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새를 타고 무지개 넘어
    구름 속 높이 올라보자
    [풀소리의 한시산책] 시인 허난설헌
        2020년 07월 31일 01: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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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따기

    – 김소월(金素月)

    우리 집 뒷산에는 풀이 푸르고
    숲 사이의 시냇물, 모래 바닥은
    파아란 풀 그림자 떠서 흘러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날마다 피어나는 우리 님 생각.
    날마다 뒷산에 홀로 앉아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져요.

    흘러가는 시내의 물에 흘러서
    내어던진 풀잎은 옅게 떠갈 제
    물살이 헤적헤적 품을 헤쳐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가엾은 이내 속을 둘 곳 없어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지고
    흘러가는 잎이나 맘해보아요.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미래사. 2001)

    떠나간 님은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있는 곳을 몰라 찾아갈 수는 없어도 그리움은 피할 수 없습니다. 님이 그리울 때면 뒷산 시내물가에 앉아 하염없이 풀을 따다 물에 띄어 보냅니다. 님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도 그리움에 속 둘 곳 없습니다. 그럴 때면 속절없어 공연히 풀잎을 따서 둘 곳 없는 내 맘을 함께 실어 시냇물에 띄어 보냅니다.

    그리움이란 무엇일까요. 속 둘 곳 없는 외로움이란 무엇일까요. 그리움이란 혹시 ‘나’ 밖에 있는 또 다른 ‘나’에 대한 갈구 아닐까요. 나 밖에 있는 나를 찾을 수 없거나 함께 할 수 없을 때 생기는 마음이 외로움인 것 같고요.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글을 시작하는 건 오늘 소개할 시인(詩人) 허난설헌(許蘭雪軒)을 소개할 때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의 시를 보겠습니다.

    感遇(감우) 1

    盈盈窓下蘭(영영창하란)
    枝葉何芬芳(지엽하분방)
    西風一披拂(서풍일피불)
    零落悲秋霜(역락비추상)
    秀色縱凋悴(수색종조췌)
    淸香終不死(청향종불사)
    感物傷我心(감물상아심)
    涕淚沾衣袂(체루첨의몌)

    느낀대로 1

    창가에 놓아둔 난초 화분
    난초꽃 벙글어 향기 그윽했는데
    건 듯 가을바람 불어와
    서리 맞은 듯 그만 시들었어요.
    어여쁜 모습 비록 시들었지만
    여전히 코 끝에 맴도는 난초의 향기.
    마치도 시든 난초가 나인 듯 싶어
    흐르는 눈물 옷소매로 닦아요.

    (나태주 역)

    ‘감물(感物)’은 ‘사물을 보고 느끼는 감흥’을 말합니다. ‘感物傷我心(감물상아심)’은 직역하면 ‘시든 난초를 보니 내 가슴이 아프다’ 정도 됩니다. 나태주 시인은 이 구절을 ‘마치도 시든 난초가 나인 듯 싶어’로 옮겼습니다. 훨씬 더 난설헌의 마음을 담은 번역 같지 않나요.

    강릉 초당 허난설헌 생가. 집 뒤 소나무숲 너머로 그가 추억했던 냇물이 흐른다고 합니다.

    난설헌(蘭雪軒)은 27세에 죽었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요절(夭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는 그의 짧은 생의 말년에 지은 것 같습니다. 난설헌이라는 호(號)에 난(蘭)이 있으니 난초에 대해 자신과 일체화시키는 건 자연스럽겠지요. 향기로운 난초가 꽃을 피웠는데, 그만 시들고 맙니다. 향기는 여전하지만 이미 생명을 잃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향기도 난초와 함께 사라져 갈 겁니다. 바라보는 난설헌 자신이 마치 시든 난초 같습니다.

    허난설헌(1563년(명종 18) ~ 1589년(선조 22))의 이름은 초희(楚姬)입니다. 난설헌이 살던 시대는 유학(儒學)으로 무장한 사림파(士林派)가 정치를 완전히 장악하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우리가 조선시대를 고루하다고 여기는 온갖 자잘한 예의범절이 이때부터 강력한 사회규범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일종의 과도기였습니다.

