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군, 솽두이지에서
황웨이 병단을 섬멸하다
[국공내전㊽] 화이하이전역4-국군, 공산당의 각개격파 전술에 휘말려
    2020년 08월 12일 12: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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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는 주도권이 매우 중요하다. 주도권이란 자신의 의사대로 전역이나 전투를 끌고 가는 것을 말한다. 반대되는 의미로는 피동 또는 피동적이라는 말을 쓴다. 상대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을 피동이라 하니 전쟁이나 전투에서 가장 피해야 할 상황이다. 1948년 들어 국민정부는 전쟁의 주도권을 공산당에게 넘겨주었다. 국민정부가 공세에서 방어로 돌아선 것이 1948년 1월부터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국군은 해방군의 공세에 밀리며 하반기에는 본거지인 베이핑과 난징까지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다.

화이하이 전역에서 해방군이 각개격파 전략을 채택했다면 국군의 전략은 공세적 방어 전략이었다. 주력을 쉬저우나 벙부 주변에 집결시켜 남하하는 해방군과 결전을 하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황바이타오 병단의 후퇴가 늦어지면서 국군의 계획은 시작부터 어그러졌다. 황바이타오 병단이 포위되어 구원병을 보내는 일은 국군의 계획에 없던 상황이었다.

“성이나 적병 일부를 포위한 뒤 지원군을 공격한다.”는 전술은 해방군이 자주 쓰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장제스는 번번이 해방군의 작전에 말려들었다. 동북에서 장제스는 지휘관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랴오야오샹 병단에 진저우 공격을 명령하였다. 그 결과 랴오의 병단은 물론 선양까지 해방군에게 넘겨 주었다. 50만 대군이 동북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바둑의 하수가 상수의 의도대로 손 따라 두는 것처럼 장제스는 언제나 허둥지둥하며 해방군의 공세를 막기에 급급하였다. 만약 두위밍의 제안처럼 주력으로 쉬저우 서쪽의 중원 야전군을 공격했더라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황바이타오 병단의 포위망 탈출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전쟁의 양상이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전쟁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다. 하지만 두위밍의 진언을 받아들여 산둥성을 선제 공격했다면 전혀 다른 국면이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국민정부가 주도권을 되찾으며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장제스는 황바이타오 병단의 섬멸 과정에서 뭔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해방군은 황바이타오 병단을 섬멸한 데 이어 또 한 사람의 충직한 국군 장군 황웨이의 병단을 맞아 싸우게 된다.

책벌레 장군 황웨이

황웨이는 황푸군관학교 1기생 출신이다. 그는 중국 공산당 초기 영도자 중 한 명인 팡즈민(方志敏)의 안배로 황푸에 입교한 특이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청년기에 공산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입은 사람인데 내전에서는 가장 철두철미하게 해방군과 싸웠다. 황웨이의 별명은 ‘책벌레’이다. 그는 국군에서도 황푸 교관을 비롯하여 군사학교 교수직에 오래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학자풍이었는데 강직한 성격에다 불요불굴의 의지가 있었다. 그는 중일전쟁에서 전력이 열세인데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1937년 상하이 방어전에서 그는 사단장으로 일본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일주일간의 공방전에서 휘하 연대장 중 한 명은 전사, 두 명은 중상을 입는 대혈전이었다. 그때 황웨이 사단의 병사들은 전보 관리병 한명을 빼놓고 문서 관리병과 취사병까지 총을 들고 전투를 벌였다. 전투 후에 점검해보니 사단병력이 모두 사상하여 1개 연대 병력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우한 방어전이나 버마 전투에서도 그는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유명하였다.

