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쑤위, 국군의 강군
    황바이타오 병단을 섬멸
    [국공내전㊼] 화이하이 전역-3 : 장제스의 오판과 황바이타오의 전사
        2020년 08월 06일 07: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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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이하이 전역에서 쑤위의 첫 번째 목표는 황바이타오 병단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중원 지역은 동북과 달리 참전 병력도 국군이 더 많았다. 전투에 참가하고 있는 부대 대부분이 장제스의 직계인 중앙군이어서 장비나 무기도 월등했다. 황바이타오, 치우칭첸, 리미, 황웨이, 후롄등 국군에서 내로라하는 맹장들이 중원에 포진해 있었다. 쑤위는 승패를 가리기 힘든 대병단 결전보다 국군 부대를 하나씩 고립시켜 해치우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쉬저우의 국군 포진에서 떨어져 있는 황바이타오 병단을 섬멸하려고 한 것이다.

    황바이타오의 7병단은 장제스의 직계는 아니지만 전투력이 강한 부대로 손꼽혔다. 황바이타오는 국군에서 손꼽히는 맹장이었다. 그는 전투에 임하면 전선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며 함께 싸웠다. 돌격할 때는 병사들의 앞에서 싸우고 가장 나중에 물러섰다. 그는 전황이 불리해도 끝까지 버티는 불굴의 투지가 있어 해방군에 여러 차례 승리했다. 장제스는 용맹하고 충성심 강한 황을 깊이 신임했다.

    황바이타오가 훈장을 받고 장제스(앉은이)와 기념촬영

    황바이타오는 부대를 잘 조련하는 것으로 소문이 났다. 그가 처음 사단장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황바이타오는 국민당 부대에 만연한 악습들을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지휘관의 부패와 축재, 군기 해이, 나약한 정신, 백성들에 대한 민폐 등을 모두 일소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25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이런 악습들을 물리치고 군기를 엄정하게 세웠다. 장교와 사병 간의 관계를 개선하고 훈련을 강화하여 전투력을 개선하였다. 황바이타오는 사단장의 신분인데도 중대원들 사이에 섞여 함께 훈련을 받고 신체를 단련했다고 한다. 청렴한데다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니 당연히 깊은 존경을 받았다. 황바이타오는 국민당 부대가 취약한 야간전투와 접근전에 대한 훈련을 강화하고 사격술을 연마하였다. 그 결과 그의 부대는 국군 안에서 손꼽히는 강군이 되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_쑤위대장_ 가운데 회색군복이 쑤위

    쑤위와 황바이타오는 오랜 적수였다. 중일전쟁 시기 황바이타오는 완난사변(1)에 참전하였다. 황바이타오의 부대는 신사군 공격의 주력으로 선봉을 맡았다. 완난사변 때 쑤위는 화를 당한 신사군 사령 예팅과 부사령원 샹잉과 달리 장쑤성 북부의 옌청(鹽城)에 주둔하고 있었다. 옌청에 신사군 총지휘부가 있었던 것이다. 쑤위는 신사군 1사단을 조직하고 있었는데 그때 장제스의 이른바 ‘마찰’ 방침으로 국공 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마찰’이란 2차 국공합작 시기 국군이 의도적으로 충돌을 일으켜 공산당의 근거지를 공격한 일을 말한다. 합작기간에 끊임없이 근거지 확대를 도모하는 공산당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쑤위는 마찰전투를 일으킨 국민정부 장쑤성 주석 한더친(韓德勤)의 부대 1만 5천명을 섬멸하여 대승을 거뒀다. 천이와 쑤위가 지휘한 이 전투에서 신사군은 7천명의 적은 부대로 한더친의 주력을 깨뜨린 것이다. 그후 일어난 완난사변은 쑤위의 승리에 대한 보복의 성격이 있다. 국군 10만명이 7천명의 예팅 부대를 공격하여 궤멸시키고 사령인 예팅은 포로, 부사령인 샹잉은 피살당했던 것이다. 그후 쑤위는 천이와 함께 신사군을 재건하여 장쑤성에 강력한 훙군 근거지를 재건하였다.

    내전에서도 황바이타오의 활약은 눈부셨다. 내전 초기인 1946년 황바이타오는 쑤위가 방어하고 있던 장쑤성 북부의 공산당 근거지로 밀고 들어가 까오유(高郵) 옌청(鹽城) 등 수많은 요지를 점령하였다. 1947년 6월 국군의 2차 산둥성 중점 공격 때에도 황바이타오는 큰 공을 세웠다. 그는 25사단(2) 을 인솔하여 화동 야전군 이멍산 근거지로 치고 들어갔다. 중국쪽 전사에서는 “이 무렵이 산둥성 해방구에서 가장 힘들고 어두운 시기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투를 지휘했던 쑤위도 평가에서 “당시 진지전, 방어전, 조우전 등에서 우리는 25사단의 적수가 아니었다. 병력이 비슷하여도 지켜내지 못하였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그해 8월 황바이타오는 25사단을 지휘하여 산둥성의 동쪽 끝인 자오둥 반도로 밀고 들어갔다. 옌타이를 점령하여 산둥성과 동북의 연결을 끊으려는 것이었다. 당시 옌타이는 동북에 병력과 물자를 보내는 보급기지 역할을 하였다. 이 전투에서 황바이타오의 사단은 쉬스유의 부대를 반도 끝까지 밀어붙였다. 쉬스유의 산동병단이 작은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하였지만 전황은 해방군에 극히 불리하였다. 전투가 계속되었다면 반도 끝에 몰린 해방군이 결딴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중원의 전황이 급해지자 장제스가 황의 부대를 이동시켜 쉬스유 병단이 기사회생했던 것이다. 장제스는 나중에 쉬스유의 산둥병단에게 지난을 함락당하여 지난날의 오판에 대한 댓가를 치렀다.

