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위밍 집단군 섬멸하고
해방군, 중원을 평정하다
[국공내전 ㊾] 장제스의 엉터리 지휘가 국군의 파멸을 재촉하다
    2020년 08월 19일 11: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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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내전에서 벌어진 전투 횟수나 규모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다. 글쓰기를 준비하며 주요 전투들을 훑어보는데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내전 전체를 총괄한 책이나 글을 우선 읽고 다음으로는 주요 전투 관련 자료들을 읽었다. 중국에 갔을 때 신화서점을 여러 군데 구경했다. 베이징의 왕푸징에 있는 서점에서는 몇 시간 동안이나 책을 구경하였다. 서점에 박근혜 자서전이 잔뜩 깔려 있었다. 함께 간 이가 그걸 보더니 화를 내며 책을 모조리 반대로 돌려놓은 기억이 난다. 박근혜가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과 함께 텐안먼에서 인민해방군을 사열하던 시기의 일이었다. 거기 진열된 내전 관련 책들을 훑어보니 방대하기가 산더미 같아 구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늙어 죽을 때까지 뒤져도 다 읽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내전을 요약해 다룬 실록 세 권을 샀다. 그것만 해도 3천 쪽이 넘었다. 그밖에도 중국에 갈 때마다 중국 혁명이나 내전과 관련한 책을 사서 돌아왔다. 인터넷으로 원서를 구매하면 배송료가 책값보다 더 비쌀 때가 많았던 것이다. 실제로 글을 쓰는 데는 중국 포털사이트인 바이두의 도움이 가장 컸다. 14억 인구에 걸맞게 바이두에는 참으로 방대한 자료들이 누적되어 있다. 한 달 5천원 정도만 내면 논문이나 개인 도서관 자료들도 얼마든지 열람할 수 있다. 아마추어가 글쓰기에 좋은 시절인 것이다. 중국 포털 사이트인 바이두나 중국 공산당 홈페이지 ‘런민왕(人民网) 등 인터넷에 쌓여 있는 엄청난 자료들을 보면 누구나 웬만한 글쓰기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자료가 넘쳐 진위 여부를 가리거나 취사선택을 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나의 내전기는 타이완쪽 자료가 거의 없다. 그러니 한계가 많은 내전기임에 틀림없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타이완쪽 자료들도 찾아서 사실관계를 맞춰보고 싶다.

화이하이 전투 기록화

화이하이 전투 상황도

국공내전에서 3대 전역이라 하면 랴오선 전역, 화이하이 전역, 핑진전역을 일컫는다. 랴오선 전역은 동북지역의 결전이고 화이하이 전역은 중원지역의 결전이다. 핑진전역은 베이핑과 텐진 등 화북지역을 놓고 다툰 결전이다. 이중 내전의 향방을 결정적으로 가른 것이 화이하이 전역이다. 중원지역에서 장제스의 직계 주력군과 공산당 중원 야전군 및 화동 야전군이 맞붙은 결전에서 공산당은 완전히 승기를 거머쥐었다. 이 전투에서 장제스가 자랑하던 국군 맹장들이 대부분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으며 주력부대가 궤멸되었다.

화이하이 전역이 치열하게 진행될 때 핑진전역이 시작되었다. 1948년 11월 29일, 린비아오가 지휘하는 동북 야전군과 네룽전이 지휘하는 화북 야전군이 화북 결전의 공세를 시작하였다. 베이핑이나 화북지역에 대한 공산당의 공세가 장제스나 국군 수뇌부의 예상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상한 것보다 동북 야전군의 산하이관 입관이 너무 빨라서 대비가 소홀하였다. 장제스는 언제나 그렇듯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의 상황에 치우쳐 다음 국면을 대비하지 못하였다. 핑진전역은 군사적 공세보다 정치적 공세의 비중이 더 컸다. 그리고 장제스와 화북 초비사령관 푸쭤이의 속셈이 서로 달라 국면이 복잡하였다. 지금은 화이하이 전역을 한창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핑진전역에 대한 구체적인 진행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한다.