내전이 발발한 뒤 황웨이는 타이완, 푸젠, 저장 등 후방에서 근무했다. 주로 군사 교육기관에서 지휘관들을 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화이하이 전역에서 그는 12병단 사령관을 맡았는데 바이충시의 화중 사령부 휘하였다. 12병단 사령관은 본래 후롄의 자리였다고 한다. 전임 참모총장인 천청이 내전에서 용맹을 떨친 후롄을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바이충시가 견결히 반대하여 황웨이가 대신 임명되었다. 천청의 직계인 후롄이 바이충시와 불화하였기 때문이다. 후롄은 황웨이의 병단에서 부사령관 겸 18군 군단장을 맡았다. 18군은 장제스의 5대 주력부대 중 하나로 ‘최강의 부대’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황웨이와 후롄은 다같이 장제스의 애장으로 화이하이 전역과 그 후의 전투에서 여러 일화를 남기게 된다.

각개격파의 목표가 된 황웨이 병단

황바이타오 병단이 녠좡에서 포위되었을 때 장제스는 허난성에 주둔해 있던 황웨이의 12병단에 화이하이 전역에 참전하라고 명령하였다. 당시 12병단은 제10, 14, 18, 85군 등 4개 군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총 병력은 12만명이었다. 대부분 미제 무기와 장비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전투력이 강한 장제스 직계 부대였다. 장제스는 리옌녠(李延年)의 6병단, 류루밍의 8병단에게도 북쪽으로 진군하여 쑤현(宿縣: 1992년 쑤저우시(宿州市)로 개명)을 다시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황바이타오 병단의 포위를 풀고 쉬저우 국군의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황웨이 병단은 1948년 11월 6일과 8일 허난성 췌산(确山)과 주마덴(駐馬店)에서 두 갈래 길로 출발하여 푸양, 쑤현 방향으로 전진하였다. 쑤현은 쉬저우와 벙부 사이 딱 중간쯤에 있는 작은 도시로 핑한철로(베이핑-한커우)상에 놓여 있었다. 국공 모두 이곳을 점령하면 핑한로를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지였다.

공산당 중원 야전군 사령인 류보청은 야전군 주력부대에게 11월 11일 야간에 쑤현지역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하였다. 미리 자리를 잡고 황웨이 병단을 포위하기 위해서였다. 13일 저녁 중원 야전군 2개 종대가 쑤현을 포위 공격하여 16일 새벽에 점령하였다. 이로써 쉬저우 국군은 철도를 이용하여 후퇴할 수 없게 되었다. 벙부의 국군도 쉬저우 방향으로 지원하기가 곤란해졌다. 쑤현을 해방군이 계속 장악하고 있는 한 쉬저우의 국군은 벙부 및 난징과 연락이 끊겨 고립무원의 상태가 된 것이다. 해방군은 이곳에서 황웨이 병단을 포착 섬멸하여 이미 승기를 잡은 화이하이 전역의 승리를 굳히려 하고 있었다. 그 후에는 쉬저우에 포진해 있는 국군 주력 두위밍 집단군을 섬멸할 계획이었다. 화이하이 전역이 이쯤에 이르면 동북의 랴오선 전역과 비슷한 양상으로 되었다. 동북에서는 진저우를 점령당하여 선양의 국군이 철수할 길이 막혔던 것이다. 따라서 장제스가 황웨이와 리옌넨, 류루밍 병단에게 쑤현을 확보하라고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바이타오가 이끄는 국군 제7병단의 섬멸 위기는 황웨이 병단에도 위기로 작용했다. 벙부에서 북진하던 리옌녠의 제6병단과 류루밍의 제8병단이 해방군의 공격을 우려하여 전진을 늦춘 것이다. 그에 따라 화중지역에서 쑤현으로 진격하던 황웨이 병단의 위치가 돌출, 고립되게 되었다. 전장의 형세는 국군에게 매우 불리했다. 해방군이 요격하는 상황에서 3개 병단은 쉬저우에 접근하여 쉬저우-벙부 간 철도를 연결시킬 방법이 없었다. 황웨이의 제12병단은 멍청(蒙城)에서 출발하여 궈허(涡河)를 건넜다.

