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호정, ‘비동의 강간죄’
    담은 형법 개정안 발의해
    일부 조문이나 문구 수정 넘어서 형법 32장 전면적 개정의 의미 지녀
        2020년 08월 12일 07:1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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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12일 ‘비동의 강간죄’를 담은 성범죄 처벌 강화를 위한 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해당 개정안은 법안의 일부 내용을 수정·보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투’ 운동과 ‘n번방’ 사건 이후 급변한 시대의 흐름에 맞게 성폭력 범죄를 재규정하는 내용을 담았다.

    류호정 의원은 이날 오후 2시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형법은 국민과 국가의 법익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성범죄 처벌을 통해 보호해야 하는 법익은 성적자기결정권”이라며 “이는 타인에 의해 강요받거나 지배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자율적이고 책임 있게 자신의 성적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자,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과 인격권의 일부”라고 강조했다.

    성폭력이 헌법에서 규정하는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범죄 행위라고 규정한 것이다. 이날 발의된 개정안 역시 성폭력 구성요건과 형량을 수정에 그치지 않고 성범죄에 관한 기본적 사항을 규율하는 형법 제32장을 시대의 변화에 맞춰 전면 재정비하는 내용을 담았다.

    사진=류호정 의원실

    류호정 안, 백혜련 안보다 더 진보한 내용 담아

    류 의원은 개정안에 대해 여성·인권단체가 모인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가 오랜 기간 논의해온 형법 개정안의 내용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비동의 강간죄 내용을 담은 형법 개정안은 20대 국회에서도 수차례 발의됐으나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모두 폐기됐다. 이번 국회 들어선 백혜련 민주당 의원에 이어 류 의원의 법안 발의까지 두 번째다.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두 개정안을 비교해 살펴보면, ‘백혜련 안’은 성폭력 구성요건과 일부 형량 정도를 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폭력 구성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으로’에서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로 개정하고 “사람의 저항을 현저히 곤란하게 하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그 죄에 정한 형의 2분의 1까지 가중할 수 있도록”했다.

    ‘류호정 안’은 이보다 더 진일보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선 성범죄 처벌을 규정한 형법 제32장의 제목 ‘강간과 추행의 죄’를 ‘성적침해의 죄’로 변경했다. 1995년 ‘강간과 추행의 죄’로 제목이 바뀐 후 25년 만이다. 1995년 제목이 바뀌기 전까지 형법상 성범죄 조항들의 제목은 ‘정조에 관한 죄’였다.

    법안 안에 등장하는 성차별적 용어인 ‘간음’이라는 표현도 모두 ‘성교’로 바꿨다. 류 의원은 “간음은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가 아닌 이성과 성관계를 맺음’을 의미한다. 한자 ‘간(姦)’도 ‘계집 녀(女)’ 자를 세 번 쌓은 글자로 ‘간악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간음 대신 성교라는 표현을 사용해) 여성혐오적 표현을 바로잡는 한편 유사성행위 등 간음이 아닌 행위를 포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회견에 참석한 배복주 정의당 여성본부장은 “이번에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개정안은 형법 297조와 298조 조문 개정에 머무르지 않고 형법 32장을 전면적으로 개정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특히 성차별적인 ‘간음’을 삭제하고 ‘성교’를 추가한 것은 기존의 유사강간을 강간으로 규정함으로써, 우리는 이후 수사기관이나 재판부로부터 ‘성기의 삽입이 있었는가’와 같은 모욕적이고 무례한 질문을 듣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간죄를 행태에 따라 유형화한 내용도 담겼다. 297조 강간죄의 1항에 비동의 강간죄를 신설했다. ‘상대방의 동의 없이 사람과 성교한 사람은 1년 이상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현행법은 폭력이나 협박에 의한 성폭력만 처벌하도록 해 피해자 보호에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2019년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소속 성폭력상담소의 상담 사례 조사 결과를 보면 보여주듯이 강간피해 상담 중 폭행이나 협박 없이 성폭력이 이뤄지는 경우가 70%가 넘었다. 실제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 또한 폭행, 협박이나 위력의 행사와 같은 행위가 없더라도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성관계를 처벌할 것인지 여부가 입법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안 전 지사를 처벌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바 있다.

    특히 기존에 업무상 위계·위력에 의한 성폭력만 처벌하도록 한 기존의 강간죄 구성요건을 확장한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근로계약 관계가 아닌 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성폭력 범죄도 처벌이 가능한 조항을 마련한 것인데, 미투 운동으로 드러난 문화·예술·체육계나 종교계 성폭력 문제를 반영한 조항인 셈이다.

    여성단체 대표자들 대거 회견 참여해 개정안 발의 환영

    이날 회견엔 강혜란 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 김경숙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김태옥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소장,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등 여성단체 대표자들이 대거 참석해 비동의 강간죄를 담은 형법 개정안 발의를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동의 여부로 강간죄를 판단하고 있고, 2018년 제8차 한국 정부 성평등 정책 심의 ‘젠더에 기반한 여성에 대한 폭력(Gender Based Violence)’ 분야 첫 번째 권고는 형법 297조의 강간죄 구성요건을 동의 여부로 바꾸라는 것이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이번 강간죄 구성요건의 개정은 단순히 형법 조항 하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성적행동에도 상대방의 동의를 전제해야 한다는 가장 상식적인 규범과 실천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며 “국회는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이 법안에 대한 심의·의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는 “강간죄의 판단기준을 ‘동의 여부’로 바꾸는 것은 여성의 온전한 시민권 보장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며 “성적자기결정권은 폭행·협박 등 강제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호동의와 이해에 기초한 민주적인 관계가 훼손될 때 침해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를 명확히 인식하고 보다 진전된 인권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동의 없음’을 성적자기결정권 침해 범죄의 기본유형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동안 여성들은 남성중심적 시각에서 만들어진 법의 문제, 법이 어떻게 성차별을 강화하고 여성기본권을 침해해왔는지 드러내고 변화를 만들어왔다. 호주제 폐지운동, 낙태죄 폐지운동, 미투운동 등이 모두 그 예”라며 “우리는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형법 개정안 발의를 환영하며 실질적 입법 과정에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비동의 강간죄를 포함한 성범죄 처벌 강화를 위한 형법 개정안엔 정의당 의원 전원, 국회부의장인 더불어민주당 김상희 의원과 권인숙·정춘숙·양이원영·이수진·윤재갑 의원, 국민의당 최연숙 의원 등 총 12명이 공동 발의자로 이름을 올렸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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