    난설헌의 아버지는 사림파가 동서로 나뉘어 당쟁(黨爭)을 벌이던 초기에 동인(東人)의 영수로 활약했던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년(중종 12) ~ 1580년(선조 13))입니다. 허엽의 스승은 대학자 서거정(徐居正) 선생입니다. 서거정 선생은 유학에서 이단시 하던 도교에 심취하였던 분이기도 합니다. 근본을 유학으로 하지만 도교나 불교를 두루 섭렵했던 분입니다. 그만큼 자유로운 사상을 가졌던 분입니다. 그분의 수제자인 허엽도 스승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서산대사나 사명대사 같은 분들하고도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난설헌의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 고개를 들어 나는 새를 바라보는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인 듯한 선비의 손을 잡고 붉은 저고리를 입은 채 고개를 한껏 젖히고 나는 새를 바라봅니다. 한가하게 옛 책을 보던 난설헌은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너무도 그리웠나봅니다.(그림 – 네이버백과)

    개방적인 사상을 가졌던 허엽은 딸인 난설헌에게도 아들들과 함께 글을 가르쳤습니다. 난설헌에게는 오빠 허성(許筬)과 허봉(許篈)이 있고, 동생 허균(許筠)이 있습니다. 이 4남매와 아버지 허엽 모두 글을 잘 했습니다. 당시 세상에서는 이들을 허씨(許氏) 5문장가(五文章家)라고 일컬었을 정도였습니다. 이 틈에서 많은 책을 읽고 상상력을 키우면서 자유롭게 자란 난설헌은 이미 8살 때에 그 유명한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었습니다.

    상량문은 대들보를 올릴 때에 축복하는 글입니다. 광한전은 달 속에 있는 전설적인 궁궐입니다. 백옥루는 백옥(白玉)으로 지은 누각인데, 옥황상제가 글 잘하는 이들을 모아놓은 곳입니다. 8살 허초희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백옥루의 상량문을 씁니다. 워낙 장문이라 시작 부분만 옮겨봅니다.

    읊노라. 보배로운 일산 하늘에 드리워지니 구름수레는 빛과 모양의 경계를 넘었고, 은빛 누각에 해 비치니 노을 젖은 기둥은 미혹된 티끌 같은 세상을 벗어났구나. 신선이 고동나발 불어 재주껏 구슬 기와 궁전을 아름답게 지었다 알리니, 푸른 이무기가 안개 불어 구슬 나무 궁전을 지어냈네.(述夫寶蓋懸空雲輧超色相之界銀樓耀日霞楹出迷塵之壺雖復仙螺運機幻作璧瓦之殿翠蜃吹霧噓成玉樹之宮)(허난설헌 평전, 새문사. 장정룡)

    다정다감한 아버지와 형제들 사이에서 자란 난설헌의 어린 시절은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꼽으라면 11살 때(1573년(선조 6))였을 겁니다. 12살 위 다정다감한 오빠이자 스승인 허봉(許篈)이 한 해 전에 문과 급제하였습니다. 이 해에는 글 잘하는 젊은 신하들에게 글공부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기 때문에 난설헌은 오빠에게 보다 자유롭게 글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난설헌은 15살에 한 살 위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습니다. 김성립의 집안은 안동 김씨 명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정 분위기는 사뭇 달랐나 봅니다. 시어머니는 엄격했고, 남편 김성립은 과거 공부를 핑계로 밖으로 돌았습니다.

    더욱이 18살 때 아버지 허엽이 상주에서 객사하고, 19살 때는 어린 딸이 죽습니다. 이어 20살 때에는 아들 희윤(喜胤)이 죽습니다.