    1948년 허난성 동부전투에서 황바이타오는 섬멸 직전에 놓인 국군 7병단을 구출하여 쑤위가 해놓은 밥에 모래를 끼얹었다. 당시 국군 7병단은 쑤위의 화동 야전군에 포위를 당해서 섬멸 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때 옌저우에서 출격한 황바이타오의 지원부대가 화동 야전군 공격부대를 기습하였다. 기회를 틈타 7병단이 탈출하였고 쑤위의 부대는 대신 황바이타오의 부대에 달려들었다. 병력이 열세였던 황의 부대는 대신 섬멸 당할 위기에 처하였다. 이때 황바이타오는 병단 사령관인데도 부대를 이끌고 앞장서 돌격하여 해방군 진지에 역습을 가하였다. 뜻밖의 기습에 해방군이 주춤하는 사이 치우칭첸의 구원부대가 해방군의 배후를 위협하였다. 쑤위는 부득이 부대를 뒤로 물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로 황바이타오는 장제스의 신임을 더하였다. 그는 청천백일 훈장을 받았고 자신이 구한 7병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황바이타오는 이제껏 해방군과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패배한 일이 없었다. 쑤위가 첫 번째 목표로 황바이타오 병단을 꼽은 것은 국군의 부대배치 상황 외에도 다른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황바이타오, 해방군의 공격을 예측하다.

    1948년 10월, 황바이타오는 7병단 정찰대로부터 화동 야전군 주력이 산둥성 서부에 집결한다는 정보를 확인했다. 중원 야전군 부사령원 천이는 이미 린이에 와 있었으며 사령원 류보청도 쉬저우쪽으로 이동한 흔적이 있었다. 장쑤성 북부 해방군도 룽하이선 동쪽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황바이타오는 정황으로 보아 해방군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바이타오는 쉬저우 초비 총사령관 류즈에게 자신의 판단을 보고하였다. “화동 야전군 부대 주력이 장쑤 북부의 3개 종대와 합류하여 우리 병단을 협격할 것입니다. 류보청의 중원 부대는 서남 방향에서 쉬저우 국군의 주력 병단들을 견제하려고 할 것입니다. 적들은 쉬저우의 아군 주력이 우리 병단을 지원하도록 유인할 것입니다. 우리 부대를 먼저 깨뜨린 뒤 아군 병단을 차례로 각개격파하려고 합니다. 적의 이동상황을 보니 이런 기도가 분명히 보입니다.”

    황바이타오는 자신이 생각한 방안도 건의하였다. “아군은 룽하이선 연선에 배치되어 있는데 전선이 너무 광대합니다. 사면팔방에 모두 적이 있으니 아군 좌익 부대들이나 전면 수비부대들이 위험합니다. 아군은 도처에 수비병력이 부족합니다. 따라서 아군을 쉬저우로 집결시켜야 합니다. 쉬저우의 사면에 배치하여 수비를 굳히고 기회를 보아야 합니다. 쑤위와 류보청의 부대가 합류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각개격파해야 합니다.” 황바이타오의 건의는 쉬저우쪽으로 병력을 집결시켜 방어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류즈는 한 달 가까이 회답은 물론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1948년 11월 4일, 류즈는 쉬저우에서 군단장 이상이 참석하는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였다. 국방부 3청장 궈루구이가 보고를 했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지난을 잃은 뒤 공산군은 화북, 화동, 따베산의 각 부대가 합류하여 대거 침공해 올 것이다. 천이의 사령부는 이미 린이에 도달해 있다.(3) 국방부의 판단은 그가 먼저 하이저우를 점령하거나 7병단을 공격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 판단은 황바이타오가 한 달 전에 했던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거기에 대한 류즈의 처방은 다음과 같았다. “신속하게 운하 동쪽을 증원하여 황바이타오의 7병단을 지원한다. 7병단은 병력을 집중하여 응전을 준비한다.” 그러나 황바이타오가 보기에 이런 처방은 옳지 않았다.

    그날 오후 황바이타오는 다시 류즈에게 건의했다. “쉬저우를 중심으로 각 병단을 집결시켜 동서남북 네 방면을 수비해야 합니다. 호를 깊이 파고 보루를 쌓은 뒤 각 병단이 서로 의지해야 합니다.” 거북이처럼 진지를 튼튼히 쌓고 방어전을 펼치자는 것이었다. 황바이타오는 또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지구전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와서 하이저우(海州)를 수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류즈는 장제스에게 황바이타오의 건의를 보고했다. 그날 늦은 밤, 장제스는 황바이타오의 건의를 승인하였다. 7병단은 하이저우를 포기하고 쉬저우로 후퇴하여 수비에 임하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쉬저우에서 7병단 사령부인 신안쩐(新安鎭)으로 오는 열차에서 황바이타오는 부하인 25군단장 천스장(陳士章)에게 토로했다. “우리의 이번 계획은 늦었다. 지금 후퇴하면 너무 늦었어.” 황바이타오의 한탄은 바이충시의 작전지휘 거부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즉 국군의 쉬저우 집결이 늦어 대비하기에 시간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황바이타오가 지휘하는 7병단은 신안쩐 지역에 주둔해 있었다. 그의 위치는 화동 야전군이 주둔한 린이에서 가장 가까웠다. 그의 동쪽인 하이저우 일대에는 국민정부 제9구정구 소속 44군이 주둔하였다. 서쪽에는 넨좡 지역에 리미((李彌)의 병단이 주둔하였다. 황바이타오가 돌아온 직후 국군 지휘부는 각 부대에 쉬저우 쪽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하였다. 황바이타오는 명령을 받고 즉시 부대를 정돈하며 철수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황바이타오는 부대를 이동시키기 직전에 갑자기 명령을 받았다. 국민당 9수정구 소속 44군을 함께 지휘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안쩐에서 44군을 기다려 합류한 뒤 함께 쉬저우로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황바이타오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절망감을 느꼈다. 우리가 이틀을 기다리는 동안에 상대도 함께 기다려 준다는 말인가?

    이틀 뒤인 1948년 11월 7일, 국군 44군이 신안쩐에 도착하였다. 황바이타오는 전 부대에 명령하여 즉시 쉬저우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황바이타오에게 44군을 기다려 함께 철수하라고 지시한 이는 장제스였다. 장제스는 44군이 화동야전군의 공격목표라고 판단한 것이다. 44군이 주둔한 하이저우가 해로교통의 요지여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제스는 황바이타오에게 하이저우에 부대를 증원하여 44군의 방어를 강화하라고 지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뒤늦게 생각을 바꿔 함께 후퇴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황바이타오의 일부 부대는 하이저우로 출동하다가 한밤중에 되돌아 와야 하였다.