쑤현을 점령한 뒤 류보청은 주력을 남하시켜 국군의 황웨이 병단에 대한 지원을 차단하게 하였다. 1948년 11월 22일, 황웨이 병단은 후이허 상류에서 중원 야전군 부대에 저지당했다. 황웨이 병단에 호응하기 위해 북상하던 리옌녠, 류루밍 병단도 런차오(任橋), 구쩐(固镇) 지역에서 중원 야전군 부대의 저지에 막혔다. 이 날은 녠좡에서 12일간 사투를 벌이던 황바이타오 병단이 섬멸 당한 날이었다. 장제스의 황바이타오 병단 구원계획이 최종적으로 무산되었다. 그리고 쑤현을 점령하여 쉬저우-벙부 간의 철도를 장악하려던 계획도 커다란 위기에 처하였다. 황바이타오 병단 공격에 참전하던 화동 야전군이 추가로 전장에 병력을 투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황바이타오의 7병단이 섬멸당하여 국군의 쉬저우 동쪽 수비망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11월 22일, 해방군 화이하이 전역 총전위는 회의를 열어 황웨이 병단 포위섬멸 방침을 의논하였다. 화이하이 전역 총전위는 전선위원회로 중원 야전군과 화동 야전군을 통일 지휘하기 위해 구성되었다. 덩샤오핑이 서기로 조직을 총괄하였으며 중원 야전군의 류보청과 천이, 화동 야전군의 쑤위와 탄전린이 함께 작전방침을 수립하였다.

덩샤오핑과 류보청은 중원야전군 사령과 정치위원으로 고락을 함께 하였다.

젊은 시절의 덩샤오핑. 곡절끝에 국가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23일밤, 총전위는 중공 중앙에 보고하였다. “지금 황웨이 병단을 섬멸하기에 좋은 시기입니다. 후이허 북쪽에 포대 모양의 매복진지를 구축하고 적을 유인하겠습니다. 그곳에서 적을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24일 오후 중앙군사위는 회신 전문을 보냈다. “황웨이 병단을 먼저 공격하는 데 완전히 동의한다. 쑤위, 천스지, 장쩐 동지는 류보청, 천이, 덩샤오핑 동지의 부대배치에 따르라. (총전위는) 병력을 내어 황웨이를 공격하라. 상황이 긴급할 때는 류보청과 천이 그리고 덩샤오핑 동지가 임기응변하여 조치하라. 중앙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된다.” 황웨이 병단 공격에 주력을 맡은 중원 야전군 지휘부의 지휘에 따르도록 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총전위는 중원 야전군 7개 종대 및 화동 야전군 2개 종대를 동원하여 황웨이 병단을 후이허 남쪽과 북쪽 지역에서 섬멸하기로 하였다. 쉬저우와 벙부에서 구원 올 국군을 요격하기 위해 따로 주력을 배치하기로 하였다.

