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란에 빠진 국민정부의 방어계획
    [국공내전㊻] 장제스, 작전안과 지휘관 인선 갈팡질팡
        2020년 07월 29일 10: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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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이하이 전역-2 :
    장제스, 작전방안과 지휘관 인선에서 갈팡질팡하다

    1948년 10월, 지난을 잃은 뒤 쉬저우 초비총사령부는 포진을 좁히고 병력을 집결시켰다. 4개 병단과 4개 수정구 부대 25개 군을 합하여 모두 60만명이었다. 이 병력을 쉬저우를 중심으로 진푸(津浦 : 텐진-푸커우)선, 룽하이(龍海 : 란저우-롄윈강)선 등 두 철로선을 따라 배치하였다. 동쪽의 하이저우(海州)에서 서쪽으로 상추(商丘)까지, 북쪽의 린청(臨城)에서 남쪽으로 벙부(蚌埠)까지 이른바 ‘일점양선(一点兩線)’(1)의 방어선이었다. 거기에 중원과 화동지역(2)을 더해 ‘전략적 방어’ 방침대로 부대배치를 단행하였다.

    국군 수뇌부는 해방군이 일단 공격을 시작하면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의견을 통일할 수 없었다. 나아가 싸울지, 물러서 수비를 굳힐지 의론이 분분하였다. 그 무렵 장제스는 동북에서 랴오야오샹 부대가 전멸당하고 선양이 극도의 혼란에 빠진 것을 보았다. 장제스의 신경은 온통 동북에 가 있어 쉬저우 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1948년 10월말, 공산당 중원 야전군이 정저우를 공격했을 때 국군은 국방부에서 작전회의를 소집하였다. 국방부장 허잉친과 참모총장 구쭈통은 두 개의 작전방안을 제출했다. 둘 다 화중 초비사령관 바이충시가 제출한 “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화이를 지켜야 한다.”(3)는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그중 하나는 병력을 벙부 중심으로 진푸철로(텐진-푸커우간) 양쪽에 병력을 집중하여 배치하는 안이었다. 그래서 공산군이 남하할 때 전력을 집중하여 결전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방안은 쉬저우를 포기하고 화이허로 물러나 하천방어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병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랴오선 전역 후 진시에 주둔하던 39군과 54군을 벙부로 이동시켜 쉬벙전장을 지원하게 하자.”고 하였다.(4)

    회의에서는 첫 번째 방안을 채택하고 국방부 작전청장인 궈루구이에게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입안하도록 하였다. 궈루구이는 즉시 입안하여 장제스를 비롯한 군 수뇌부에 제출했다. 그것이 논란이 많은 ‘쉬벙회전 계획’이다. 나중에 화이하이 전역을 실제로 지휘한 두위밍은 ‘쉬벙회전 계획’에 대하여 이렇게 회고하였다.

    “‘쉬벙회전 계획’을 요약하면 현재 초비사령부가 있는 쉬저우를 사실상 포기하고 남쪽의 벙부로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국군의 주력부대가 대부분 화이허 남안의 벙부 동서지역에 포진하여 해방군의 공세를 막아낸 뒤 기회를 보아 공세로 돌아서겠다는 계획이었다. 각 부대는 되도록 전투를 피하고 신속하게 목적지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11월 3일, 장제스는 후루다오에서 동북 국군의 철수를 지휘하고 있던 두위밍에게 사람을 보내어 쉬벙회전 계획에 대한 의견을 물어 보았다. 그리고 두위밍에게 전투지휘를 맡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제자가 이 안에 동의한다면 즉시 벙부에 와서 지휘하기 바란다.”

    두위밍은 계획을 본 뒤에 벙부 부근에서 해방군과 결전을 벌이는 것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했다. 다만 계획이 두루뭉술하여 각 병단의 행동에 대한 배치가 불명확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국군의 후퇴가 신속하지 않으면 해방군에게 발각되어 각개격파 당할 위험이 있다고 덧붙였다. 두위밍은 장제스에게 답신을 썼다. “저는 계획에 동의합니다. 후루다오 부대가 철수를 완료하면 즉시 벙부로 가겠습니다. 쉬벙회전의 부대배치는 류 총사령이 지휘하게 하고 계획대로 신속하게 실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산군의 견제로 철수하기 어려워집니다.”

