민정부는 난징 차고에서 2,972상자의 문물을 골라 타이완으로 가져갔다. 그 뒤 타이베이(臺北)시 스린(士林)밖 와이솽시(外雙溪)에 새 건물을 지어 대외에 공개하고 있다. 남은 대량의 문물은 1949년 뒤 육지 수송을 통해 베이징 고궁 박물관에 1만 상자를 운송했다. 지금도 2,176상자는 봉인된 채 난징 차고에 남아 있으며 난징 박물관이 대신 관리하고 있다.

    국민당 중앙 당부는 겨우 10여명이 남았을 뿐 입법원의 80퍼센트에 달하는 입법위원들이 난징에서 달아났다. 미국 주중 군사고문단도 요원 및 가족들이 황망히 철수했다. 리쫑런(李宗仁)은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쉬벙회전의 결말이 가까워졌을 때 중공의 전반적 승리가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다. 난징과 상하이가 요동치고 인심이 흉흉해졌다. 국내외 많은 여론기관, 심지어 작전을 통솔하는 고급 장교들이 모두 앞날의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표를 잠깐 앞으로 돌려야 한다. 화이하이 전역을 기술하느라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을 건너뛰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장제스의 오랜 측근 천부레이의 자살과 쑹메이링의 도미이다. 특히 쑹메이링이 미국에 가서 지원을 호소한 것은 대미관계를 상징하는 사건이므로 지면을 나누려고 한다.

    장제스의 비서장 겸 대변인 천부레이 자살하다

    1948년 11월 13일, 장제스의 오랜 측근이자 대변인역인 천부레이가 자살했다. 천부레이는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여 자살했는데 난징의 정계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만큼 천부레이의 자살이 주는 파장이 컸던 것이다.

    천부레이는 ‘국민당에서 제일 가는 붓’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학식과 문장에 뛰어났다. 그의 본명은 천쉰언(陳訓恩)으로 ‘부레이(布雷)’는 필명이다. 부레이라는 이름은 수뢰나 지뢰 같은 폭탄을 설치한다는 뜻이니 필명치고는 매우 과격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상하이의 기자였는데 1927년 장시성 난창에서 장제스를 만났다. 그는 곧바로 장제스의 눈에 들어 국민당 비서처 서기장이 되었다. 그후 장제스 시종실 주임, 중앙선전부 부부장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장제스의 연설문, 외교 편지, 문서 등을 작성하는 것은 물론 비밀업무도 도맡았다. 산더미 같은 문서를 정리한 뒤 일목요연하게 요약하여 장제스에게 보고하였다. 장제스의 손이나 혀와 마찬가지였다.

    천부레이는 장제스의 비서이자 대변인이었다.

    국민정부는 천부레이의 자살을 두고 “죽음으로 나라를 위한 것”이라거나 “감격하여 죽음을 가벼이 본 것”이라고 미화하였다. 그러나 천부레이의 자살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국민정부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비관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드라마에 보면 천부레이는 장제스를 만나서 마지막 충언을 한다. “상하이에서 장징궈가 호랑이 때려잡기 하는 것을 막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지금이라도 개혁해서 민심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장제스는 냉담하게 반응하였다. “몸도 마음도 쇠약해졌으니 이제 그만 쉬라.”며 내친 것이다. 그날 밤 천부레이는 집에서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였다. 그의 자살은 난징의 지식인들은 물론 정관계 인사들에게 “이제 더 이상 국민당 정부에 희망이 없다.”는 메시지를 준 것이었다.

    이채로운 것은 천부레이 자녀의 일이다. 천부레이는 7남 2녀를 두었는데 둘째 딸이 천롄(陳璉)이다. 천렌은 장제스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아버지와 달리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9년 고등중학교(高中으로 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에 다닐 때의 일이었다. 1941년 완난사변이 일어나자 천롄은 가정과 결별을 선언하였다. 완난사변이 천롄에게 주는 충격이 그만큼 컸던 것일까? 합작을 노골적으로 깨뜨린 장제스를 위해 일하는 아버지에게 실망하였던 것이다. 드라마에 보면 천롄이 공산당원인 것이 천부레이가 자살한 원인 중 하나로 거론되는데 비약일 것이다. 1941년의 일이니 오래 전의 일이고 형제가 국공으로 갈린다던지 국군 지휘관의 귀순이 흔하던 시절이었다. 천롄은 신중국 성립 후 공산청년단 중앙 아동부장을 지냈다. 문화대혁명때 천롄은 “국민당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반도라는 모함을 받았다. 얼마나 핍박이 심했던지 그녀는 유서를 써놓고 누각에서 뛰어내려 죽음을 선택하였다. 애달픈 운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천롄 전기. 1989년 출판되었다. 천롄은 천부레이의 딸이다.