11월 23일, 국군 쉬저우 지휘부의 두위밍과 류즈는 난징의 장제스 관저에서 군사회의에 참가하였다. 이날 회의에서 국방부 작전청장인 궈루구이가 다음 작전계획을 보고하였다. “진푸철도의 쉬저우와 벙부 간을 장악하기 위해 쉬저우의 주력부대가 쑤현 북쪽 푸리지(符離集) 방향으로 공격 전진한다. 쑨웬량 병단과 황웨이 병단은 쑤현을 공격하여 쉬저우쪽 부대와 남북으로 협격하여 일거에 해방군을 격파한다.” 장제스는 두위밍에게 작전계획에 따라 공격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두위밍이 보기에 이 작전은 너무 위험했다. 쑨웬량 부대와 황웨이 부대가 순조롭게 같은 시간대에 도달하여 함께 작전해야 했다. 도착시간이 사로 다르거나 부족하게 되면 황웨이 병단이 포위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두위밍은 3개 군을 벙부에 집중시켜 참전하도록 하고 2개 군을 이동시켜 추가로 참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제스는 5개 군을 이동시키기는 어렵다고 대답했다. 두세개 군을 이동시킬 수는 있으니 반드시 계획대로 집행하라고 지시했다. 두위밍은 쉬저우로 돌아와 부대들에게 푸리지 방향으로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1948년 11월 23일, 중원 야전군 각 부대가 전 전선에서 출격하였다. 황웨이는 벙부의 리옌녠 병단과 쉬저우의 치우칭첸 병단 및 쑨웬량 병단과 남북으로 대진하여 쉬벙로(쉬저우-벙부)의 교통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황웨이의 부대는 후이허 남안의 난핑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중원 야전군 4종대의 완강한 저지에 부딛쳤다. 4종대 사령원인 천겅은 황웨이와 황푸 동창이었다. 고지식한 황웨이의 성격을 아는 천겅은 허허실실 병법으로 황웨이를 현혹하였다. 그날 저녁 중원 야전군은 방어하던 난핑지 진지를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황웨이 병단을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1948년 11월 24일 오전 황웨이 병단은 후이허를 강행 도하하여 둥핑지(東坪集), 런자지(任家集), 치리차오(七里橋), 朱口(주커우) 등에 부대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 지역은 중원 야전군이 펼쳐놓은 포대형 매복 포진 안이었다. 황웨이는 시세가 불리한 것을 깨닫고 그날 오후 즉시 각 부대에 남쪽으로 집결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지휘관들에게 집결한 뒤 후이허 남안을 따라 후거우지(胡溝集), 구쩐(固鎭) 방향으로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구쩐의 리옌넨 병단과 합류한 뒤 진푸로를 따라 북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날 해질녘 중원 야전군이 전 전선에서 출격하여 4개 종대가 각각 쑨퇀지(孫疃集), 우거우지(五沟集), 바이샤지(白沙集), 차오스지(曹市集)에서 황웨이 부대쪽으로 돌격하였다. 해방군 부대들은 동쪽과 서쪽에서 황웨이 부대를 협격하는 한편 북쪽에서 남쪽으로 밀어 붙였다.

1948년 11월 25일, 해방군은 황웨이 병단을 쑤현(宿縣: 1992년에 쑤저우시로 개칭) 서남쪽 솽두이지의 가로 세로 약 7.5킬로미터의 지역에서 포위하였다. 7개 종대 병력이 포위에 가담하였으니 철통같은 포위망이었다. 이때 장제스는 12군 부사령원 겸 18군단장 후롄을 난징으로 불러 전황을 물어보았다. 이때 후롄은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집에 가 있었다. 솽두이지 전선전황이 심각한 것을 확인한 장제스는 후롄에게 “진지를 고수하라. 필승의 신념으로 임하라.”고 격려하였다. 후롄은 소형 비행기를 타고 12월 1일에 솽두이지 전선으로 돌아갔다.

1948년 11월 26일, 장제스는 황웨이에게 해방군의 포위가 취약한 동남쪽 지역으로 돌격하여 포위망을 벗어나라고 명령하였다. 1948년 11월 27일, 황웨이는 휘하 부대를 지휘하여 중원 야전군 포위부대에 잇따라 돌격하였다. 탱크와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지원했으나 해방군의 포위를 뚫을 수 없었다. 그날 돌격하던 중 국군 110사단장 랴오윈저우(廖運周)가 기의를 선언하였다.