    哭子(곡자)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紙錢招汝魄(지전초녀혼)
    玄酒奠汝丘(현주전여구)
    應知弟兄魂(응지제형혼)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縱有腹中孩(종유복중해)
    安可冀長成(안가기장성)
    浪吟黃臺詞(낭음황대사)
    血泣悲呑聲(혈음비탄성)

    아들의 죽음에 울다

    지난해 귀여운 딸을 잃었고
    올해는 또 사랑하는 아들이 떠났네.
    슬프고도 슬프다.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 보고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오슬오슬 바람이 일고
    숲속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 태우며 너의 넋을 부르며
    너의 무덤 앞에 술잔을 붓는다.
    안다. 안다. 어미가 너희들 넋이나마
    밤마다 만나 정답게 논다는 것.
    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하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기나 바랄 것이냐.
    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
    피눈물 슬픈 울음 혼자 심키네.

    (나태주 역)

    아들과 딸의 무덤(앞 쌍분)과 허난설헌의 무덤. 쌍분에는 허난설헌의 오빠 허봉이 허난설헌의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썼던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 눈물 흘리면서 쓰는 비문. 맑고 맑은 얼굴에 반짝이던 그 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곡(哭)에 부치노라.(苗而不秀者喜胤也。涕出而爲之銘曰。皎皎其容。晣晣其目。萬古之哀。寄此一哭)

    아들이 죽고 이듬해인 1583년(선조 16) 믿고 의지하던 둘째 오빠 허봉이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귀양갑니다. 외톨이가 되어 외로움에 사무치던 난설헌은 1585년(선조 18)에 집안에 상(喪)을 당해 강릉으로 갑니다. 강릉은 꿈에도 그리던 고향입니다. 이곳에서 신선이 산다는 광승산(廣乘山)에 가 신녀를 만나는 기이한 꿈을 꾸었고, 꿈속에 시 한 수를 짓습니다. 그 시가 유명한 「몽유광승산(夢遊廣乘山)」입니다.

    夢遊廣乘山(몽유광승산)

    碧海侵瑤海(벽해침요해)
    靑鸞倚彩鸞(청란기채란)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꿈속에 광승산에 노닐다
    푸른 바다는 옥빛 바다로 젖어들고
    파란 난새는 오색 난새에 의지하네
    스물일곱 송이송이 붉은 연꽃들
    찬 서리 내린 달빛 아래 떨어지네

    여러 책들과 인터넷에는 광승산(廣乘山)이 아니라 광상산(廣桑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전번역원 DB』(http://db.itkc.or.kr/)에는 광승산으로 되어 있고, 목판본 원문도 광승산으로 보입니다. 다산선생의 문집에 보면 광승산은 도교에서 중국의 신성한 산 오악(五嶽) 중 하나로 여기는 산이랍니다. 이런 것을 보아도 광승산이 맞는 것 같습니다.

    목판본 원본

    동생 허균은 이 시를 난설헌이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시라고 여겼습니다. 시에 나오는 삼구(三九)는 곱하면 27이고 난설헌이 27살 때 죽었기 때문입니다. 신선이 사는 곳에서 옥황상제 등이 시(詩)를 요청하고 그에 응하면 죽는다는 설이 있습니다. 역시 27살 때 요절한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이하(李賀)의 경우가 그렇답니다. 그러니 허균의 주장이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난설헌이 죽기 1년 전 작은 오빠 허봉이 죽습니다. 허봉은 일세를 풍미하던 대문장가였습니다. 난설헌에는 스승이었고, 붓과 책을 선물하면서 난설헌의 재능을 응원하던 다정다감한 오빠였습니다. 친정의 몰락으로 더 이상 기댈 언덕도 사라졌습니다. 아이들은 죽고, 뱃속의 아이도 사산합니다. 남편은 여전히 과거공부를 핑계로 밖으로만 돕니다. 그 와중에 시어머니와 불화는 계속됩니다. 실의에 빠진 난설헌은 27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습니다.

    난설헌은 6살 아래 동생 허균(許筠)에게는 누나이면서 시를 가르쳐 준 스승이고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벗이었습니다. 허균은 그의 문집 속 글들 곳곳에서 누나를 추억합니다. 그리고 누나의 재능을 ‘하늘 신선(天仙)의 재주’라고 칭했습니다. 그리고 형 허봉의 평을 빌어 “경번(景樊, 난설헌)의 재주는 배워서 그렇게 될 수가 없다. 모두가 이태백(李太白)과 이장길(李長吉)의 유음(遺音)이다.” 라고 극찬했습니다. 이장길은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를 말합니다. 난설헌의 시가 이백이나 이하와 같다는 말입니다.