    황바이타오가 44군을 기다린 것에는 다른 주장도 있다. 당시 쉬저우 지휘부 사령관인 류즈가 경영하던 개인 염전이 하이저우에 있었다는 것이다. 염전을 44군이 경영했는데 류즈는 44군이 금고를 가지고 후퇴할 수 있도록 황바이타오에게 엄호하기를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설로는 참모총장인 구쭈통이 44군의 해상철수가 어려워지자 황바이타오 부대에게 엄호하라고 명령하였다고 한다. 장제스의 오판이든 류즈의 탐욕 때문이든 신안쩐에서 이틀을 허비한 것이 결과적으로 황바이타오 부대를 옭아맨 올가미가 되었다.

    1948년 11월 5일, 국군이 아직 계획에 따라 이동을 마치지 못했을 때였다. 쉬저우 지휘부의 사령관 류즈는 국군 각 병단으로부터 빗발치는 전화보고를 받았다. 각 병단이 모두 정면에서 해방군 주력을 발견했으며 쉬저우를 공격할 태세라는 것이었다. 류즈는 각 부대에 서둘러 쉬저우 방면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하였다. 명령에 따라 황바이타오의 7병단, 리미(李彌)의 13병단은 쉬저우 동쪽으로 향했다. 쑨웬량(孫元良)의 제16병단도 멍청(蒙城)을 지나 벙부(蚌埠)로 이동하다가 쑤현(宿縣)을 거쳐 쉬저우로 북상했다. 치우칭첸(邱清泉)의 2병단도 쉬저우 서쪽 교외로 돌아와 수비에 임했다. 1948년 11월 6일, 국군은 바이충시가 지휘하는 화중 초비사령부의 12병단을 타이허(太和), 푸양(阜陽)지역으로 이동시켜 지원하게 하였다. 쉬저우, 벙부 전장의 국군 병력은 증원에 따라 70만명에 이르렀다. 화이하이 전역에 참가한 국군의 총병력은 80여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60만명이 참전한 해방군보다 병력이 많았다. 그러나 실제로 기동할 수 있는 병력은 40만명이어서 실질적인 병력은 해방군쪽이 더 많았다.

    화이하이 전역 직전 국공 부대배치도

    국군 운하 수비대에서 기의가 발생하다

    쑤위가 지휘하는 화동 야전군은 1948년 11월 6일 야간에 화이하이 전역을 일으켰다. 예정된 계획보다 이틀을 앞당긴 행동 개시였다. 쑤위는 황의 부대가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는 정보를 확인한 뒤 군령 위반을 무릅쓰고 즉시 가능한 모든 부대를 출격시켰다. 다음날 쑤위는 황바이타오 부대가 신안쩐에서 이동을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쑤위는 황바이타오 부대가 이동할 때가 공격의 적기라고 판단하였다. 쑤위의 부대는 세 방향에서 황바이타오 병단과 쉬저우 초비사령부 사이를 파고 들었다. 쑤위는 중앙군사위에 전문을 보내어 화이하이 전역의 개시시각을 11월 8일에서 11월 6일 야간으로 당겨 달라고 요청하였다.

    산하 부대에서 중앙군사위원회에 총공격 시간을 바꿔 달라고 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마오쩌둥은 쑤위의 전문에 대하여 완전히 동의한다는 회신을 기초했다. “특별히 중대한 변화가 없다면 계획을 바꾸지 마라. 견결하게 집행해야 승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은 당신들이 임기응변하여 판단하라. 일일이 허락을 받을 필요 없다. 대신 전황이나 의견은 매일 혹은 매일 2회나 3회씩 보고하도록 하라.”

    그런 것을 보면 쑤위에 대한 마오쩌둥의 신임을 알 수 있다. 마오쩌둥은 린비아오에 대하여는 계속 독촉하거나 자신의 방침에 따르지 않는다고 질책하기도 하였다. 쓰핑 방어전에서는 “중국의 마드리드로 만들라.”며 사수를 명령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쑤위의 이의 제기에 대하여는 중앙군사위원회의 방침까지 바꾸며 승인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마오쩌둥과 중앙군사위의 승인을 얻은 쑤위는 휘하 부대를 재촉하였다. “빨리 추격하라.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황바이타오 병단을 포위 섬멸하라.” 쑤위는 7병단을 놓칠까 불안하였다. 쉬저우에 있는 다른 부대와 합류하면 각개격파가 어려워지는 까닭이었다.

    이때 국군 수뇌부가 예기치 않았던 사건이 발생하였다. 운하 수비부대에서 대규모 기의가 돌발한 것이다. 서둘러 후퇴한 황바이타오 병단이 서쪽으로 대운하(4)를 건너고 있을 때였다. 1948년 11월 8일, 동이 틀 무렵 운하를 수비하던 제3수정구 부대에서 기의가 일어났다. 기의를 주도한 사람은 허지펑과 장커샤로 3수정구 부사령원들이었다. 둘은 허지펑의 주둔지인 자왕(賈汪)에서 함께 기의를 선언한 것이다. 이들이 3수정구 수비병 3만명 가운데 2만 3천명을 이끌고 기의했으니 3수정구 수비구역이 완전히 뚫린 셈이었다. 화둥 야전군 추격군이 3수정구로 직진하여 황바이타오의 7병단을 우회 포위할 수 있는 지름길이 열린 것이다.

    베이징 항저우를 잇는 징항 대운하. 사진은 80년대 모습이다.

