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제는 좋아하면서 혼혈은 왜 싫어해?"
    By tathata
        2006년 10월 08일 09:4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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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작가 김중미 씨가 장편소설 <거대한 뿌리>(검둥소)로 찾아왔다. 지난 8월 말에 출간된 이 소설은 동두천의 미군부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1970년대 우리 시대의 한 초상을 30년이 훌쩍 넘은 현재와 서로 마주보게 한다.

    1970년과 현재. 동두천과 I시 M동. 양공주, 혼혈아 그리고 이주노동자. 이 두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유사성을 보이고 있음을 작가는 말한다. 미국을 동경하면서 혼혈아와 양공주를 배척하고, 이주노동자에게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면서도 그들을 천대하는 우리 사회의 이중성이 그것이다.

    그는 그 시절 동두천부터 그리고 현재까지 뿌리내리지 못하는 소외자들의 모습을 차근차근 보여주면서 우리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그들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어린 시절을 동두천에서 보낸 정원은 I시 M동을 처음 보자마자 ‘혼’을 빼앗겨버리는 듯한 경험을 하고, 그 곳에서 공부방을 운영하며 산다.

    그의 제자인 정아는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며, 가난에 쪼들려 대학 진학을 포기한 꿈 잃은 소녀다. 정아가 스무 살이 갓 넘은 어느 날 네팔 이주노동자 자히드와의 결혼을 선언한다. 이미 그의 배에는 자히드의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정원은 혼혈아로 살아야 하는 아이의 미래에 한숨지으며, 자히드와의 연을 끊을 것을 재촉한다. 그러나 정아는 자히드로 인해 희망과 빛을 보았다며, 오히려 이주노동자 운동을 지원해온 정원을 경멸한다.

    “선생님, 그 사람 계급이 브라만이래요…카스트에서 첫 번째요. 자히드는 여기 한국에 와서 뼈저리게 느꼈대요.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겉모습이나 돈이나 계급으로 사람을 나누는 게 얼마나 비참한지 말이예요. 자히드가 그랬어요. 한국 와서 네팔에서 온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형제애를 느꼈다고요.”

    ‘불법체류’ 이주노동자의 아내로 살아갈 정아의 모습을 걱정하며 정원은 26년 전 떠나온 동두천을 찾아간다. 양색시가 빼곡히 들어서 있던 기지촌 골목은 이제 러시아, 필리핀 여성들이 두꺼운 화장을 하며 걸어다니고 있었다.

    정원은 동두천 골목을 되짚으며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하나 되새긴다. 그들은 한국현대사의 상흔을 깊숙이 간직하고, 동두천에 정착해 새 삶을 시작하려 했지만 미군으로부터 억압과 핍박을 당하고, 또 그 자신들도 서로를 부정하면서 살아간다.

    6.25 당시 피난을 가다 팔을 잃은 후로 동두천 시장에서 고무줄을 파는 아버지를 둔 경숙은 미국으로 입양되기만을 간절히 소망한다. 양공주의 옷을 세탁하는 일을 하는 엄마와 양공주인 언니들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미국으로 입양되는 길뿐이라고 경숙은 생각하고, 어릴 적부터 노랑머리, 화려한 드레스의 종이인형만을 가지고 놀았다.

    아버지가 베트남 참전 한 대가로 받은 돈으로 동두천에서 포주 일에 나선 해자네 가족은 바람 잘 날 없는 가족이다. 베트남 참전 이후 갈수록 사람들이 모두 ‘베트콩’으로 보인다며 난폭해지는 아버지는 미군에게 폭행을 당해 갈비뼈가 부러졌지만 병원비는커녕 사과조차 받아내지 못한다.

    “병원비?  미군이 때린 거라면 미군이 물어줘야지.”
    “야, 이 멍텅구리야. 너 정말 몰라서 그래? 미군이 한국사람 때렸다고 병원비 물어주는 거 봤냐?”
    기지촌 사람들 사이에는 불문율이 있었다. 아무리 억울해도 괜히 미군한테 대들거나 시비를 걸면 안 된다는 거였다. 미군하고 실랑이가 붙으면 무조건 한국 사람만 손해였다.

    경숙과 해자의 가족은 6.25전쟁과 베트남 참전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채로 동두천에 둥지를 틀었으나, 동두천은 미군이라는 또 다른 ‘주인’이 군림하며 그들의 고름을 흘러내리게 했다.

