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원칙 평화진보 세력 입지 좁혀
    2006년 10월 09일 10:43 오전

Print Friendly

북핵 문제는 한국의 진보진영에게 예민한 주제다. 두 가지 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북한(정권)을 보는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수구냉전적 질서가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상황에서 진보진영의 대북 입장은 여러 변수를 고려해 넣어야 하는 고차함수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진보적 원칙에 입각한 대북 비판이 수구냉전의 프리즘을 통해 굴절되면 의도하지 않은 정치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한다. 반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대북 적대정책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북문제, 딜렘마 또는 고차방정식

예컨데 북한 인권 문제가 그렇다. 현재 북한 인권 문제의 국제적 여론화를 주도하는 것이 미 네오콘 세력이라는 사실은 이 같은 우려의 현실적 근거를 제공한다. 그렇다고 진보적 원칙에 입각한 비판을 등한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원칙적으로 옳지 못할 뿐더러 진보진영의 국내 정치적 토대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최근 진보진영 일각에선 북한에 대해서도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한국 진보진영은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원칙과 ‘대북 적대정책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 사이에서 정확하게 입장 정리를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북핵 문제가 갖고 있는 사안의 복합성과 관련되어 있다. 핵을 고리로 전개되고 있는 북한과 미국의 극단적 양자대결 구도에서 일방에 대한 비판은 자칫 다른 일방에 대한 결과적 정당화로 귀결될 수 있다는 얘기다.

위치 잡기 애매한 북미 핵 정치 지형

예컨데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내세워 북한의 핵실험 발표만을 비난하는 것은 기왕에 핵을 고리로 진행되고 있는 협상에서 미국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될 수 있다. 또 미국의 북미대화 거부만을 탓하는 것은 북한의 핵보유를 정당화하는 상황논리로 작용할 개연성이 있다.

이렇듯 복잡하고 예민한 주제에서 균형잡힌 태도를 취하려면 ‘원칙’과 ‘현실’을 두루 섬세하게 고려해야 한다. 윤영상 ‘평화공감’ 선임연구원은 북핵 문제의 판단틀로 세 가지를 제안한다.

먼저 ‘북한의 핵보유 자체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문제다. 여기에 대해서는 진보진영의 의견이 두루 일치한다. 이른바 한반도 비핵화 원칙이다.

민주노동당은 북한의 핵실험 발표에 대한 지난 4일자 성명에서 "민주노동당은 핵의 무기화 뿐 아니라 핵의 평화적 이용도 반대하고 있다"며 "민주노동당은 한반도에 어떠한 방식의 핵무기도 시험·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 배비(配備)·사용의 금지한다는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는 입장을 분명히했다.

다음은 ‘북한이 핵실험을 발표하게 된 사태 악화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문제다. 여기에 대해서도 진보진영 뿐 아니라 외교안보전문가들의 입장이 대체로 일치한다. 이른바 미국 책임론이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남북한관계연구실장은 미국이 북한 핵을 사실상 허용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본다.

미국은 왜 북한 핵을 허용하나

윤영상 선임연구원도 "미 네오콘이 북 핵보유를 사실상 묵인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민주노동당은 지난 4일자 성명에서 "미국은 9.19 베이징 성명 이후 북핵 문제가 오히려 악화를 거듭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며 "미국은 지금의 상황을 오히려 즐기고 있으며 엄중한 사태를 유도하는 정책을 갖고 있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마지막 질문은 ‘사태 악화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하더라도 북한이 핵을 보유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방법인가’ 하는 물음이다. 즉 북한이 핵을 ‘협상수단’으로 삼은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느냐는 문제다. 이는 원칙의 문제이면서 또한 실질의 문제다. 원칙적인 면에서는 한반도 비핵화에 역행하는 것인만큼 부정적인 반응이 우세하다.