두위밍의 판단과 조변석개하는 장제스의 지휘

1948년 11월 23일, 해방군의 화이하이 전역 총전위는 지휘소를 이전했다. 린환 동쪽 15리 지점에서 후이허 북안의 쑤현 샤오리자춘(小李家村)으로 이동한 것이다. 샤오리자춘은 민가 삼사십호가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주위는 측백나무가 울창하게 둘러싸고 있어 은폐하기가 쉬웠다. 이부근은 쉬쑤철로(徐宿鐵路 쉬저우와 쑤현을 잇는 철도)와 쉬푸공로(徐濮公路 쉬저우 푸양을 잇는 도로) 사이로 전략적 요지였다. 국군이 남북으로 대진하여 쉬저우와 벙부 간을 소통시켜야 지점이 바로 이 지역이었다. 삼로에서 출발한 국군이 합류할 예정지였던 것이다. 매일 국군 비행기가 공중정찰을 하거나 지나갔다. 국군은 총전위가 이곳에 있으리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총전위는 가끔 샤오리쟈춘 부근 기씨집(纪家)이나 저우인웨이(周殷圩)로 옮겨 지내곤 하였다. 그러나 다시 샤오리자춘으로 돌아왔다. 덩샤오핑, 류보청, 천이등 총전위 지휘부가 이곳에 지휘소를 이전한 것은 황웨이의 12병단을 섬멸하기 위해서였다. 황웨이 병단이 이곳에서 가까운 솽두이지에서 해방군에 포위되어 있었던 것이다. 황웨이 병단은 끝내 솽두이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전멸당하였다.

해방군은 언제나 전선 지휘소를 전투가 벌어지는 최전방에 설치하였다. 펑더화이나 쑤위 같은 지휘관들은 눈앞에서 포탄이 터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망원경으로 시찰을 하고는 하였다. 해방군의 이런 전통은 홍군 시절부터 쭉 이어져 온 것이었다. 공산당 주석인 마오쩌둥조차 국군의 추적에 쫓기며 일 년이나 섬북을 전전하였다. 최고 지도부가 위험을 피하지 않고 의연히 전쟁을 지도하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동북에서 린비아오는 후방에 지휘소를 설치하려다 마오쩌둥의 질책을 받고 최전방으로 옮긴 일도 있었다. 그러나 국군은 달랐다. 장제스는 난징의 총통 관저나 국방부, 베이핑과 선양의 사령부에서 독전하거나 전쟁을 지휘하였다. 화이하이 전역에서도 류즈는 쉬저우에 앉아 전화로 부대들을 지휘하였다. 그러다 상황을 오판하여 쉬둥대첩과 같은 엉뚱한 해프닝이 벌어졌던 것이다.

1948년 11월 28일, 장제스는 난징에서 군사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전 두위밍은 참모총장 구쭈통에게 병력을 집중하여 공산군과 결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쭈통은 현재 추가로 이동시킬 병력이 없다고 실토했다. 화중에 바이충시 집단군이 있었으나 바이충시는 이미 장제스의 명령을 공공연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국방부가 준비한 방안은 궈루구이가 제출한 “쉬저를 포기하고 주력으로 하여금 황웨이 병단을 구원 출격시킨다.”는 것이었다. 두위밍은 이 안에 견결히 반대했다. 두위밍은 장제스와 독대까지 한 끝에 장제스와 구쭈통에게 “싸울 것이면 쉬저우에서 싸우고, 후퇴할 것이면 해방군과 싸우지 말아야 한다.(打則不走,走则不打)”는 방침을 제안하였다. 두위밍의 판단에는 쉬저우 지휘부 주력 부대가 황웨이 병단을 구원하러 가서도 안되고 쉬저우에서 결전을 벌여도 안되었다. 병력이 부족하여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주력을 남하시켜 후퇴하면 해방군이 따라 붙을 것이고 그러면 황웨이 병단에 대한 포위도 느슨해질 것이다. 두위밍은 안후이성 푸양(阜陽) 부근에서 병력을 집결, 화이허에 의지하여 다시 결전을 할 계획을 밝혔다.

장제스가 보기에도 전략적으로 두위밍의 판단이 옳았다. 그러나 황웨이 병단을 2개 병단만으로 지원하면 포위망을 돌파할 가능성이 더 적어지는 것이다. 장제스는 고심 끝에 두위밍의 건의를 채택하고 쉬저우에 주둔하던 2,13,16 등 3개 병단에 쉬저우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쉬저우 초비사령관 류즈에게는 쉬저우를 떠나 벙부에서 제6병단과 8병단을 지휘하여 북쪽의 황웨이 병단을 지원하게 하였다.

1948년 11월 30일 두위밍은 쑨웬량, 치우칭취안, 리미 등 3개 병단 30만 병력을 지휘하여 쉬저우를 포기하고 서남쪽 용청(永城)、궈양(渦楊)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군의 쉬저우 철수는 순조롭지 못하였다. 대병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느라 쉬저우 성안은 혼란이 극에 달하였다. 쉬저우는 불빛이 밤하늘에 비쳐 대낮처럼 밝았다. 인마가 뒤엉키고 차량끼리 길을 다투어 철수작업은 한없이 길어졌다.