    트루먼, 재선에 성공하다

    1948년 11월 2일 벌어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루먼이 재선에 성공하였다. 트루먼의 재선은 장제스에게 설상가상의 재난이었다. 본래 트루먼은 장제스 정권에 대하여 심각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때 마샬을 중국에 보내어 국공 간 회담을 중재하였다. 중국에 민주적인 연립정권을 수립하여 소련에 대응하겠다는 것이었다. 마샬의 시도는 처음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국공은 열심히 회담에 임했으며 연합정권을 수립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국공 사이의 동상이몽을 깨뜨리기는 어려웠다. 군대 보유 등 실질적인 문제에서 국공은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쨌든 장제스가 먼저 합의를 깨뜨리고 내전으로 끌고 갔다. 내전을 일으킨 것은 물론이고 공산당과 민주동맹등을 제외한 채 국민대회 개최도 강행하였다.

    마샬이 중국에 와서 국공 간에 조정을 시도할 때 장제스와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결국 마샬은 중국에서 실망과 환멸을 안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마샬이 미국 정부의 외교정책을 좌우하는 국무장관이 된 것이다. 마샬은 트루먼의 깊은 신뢰를 얻고 있었다. 마샬의 태도는 워싱턴의 중국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947년 8월부터 미국은 이미 장제스 하야 문제를 고려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암암리에 대체인물도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미국 특사인 웨드마이어는 장제스의 관저에서 공공연하게 이야기하였다. “중국이 부흥하려면 감화력이 풍부한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중국은 그와 같은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다.” 같은 해 9월, 미국대사 스튜어트는 본국으로부터 화북을 시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실제 목적은 화북의 군정장관인 리쫑런이 장제스를 대체할만한 인물인지 관찰하려는 것이었다. 스튜어트는 마샬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장제스의 위망은 날로 쇠미해지고 있다. 화북의 지식인들은 그를 과거의 인물로 치부한다. 대신 리쫑런의 인망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스튜어트의 지지를 얻은 리쫑런은 그해 10월 장제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부총통 경선을 요청하였다. 1948년 봄에 리쫑런은 장제스가 지지하는 쑨커와 부총통을 놓고 다투었다. 그때 스튜어트는 마샬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각 전장이 수세에 몰려 있다. 민심과 사기가 매우 좋지 않다. 민심을 진작시킬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 출현하지 않고 있다. 상황이 날로 긴박해지므로 장 위원장은 반드시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적극적인 개혁조치를 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내전이 회담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 위원장이 정치무대에서 물러나는 것도 포함해야 한다. 그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장제스(가운데)와 리쫑런(오른쪽)

    4월 29일, 리쫑런은 쑨커와의 부총통 경선에서 승리했다. 중국 정치무대에서 광시계 세력이 굴기하는 것이 분명해졌다. 당시 어떤 이가 말하였다. “장제스는 전장에서 공산당에 패하고 국민대회서 리쫑런에게 패하였다.” 장제스가 보기에 국방부장 바이충시는 국민당 내에서 가장 지모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리쫑런과 바이충시가 조정에서 손을 잡는 것을 두려워했다. 곡절 끝에 장제스는 바이충시를 우한으로 보냈다. 그때 스튜어트는 마샬에게 이렇게 보고하였다. “바이충시는 국방부장직에서 해임당했다. 그가 선거에서 리쫑런을 도왔기 때문이다. 장제스는 광시계가 자신을 반대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고 의심하고 있다.”