    두위밍은 쉬벙회전이 동북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동북은 이미 승패가 결정된 싸움이었고 중원의 결전은 막 시작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국군의 벙부 쪽 철수를 주도할 경우 쉬저우를 포기했다는 국민당 안의 여론을 의식했다. 전 참모총장인 천청도 국민당에서 동북 실패의 책임을 지고 실각하였다. 두위밍은 후루다오의 철수를 완료하기로 결심했다. 그때쯤이면 국군이 화이허 부근으로 철수하였을 것이고 자신도 비로소 벙부로 갈 생각을 한 것이다. 책임을 부하에게 떠넘겨 온 장제스의 태도가 두위밍 같은 충직한 사람까지 그런 걱정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11월 9일, 두위밍은 임무를 마치고 난징에 가서 장제스를 만났다. 그는 ‘쉬벙회전 계획’이 실행되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전사는 “그때 두위밍은 당황하였으며 심리적 공황에 빠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위밍이 확인한 것은 ‘쉬벙회전 계획’ 대신 “가능한 모든 병력을 쉬저우와 벙부 사이 진푸로 양쪽에 집중하여 공세적 방어를 실시하고 공산군과 결전한다.”는 안이었다.

    두위밍은 이 안에 대하여 나중에 이렇게 비판하였다. “국방부의 제1안은 쉬저우에서 벙부까지 200킬로가 넘는 철도 양쪽에 수십만 대군이 포진하는 것이다. 쉬저우에 이미 시설해 놓은 영구공사는 포기하는 것이다. 쉬저우에는 겨우 2개 군이 남아 수비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각 병단이 철도 양쪽에 어떤 진지공사도 없이 장사진을 쳐서 도처에서 공격당할 태세였다. 동서고금 중국 내외의 전사에서 이런 포진방식은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안은 장제스 집단 중 허잉친, 구쭈통 등 수뇌부와 궈루구이 등이 주관하여 만든 것이다. 강을 지키려면 화이를 지켜야 한다는 방침으로 이런 이상한 방안을 작성한 것이다. 장제스는 이 계획의 실시를 감독하지 못하고 제외되었다.”(5)

    그러나 국군은 ‘쉬벙회전 계획’은 물론 대신 작성한 “쉬저우와 벙부 사이에서 결전한다.”는 안도 계획대로 집행하지 못하였다. 결전이 시작될 때까지 여전히 부대 배치를 완료하지 못한 것이다. 1948년 11월 5일, 국군 참모총장 구쭈통은 쉬저우에서 초비사령관 류즈와 병단 사령관 치우칭첸, 황바이타오, 리미 등과 군사회의를 소집했다. 그들은 첫 번째 부대 배치안을 확정하고 주력을 진푸로를 따라 길게 배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늦어도 너무 늦었다. 화동 야전군이 다음날인 11월 6일 공격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화이하이 전역 70주년 기념 포스터

    화이하이 전역 상황도

    바이충시 전역 총지휘를 견결하게 거부하다.

    국군의 혼란은 부대배치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지휘관 인선에서 장제스는 국군 통수권자로서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였다. 장제스는 화중 초비사령관인 바이충시가 중원 결전을 총지휘할 것을 희망하였다. 하지만 바이충시는 국군의 포진이 완전히 피동상태에 빠졌다고 생각하여 견결하게 사양하였다. 바이충시는 국민당 내부에서 유능한 인물로 꼽혀 왔다. 그는 대병단 작전을 수행한 경험이 풍부하고 군벌과의 전쟁이나 중일전쟁에서 능력을 입증한 지휘관이었다. 장제스는 광시군벌의 맏형격인 바이충시에게 전역 지휘를 요청하였고 처음에는 그도 흔쾌히 수락하였다. 내전의 운명을 가르는 중원의 결전이었으므로 파벌 다툼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바이충시는 화이하이 전역이 시작되기 전부터 장차 벌어질 중원 결전에 대한 나름의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1948년 6월, 화이하이 전역이 시작되기 5개월 전의 일이다. 장제스는 바이충시를 국방부장에서 면직하고 측근인 허잉친을 임명하였다. 바이충시는 곡절 끝에 화중 지휘부 사령으로 부임하여 후베이성 우한에 주둔하였다. 부임한 뒤에 그는 참모들과 진지하게 전쟁의 형세를 분석하였다. 바이충시는 창장 이남을 확보하려면 화이허를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이 이른바 ‘강을 지키려면 화이허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이다. 바이충시는 장제스에게 건의하였다. “화중 초비 총사령부를 우한에 둘 것이 아니라 강남지역에 가까운 벙부에 두어야 한다. 그 뒤 장화이(江淮)지역(6)의 산천과 구릉, 소택지를 이용하여 공세적 방어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바이충시는 안후이성과 장쑤성이 물의 고장으로 해방군이 장기로 하는 운동전을 펼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바이충시는 또 “장래 중원지역의 전투는 반드시 통일지휘를 해야 한다. 중원 화중과 쉬저우에 지휘부를 따로 두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반드시 합병하여야 대규모 전투를 치를 수 있다. 쉬저우는 지형상 공격하기는 쉽고 방어하기는 어렵다. 지휘부를 두기에 적당한 장소가 아니니 벙부로 옮겨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장제스는 당시 바이충시가 제기한 건의와 구상을 한가한 소리로 들었다. 그가 보기에 중원의 결전이 멀어 보였던 것이다. 장제스는 바이충시의 건의가 대병을 거느리기 위해 명분을 세우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결국 장제스는 바이충시의 건의를 유야무야 묵살하였다. 그때 바이충시는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장제스는 중원의 대군을 분할하여 사용한다. 장래에 반드시 패하고 말 것이다.”