    난설헌이 스승처럼 의지했던 다정다감한 오빠 허봉의 무덤(왼쪽)과 난설헌에게 의지했던 역시 다정다감한 동생 허균의 무덤(오른쪽) 폐허처럼 보이는 두 무덤엔 자줏빛 엉겅퀴가 이들의 따뜻한 혼인 양 무덤 가득 피어있다.

    시대에 저항했던 허균은 조선에 여성 시인이 드문 까닭을 이른바 ‘술 빚고 밥 짓기만 일삼아야지, 그 밖에 시문(詩文)을 힘써서는 안 된다.’ 해서인가? 라고 따지듯이 묻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우뚝 섰던 다정다감한 누나의 죽음 앞에 ‘옥(玉)이 깨진 원통함에 한이 없는 슬픔’을 느낍니다. 그 슬픔을 담은 만사(挽詞)가 ‘구슬이 깨어졌네! 진주 구슬 떨어졌으니(毁璧兮隕珠)’로 시작되는 그 유명한 시 「훼벽사(毁璧辭)」입니다.

    여성이면서도 조선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명인 난설헌의 시를 한편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아버지나 오빠 허봉, 특히 동생 허균까지 가족 모두는 다정다감했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한계에 맞서 개혁하고자 했던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가문의 몰락은 시대를 변혁하고자 하는 세력의 몰락이기도 했습니다. 난설헌도 동생 허균처럼 가난한 이웃에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여기 4부작 연시(聯詩)인 「빈녀음(貧女吟)」 중 3번째 시를 끝으로 보겠습니다.

    貧女吟(빈녀음) 3

    夜久織未休(야구직미휴)
    戛戛鳴寒機(알알명한기)
    機中一匹練(기중일필련)
    終作阿誰衣(종작아수의)

    가난한 여인의 노래 3

    밤 깊도록 쉬지 않고 비단 짜노라니
    베틀 소리만 삐걱삐걱 처량하게 울려요.
    베틀에는 비단이 한 필 짜여 있지만
    이 비단이 마침내 누구의 옷감 될까요!

    (나태주 역)

    나태주 시인은 비단을 베라고 옮겼는데, 저는 비단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 결례를 무릅쓰고 비단으로 모두 고쳤습니다.

    허난설헌은 신사임당보다 60년 뒤에 태어났습니다. 같은 강릉에서 태어났고 재능이 많은 여성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사임당은 친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웠던 반면, 허난설헌은 가부장적 성리학적 사고에 갇혀 지내야만 했습니다. 신사임당이 살었던 때보대 난설헌은 인간의 본성을 억압했던 이념이 승리하고, 변혁적 이념이 패배하는 시대에 살았던 것이죠. 서리 맞은 난초처럼 일찍 시들어간 억눌린 재능을 위해 문태준의 시 「강을 건너가는 꽃잎처럼」을 난설헌의 만사(挽詞)로 대신 올리면서 이번 한시산책을 마칩니다.

    강을 건너가는 꽃잎처럼

    – 문태준

    강을 건너가는 꽃잎들을 보았네
    옛 거울을 들여다보듯 보았네
    휘어져 돌아나가는 모롱이들
    울고 울어도 토란잎처럼 젖지 않는 눈썹들
    안 잊어지는 사랑들
    어느 강마을에도 닿지 않을 소식들

    나 혼자 꽃 진 자리에 남아
    시원스레 잊지도 못하고
    앓다가 귀를 잃고
    강을 건너가는 꽃잎들을 보았네

    강을 건너가는 꽃잎 꽃잎들
    찬비에 젖은 머루 같은 눈망울들

    (문태준 시집 『맨발』, 창비. 2010년)

    필자소개
    최경순
    민주노총 전국민주버스노동조합과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에서 일했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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