    바이충시를 보내놓고 장제스는 두 개의 도박을 하였다. 하나는 전장에서 정예 병단을 투입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것이었다. 장제스는 트루먼에 대하여 불만과 한이 있었다. 미국인들이 암암리에 리쫑런을 지지하고 장제스를 계속 견제하였기 때문이었다. 트루먼과 마샬이 그에게 실망을 감추지 않은 것처럼 장제스도 그들에게 충분히 실망하였다. 1948년 여름에 장제스는 측근인 천리푸를 미국에 파견하였다. 천리푸를 통해 대통령 경선에 나선 뉴욕주 지사 듀이에게 거액의 자금을 지원한 것이다. 이때 지원한 선거자금이 4억불에 이른다고 한다.

    당시 뉴욕의 중국인들은 대부분 듀이가 트루먼에게 절대 우세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장제스도 듀이에게 패를 건 것이었다. 천리푸는 상하이로 돌아와 ‘신문천지’에 담화를 발표했다. “만일 듀이가 당선된다면 중국에 군사원조를 하는 것은 물론 진행중인 반공전쟁에서 비상한 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듀이는 낙선하였다. 11월 7일, 대통령 선거결과가 중국에 알려졌다.

    11월 9일, 장제스는 눈물을 머금고 트루먼에게 편지를 보내어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였다. 이 편지에서 장제스는 “국민정부의 작전목표를 지지한다는 선언을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트루먼은 거리낌없이 장제스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장제스가 자신의 정적을 지원한 사실을 결코 잊지 않은 것이다.

    쑹메이링, 미국에 가서 지원을 요청하다

    11월 28일, 쑹메이링이 미국으로 날아갔다. 쑹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미국의 조야 인사들에게 중국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였다. 그녀는 장제스와 국민정부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미국이 계속 장제스의 반공전쟁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마샬과 트루먼은 동방의 가장 큰 나라에서 온 대통령 부인 쑹메이링의 체면을 조금도 보아주지 않았다. 쑹메이링이 애절한 어조로 호소한 요청은 완전히 거절당했다. 장제스는 계속 사면초가의 궁지에 몰렸다. 곧이어 벌어질 화이하이 전역에서 패배가 굳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화이하이 전역에서 패배한 장제스를 더욱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다. 쑹메이링의 도미에는 여러 일화가 있다. 트루먼을 만난 일은 중요한 일이고 10대 미인에 선정된 일은 가십거리이다. 간략하게 소개한다.

    쑹메이링은 1898년 중국 하이난 원창에서 태어났다. 장제스 정부에서 재정과 금융, 외교부문을 맡아온 쑹즈원(宋子文)이 오빠이고 행정원장을 맡았던 쿵상시가 그의 형부이다. 즉 쑹아이링, 쑹칭링, 쑹메이링 등 송씨 세 자매 중 막내이다. 그의 큰 언니 쑹아이링은 은행가인 쿵상시와 결혼하였다. 둘째인 쑹칭링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다같이 떠받드는 쑨원의 부인이었다. 쑹메이링 자신은 장제스와 결혼하여 중국의 ‘제1부인’이 되었다. 중국에는 이런 속설이 있다. “쑹아이링은 돈을 사랑하고, 쑹칭링은 조국을 사랑하며, 쑹메이링은 권력을 사랑한다.”

    왼쪽부터 쑹메이링, 쑹칭링, 쑹아이링

    쑹메이링은 영어를 비롯하여 6개 외국어를 할 줄 알았으며 그림 그리기, 붓글씨는 물론 피아노 연주도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쑹은 열네살 때 미국에 유학하여 웰즐리 여자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한 후에는 상하이로 돌아와 중국어와 고전문학을 공부하였다. 집안이 거부인데다 뭐든지 열심히 하는 성격이어서 독선생을 들여서 맹렬하게 학습했다고 한다. 이처럼 다재다능하고 총명한데다 뛰어난 미인이어서 상하이 신사들이 열렬하게 짝사랑하는 대상이 되었다.

    1922년 연말, 쑹메이링은 오빠 쑹즈원이 상하이에서 주최한 연회에서 처음 장제스를 만났다. 장제스는 쑹메이링을 보고 한눈에 반하여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결혼하고야 말겠다.”고 결심하였다. 장제스는 두 번째 부인과 억지로 이혼하고 쑹메이링을 한사코 따라다녔다. 그러나 쑹의 둘째 언니인 쑹칭링이 견결하게 반대하였다. 쑹칭링이 보기에 장제스는 결코 쑨원의 유지를 실현할 사람이 아니었다. 쑹칭링과 장제스의 관계는 점점 적대적으로 발전하였고 1927년 장제스가 일으킨 상하이 정변 때에 결정적으로 갈라섰다. 쑹칭링은 1949년 신중국이 성립될 때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에 선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큰 언니인 쑹아이링은 장제스를 지지하며 쑹메이링에게 그와 결혼할 것을 권하였다.