랴오윈저우는 오래된 골수 공산당원으로 1927년 난창 기의에도 참여하였다. 난창 기의는 상하이 정변을 일으켜 노동자와 공산당원을 학살한 장제스에게 대항하여 국군 안에 잠복해 있던 공산당원들과 노동자들이 일으킨 무장봉기였다. 저우언라이, 주더, 예팅, 허룽, 류보청, 녜룽전 등이 이끈 봉기에서 봉기군은 장시성 성도인 난창을 잠시 점령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밀려났다. 중국은 난창봉기 시작일인 8월 1일을 인민해방군 창건일로 기념하고 있다. 어쨌든 랴오윈저우는 난창 기의는 물론 라이우 병변 등 여러 곳에서 봉기를 일으켰으나 용케 신분을 감추고 국군 안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기의를 일으킨 시점까지 계속 공산당과 연락을 유지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사단장으로 승진한 1945년부터 기의를 노렸으나 결정적인 시기를 기다리라는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사단 안에서 부대를 장악해가고 있었다. 내전 드라마를 보면 랴오윈저우는 사령관인 황웨이에게 포위망 돌파의 선봉을 자임하며 기의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려고 애를 쓴다. 부사령원인 후롄이 그를 의심했으나 황웨이는 그를 신임하여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랴오윈저우가 기의를 선언하고 병력을 인솔, 부대를 이탈하자 포위망 탈출계획은 엉망이 되었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것은 물론 부대를 재편성하여 배치해야 했던 것이다.

그 뒤 장제스는 황웨이에게 현지를 고수하며 구원병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하였다. 황웨이는 병단 사령부를 솽두이지 북쪽 샤오마좡(小馬庄)에 설치하고 각 부대를 종심 및 네 방향으로 배치하였다. 황웨이 병단이 마을에 의지하여 보루를 쌓고 방어하자 중원 야전군은 ‘보루에는 보루’ ‘참호에는 참호’의 전술을 채택하여 보루와 참호를 건설하며 바짝 접근하였다. 해방군은 포위망을 압축하여 국군을 마을에서 밀어내려 하였다. 해방군은 차근차근 전진하며 한 마을 한 마을을 점령해 나갔다. 1948년 12월 2일, 황웨이 병단은 솽두이지를 중심으로 반경 5킬로미터의 좁은 지역으로 몰렸다. 이때 화동 야전군은 중원 야전군의 포위공격 엄호를 위해 두 개의 요격병단을 편성하여 쉬저우에서 남쪽으로 구원하러 온 치우칭첸 및 쑨웬량 병단과 벙부에서 북쪽으로 접근하는 리옌녠, 류루밍 병단을 저지하였다.

1948년 12월 5일 류보청, 천이, 덩샤오핑은 황웨이 병단에 대한 총공격 명령을 하달했다. 각 부대에 어떤 희생이라도 무릅쓰고 임무를 완성하라고 지시했다. 중원 야전군 지휘부는 공격부대를 3개로 편성하여 각각 천겅과 셰푸즈, 천시롄, 왕진산과 두이더에게 각각 지휘하게 하였다. 천겅과 셰푸즈는 공격의 주력을 맡아 황웨이 병단의 방어체계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맡았다.

붉은 표시점이 솽두이지. 박스 안의 원 표시지역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상추, 쉬저우, 벙부, 푸양

1948년 12월 6일 16시 30분 중원 야전군이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해방군은 세 방향에서 각각 돌격하여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1948년 12월 12일 류보청과 천이는 ‘황웨이는 즉시 투항하라’는 투항서를 뿌렸다. 황웨이는 단호히 뿌리치며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황웨이는 오히려 독가스 살포를 명령하며 최후의 저항을 거듭하였다. 내전에서 독가스를 사용한 것은 황웨이 병단이 처음인데 장제스의 밀명이 있었다고 한다. 최루가스를 비롯하여 질식성 가스, 신경성 가스등을 살포하였으나 전황을 바꾸기는 힘들었다.

솽두이지 전투 기록화. 트럭으로 바리케이드를 쌓은 것이 국군이다.