    해방군 공격에 길을 터준 자왕기의 주인공들 왼쪽부터 허지펑 장커샤

    기의를 주도한 허지펑(何基沣)은 중일전쟁의 시작점인 ‘노구교 사건’ 때 국군 110여단장으로 국군쪽 수비를 지휘한 인물이었다. ‘노구교 사건’은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근교 루거차오(盧沟橋)에서 일본군이 훈련 중이던 병사 1명이 실종된 것을 핑계로 중국군을 공격한 사건을 말한다. 중국에서 ‘노구교 사변’, 혹은 ‘7·7사변’으로 부르는데 중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는 사건 전날 부대를 인솔하여 노구교 일대를 방비하였다. 전투가 벌어지자 허지펑은 부대를 지휘하여 도발한 일본군을 격퇴했다. 허지펑이 항일 명장으로 이름을 낸 사건이었다. 그는 1938년 봄 비밀리에 옌안에 왔다가 다음 해인 1939년 1월 공산당에 몰래 가입하였다. 허지펑은 에드가 스노우가 쓴 ‘중국의 붉은 별’을 읽고 공산당 해방구를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옌안에 온 그는 1개월간 머물렀는데 마오쩌둥, 류샤오치, 주더 등과 환담을 하였다. 중공 지도부가 허지펑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948년 11월, 기의를 선언하기까지 장장 10년을 국군 안에서 공산당 지하당원으로 있었다. 기의 당시 허지펑의 신분은 장커샤와 함께 국군 3수정구 부사령원이었다. 허지펑이 중공 지하당원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죽을 때까지 비밀에 부쳐졌다. 공산당의 지하공작을 총괄했던 저우언라이는 나중에 “허지펑의 일을 당에서 비밀에 부치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장커샤도 허지펑과 함께 노구교 전투에 참전한 인물이었다. 그는 허지펑보다 훨씬 전인 1929년 공산당에 비밀당원으로 가입하였다. 그후 저우언라이가 직접 지도하는 특별당원으로 장기간 국군 안에 잠복하였다. 1945년 장커샤는 제2수정구 부사령원으로 임명되었는데 내전이 일어나자 부대 안에서 적극적으로 내전 반대 활동을 펴왔다고 한다. 허지펑과 장커샤가 3수정구 장병 대부분을 이끌고 기의할 수 있었던 것은 잠복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결정적인 시기에 기의할 수 있도록 부대 안에서 암약했던 것이다. 이십년 가까이 국군에 묻어 두었다가 결정적인 시기에 창을 거꾸로 돌리게 만들었으니 저우언라이의 심모원려가 무섭다.

    쑤위, 황바이타오를 넨좡 지역에서 포위하다

    화둥 야전군은 시기를 놓치고 대운하를 건너던 제7병단을 추격했다. 7병단의 후미에서 주력을 엄호하며 철수하던 63군과 100군 소속 83사단은 해방군에 포착되어 금방 섬멸당했다. 황바이타오 병단 주력도 곧바로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대군이 건너야 할 대운하에 다리라고는 달랑 철교 하나뿐이었다. 다리 하나로 10만 대군이 건너는 것은 무리였다. 거기에 하이저우에서 함께 떠난 피난민 수만명이 더 있었다. 황바이타오 부대는 신안쩐에서 우왕좌왕하며 시간을 허비하였기 때문에 운하에 가교나 부교도 설치하지 못하였다. 쉬저우에 있는 공병부대도 철수로 부교 하나 준비하지 않았다. 그 결과 황바이타오의 7병단과 하이저우에서 철수한 44군, 그리고 피난민 수만명이 철교 하나에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리를 건너는 과정에서 1만명이 희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니 부대의 전진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때 황바이타오는 세가 불리한 것을 보고 리미의 13병단과 협력하여 후퇴하기를 희망했다. 리미는 류즈의 명령을 핑계로 계획대로 철수하기를 고집하며 지원을 거절했다. 류즈가 명령하여 리미가 핑계를 댄 것인지, 리미의 요청으로 류즈가 승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여간 우군을 팽개치고 철수하라고 한 류즈의 지휘는 할 말을 잊게 한다. 리미의 13병단은 병력이 5만명밖에 되지 않았다. 부대의 전력도 약한데 이틀이나 기다려 황바이타오와 함께 철수하고 싶지 않았다. 리미는 황바이타오의 요청에 난감한 목소리로 “류 총사령관이 오늘 세 번이나 철수 전화를 했소. 형은 보중하시오. 나는 상부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소.”하고 대답하였다.

    어떤 이들은 리미가 황푸군관학교 출신의 장제스 직계여서 잡패군 출신의 황바이타오와 위험을 함께 할 의욕이 없었을 것으로 본다. 황바이타오가 병단 사령관으로 출세하고 장제스의 신임을 받게 되자 직계 출신들은 줄곧 그를 떫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리미의 부대가 먼저 후퇴해버리자 황바이타오의 7병단은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황의 부대를 지원할 병단도, 옆에 의지할 우군도 없으니 해방군이 마음 놓고 달려들 수 있는 먹이가 된 것이다.

    황바이타오의 7병단을 추격하던 화동 야전군 5개 종대는 각각 다른 길로 남하하여 운하 동안으로 돌격하였다. 3개 종대는 뻥 뚫린 기의부대 방어구역으로 직진하였다. 2개 종대는 룽하이로를 넘어 쉬저우 동남쪽으로 전진하였다. 서쪽으로 철수하는 황바이타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중원 야전군은 일부 부대를 핑한로에 남겨 국군 황웨이(黄维) 병단과 다른 병단 지원군을 견제하였다.

    11월 10일, 화동 야전군은 공격 선두부대와 산둥병단 주력이 서쪽 방향으로 철수하던 7병단 선두부대를 격파하고 7병단의 쉬저우쪽 후퇴로를 차단했다. 궁지에 몰린 7병단은 대운하를 건넌 뒤 넨좡(碾庄)으로 이동했다. 해방군은 행군 속도를 높여 하루만에 화동 야전군 3개 종대가 녠좡과 쉬저우 사이 차오빠지(曹八集) 등 각 거점 주요 도로를 점령했다. 화둥 야전군은 7병단을 녠좡 지역에서 포위 섬멸하려고 하였다.

    녠좡은 격전이 벌어진 장소이지만 작은 진에 지나지 않았다. 장쑤성 피저우(邳州)시에 속한 진으로 우리의 면에 해당한다. 이 작은 곳에서 중원 결전의 성패를 갈음하는 대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녠좡에 도착한 날, 황바이타오는 방어를 위한 병단 지휘관 회의를 소집했다. 대다수 지휘관들이 “해방군이 아직 모두 도착하지 않았으니 포위망을 뚫고 쉬저우로 철수하자.”고 주장하였다. 오직 64군 군단장 류쩐샹만이 감연히 “이곳에서 공산군과 결전을 벌이자.”고 주장하였다. 지휘관들이 류의 의견에 반대하며 설왕설래하고 있을 때 선두를 맡았던 부대가 자오빠지에서 완전히 섬멸당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쉬저우쪽 퇴로가 완전히 끊긴 것이다. 논란이 필요없게 되었을 때 마침 난징 국방부에서 급전이 도달하였다. “7병단이 운하를 건너지 않았으면 더욱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쉬저우 방향으로) 계속 서진하면 공산군에게 추격 당해 궤멸할 위험이 있다. 독자적으로 판단하여 신속히 결정하라. 필요하다면 넨좡에서 진지를 보수하여 공산군을 격파한 뒤 다시 철수해도 된다.” 이 전문은 녠좡 결전을 요청했던 류전샹의 건의에 대한 회신이었다.

