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질문에 답하는 두 가지 방식
[책소개] 『말과 칼』 (임해성(지은이) / 안타레스)
    2020년 08월 01일 11:5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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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말’ vs. 노부나가의 ‘칼’

이 책의 제목인 ‘말(words)’과 ‘칼(sword)’은 서양의 ‘니콜로 마키아벨리’와 동양의 ‘오다 노부나가’를 은유하는 단어이자, ‘시대의 질문에 답하는 두 가지 방식’을 상징하는 키워드다. 흥미롭게도 ‘6월 21일’이라는 같은 날에 죽은 이들 두 사람은 15세기와 16세기의 연결선상에서 살아간 인물들이며, 같은 질문에 관해 각기 다른 대답, 즉 ‘말’과 ‘칼’이라는 방식으로 시대적 과제에 묻고 답하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인류 역사가 중세에서 근세로 전환하던 격동의 시대 한복판을 살았고, 각자 유럽과 일본의 근세를 여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저자는 마키아벨리와 노부나가를 통해 역사에서 또 다시 동서양이 ‘공통적 대안’을 모색하는 시기가 있었음을 발견했다. 급격한 중앙집권화와 그에 따른 사회적·경제적 변화,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거치면서 야기된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두 사람이 찾아낸 공통적 대안은 과거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그 대안은 자기 내면으로 향하는 구심력이 아니라 자신의 외부 세계에 대한 적극적 참여와 개입 그리고 주도적 역할로 모순을 스스로 극복하고자 하는 원심력이었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을 둘러싼 세계를 관찰했고, 의문을 품었으며, 그 해답을 얻고자 세상에 없던 생각으로 스스로의 삶을 열어나갔다.

한편으로 역사는 역설적인 모습도 보여주는데, 훗날 ‘암흑의 중세’로 평가받으며 왕권을 넘어선 교권의 전횡으로 침체됐던 유럽과, ‘전국 시대’라는 미명 아래 왕권을 넘어선 무사들의 싸움으로 어지러웠던 일본과 달리, 세계의 중심과 그 변경으로서 또 다른 역사의 흐름을 이끈 ‘중국’과 ‘조선’은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에 이르는 동안 침체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오히려 유럽과 일본은 이 시기에 웅비를 시작해 새로운 시대, 즉 중세에서 근세로의 전환을 이루게 된다. 중국과 조선과는 완전히 다른 궤적을 그렸던 것이다.

저자는 이 책 《말과 칼》에서 이 반전의 드라마를 생생하고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다. 그 시작은 중국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때 펼쳐진 정화(鄭和)의 대규모 해외 원정이다. 이를 심도 깊게 다룬다. 유럽이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중세를 끝내고 근세로 전환하는 데 큰 변수로 작용해서다. 저자는 정화의 원정과 그 직후의 쇄국이 ‘잠에서 깨어나는’ 유럽과 ‘겨울잠에 들어가는’ 중국의 모습에 그대로 투영됐다고 설명한다. 정화가 어떻게 《아라비안 나이트》 ‘신밧드의 모험’의 신밧드가 됐는지에 관한 흥미진진한 설(說)도 소개한다. 그런 다음 동로마 제국 멸망 후 분열된 유럽 대륙을 ‘중세의 균열’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서양과 동양의 두 인물로 연결된다. 유럽 역사가 근세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중앙집권국가들의 패권 경쟁에 이탈리아가 뒤처지지 않도록 하고자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써내려간 ‘말’을 파헤친다. 또한 마찬가지로 전국 시대의 혼란을 끝장내고 일본의 근세를 엶과 동시에 새로운 중앙집권국가를 세우기 위해 오다 노부나가가 목숨 걸고 휘두른 ‘칼’을 추적한다.

달라진 ‘양상’, 변함없는 ‘본질’

역사적 사실로만 바라보면 살아생전 마키아벨리의 ‘말’과 노부나가의 ‘칼’은 모두 실패했다. 《군주론》으로 대표되는 마키아벨리의 ‘말’은 그가 그토록 귀기울여주기를 바랐던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외면당했으며, 전국 통일을 눈앞에 둘 때까지 힘차게 휘둘러졌던 노부나가의 ‘칼’은 결국 배신자의 칼끝으로 돌아와 그를 몰락시켰다. 그 뿐만 아니라 이들의 이름은 모두 후대에 불한당의 대명사가 됐다.