솽두이지 전투에서 해방군이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바이충시, 장제스의 구원 요청을 거절하다

한편 난징에 있는 장제스는 황웨이 병단을 구원하기 위해 고심했으나 움직일 병력이 부족했다. 두위밍이 지휘하는 쉬저우 집단군 주력이 모두 출격한 것이다. 장제스는 부득이 우한에 있는 바이충시에게 구원병을 보내라고 요청했다. 그때 바이충시는 우한 초비사령부에서 30만명의 대병을 지휘하고 있었다. 포위 당해 섬멸될 위기에 처한 황웨이의 12병단도 지휘체계상 바이충시의 휘하였다. 장제스에게 화이하이 전역 참전명령을 받은 황웨이가 부대를 즉시 출발시키려고 하였으나 바이충시는 12병단 소속부대의 귀대를 방해하였다. 장제스의 협조 요청이 있고서야 12병단 소속 85군이 겨우 합류할 수 있었다.

이제 장제스는 황웨이 병단을 구원하기 위해 직계인 쑹시롄의 14병단을 참전시킬 생각이었다. 14병단 또한 편제상 바이충시의 휘하로 후베이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장제스의 전보를 받은 쑹시롄은 부대를 한커우에 집결시켜 수로를 이용하여 쉬저우 방면으로 이동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바이충시가 동의하지 않았다. 자신이 수비하는 화중지역이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바이충시는 병력을 파견하여 쑹시롄의 14병단이 타고 갈 선박을 지키게 하였다. 부득이 장제스가 바이충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부터 두 사람 사이에 언성이 높아지고 마침내 장제스의 화가 폭발했다. “지엔셩(建生: 바이충시의 호이다.), 지휘관이 되어 총통의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는 건가?” 그러자 바이충시는 태연히 “합리적인 명령이면 나는 복종합니다. 불합리한 명령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고 대꾸했다. 장제스는 화가 난 나머지 전화통을 던져 버렸다. 바이충시가 공공연하게 명령을 거부한 것은 장제스의 세력이 기울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때는 미국이 공공연하게 장제스의 후임을 물색하고 있을 때였다. 미국의 선택지가 부총통인 리쫑런으로 기울고 있음을 바이충시는 잘 알고 있었다.

중원 야전군, 황웨이 병단을 완전히 섬멸하다

1948년 12월 13일, 황웨이 병단은 동서 1.5킬로미터의 좁은 지역으로 압축되었다. 1948년 12월 15일 황웨이 병단은 완전히 섬멸되었다. 사령관 황웨이와 부사령관 우샤오저우(吳紹周) 등은 포로가 되었다. 부사령관 후롄이 지휘한 18군은 최후까지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취사원까지 총을 들고 싸운 18군에는 투항자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전군이 섬멸당하기 전 후롄은 전차를 타고 탈출했다. 그는 군의관에게 수면제를 다량 요구하여 휴대하였다. 만약 탈출이 불가능할 경우 자살할 생각이었다. 그는 전차를 타고 겹겹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는데 해방군의 포격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래도 요행히 포위망을 벗어난 18군 기병연대를 만났다. 이로써 장제스는 12병단에서 용장인 후롄 한 명을 건지게 되었다. 그는 중상을 입고 상하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후롄은 1949년 ‘진먼전투’에서 진먼다오에 상륙한 해방군 1만명을 섬멸하고 5천명을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다. 마오쩌둥은 후롄을 가리켜 “교활하기는 여우같고 용맹하기로는 호랑이같다. 위험을 잘 벗어나고, 실력을 지킬 줄 알고, 승리할 기회를 엿볼 줄 안다.”고 평가했다. 한마디로 용병을 잘하는 지휘관이라는 뜻이다.

솽두이지 전투에서 해방군은 1개 병단, 4개 군, 12개 사단, 1개 쾌속종대 등 12만명을 섬멸하였다. 그중 포로가 4만 6천명, 사상자가 4만 6천명, 기의가 5,500명, 투항이 3,300명이었다. 각종 화포 870문, 탱크 15량, 자동차 300량 등을 노획하였다. 해방군은 3만명이 사상하였다.