    황바이타오는 전문을 탁자에 놓더니 지휘관들에게 이야기하였다. “각 부대가 급히 철수하느라 손실이 컸다. 군심도 소란하여 빨리 정돈해야 한다. 해방군의 남하가 이렇게 빠르다. 우리가 룽하이선을 따라 후퇴하는데 의지할 데도 없다. 틀림없이 분할 포위된 것이다. 녠좡 일대에 리미 병단이 구축한 진지가 있다. 우리가 보강하여 사용하면 된다.” 그러더니 황바이타오는 탁자를 내리쳤다. “여러분, 이번 회전에 당과 나라의 존망이 걸려 있다. 총통께서 우리를 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생사를 걸고 한번 싸워보자. 불리한 전황을 바꿔보자.” 황바이타오는 즉시 수비를 위한 부대 배치를 단행하였다. 그는 병단 사령부를 녠좡에 두어 부대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1948년 11월 11일, 화동 야전군은 황바이타오 병단에 대한 포위망을 완성했다. 그날 5개 종대가 포위망을 좁히며 7병단 수비군을 공격했으나 전혀 진전이 없었다. 진지가 튼튼한 데다 녠좡을 가운데 두고 두 줄기의 깊은 해자가 있어 돌격하기에 어려움이 컸다. 12일 저녁 해방군은 총공격에 나섰으나 여전히 수비망을 뚫지 못하고 일진일퇴하였다. 황바이타오 병단 10만명이 십몇 평방킬로미터의 좁은 지역에서 밀집하여 수비를 하니 서로 병력만 소모할 뿐이었다. 황바이타오가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버티겠다는 각오로 독전하니 국군 병사들도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가옥 한 채를 두고 혈전이 벌어졌다. 해방군이 시골집 한 채를 점령하면 국군이 집중포격으로 파괴한 뒤 다시 돌격하는 형국이었다. 국민정부 공군이 출동하여 공격하는 해방군 진지를 폭격하여 해방군의 사상자도 급증하였다.

    3일간의 맹공이 무위로 돌아가자 화동 야전군은 돌격집단군을 새로 편성하였다. 야전군 부정치위원 탄전린과 산둥병단 부사령원 왕젠안이 집단군을 통일 지휘하기로 하였다. 11월 16일, 돌격집단군이 탱크부대를 앞세우고 공격에 나섰으나 진전이 없었다. 17일에도 국군 수비부대의 기관총에 사상자만 급증했을 뿐 전황은 여전히 교착상태였다. 그날 육군 참모총장인 구쭈통이 항공기로 녠좡 상공에 와서 무선전화로 황바이타오와 통화를 하였다. 구쭈통은 “치우칭첸과 리미 병단이 출격했으나 해방군의 저지에 막혀 있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포위망을 돌파하여 두 병단과 합류하라.”고 지시하였다. 황바이타오는 구쭈통에게 “우리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총통에게 진충보국하겠다고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구쭈통은 “마음을 급하게 먹지 말고 고수하라. 구원병이 도달할 것이다.”고 위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들은 장제스에 대한 황바이타오의 충성심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황바이타오는 황푸계도 아니다. 저장성 출신도 아니다. 그런데도 장제스는 황바이타오를 깊이 신임하였다. 황바이타오의 총통부 출입증이 17번인데 직계 지휘관들보다 더 앞자리인 것을 보면 증명된다. 황바이타오는 그것에 감복하였다. 총통이 그만큼 자기를 신임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주요도시는 붉은 원. 붉은 표시 부분이 넨좡

    장제스, 황바이타오 병단을 구원하기로 결정하다

    과연 장제스는 황바이타오 병단을 그냥 버려두지 않았다. 장제스는 난징 군사회의에서 국군 지휘부에게 황바이타오 부대를 구원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쉬저우 지휘부는 얼른 집행하지 않고 지지부진 시간을 끌었다. 쉬저우 지휘부에 막 합류한 두위밍이 영문을 몰라 류즈에게 까닭을 물어 보았다. 류즈는 “정보에 따르면 쉬저우 부근의 도처에 공산군 주력이 도달했다고 한다. 넨좡에 부대를 보냈다가 쉬저우가 공격당하면 어쩔 거요?” 하는 것이었다. 두위밍은 기가 찼지만 애써 참고 두 개의 작전방안을 제기하였다.

    1. 황바이타오 병단에게 녠좡에서 7일에서 10일간 고수하라고 명령한다. 리미의 13병단은 쉬저우를 수비하고 72군을 예비대로 한다. 치우칭첸의 2병단과 쑨웬량의 16병단은 황웨이의 12병단과 합류하여 쉬저우 서쪽에서 류보청 덩샤오핑의 부대(중원 야전군)와 결전하게 한다. 그후 동쪽으로 부대를 돌려 천쑤 부대(화동 야전군)를 격퇴하고 황바이타오 부대의 포위를 푼다. 이 방안을 실시하려면 황바이타오 부대가 7일에서 10일을 버텨야 한다.

    2. 쑨웬량의 16병단으로 쉬저우를 수비하게 한다. 72군을 예비대로 한다. 치우칭첸의 2병단과 리미의 13병단은 전력으로 황바이타오의 포위를 푼다. 동시에 황웨이의 12병단은 쉬저우로 진격하도록 명령한다. 이 방안은 황바이타오 병단의 군심을 안정시킬 수 있다. 이 안의 결점은 황웨이 병단이 류덩부대의 견제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천쑤 부대를 공격할 병력이 부족하다.

    두위밍은 본래 첫 번째 방안을 주장하였다. 자신이 치우칭첸과 리미의 병단을 직접 인솔하여 쉬저우 서쪽으로 출격하여 류보청과 덩샤오핑의 중원 야전군 부대를 공격하겠다는 것이었다. 황바이타오 부대 구원을 위해 출격한 황웨이의 12병단과 함께 쉬저우 서쪽의 적을 강력하게 공격하면 황바이타오에 대한 포위가 풀릴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위나라를 쳐서 조나라를 구원하는 이른바 ‘위위구조’의 전법이었다. 류보청이 지휘하는 중원 야전군은 화동 야전군에 비해 병력도 적을 뿐 아니라 경무장이었다. 장쑤성과 허난성 등 서쪽에서 먼 거리를 원정하여 대포나 탱크같은 중화기를 가져오기 어려웠던 것이다. 따라서 두위밍은 쉬저우 지휘부의 주력을 이끌고 출격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화동 야전군은 쉬저우에 인접한 산둥성 린이에서 출전하여 병력도 많고 장비도 우세하였다.