화동 야전군은 국군이 철수하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7개 종대 30만 병력으로 추격하였다. 그와 함께 남쪽 전선의 리옌녠 병단이 벙부로 돌아오자 쑤위는 남쪽 전선에서 나머지 3개 종대를 이동시켰다. 쉬저우에서 남하 중인 두위밍 집단군을 포위하기 위해서였다. 두위밍 집단군의 후위에 있던 부대와 보급 부대는 해방군의 먹이가 되었다. 12월 1일 해방군은 쉬저우에 무혈입성하였다.

1948년 12월 3일, 두위밍은 용청으로 철수하는 도중에 갑자기 장제스의 명령을 받았다. 장제스가 친필 편지를 비행기로 공중에서 투하하게 한 것이다. 편지의 요지는 철수를 중단하고 황웨이 병단의 구원을 위해 출격하라는 것이었다. “달아나기만 해서는 피동에 처할 것이다. 도주를 멈추고 전력으로 작전에 임하라.” 장제스는 기왕에 황웨이 병단을 엄호하러 떠난 부대는 전력으로 엄호하라고 명령했다. 철수하기로 결정한 두위밍 집단군도 되돌아 가 솽두이지를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두위밍은 기가 막혔다. 대병이 움직이는데 이렇게 조변석개하여 명령을 바꾸다니. 대군의 쉬저우 철수는 바로 장제스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었던가. 장제스의 명령에 따르면 전 군이 전멸당할 위험이 컸다.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황웨이 병단을 방치하는 모양이 되어 진퇴양난의 처지로 몰렸다. 두위밍은 각 부대에 즉시 정지하라고 명령했다.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여 철수 쪽으로 중론을 모으려 하였으나 아무도 장제스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두위밍도 부득이 명령에 복종하기로 하였다. 두위밍은 동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 등 세 방향을 수비하게 하고 남쪽 방향으로 공격하기로 하였다. 두위밍은 공격이 가능하면 공격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수비로 돌아설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두위밍은 다시 국방부의 명령을 받았다. 이삼일 내에 쑤현 부근의 적을 격파하라는 것이었다. 두위밍은 장제스 배후에 궈루구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두위밍은 11월 28일 작전회의 때 장제스에게 궈루구이가 공산당 첩자라고 분명히 알렸어야 한다고 후회하였다. 국방부장 허잉친과 참모총장 구쭈통에게 자신의 철수안을 변경하면 안된다고 다짐을 받았어야 했다. 이제 작전계획을 다시 바꾸니 시간만 허비할 뿐이었다.

12월 4일, 두위밍이 지휘하던 치우칭취안, 리미, 쑨웬량 등 3개 병단은 쉬저우 서남쪽 65킬로 떨어진 천관좡(陳官庄) 지역에서 화동 야전군에게 포위되었다. 쑤위는 두위밍 집단군의 진로인 남쪽에 강력한 요격부대를 배치하여 가로막은 다음 삼면에서 포위망을 좁히며 공격에 나섰다. 두위밍 집단군이 전력으로 철수해도 따라 잡힐 판인데 공격명령을 받고 우왕좌왕했으니 쑤위가 미리 쳐놓은 그물에 스스로 들어간 셈이 되었다.

천관좡 전투에서 국군을 포위 공격하는 해방군

12월 6일, 해방군이 공격을 시작하여 국군 진지가 여기저기 뚫렸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치우칭취안, 리미, 쑨웬량 등 병단 사령관들이 두위밍에게 포위망 돌파를 건의했다. 두위밍은 “3일전에 여러분이 후퇴하는데 동의했다면 어른에게 떳떳했을 것이오. 지금은 이미 늦었소. 이제 와 명령을 위반해 보아야 부대를 보전하기도 어렵고 나중에 어른을 어떻게 볼 수 있겠소?”하며 거절했다. 그러나 세 사람이 완강하게 돌파할 것을 요청하자 두위밍도 부득이 각 병단별로 포위망을 돌파하라고 지시하였다.

12월 6일, 쑨웬량은 자신이 지휘하는 16병단을 이끌고 홀로 포위망 돌파에 나섰다. 두위밍의 결심이 흔들릴 것을 걱정한 그는 전화선까지 차단한 뒤 부대에 돌파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16병단은 화동 야전군의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1만명이 섬멸당한 뒤 도로 포위망 속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병단 휘하 군단장, 사단장 등 지휘관들이 여러 명 포로가 되거나 사상하였다. 쑨웬량은 단신으로 전장을 벗어났다. 그는 농민으로 분장하여 기차역으로 간 다음 난징으로 돌아갔다.