짚어봐야 할 것은 핵을 지렛대로 해서 과연 북미관계 개선이라는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윤영상 선임연구원은 "9.19 합의 후 미국이 위폐문제를 꺼내든 것은 북한과 대화할 용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라며 "이런 마당에 북한이 핵 카드를 들고 나온다고 미국이 대화에 나서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북이 핵실험을 하게 되면 북은 고립될 것이고 미국은 유엔을 통한 다자 제재와 미일 제재에 나설 것"이라며 "미국의 네오콘이 노리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 말했다. 또 "북한이 미국과 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싸우는 방식이 문제"라며 "북 핵실험은 국내외 평화 진보세력의 입지를 좁힘으로써 북한의 협상력을 더욱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단기적으론 북미 대화 압박 요인 가능성

물론 북한의 이번 핵실험 발표가 단기적으로는 북미대화를 압박하는 요인이 될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백학순 실장은 지난 4일 ‘세종논평’에서 "미국은 겉으로는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오겠지만, 실제 어떤 대응을 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어떻게든 북한의 압력에 굴복하는 모양새는 피하겠지만, 이번에는 북한이 핵시험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반확산정책의 목표달성의 성패가 달려있는 문제여서, 겉으로의 반응과는 달리 실제는 협상의 방안을 모색하게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북미대화가 진전되지 못하고 북이 핵실험을 강행할 경우 북은 핵보유국이 되고 북미관계 및 한반도 주변 정세는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될 공산이 크다.

먼저 북한의 핵보유는 동북아에서 핵군비경쟁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백학순 실장은 "일본의 핵무장, 중국, 타이완, 한국정부의 연쇄적인 핵관련 반응은 동북아에서 북한의 대외안보환경의 악화를 의미하며 북한의 고립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정택상 진보정치연구소 상임연구위원은 "북한의 핵보유는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요인이 될 것"이라며 "내년이 일본 평화헌법 개헌의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의도를 배반하는 정책 수단

남북관계도 상당기간 정체 내지 퇴보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백학순 실장은 "북한의 핵실험은 남북관계를 곤경에 빠뜨리고 그 동안 쌓아온 남북화해협력의 성과를 파탄에 이르게 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고 우려했다.

정택상 상임연구위원도 "북한의 핵실험은 남한 주도의 대북포용정책의 근간이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한미일 동맹이 재편되고 그에 대한 북중러의 대응이 강화되는 등 한반도 문제에서 남한의 주도권이 발휘되기 힘든 구조적 여건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이 의도하고 있는 북미관계 개선도 사실상 기대하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백학순 실장은 "미국의 대북정책이 본격적으로 북한의 정권교체와 체제붕괴로 전환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며 "미국은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 금융·경제제재, 유엔안보리 제재 등을 통해 북한을 봉쇄하려는 노력을 할 것인데, 이것은 북한이 그 동안 미국과 6.25전쟁을 조속히 종료하고, 평화협정 맺고, 관계정상화를 이루려는 자신의 대미정책목표 달성의 실패를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정택상 상임연구위원도 "군사적 공격을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졌지만 경제적 문제의 타개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 핵보유는 국내 정치환경에도 상당한 변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먼저 내년 대선에서 최대의 이슈로 떠오를 수 있다. 윤영상 선임연구원은 "북한의 핵보유는 한나라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며 "민주노동당, 열린우리당, 민주당의 경우 자칫 친북적이라는 낙인이 찍힐 경우 대중적 존립 근거를 상실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북한 핵보유, 내년 대선 한나라당에 유리

북한이 핵 실험을 강행할 경우 예상되는 부정적 영향이 이렇듯 확연한만큼 북 핵실험을 막아야 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한국정부도 그렇고 진보진영도 마찬가지다.

윤영상 선임연구원은 "이번 사안과 관련해 입장 발표하는 정도 말고는 진보진영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고 토로했다. 정택상 상임연구위원은 "국회의 평화결의안 채택이나 동북아 관련국 의원 협의회 추진 등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한국 정부를 압박해 남북 특사 교환이나 인도적 지원 재개, 남북정상회담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은 공통적으로 나온다.

백학순 실장은 "우리가 그 동안 북한과 북핵문제에 대해 본격적인 협상 한번 하지 못하고 이렇게 상황이 악화된 것은 그 동안 우리정부가 남북간에 특사 파견, 정상회담, 핫라인 가동 등을 통해 남북간에 신뢰를 쌓고 대화와 협상의 기제를 마련하지 못한 아쉬움과 책임이 크다"고 지적하고, "우리정부는 지금은 북한이 ‘아직 핵시험을 하기 전’이라는 점을 중시하고 지금부터라도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개최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여 어떻게든지 북한의 핵실험을 막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윤영상 선임연구원은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상황"이라며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기 전에 김 전 대통령이 카터가 했던 중재역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