    윤희언니는 얼굴과 맵시가 아름답고, 문학을 동경하는 아가씨이지만, 그의 오빠와 남동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청춘을 미군부대에서 보내야 했다. ‘오빠 하나만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고 시작한 것이 남동생들도 줄줄이 대학을 보내기 위해 꽃다운 시절을 바쳤다. 가족을 위해 희생을 강요받았던 윤희언니는 그 시대 우리 누이들의 초상이었다.

    미군 흑인병사의 아기를 밴 윤희언니를 대학 나온 오빠는 뺨을 때리며 손찌검을 한다. 윤희언니는 “나 다시는 한국에 안 올 거야. 한국 사람들 넌덜머리가 나. 난 이름도 미국식으로 바꾸고 말도 다 잊어버릴 거야”라고 다짐하며 미국으로 떠난다. 경숙이가 가난을 피해 미국을 동경한 것처럼, 윤희언니는 오로지 아들만을 위해 딸을 짓밟는 가족에게 배신당하며 미국으로 향한다.

    한국에서 희망을 찾지 못했던 그들이 도피처로 택한 곳이 바로 그들의 절망의 진원지인 미국이라는 점은 아이러니다. 그래서 그들은 미국에서조차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다. 윤희언니는 이후에 미국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다니며 방황한다.

    재민은 정원의 첫사랑이다. 양공주에게서 태어난 재민은 백인도, 황인도 아닌 ‘튀기’(혼혈아)다. 훤칠한 키와 준수한 외모의 재민은 학년이 오를수록 아이들과 교사, 학부모로부터 따돌림을 받는다. 축구부에서도 쫓겨나고, 도둑으로까지 몰린다. 단지 재민이가 ‘튀기’라는 이유, 그 뿐이다.

    “나는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싶어. 도대체 튀기가 뭐 어쨌다는 거야? 물건은 미제라면 사족을 못 쓰면서, 왜 우리 같은 애들은 싫어해? 나도 반쪽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미제야. 그리고 나머지 반은 너희들이랑 똑같다고. 도대체 왜 우리가 너희들한테 무시를 당해야 하냐고, 왜?”

    재민이는 절규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울음을 터뜨린다. 재민이가 따돌림 당하는 것은 도무지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주민들의 편견 때문이다. “미군만 보면 군침을 흘리고 쩔쩔매는 사람들도 자기들이 그토록 동경해마지 않는 미군의 피가 섞인 혼혈아들만 보면 마음 놓고 비난하고 터부시했다.”

    동두천의 주민들은 그들이 미군에게서 받은 차별과 설움을 동시에 서로를 향해서도 겨누었다. 혼혈아를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은 물론, 서로 미군을 차지하기 위한 포주 간의 싸움이나, 양공주를 이용해 돈벌이를 하면서도 경멸하는 그들의 행위는 매우 위선적이다. 미군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동두천 주민의 분열된 의식은 생존을 향한 맹목적인 경쟁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의 ‘싸움’은 안타깝고, 서글프다. 

    26년만에 만나는 재민은 개농장을 운영하며 그의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그와 같은 삶을 다시는 영위시키고 싶지 않다는 재민은 ‘튀기’는 자신에게서 끝나야 한다며 독신을 고집한다. 따를 당하며 학교를 다니더라도 ‘정상적인’ 취업을 할 수 없을 것이라 여기고 중퇴한 재민은 여러 길을 모색해보았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시고 만다. 하지만 재민은 쉽게 절망을 드러내지 않는다. 세상을 조롱할 뿐이다.

    “어떤 개새끼는 혈통 좋다고 몇십, 몇백에 사고팔고 사람들도 잘 못 먹는 고기에 영양제에 난리법석을 떨면서, 지들이 돈 벌겠다고 만들어놓은 잡종은 살아 있는 동물 취급조차 안 해. 그놈들은 살아 있을 때도 그냥 고기야…이 개고기감으로 팔리는 놈들은 일부러 좁은 우리에서 키워. 그래야 많이 움직이지 않고 살만 피둥피둥 찌니까….

    어떻게 보면 내 신세 같기도 하고. 그래서 똥개가 좋은 거야. 똥개들은 자유롭게 다니면서 서로 지가 좋은 놈하고 짝 맺고 그렇게 사는 놈들이잖아. 자기 조상이 누군지, 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하도 이렇게 저렇게 섞여서 말이야. 난 똥개들의 그 자유정신이 좋다.”(124쪽)

    ‘동두천 순례’를 마치면서 정원은 정아의 결혼과 임신을 축하해준다. 동두천이 자신의 음지이자, 그림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정아와 자히드마저 이 땅의 그림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림자는 해자와 재민이, 윤희 언니, 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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