별 표시지역은 위쪽부터 쉬저우, 용청, 벙부. 별도 표시지역은 천관좡

두위밍 집단군 조롱 속에 갇힌 새가 되다.

쑨웬량 병단의 포위망 돌파가 실패한 뒤 치우칭취안과 리미의 병단은 8일과 9일 계속하여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해방군의 포위망은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쑤위는 병력을 증강하여 10개 종대로 두위밍 집단군을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진퇴양난이 된 두위밍은 장탄식을 하였다. “이것은 내가 싸움을 못해서가 아니다. 어른의 지휘가 어리석은 것이다.”

두위밍 집단군은 조롱 속에 갇힌 새가 되어 화동 야전군의 공격 앞에 몸을 맡기는 형편이 되었다. 이때는 이미 핑진전역이 시작된 후였다. 마오쩌둥과 중앙군사위는 핑진전역을 위해 쑤위에게 두위밍 집단군에 대한 공격을 멈추라고 지시하였다. 여차하면 베이핑과 텐진 등 화북지역에서 철수할 가능성이 있는 푸쭤이 집단군을 차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형세가 1949년 1월 5일까지 이어져 화동 야전군은 두위밍 집단군을 포위한 채 휴식했다.

1948년 12월 16일 저녁, 총전위 수뇌부 인사들인 류보청, 천이, 당샤오핑은 차를 타고 화동 야전군 지휘부가 있는 안후이성 샤오현(蕭縣) 차이와춘(蔡窪村)에서 쑤위와 만났다. 차이와춘은 총전위가 있는 샤오리자춘에서 백리쯤 떨어져 있었다. 17일 아침, 탄전린(谭震林)도 산둥 병단이 있는 곳에서 급히 왔다. 류보청, 덩샤오핑과 쑤위, 탄전린은 장시성 중앙 소비에트 지역에서 헤어진 뒤 십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 이들 총전휘 지휘부는 감회를 누른 채 함께 전쟁의 일을 토론했다. 이 회합은 화이하이 전역중 첫 번째 전체모임이었다.

17일 첫날 회의가 소집되었다. 두위밍 집단군은 독안에 든 쥐가 되어 회의 의제가 되지 않았다. 회의에서는 주로 도강작전 계획과 부대 개편방안을 연구하였다. 회의 사이 다섯 명 지도부는 작은 시골집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회의 뒤 덩샤오핑은 샤오리자춘으로 돌아가고 류보청과 천이는 시바이포(西柏坡)의 중앙으로 가서 보고했다. 그리고 중앙 정치국 회의에 참가했다.

12월 19일, 두위밍은 장제스에게 계책을 진언하였다. “상책은 우한과 시안을 포기하고 병력을 집중하여 공산군과 결전을 벌이는 것입니다. 중책은 각 병단이 지구전을 펼치며 고수하여 정치적 시간을 버는 것입니다. 하책은 포위망을 돌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치적 시간이란 국공 간 회담을 말하는 것이었다. 두위밍이 생각하기에 만약 베이핑과 텐진을 잃게 되면 동북 야전군이 남하할 것이고 그러면 난징도 지킬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장제스는 오로지 타이완으로 달아나는 길밖에 없었다. 나중의 결과를 보면 두위밍의 판단이 옳았다. 그러나 장제스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해방군, 두위밍 집단군을 섬멸하고 중원지역을 평정하다

국군 34개 사단이 이미 소멸되고 치우칭취안의 2병단과 리미의 13병단은 포위되었다. 국군은 베이핑과 화북에 있는 푸쭤이 집단군의 분할과 포위를 피하기 위해 해로를 통해 남쪽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해방군은 포위된 두위밍 집단군에 대한 공격을 잠시 완화하고 20일 동안 휴식과 정돈을 진행했다. 대신 두위밍에게 정치적 선전과 투항을 권유하며 심리전을 폈다. 두위밍은 투항하기를 거절했으나 국군 장교와 사병들의 사기는 와해되었다. 식량과 탄약도 고갈되어 공중보급에 의지했으나 대병력이 먹고 마실 음료수와 식량조차 한참 부족했다. 1948년 12월 19일 국군은 공군의 엄호 속에 포위망 돌파를 기도했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1948년 12월 30일, 화이하이 전역 총전위를 이끌고 있는 덩샤오핑은 총전위 지휘부를 인솔하여 쑤현 샤오리자춘을 떠났다. 쉬저우를 거쳐 1949년 1월 1일에 허난성 상추(商丘)에 도착했다. 당시 상추는 화이하이 전선을 지원하는 보급 기지였다. 정거장의 플랫폼과 창고 도처에 각양각색의 지원물자가 쌓여 있었다. 상추역은 포탄, 작약, 식량, 포목, 피복, 군화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눈앞에 쌓인 보급물자를 보고 덩샤오핑은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러워 하였다. 그는 중원 야전군에서 상추 전선지원 책임을 맡은 양궈위(陽國宇)를 찾았다. 덩은 그에게 “일을 참 잘했소. 당신 공은 꼭 기록하겠소.”하고 말했다.