    류즈는 첫 번째 방안을 견결히 반대하였다. 황바이타오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류덩 부대에 대한 공격이 불발되면 황바이타오 병단 구원도 끝나는 것이다. 쉬저우 지휘부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두 번째 방안을 지지하였다. 직접 구원하기를 원하는 장제스의 명령과 부합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바이타오 부대는 12일간이나 버텨 모든 이들의 예상을 뛰어 넘었다. 그리고 국군이 황바이타오 병단을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출동시킬 것이라는 것을 쑤위도 일찌감치 계산에 넣고 있었다.

    류즈는 몇 번 망설이다가 치우칭첸의 2병단과 리미의 13병단이 함께 쉬저우 동쪽으로 공격 전진하게 하였다. 넨좡에 접근하여 직접 황바이타오의 7병단을 구원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행동 개시 시간은 11월 13일이었다. 쉬저우 지휘부가 구원군 2개 병단을 출동시키자 화동 야전군도 바짝 긴장하였다. 황바이타오가 완강히 버텨 녠좡 공격이 교착되었는데 국군 가운데 강병으로 손꼽히는 치우칭첸의 부대가 리미의 병단과 함께 공격해 오는 것이다. 쑤위는 화동야전군 7,10,11종대에게 구원병 요격병단을 결성하라고 명령하였다. 10종대 사령원 쑹스룬, 정치위원 류페이샨이 통일 지휘하여 호우지(候集)에서 따쉬자(大許家) 지역까지 25킬로의 정면을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다른 요격부대인 쑤베이 병단은 쉬저우 동남쪽에서 제 2병단과 13병단을 측면 공격하여 판당(潘塘) 부근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쉬둥대첩(徐東大捷)’

    저녁 무렵 두위밍은 쉬저우 지휘부에서 각 부대의 보고를 확인하였다. 각 부대들이 적으면 3-4킬로, 많으면 6-7킬로 전진했다는 정보를 접했다. 두위밍은 기쁘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기쁜 일은 구원군이 넨좡까지 40킬로 지점에 접근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속도로 전진한다면 일주일내에 녠좡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걱정은 해방군 요격부대가 예상외로 완강한 것이었다. 국군 구원병단은 마을 하나를 점령하는데에도 많은 희생자를 내야 하였다. 해방군은 탄력적인 진지를 구축하여 돌격과 밀집을 거듭하였으며 측면에 화력을 집중하며 다른 규모로 반격하고는 하였다. 해방군은 종대, 사단, 연대, 대대가 모두 종심방어 체계를 채택하여 품자형을 이루고 있었다. 돌출 진지가 매화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진지는 교통호로 연결되어 있었다. 양군은 11월 16일 해질 무렵까지 격렬하게 싸웠으나 전선은 여전히 교착상태였다. 삼사일간 전투를 거듭했는데 해방군은 계속 병력을 보충하였다. 두위밍이 걱정했던 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두위밍은 좌불안석이 되어 류즈와 상의도 없이 치우칭첸에게 명령하였다.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우회를 해서 따쉬자로 돌진하라. 하루안에 따쉬자를 점령하여 황바이타오 부대의 포위를 풀라. 이를 어기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치우칭첸은 명령을 받고 기가 막혔다. 정면을 공격하다 말고 우회하는 전술은 만부당한 것이었다. 꼬리를 해방군에게 잡히면 자신의 부대도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았다.

    치우칭첸은 손가락으로 판당쩐을 가리키며 74군장 치우웨이다(邱维達)에게 명령하였다. “병력을 집결시켜 경장 차림으로 출발하도록 하라. 판단쩐, 장지(張集)를 거쳐 따쉬자로 간다. 공산군의 측면에 일격을 가하고 요격부대의 퇴로를 차단하라. 신속하고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내일 정오까지 따쉬자로 진격해야 한다.”

    그러나 그때 화선묘(火神廟)의 화동 야전군 사령부에 있던 쑤위도 손가락으로 판당쩐과 따쉬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장제스는 황바이타오 병단의 포위를 풀기 위해 다시 3개 병단을 투입하였다. 황웨이의 12병단은 이미 푸양에 도착하였고 리옌녠과 류루밍의 2개 병단은 구쩐에 도달하였다. 장제스는 지금껏 한 지역에 7개 병단을 투입한 일이 없었다. 쑤위는 일주일 내 황바이타오 병단을 섬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치우칭첸 병단이나 리미 병단을 섬멸할 생각이었다. 쑤위는 다시 부대 배치를 단행하였다. 주력을 정면에 배치하여 국군의 구원병단을 요격하게 하고 4개 종대로 측면 공격병단을 편성하였다. 쑤위는 측면 공격병단을 쉬저우 동남쪽에 배치하였다. 그때 중앙군사위는 치우칭첸과 리미 병단을 따쉬자와 판당쩐 선에서 후퇴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치우칭첸, 리미 병단을 동쪽으로 유인하라는 것이었다. 그후 황바이타오의 7병단을 먼저 섬멸하고 동시에 측면 공격으로 치우칭첸과 리미 병단의 퇴로를 끊으라고 하였다. 이것이 쑤위가 늘 써오는 포위공격을 한 뒤 지원병을 공격하는 전술이었다.

    판당쩐과 따쉬자로 공격하던 국군은 해방군의 강력한 반격에 부딪혔다. 이곳의 전투가 국공내전에서 3대 격전으로 꼽는 쉬저우 동부전투이다. 중국에서는 이를 ‘쉬둥(徐東) 저지전’이라고 부르는데 쉬저우 동부의 요격전투라는 뜻이다. 국공내전에서 3대 격전은 동북 결전의 진저우 구원을 둘러싼 타산전투와 역시 동북에서의 헤이산 전투를 꼽는다. 그런데 가장 치열하기로는 화이하이 전역에서의 쉬둥 저지전을 꼽는다. 25킬로 정면에서 국군 12개 사단이 총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여기에 저항하는 해방군은 처음에는 2개 종대 병력이었다. 병력과 장비에서 국군에 비해 현저히 열세였다. 그러다 세 불리를 느낀 쑤위가 주력을 추가 배치하여 사실상 이곳이 주전장이 되었다.