저자는 르네 지라르(Rene Girard)의 ‘희생양 메커니즘’을 인용해 이들 두 사람이 ‘모방적 욕망’에 의한 희생양이라고 분석한다. 지라르에 따르면 인간의 갈등은 서로간의 ‘다름’이 아닌 ‘같음’ 때문에 일어난다. 다른 것을 보고 다르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을 보고 다르다고 한다는 것이다. ‘같은’ 욕망을 위해 ‘모방적’ 경쟁을 벌일 때 ‘갈등’이 발생한다. 서로를 닮게 만드는 동시에 갈등을 유발한다. 욕망에 대한 모방은 경쟁심을 낳고 그 경쟁심은 또 다시 모방을 낳는다. 이런 식으로 갈등과 폭력이 점차 격화되면 공동체에 위기가 찾아온다. 그러면 공동체는 그 위기를 초래한 책임과 비난을 하나의 대상에게 떠넘김으로써 공동체의 통합을 꾀한다. 이때 폭력이 집중되는 하나의 대상, 그것이 바로 ‘희생양’이다.

저자는 마키아벨리와 노부나가가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와 후대 사람들의 ‘모방적 욕망’에 의한 ‘희생양’이었다고 설명한다. 두 사람을 그런 이미지로 만든 주도 세력은 ‘교황’과 ‘천황’이었으며, 이른바 당대의 ‘대제사장’에 의해 희생양이 된 것이다. 아직 중세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 시대의 가치 판단 기준을 넘어서버린 이들은 집단으로부터 악마화됐다.

여기서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오늘날은 어떤가. 이성과 합리성이 지배하는 현대에는 더 이상 희생양이 없을까? 피를 보지 않을 뿐 누군가가 차별받고 배제되고 억압당하는 경우는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때로는 집단적 히스테리에 사로잡힌 다수가 소수를 향해 분노와 폭력을 분출한다. 나와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적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팽배하다. 여전히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마키아벨리와 노부나가가 좋은 수단만으로는 결코 좋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명확히 인식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데 당시 이들이 처했던 현실과 오늘날을 비교해봐도 별반 나아진 게 없어 보인다. 지금도 우리는 ‘경제’라는 전쟁과 ‘기업’이라는 사회에서 ‘전략’과 ‘전술’이라는 군사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며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양상’이 달라졌을 뿐 ‘본질’은 같다. 우리가 인식해야 할 현실도 동일한 것이다. 현재에도 공동체의 위기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내부의 긴장이나 분쟁이 폭발 직전에 있다고 해도 틀린 관점은 아닐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의 현실이 마키아벨리와 노부나가를 재조명하게 만들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되새겨야 할 삶의 가치를 위하여

저자는 전제적 왕권이든, 종교적 권위든, 집단적 압박이든 간에 외부로부터의 압력에는 ‘말’과 ‘칼’을 따로 또 함께 사용하며 맞서면 된다고 역설한다. 외부 세계와의 싸움에는 ‘말’도 수단이요 ‘칼’도 수단이기에 ‘말’로 싸울 수도 있고 ‘칼’로 싸울 수도 있다. 이 책에서 묘사하는 마키아벨리의 ‘말’과 노부나가의 ‘칼’은 글자 그대로의 말과 칼이 아니다. 세상을, 시대를, 상대를, 스스로를 바꾸고 변화시키는 두 가지 ‘삶의 무기’다.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이야기할 때 흔히 동양은 ‘순환적’이고 서양은 ‘직선적’이라는 식으로 설명해왔다.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서로 융합되기 어렵다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세계화의 물결 속에 동서양의 문화가 빠르게 뒤섞이고 정치적·경제적으로 한 배를 타게 되면서 그 ‘정신적 이질감’은 희석됐다. 더욱이 동서양을 비교해가며 하나의 공통된 주제로 접근해나가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우리가 정서적 유대감을 갖고 있는 쪽(동양)의 이해를 근저에 두고 태생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쪽(서양)을 끌고 들어와 ‘교집합’을 만든 뒤 그것을 통해 또 다른 ‘융합’을 시도하는 작업은 즐겁고 유용하다.

이 책은 그와 같은 작업의 일환으로 쓰였다.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시대의 질문에 ‘말’과 ‘칼’이라는 다른 방식,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낡은 생각과 관습을 파괴하겠다”는 같은 목적으로 그 해답을 구하고자 했던 마키아벨리와 노부나가의 이야기는, 21세기 제4차 산업혁명의 거센 물결을 헤쳐 나가는 현대인들이 귀감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역사는 ‘데자뷰’를 제공한다. 세계사 평행 이론처럼 역사의 시간과 공간의 다른 지점에서 같은 문제들을 반복적으로 제기하는 듯 보인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키아벨리와 노부나가가 죽음의 저편에 서서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마키아벨리와 노부나가가 그 시대에 어떤 질문을 던졌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무엇을 과제로 삼았으며, 그 과제를 달성하고자 어떻게 행동했는지 들여다봄으로써, 물리적 시공간을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주목해야 할 삶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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