총전위 지휘부는 상추에서 남쪽으로 십 몇 킬로미터 떨어진 장차이위안춘(張菜园村)에 설치했다. 이때 류보청과 천이는 시바이포에 가 중앙에 보고하느라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쑤위와 탄전린은 전선에서 치우칭쳰, 리미 병단과의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덩샤오핑 혼자 총전위에서 전방 작전을 지휘하고 각종 전문과 보고서 등을 처리했다. 또 화이하이 전역의 각종 사무를 총괄하고 중원 야전군의 휴식과 정돈을 안배하고 보충하는 일을 했다.

1949년 1월 5일, 장제스는 두위밍에게 포위망을 돌파하라고 명령하였다. 두위밍은 탄약과 식량이 부족하고 장병들이 힘이 없어 어렵다고 회신하였다. 장제스는 3일간 공중보급을 할 테니 돌파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1월 6일이 되자 해방군이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두위밍은 장제스에게 마지막 전문을 보냈다. “부대는 이미 혼란에 빠졌습니다. 내일까지 버티기 어렵습니다. 오늘 저녁 부대별로 돌파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래 두위밍 본인은 포위망을 벗어날 기회가 있었다. 두위밍 집단군이 천관좡에서 포위된 지 40일째 되는 날 장제스가 전문을 보냈다. “제자는 병이 있다고 들었다. 일간 비행기를 보낼 테니 제자는 난징에 와서 치료를 받으라.” 치우칭취안도 장제스에게 두위밍의 소환을 요청했다. 그러나 두위밍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장제스에게 이렇게 회신했다. “제자는 몸에 병이 있어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수십만의 충성스러운 병사들을 버릴 수 없습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이들과 함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그사이 천이는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어 두위밍에게 투항할 것을 권하였다. 12월 17일에는 마오쩌둥도 “두위밍의 투항을 촉구한다.‘는 권고서를 보냈다. 그러나 두위밍은 끝까지 장제스와 함께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1949년 1월 6일, 핑진전역을 맡은 해방군이 베이핑과 톈진의 분할과 포위를 완성하였다. 쉬고 있던 해방군은 칭룽지(青龍集)와 천관좡에 포위되어 있던 두위밍 집단군에 총공격을 시작했다. 1월 9일 리미가 지휘하던 13병단은 대부분 섬멸당하고 잔존 부대가 제2병단 방어구역으로 철수했다. 1월 10일 마침내 전투가 끝이 났다. 쉬저우 초비 총사령부 부총사령 겸 전진지휘부 주임 두위밍은 포로가 되었다. 역시 부총사령 겸 전진지휘부 부주임을 맡았던 2병단 사령관 치우칭쳰은 전사하고 13병단 사령관 리미는 도주했다. 벙부에서 북진하던 리옌녠의 6병단과 류루밍의 8병단은 화이허 이남과 창장 북쪽 지역을 포기하고 강남으로 철수했다. 화이하이 전역은 비로소 끝이 났다. 해방군은 창장 북쪽의 드넓은 토지를 점령했다.

두위밍, 베이징 애국혁명열사능에 묻히다

1949년 1월 9일 저녁 두위밍은 부관을 데리고 경호병 십여명과 함께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곧 해방군에 붙잡혔다. 포로가 된 뒤 그는 자살하려고 하였으나 해방군 병사가 가로막아 미수에 그쳤다. 두위밍은 화동 야전군 4종대 지휘부로 압송되었다. 두위밍은 화동 야전군 4종대 사령원 타오용(陶勇) 및 정치위원 궈화뤄(郭化若)과 면담하였다. 그때 두위밍은 두 사람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우리가 패한 것은 총통이 류즈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말을 듣지 않아 전멸당한 것이다. 나는 본래 이 전역에 참가하고 싶지 않았다.” 그후 두위밍은 화동 야전군 지휘부로 압송되었다.