    쌍방의 포격으로 판당쩐 일대의 산야가 초토로 변하였다. 양 군의 전투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치열한 포화를 주고받던 국공 양군은 결국 근거리 백병전에 돌입했다. 얼마 후 국군 96사단장 덩쥔린(鄧軍林)은 정면의 해방군 요격부대가 썰물처럼 후퇴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휘하 지휘관들에게 급히 추격하라 이르고 치우칭첸에게도 적이 도주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치우칭첸은 보고를 받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는 계속 “하오”를 연발하며 보고를 듣더니 “쥔린, 적이 도주한다니 빨리 추격하라. 매우 좋은 기회이니 장갑차를 앞세워 맹추격해야 한다.”

    치우칭첸은 전화기를 들어 류즈에게 보고하였다. “판당쩐과 따쉬자 선에서 전투하던 적이 도주하고 있습니다. 하루 밤낮을 격렬하게 싸웠는데 대승을 거뒀습니다. 포로와 전리품이 무수합니다.” 류즈는 치우칭첸의 보고를 듣는 순간 “판당대첩”이라는 글귀가 떠올랐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쉬둥대첩(徐東大捷)”이라는 말이 나을 것 같았다. 류즈는 난징에 있는 참모총장 구쭈통에게 즉시 보고했다. 구쭈통도 크게 기뻐하며 “국군이 녠좡에서 크게 승리했다.”고 선전하였다. “황바이타오 병단이 포위당 했지만 의연히 고수하며 공산군 수십만 대군을 견제하였다. 공산군은 인해전술도 효과가 없자 부득이 녠좡의 국군 진지 앞에서 후퇴하였다. 공산군 전사자가 들판을 덮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국방부장 허잉친도 오랜만의 승리에 크게 기뻐하였다. “황바이타오는 진정한 영웅이다. 비행기로 데려다 훈장을 줘야 한다.” 잠시 후 국군 비행기가 넨좡의 지면에 ‘중앙일보’와 ‘소탕보(掃蕩報)’(5)를 살포했다. 모두 국민정부쪽 신문으로 지면에는 황바이타오의 반신상과 장제스의 포상명령이 실려 있었다.

    전투가 11월 15일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치우칭첸과 리미의 병단은 여전히 진격 속도가 지지부진했다. 그동안 구원부대가 전진한 거리는 10킬로미터에 미치지 못하였다. 쉬저우에서 녠좡까지 거리를 감안하면 두 병단은 겨우 삼 분의 일을 전진한 셈이었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것으로 알고 있던 난징 국방부에게는 뜻밖의 일이었다. 대첩을 거두었다고 하더니 대군이 진격한 속도가 하루평균 2킬로미터에도 못미치는 것이다.

    장제스가 사실을 확인하고 노발대발하였다. 구쭈통과 궈루구이에게 즉시 현지로 가서 사실을 확인하고 독전하라고 명령하였다. 구쭈통은 쉬저우 지휘부에서 류즈와 두위밍을 보자마자 다그쳐 물었다. “공산군이 불과 두세 개 종대에 지나지 않는데 어째서 우리 병단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건가?” 두위밍이 해명하였다. “전투는 신문에서 쓴 것처럼 화살표 하나로 목적지에 가는 게 아닙니다. 적이 먼저 진지를 점령하고 있는데다 적병은 계속 증가일로에 있습니다. 전투력도 강력하여 마을 하나를 두고 여러 번 쟁탈전을 벌여야 겨우 점령합니다.”

    두위밍은 말을 멈추더니 궈루구이를 보았다. 그러더니 구쭈통을 따로 불러내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쉬저우의 작전계획을 궈루구이에게 이야기했소? 절대 말하면 안됩니다. 궈루구이는 공산당과 연결되어 있어요. 궈루구이가 나의 작전방침을 알게 되면 제대로 집행할 수 없습니다.” 구쭈통은 “괜한 의심이다.”고 달랬지만 두위밍의 태도가 완강하자 “알겠다. 비밀로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때 궈루구이는 비행기를 타고 넨좡 상공을 한 바퀴 돌며 공군 사령관 저우즈로우(周至柔)의 보고를 들었다. “폭격이 효과가 크고 공산군 사상자가 많습니다. 황바이타오 부대는 위험하지 않습니다.” 저우즈로우의 보고와 공산군이 쉬저우 동쪽에서 강력하게 저항하는 것을 근거로 난징 국방부는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공산군 주력이 쉬저우쪽으로 이동했다. 황바이타오 부대에 대하여는 감시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궈루구이는 녠좡 상공에서 황바이타오와 무선전화로 통화하였다. 7병단이 여전히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궈루구이는 다시 장제스에게 상황을 보고하였다.

    장제스는 직접 치우칭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국의 존망이 이 싸움에 달려 있다. 제자는 황푸 정신을 발휘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충성과 효성을 다하라.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적을 격퇴하여 황바이타오 병단을 구원하라.” 장제스는 치우칭첸에게 엄명을 내렸다. “하루만에 따쉬자까지 전진하여 황의 병단과 합류하라.”

    장제스의 전화를 받고 치우칭첸은 마음이 복잡하였다. 그때 난징에서 들려오는 소문은 더욱 흉흉하였다. 정부 각 부처와 원이 모두 서남쪽 이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치우칭첸은 그의 참모장 리한핑(李漢蓱)을 보고 불평하였다. “우리는 전방에서 죽기로 싸우고 있는데 난징은 천리나 떨어져 있어도 그렇게 무서워 하는가? 달아날 준비만 하고 있으니 참으로 우습구나.” 그는 또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싸우라는 건가? 두목은 왜 스스로 오지 않는가? 총통이 쉬저우에 앉아 있어도 누가 감히 그를 팔아 명령하겠는가? 쉬저우가 지금 위험하긴 하다. 그럼 비행장에서 지휘하면 되지 않는가?” 치우칭첸이 말한 두목은 장제스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치우칭첸이 장제스를 사칭한다고 불평한 것은 류즈와 두위밍을 말하는 것이었다. 화이하이 전역에서 국군의 난맥상이 대체로 이러하였다. 그날 치우칭첸과 리미는 휘하 지휘관들을 다그쳤으나 끝내 해방군 요격부대의 저지선을 돌파하지 못하였다. 녠좡 15킬로 지점까지 진출했으나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국공은 쉬저우 동부 전투에서 각각 1만영의 사상자를 내는 대혈전을 벌였다.