황웨이 병단이 섬멸할 때는 쉬저우에서 철수하지 못한 두위밍 집단군도 포위를 당하던 시기였다. 황웨이 병단이 섬멸당하자 황의 병단을 구원하느라 발이 묶인 두위밍 집단군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포로가 된 황웨이의 12병단 병사들

해방군이 승리한 또 다른 이유

양바이타오(楊伯濤)는 황웨이 병단의 18군 군단장이었다. 황웨이와 함께 화이하이 전역에 참전하였다가 솽두이지에서 포로가 되었다. 그는 당시의 정황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12병단은 11월 췌산에서 출발하여 허난성과 안후이성 경계를 지났다. 백성들이 모두 피하여 길 안내자를 찾기 힘들 지경이었다. 개와 닭도 보기 힘든 형편이었다. 나는 그때 황허가 범람하여 황량해진 모습을 보았다. 국공이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니 더욱 인적이 드물었다. 그후 나는 포로가 되었다. 해방군은 솽두이지 부근에서 린환(臨渙)으로 우리를 압송하였다. 90리 길을 지나는 동안 사방을 둘러보았다. 강산은 그대로인데 거리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었다. 인적의 통행이 빈번하고 수레의 왕래가 그치지 않았다. 나는 이전에 그곳을 지난 일이 있었다. 초가집에 인적이 없어 거리가 죽은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집집마다 사람이 있고 밥짓는 연기가 피어 올랐다. 거리에는 만두나 땅콩, 술 담배를 파는 가게들이 있었다. 돈이 있는 포로들은 다투어 사먹었다. 압송하던 해방군도 막지 않았다. 그들도 만두나 땅콩은 오랜만에 보는 것이다. 커다란 수레가 눈앞에서 지나기도 하였다. 어떤 수레에는 잡아서 깨끗이 손질한 돼지고기가 실려 있는데 해방군에게 가져다 주는 것 같았다. 전에 우리가 지나갈 때는 돼지털 한줌 본 적이 없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마을을 지날 때 해방군과 마을 주민이 가족처럼 친밀하고 웃으며 이야기하였다. 솥에 둘러 앉아 함께 밥을 먹기도 하였다. 입고 있는 옷이 달라서 그렇지 농민과 군인이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우리 국민당군 장교들은 포로가 되어서야 이런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국군이 지나갈 때는 사람들이 모두 무서워할 뿐이었다. 해방군이 오면 사람들은 자기 가족처럼 대하였다. 민중의 지지가 있어 해방군의 보급이 가능하였다. 이것이 해방군이 승리한 주요 원인이다. 이 점에 대하여 황웨이는 알지 못하였다.”

황웨이가 석방된 뒤 부부의 모습. 부인은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황웨이와 가정의 비극

황웨이는 포로가 된 뒤 전범으로 사상개조를 받았다. 국군 포로 가운데에서 그는 가장 늦게 석방되었다. 1975년에 석방되었으니 26년만에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 부인 차이뤄슈(蔡若曙)의 고초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국군 고위 지휘관들이 그렇듯 그의 부인도 대갓집 규수인데다 뛰어난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석방되는데 황웨이만 계속 구금되어 있자 차이뤄슈는 정신질환을 얻게 되었다. 차이뤄슈는 도서관에서 일하며 홀로 세 자녀와 보모까지 부양해야 하였다.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남편은 소식이 끊겨 어디 있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자신은 수없는 비판을 받으며 신경쇠약이 악화되었다. 황웨이가 석방되었을 때 젊었던 부인은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석방된 뒤 황웨이는 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차이뤄슈는 증세가 더욱 악화되어 끝내 강물에 뛰어들어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황웨이가 또 다시 잡혀 갈까봐 전전긍긍하였으며 환청에 시달렸다고 한다. 황웨이는 석방된 뒤 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다 1989년 85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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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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