비운의 장군 두위밍, 막 포로가 되었을 때 모습이다.

화동 야전군 사령원이던 천이는 두위밍을 보고 싶어 하였다. 두위밍은 천이와의 면담을 거부하였다. 두위밍은 전범으로 10년 동안 개조를 받다가 1959년 12월 4일 특사로 풀려났다. 그후 여러 차례 저우언라이와 천이 등 중국 지도부 인사들과 접견했다. 12월 13일 두위밍은 저우언라이 및 천이와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생도 두위밍은 스승을 볼 낯이 없습니다. 스승을 따라 혁명의 길로 가지 못하고 반혁명 대열에 섰습니다. 죄송합니다.” 황푸군관학교 시절 저우언라이는 정치부 주임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생도였던 두위밍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생도들을 탓할 수 없습니다. 선생이 잘못 가르친 탓입니다.” 두위밍은 또 천이에게도 토로하였다. “내가 화이하이 전장에서 막 포로가 되었을 때 천 사령이 나를 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반동적 입장을 견지하여 만나기를 거부했습니다. 완고한 태도를 보였으니 죄가 무겁습니다.” 천이는 “과거의 일일 뿐이오.”하고 웃었다.

1960년 5월 저우언라이와 천이는 인민대회당에서 영국 원수 몽고메리를 만났다. 그때 두위밍을 청하여 함께 만났다. 저우언라이가 몽고메리에게 두위밍을 소개하자 몽고메리는 “두 장군, 당신의 백만대군은 어디로 갔습니까?” 하고 물었다. 두위밍은 천이를 가리키며 “모두 저 사람에게 보냈습니다.”하고 대답했다.

두위밍은 석방된 뒤 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두위밍은 1981년 고질인 신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을 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타이완에 있는 동창, 친우, 동포들은 민족의 대의를 중하게 여겨 평화통일을 앞당겨 달라.” 중국 공산당은 두위밍의 추도식에서 이렇게 추도했다. “두위밍은 곡절 많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후반부는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인민의 혁명사업에 공헌했으며 인민들은 그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유명한 애국인사이다.”

두위밍은 전범 중 가장 먼저 석방되었다. 사망 뒤에는 베이징 교외의 빠바오산 애국혁명열사능에 묻혔다.

전역의 규모

화이하이 전역은 국공내전에서 전략적 결전이었던 3대 전역중 규모가 가장 큰 전역이었다. 1948년 11월 6일부터 1949년 1월 10일까지 66일이 소요되었다. 국군은 잇따라 7개 병단, 2개 수정구, 34개 군, 86개 사단, 모두 80만명을 투입했다. 항공기 출동은 2,957회에 이르렀다. 해방군의 참전부대는 화동 야전군 16개 종대와 중원 야전군 7개 종대, 화동 군구와 중원 군구에 관련한 지방부대 등 모두 60만명이었다. 전역 중 섬멸당한 국군은 쉬저우 초비 총사령부 전진지휘부가 지휘했던 5개 병단부대, 22개 군, 56개 사단, 1개 수정구의 정규군 및 기타 부대등 총 555,099명이었다. 참전병력의 69퍼센트가 섬멸당한 셈이다. 그중 포로가 320,355명, 사살 171,151명, 투항 35,093, 기의로 인한 재편이 28,500명이다. 국민정부군 소장 이하 고급 장교 포로가 124명, 투항 22명, 기의가 8명이다. 이 통계에는 흩어지거나 도망한 사람은 포함되지 않았다. 주요 노획물은 화포가 4,215문, 중경기관총이 14,503정, 장총과 단총이 151,045자루, 비행기 6대, 탱크 및 장갑차 215량, 자동차 1,747량, 마차 6,680량, 포탄 120,128발, 총알 2,015만 1천발이다.

해방군 사상자는 전사가 25,954명, 부상이 98,818명, 실종이 11,752명으로 모두 136,524명이다. 국군과 해방군의 손실 비율은 4.06:1이 되었다. 3대 전역 중 화이하이 전역에서 사상한 해방군의 숫자가 가장 많았으며 다른 두 전역에서 사상한 숫자를 넘어섰다. 화이하이 전역이 얼마나 격렬하게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화동 야전군은 전투에서 국군 44만명을 섬멸하였다. 화이하이 전역에서 섬멸한 국군 총수의 80퍼센트를 차지하였다. 화동 야전군의 사상자 수도 약 9만명으로 이 전역 사상자 총수의 67퍼센트를 차지하였다.