    1948년 11월 6일 황바이타오 병단 공격을 위해 진격중인 해방군

    황바이타오 부대 섬멸전을 그린 중국측 기록화

    황바이타오의 최후

    황바이타오는 궈루구이와 통화한 뒤 각 군단장에게 명령했다. “진지공사를 더 보강하라. 우리는 스스로 싸워야 한다. 군인의 직분을 다하자.” 그후 황은 비장한 목소리로 탄식하였다. “국민당 군에서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이를 구할 사람이 있는가? 다른 이를 위해 희생할 사람이 있는가?”

    황바이타오는 구원병이 자신과 부대를 구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래도 끝까지 저항하다가 장렬히 전사하리라고 결심하였다. 하지만 지휘관들 마음이 모두 황과 같지는 않았다. 11월 18일, 병력 대부분을 잃은 7병단 휘하 150사단장이 2500여명과 함께 해방군에 투항했다. 그날 정오 무렵 44군과 100군이 섬멸당했다. 11월 19일 20시, 쑤위는 끈질기게 버티는 국군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로 결심하고 휘하 지휘관들을 독려하여 맹공에 나섰다. 이날 해방군은 녠좡 수비군의 제1방어선과 2방어선을 돌파했다.

    11월 20일 새벽 5시 30분, 격전 끝에 해방군은 녠좡의 국군 수비지역을 대부분 점령했다. 황바이타오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녠좡 동쪽의 커다란 정원으로 이동하여 최후의 저항을 계속하였다. 화동 야전군은 11월 21일까지 넨좡과 주위에 남은 국군 잔여병력을 완전히 소탕하였다. 22일 오전에는 황바이타오가 버티던 정원까지 점령하였다. 황바이타오는 소수 경호병력과 함께 녠좡 동북쪽에 있는 우좡(吳庄)으로 후퇴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64군단장 류쩐샹과 함께 희망 없는 마지막 저항을 계속하였다. 해질 무렵, 황바이타오는 대세를 완전히 그르쳤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류쩐샹에게 남은 병력을 이끌고 서북쪽으로 포위망을 돌파하라고 권했다. 황바이타오는 류에게 “나는 늙었다. 병도 있어 포로가 되면 걸을 수 없다. 부끄러워 참을 수도 없다. 나는 죽은 뒤 충직한 국민당원으로 기억되면 그것으로 족하다. 당신은 아직 젊으니 이룰 게 있다. 포위망을 벗어나 당국을 위해 일해 달라.” 그러나 류쩐샹은 마을을 벗어나자 곧 매복한 해방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황바이타오는 소수 병력을 이끌고 마을에 있는 호수 서남쪽으로 돌파했으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황바이타오의 전사에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부상을 입은 그가 총통부 출입증 뒷면에 “황바이타오 진충보국”이라고 써서 부하인 25군 부군단장 양팅엔(楊廷宴)에게 준 뒤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다. 내전을 다룬 드라마에서도 황바이타오가 자살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유탄에 맞아 전사하는 대신 홀로 앉아 있다가 훈장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으로 그렸다. 황바이타오가 죽자 양팅옌이 황의 시신을 큰 나무밑에 몰래 매장하였다. 양팅엔은 천신만고 끝에 전장을 벗어나 난징으로 돌아갔다. 그가 국방부에 황의 전사를 알리니 그의 부인이 시신을 찾아 달라고 호소하였다. 국방부는 황바이타오의 부관 등을 변복시켜 매장지로 가서 황의 시신을 운구하였다. 황의 시신은 1949년 1월 17일 난징에 도착하였다. 그해 1월 20일, 국민당계 신문인 ‘중앙일보’는 “수도 각계 인사들이 반란평정중 순국한 황바이타오 장군의 장례식을 21일부터 3일간 진행하기로 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장제스에게 황바이타오는 보기 드문 충신이었다. 그는 장제스가 늘 강조하던 “투지만 있으면 승리할 수 있다.”는 정신을 구현한 인물이었다.

    국군 가운데 상승부대이던 황바이타오 병단의 10만 강병은 중원 결전의 서전에서 남김없이 섬멸되었다. 하이저우에서 철수한 병력까지 합하면 최대 15만명의 부대가 와해된 것이다. 황바이타오 부대가 철수를 시작하여 넨좡에서 섬멸되기까지 해방군은 6만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황바이타오 병단의 사상자도 6만여명에 이르러 유례없는 혈전이었음을 증명하였다. 죽기 전에 황바이타오는 이렇게 한탄하였다고 한다. “나는 참으로 어리석었다. 신안쩐에서 이틀을 기다리다니… 기다리면서 부교 설치를 잊다니….. 리미는 나중에 다시 구원하러 올 것을 그때는 왜 함께 철수하지 않았나?”

    황바이타오의 7병단이 섬멸될 무렵 치우칭첸과 리미의 구원 병단은 녠좡 부근에서 막혀 있었다. 그때 해방군의 포위망을 가까스로 벗어나 도주해온 25군단장 천스장을 만났다. 그들은 천에게서 7병단이 결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부대에 명령하여 전진을 멈추게 하였다.

    <주석>

    1. 완난사변(皖南事變)은 1941년 국군이 장제스의 밀명을 받아 안후이 남부에서 팔로군 신사군을 공격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2차 국공합작 기간이어서 이 공격은 중국 내외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2. 당시에는 군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규모는 개편된 사단과 같았다.

    3. 이 부대는 사실상 쑤위의 부대로 국군은 화동 야전군을 천이의 부대로 불렀다. 천이가 중원 야전군 부사령원으로 전보되었으나 화동 야전군 사령원을 겸했다. 쑤위는 사령원 대리 겸 정치위원 대리였다.

    4. 여기서 말하는 대운하는 베이징부터 저장성 항저우에 이르는 운하를 말한다.

    5. 사오당바오(掃蕩報)는 1935년 창간한 국민당 군사신문이다. 오직 공산당 소탕소식만 다루는 특수신문이었다.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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