    1927년 장제스와 쑹메이링은 마침내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난징에 새로 정권을 세우고 우한의 국민당 정권과 대립하던 장제스가 실각했을 때의 일이었다. 갑부인 쑹씨 집안과 권력자인 장제스의 결합이니 정략결혼이라고 하여도 틀린 말은 아니다. 장제스는 이 결혼으로 일개 대군벌에서 자본가들의 지지를 받게 되는 정치가가 되었다. 쑹씨 집안은 물론 상하이 재력가들의 후원으로 튼튼한 물적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결혼사진

    장제스는 쑹메이링과의 결혼을 위해 그동안의 방탕한 생활을 씻었다. 종교도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다. 그는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는 건실한 남편이 되었다. 둘의 나이 차이는 열 한 살이었다. 장제스는 전형적인 중국 군벌이고 쑹메이링은 미국식 사고방식을 가진 신여성이어서 뭔가 잘 맞지 않는 배필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 군벌들은 새로운 교육을 받은 신여성들과 결혼하기를 열렬히 원하였다. 나중에 국민당 고위 장교들을 보아도 대부분 신여성들을 부인으로 맞거나 안되면 첩으로라도 들이곤 하였다.

    어쨌든 장제스의 부인이 된 쑹메이링에게 ‘제1부인’은 몸에 꼭맞는 옷이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장제스로서는 유능한 외교 조수를 얻은 셈이었다. 1936년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 쑹메이링은 항공위원회 비서장을 맡았다. 외국에서 항공기를 구매하기 위해 외국의 인사들과 접촉했는데 쑹메이링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이때 쑹메이링은 항공이론과 비행기 설계기술을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시안사변’ 때 쑹메이링은 강경진압을 주장하는 국민당내 강경파들 사이에서 평화적인 교섭으로 장쉐량 및 공산당과 교섭하여 장제스를 구해냈다.

    1943년 쑹메이링은 미국의 하원 및 상원에서 연설하며 중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호소하였다. 이때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휘황한 외교업적을 거둔 시기였다. 쑹메이링은 루즈벨트 대통령과 함께 기자간담회를 진행하는가 하면 캐나다까지 가서 강연을 하였다. 그녀는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등에서 수십 차례의 강연을 하며 미국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쑹메이링은 미국 조야에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그 대가는 거액의 군사원조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2차 대전을 치르고 있는 중국에 40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약속했던 것이다.

    1943년 방미때 환영을 받는 쑹메이링

    쑹메이링, 트루먼에게 냉대를 받다

    1948년 연말 장제스는 연이은 패배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동북에서 전쟁의 주도권을 내준 장제스는 화이하이 전역으로 일컫는 중원 결전에서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과 장제스는 개와 고양이처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내전 시기에 미국의 정책도 변하였다. 트루먼은 장제스와 국민정부를 더 이상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국민정부의 부패는 미국 고위층에서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쑹메이링은 1943년의 기억을 되살려 장제스에게 자신이 미국에 가겠노라고 제안하였다. 장제스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쑹메이링을 미국에 보냈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쑹메이링이 도미하기 전 트루먼은 국무장관인 마샬을 통해 국민정부에 통보하였다. “장 부인의 방문은 국민정부의 대표가 아닌 개인 자격이다.” 1948년 11월 28일, 쑹메이링은 미국 해군 전용기를 타고 상하이에서 미국으로 날아갔다.

    스털링 시그레이브(Sterling Seagrave)는 ‘송가왕조’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이번에 워싱턴은 쑹메이링에게 양탄자를 깔아주지 않았다. 쑹메이링을 백악관에 초청하지도 않았으며 의회 연설도 요청하지 않았다.” 트루먼은 심드렁한 어조로 비꼬았다. “그녀가 이번에 와서 뭘 얻어 가려는 모양이지. 나는 그 여자가 백악관에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아. 그녀가 뭘 좋아하는지 관심도 없어.”