화이하이 전투에 참가한 국군병사의 모습

화이하이 전투에 참가한 국군 탱크부대

보급관계

거대한 전역에는 지휘와 용병 외에 보급이 관건이다.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은 보급을 대부분 인력에 의존하였다. 류보청, 천이, 덩샤오핑, 쑤위, 탄전린으로 구성된 총전위가 전역의 지휘를 맡았다면 보급은 대부분 공산당 화동국, 화동군구와 화동 야전군 보급부대가 맡았다. 전역 기간에 장쑤성, 산둥성, 안후이성, 허난성에서 543만명의 노무자가 동원되었다. 그중 전선을 따라다니는 상시 노무자가 22만명, 전선과 후방 사이의 노무자가 130만명, 후방 임시 노무자가 391만명에 이르렀다. 보급에 쓴 담가가 20만 6천개, 크고 작은 수레가 88만량, 멜대가 30만 5천개, 가축 76만 7천 마리가 동원되었다. 그밖에도 배가 8,539척, 조달한 식량이 9억 6천만근(중국의 1근은 500그램이므로 9만 8천톤 해당)., 전선에 보낸 식량이 4억 3천 4백만근이었다.

전역의 마지막 단계가 되면 참전 병력과 지원 노무자의 비율이 1대 9에 이르렀다. 전에 없던 대규모 인력 동원은 해방구의 예사롭지 않은 물적 부담 능력을 보여준 것이었다. 노무자의 전선지원 부담이 가장 무거웠던 산둥성 중남지역 해방구는 동원한 노무자가 49만명으로 총인구 300만명의 16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주전장이 되었던 용청(永城)과 샤이(夏邑), 쑤현(宿縣)은 거의 모든 사람이 동원되었다. 이때 보급 관계자들이 제출한 구호는 “가산을 탕진해서라도 전선을 지원하자. 어려움을 참고 고통을 이겨내자. 전역 승리를 쟁취하자.”였다. 화이하이 전역에 대한 수많은 문학작품과 영화가 인민전쟁과 노무자들의 전선지원이 매우 중요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영화로는 ‘화이하이 전역’ ‘마차바퀴는 구른다.’ ‘백합화’ 등이 있다.

장제스의 조변석개식 지휘가 두위밍 집단군을 파멸시켰다

화이하이 전역에서 해방군은 병력과 장비면에서 열세인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국군 집단군과 전략적 결전을 치러 전면적인 승리를 만들어냈다. 해방군이 복잡다변한 상황과 조건에서 승리한 것은 중앙군사위와 총전위의 결정이 긴밀하고 비교적 정확하였기 때문이다. 또 화동 야전군과 중원 야전군이 긴밀하게 협력하였으며 지휘관과 전투원들의 사기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80년대에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사람을 파견하여 화이하이 전장 구지에서 현지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불가사의하다.”고 평가하였다.

1949년 1월 20일, 화동야전군 사령원 쑤위는 야전군 확대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화이하이 전역의 승리는 중앙군사위원회, 마오 주석, 총전위의 정확한 지도에 따른 것이다. 후방 당정군민의 전력을 다한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각 병단, 각 병종의 협동작전이 있었으며 모든 동지들이 기동성 있고 민활하게 지휘했기 때문이다. 전체 지휘관과 전투원들이 괴로움을 참고 영용하게 작전하였다.”