    결전이 임박하자 장제스는 바이충시의 제안대로 벙부에 국방부 지휘소를 설치하고 바이충시에게 대임을 맡기려고 하였다. 두 개의 지휘부를 통합하고 바이충시에게 통일하여 지휘하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바이충시는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꿨다. 다음날 군사회의에서 그는 전역 지휘를 사양하였다. 누가 무슨 말을 하여도 듣지 않으니 사양이 아니라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도대체 바이충시는 왜 하루 만에 입장을 바꾸었을까? 바이충시의 돌발적인 행동은 많은 억측을 낳았다. 어떤 사람들은 파벌투쟁이 원인이라고 생각하였다. 장제스를 밀어내고 광시계의 영수인 리쫑런을 옹립하기 위해 장제스의 성공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군사회의 전날 밤 바이충시가 리쫑런을 만났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수십만 대군을 총괄 지휘하는 임무를 하루아침에 내던지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바이충시가 고사하며 내세운 이유나 실제로 드러난 상황으로 미루어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당시 국군의 포진을 원인으로 보는 견해이다. 바이충시는 쉬저우 초비사령관인 류즈가 펼쳐놓은 작전지도를 보게 되었다. 여러 개의 병단이 룽하이 철도를 따라 일자로 늘어서 머리와 꼬리가 서로 돌보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국군이 포진을 완료한 것은 화이하이 전역이 시작되기 전 겨우 5일이 남았을 때였다. 새로 배치하기에는 시일이 너무 촉박하였다. 대적을 앞에 두고 수십만 대군을 하루아침에 이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이충시는 지도에서 국군부대가 포진된 상태를 보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해도 지휘를 맡지 않은 것이다.

    화중초비사령관 바이충시 국군 최고의 지장으로 꼽혔으나 화이하이 전역 총지휘를 거부했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좋은 전략과 전술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전략과 전술이 상황에 맞게 제대로 구사되는지 여부이다. 바이충시의 안이 채택되었다고 하여도 시기가 너무 늦어 포진이 엉망이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따라서 전략과 전술을 올바로 집행할 지휘관이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바이충시가 거부했으니 다음으로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두위밍이었다. 장제스는 자신의 ‘소방대장’ 격인 두위밍을 동북에서 급히 불러 내렸다. 그때는 이미 화동야전군의 공격이 시작된 후였다. 즉 화동 야전군의 공격 개시일이 1948년 11월 6일인데 두위밍이 쉬저우 전장에 도착한 날이 11월 9일이었다. 이래서는 아무리 유능한 지휘관이라고 하더라도 능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해방군이 총공격을 시작한 지 3일 후 장제스는 두위밍을 부총지휘로 하여 류즈를 보좌하게 하고 겨우 전투 지휘부 구성을 마무리했다. 장제스는 두위밍을 전선지휘부 주임으로 임명하여 전투지휘를 직접 맡겼다. 사령관인 류즈를 믿기에는 불안하여 지휘의 실권을 두위밍에게 준 것이다. 그러나 두위밍은 자신의 구상은 그만두고 국방부가 제출한 ‘쉬벙회전 계획’조차 전혀 실행되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내전을 다룬 드라마에서 두위밍은 의견을 묻는 장제스에게 “저는 이제 막 도착하여 구체적인 상황을 알 수 없습니다. 의견을 듣는 것만 하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실제로 전투 지휘를 할 사람이 그런 상황이니 국군의 대비는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두위밍은 충직한 군인이었다. 그는 장제스의 명령을 계속 해태하거나 거부하는 웨이리황이나 무능하기 짝이 없는 류즈와 다투거나 갈등을 빚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어진 임무를 다하려 애를 썼다.