    1948년 12월 10일, 트루먼 부부는 백악관에서 쑹메이링을 회견했다. 그들은 예의를 갖추었지만 한편으로는 냉담하였다. 트루먼은 쑹메이링에게 시간을 30분만 할애하였다. 쑹메이링은 예전 이야기를 하며 미국에게 30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요청하였다. 트루먼이 딱 잘라 말했다. “미국이 이미 약속한 원조 40억불은 보내 주겠소. 그러면 끝납니다. 미국은 지지할 수 없는 중국을 무한정 지원할 수 없소.” 트루먼은 그 뒤 거리낌없이 성명을 발표하였다. “장제스 정권에 대한 원조 총액이 이미 38억 달러를 초과하였다.” 쑹메이링의 방미는 1943년 행차와 비교할 수 없게 되었다. 쑹메이링의 매력은 여전하였으나 갈채를 받지 못하였다. 장제스가 중국 대륙에서 세력을 잃은 데다 민심이 떠난 까닭이었다.

    트루먼과 환담중인 숭메이링

    일설에는 트루먼이 국민정부 4대 가문의 부패에 염증을 느껴 지원을 거절했다고도 한다. 트루먼은 만년에 어느 작가와의 대화에서 이런 일화를 소개하였다. 1949년 5월, 쑹메이링이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미국에는 이런 이야기가 돌았다. 장제스 정권 4대 가족 중 쑹씨와 쿵씨 집안의 은행예금이 20억불에 달한다는 것이었다. 트루먼은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당장 연방조사국에 조사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결과 은행에 거액을 예금한 것은 물론 뉴욕과 세인트폴의 부동산에 거액을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액수가 대략 7억 5천만 달러였다. 나라를 구할 돈은 없다며 부동산 투기를 일삼는 정권에 대하여 트루먼의 실망은 극에 달했다. 그는 곧바로 신문에 성명을 발표하였다. “미국은 이미 성의를 다하였다. 앞으로 더 이상 장제스와 그 정권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트루먼은 쑹메이링이 만리타향에 와서 지원을 호소했지만 차갑게 외면하였다. “장제스와 국민정부가 죽어도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녀는 마침내 분노하며 워싱턴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후 쑹메이링은 뉴욕에 있는 쿵상시의 별장에서 은거하였다. 그리고 다시는 중국 대륙을 밟지 못하였다. 장제스가 대륙을 잃는 바람에 타이완으로 가야 했던 것이다. 1950년 1월 8일, 쑹메이링은 낙담한 채 미국을 떠나 타이완으로 돌아왔다.

    쑹메이링이 냉대를 받은 보상은 엉뚱한 것이었다. 미국 미술가 협회가 “장 부인이 전세계 10대 미인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 이유는 쑹메이링의 코가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실소를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쑹메이링은 만년에 미국에서 살다가 2003년에 사망했다. 1898년생이므로 105세를 산 것이다.

    쑹메이링은 중국에서 국모로 추앙받은 언니 쑹칭링보다 더 많은 화제를 뿌렸다. 젊은 시절에는 동북의 청년군벌 장쉐량과 염문을 뿌렸다고 한다. 장제스 평전에는 쑹메이링과 트루먼의 적수였던 공화당 대통령 후보 듀이와의 추문도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쑹메이링은 그런 사생활을 완전히 가릴 만큼 휘황한 삶을 살았다. 장쉐량은 쑹메이링을 가리켜 “중국 근대에서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는 총명한 인물이다. 서안사변 뒤 내가 죽지 않은 것은 쑹메이링의 보호가 있었기 때문이다.”고 평가하였다. 장제스는 더욱 쑹메이링을 칭송했다. “부인의 능력은 20개 육군 사단과 맞먹는다.”

    쑹메이링이 사망한 뒤 중국정치협상회의는 자칭린(賈慶林) 주석 명의로 조전을 보냈다. “쑹메이링 여사는 중국 인민의 항일전쟁에 진력하였다. 국가 분열에 반대하여 해협 양안의 평화통일을 열망하였다. 중화민족 부흥의 역사에 공적이 뚜렷하다.” 국공내전에서 주요 전범으로 지목되었던 쑹메이링이 대륙에서 상징적으로나마 복권이 된 것일까? 역사의 흐름은 유장하고 굴곡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국공내전] 연재칼럼 링크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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