중원 야전군은 ‘솽두이지(雙堆集) 작전 총결’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작전 중 물자공급이 비교적 원활했다. 양식과 탄약은 물론 의료나 구호쪽도 생각보다 곤란하지 않았다. 이것이 작전 승리에서 매우 유력한 요인이다. 이런 보장이 없이 이 작전에서 승리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오백만명의 노무자가 곳곳에 식량을 운반하고 탄약을 운반했으며 부상병을 들어 옮겼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우세이다. 화이하이 전역의 승리는 인민군중이 손수레로 밀어서 만든 것이다. 화이하이 전역의 승리는 인민의 승리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화이하이 전역은 화동 야전군 사령원이었던 쑤위의 역할이 매우 컸다. 위에 쓴 평가는 공산당의 것이므로 공을 당과 총전위에 돌린 것이다. 쑤위는 복잡다변한 전장 상황에 맞게 적시에 병력을 투입하고 이동시켜 결정적인 승리를 만들어 내었다. 운동전으로 적을 유인하여 각개격파하는 것은 쑤위의 장기였다. 그래서 마오쩌둥도 쑤위를 “화이하이 전역에서 쑤위의 공이 으뜸”이라고 칭찬하였다. 마오쩌둥은 해방군에 계급을 도입할 때 쑤위에게 원수계급을 주려 하였다. 그러나 쑤위가 고사하여 대장계급을 받았다. 마오쩌둥은 그때 “쑤위는 10대 대장 중에 으뜸”이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쑤위 본인은 “대장으로 평가받았으면 족하지 무슨 원수인가? 나는 지위가 높아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범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국민당이 실패한 원인은 장제스를 비롯한 통수부의 결심이 자꾸 변하고 각 병단이 서로 협력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밑바탕에는 민심을 잃고 표류한 국민정부가 있었다. 이 때문에 국군의 지휘관들과 사병들은 시작부터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국군 쉬저우 초비사령관 류즈는 이 전역에서 전략의 실패와 전술의 실패가 많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13개 잘못을 열거하였다. 주요하게는 “진퇴를 결정하는데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한 점, 그 결과 응전만 하고 계획이나 준비가 없었던 점, 병력의 형세나 태세에서 열세였으며, 창장과 화이허의 방어를 걱정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점, 병력을 분산하고 부대간 협력이 좋지 못했던 점, 병력의 전용이 민활하지 못한 점, 황웨이 병단이 일찍 동진하여 참전하지 못한 점, 전기를 잃은 점, 두위밍이 쉬저우를 포기하는 모험을 했지만 용감하고 과단성있는 지휘를 하지 못해 신속하게 공산군을 격파하지 못한 점, 그로써 전군을 위험에 빠뜨린 것”을 들었다.

국민당 통수부는 전역 후 이렇게 평가했다. “실패한 주요 원인은 전략적 착오이며 다음으로 전술의 개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략을 받치기가 어려웠다. 또 전투력 유지를 못한 점, 전투력을 통합적으로 발휘하지 못한 점이 있고 정보전 등에서 중대한 잘못이 있었다.” 정보전에서 중대한 책임이란 바로 국방부에서 작전을 책임졌던 궈루구이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가장 중요한 점을 빠뜨렸으니 바로 장제스의 지휘 책임이다. 장제스는 화이하이 전역의 서전에서부터 마무리까지 엉터리 지휘로 국군을 파멸시켰다. 황바이타오 병단의 늦은 후퇴, 황웨이 병단에게 무리한 진격을 명령하여 고립시킨 점, 두위밍 집단군에게 명령을 번복하여 혼란에 빠뜨린 점등 그의 조변석개식 지휘는 자신의 직계 중앙군을 모두 연기처럼 사라지게 만들었다.

화이하이 전역에서 패배하여 장제스는 남쪽 전선의 정예 주력을 거의 잃었다. 국민정부군 가운데 푸쭤이의 화북 집단군은 이미 고립되어 있었다. 바이충시의 화중 집단군은 소수 병력으로 창장을 방어하게 되었다. 시안에 있는 후쫑난 집단군도 서북 야전군의 지속적인 공세로 방어에 급급한 형편이었다. 난징과 상하이, 그리고 항저우 방어를 위해 새로 조직한 탕언보 집단군도 세가 약하여 주력이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화이하이 전역의 실패로 장제스는 국민정부 통치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미국 주중 군사고문단 단장 배드웨이 장군은 미국 육군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렇게 썼다. “국민당 정부가 창장 북쪽에서 실패하여 치욕을 겪었다. 시간이 허락한다고 해도 국민당 정부는 화남지역에서 필요한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인지, 이 지역의 인력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인지, 군대를 재건할 수 있을지 회의를 갖게 한다. 국민당은 완전한 실패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 주중 대사 스튜어트(John Leighton Stuart)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장졔스의 군사역량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리쫑런, 바이충시 등) 광시파는 일순 울분을 토하고 있다. 심지어 (장제스와) 한바탕 하고 싶어하고 있다.”

화이하이 전역의 의의에 대하여 마오쩌둥은 전역이 끝난 뒤 4일째, 1949년 1월 14일 발표한 시국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 인민해방군은 숫자는 물론 사기와 장비 등 모든 면에서 국민당 반동파 정부의 군사역량에 우세를 보이고 있다. 중국 인민은 비로소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지금 상황은 분명하다. 해방군이 남은 국민당군에 대하여 약간의 커다란 타격을 가하기만 하면 국민당 통치는 흙더미처럼 무너질 것이다. 소멸하는 길로 갈 것이다.”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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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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