    국군은 일사불란하기는커녕 지휘부 구성과 부대배치가 뒤죽박죽인 채로 중원의 결전을 맞이하였다. 바이충시는 두위밍이 후루다오에서 되돌아와 쉬저우 전장에서 소방대장 역할을 맡았을 때 전쟁의 앞날을 예언하였다. “중원 전장의 실패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 바이충시의 예언이 무책임하기는 하지만 냉혹한 현실을 말한 것이었다. 중원의 전장도 주력부대의 진저우 철수문제로 웨이리황과 갈등을 빚는 사이 시일을 허비했던 동북과 같은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현장의 지휘관이 다음 작전을 구상하고 수뇌부가 이를 검토한 뒤 일사불란하게 부대배치를 단행한 공산당에 비해 결전이 임박할 때까지 인선에 우왕좌왕한 국민정부는 싸우기 전에 이미 주도권을 잃고 있었다. 그런데 더 한심하고 위험한 일이 국군 수뇌부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공산당 지하당원 궈루구이, 국군 작전계획을 입안하다

    국공내전을 통틀어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화이하이 전역에서 국군의 작전계획을 입안한 이는 중공 지하당원인 궈루구이였다. 궈루구이는 이 연재에서 소개한 일이 있는데 화이하이 전역 당시에도 국방부 작전청장을 맡고 있었다. 적수의 첩보원이 작전계획을 입안하는 책임자였으니 더 말을 해서 무엇하랴. 국민정부는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부대배치나 이동계획 등을 적에게 통보하는 셈이 되었다. 궈루구이는 허잉친의 지시를 받고 ‘쉬벙회전 계획’을 작성하였다. 그것을 장제스와 국방부에 제출하는 즉시 마오쩌둥을 비롯한 공산당 수뇌부에게도 전달하였다.

    궈루구이는 국민정부 안에서 장제스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장제스는 추호도 궈루구이를 의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본에 유학한 군사 수재”로 칭찬하였다. 궈루구이는 본래 전임 참모총장인 천청의 심복이었다. 천청에게 신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허잉친, 구쭈통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다만 궈루구이를 ‘통공분자’로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두위밍이었다. 두위밍은 궈루구이가 있으면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참모총장인 구쭈통이나 장제스와 따로 독대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궈루구이가 들으면 기밀이 새어 나간다고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두위밍도 정작 쉬벙회전 계획에 대하여는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면 ‘쉬벙회전 계획’이 고위 지휘관들 사이에서 검토된 안이고 궈루구이는 단지 작성실무를 맡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주요기밀인 작전계획이 중공 지도부에 즉각 통보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전 드라마에 보면 두위밍은 참모총장인 구쭈통에게 궈루구이를 조심하라고 여러 차례 충고한다. 그러나 구쭈통은 “궈루구이는 유능하고 충직한 인물이다. 괜한 의심이다.”하며 적극 변호하였다. 두위밍은 장제스에게 “궈루구이가 공산당원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직간한 일이 있었다. 장제스가 깜짝 놀라서 근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두위밍이 대답했다. “저도 비교적 청렴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궈소귀(小鬼 : 꼬마. 얕잡아 부르는 말)와 비할 바가 아닙니다. 청렴한 정도가 이해할 수 있는 정도를 벗어납니다. 거기다 여색도 멀리합니다. 재물을 탐하지도 않고 심지어 자기집 소파를 기워서 쓰고 있습니다.” 장제스가 듣더니 “그건 근거가 될 수 없다.”며 일축하였다고 한다.

    화이하이 전역에서 궈루구이의 역할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단순히 전역계획을 입안하고 그것을 공산당 수뇌부에 전달했을 뿐이다.”고 하는 이도 있고 “장제스를 움직여 국군이 섬멸 당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궈루구이의 활동에 대하여는 화이하이 전역 과정에서 몇 번 더 등장할 수밖에 없다. “가장 중요한 결전의 작전계획을 공산당 지하 공작원이 입안하였다.”고만 하기에는 너무도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산당 쪽에서는 “쉬저우를 포기하고 화이허 남쪽에 병력을 집중하여 결전하는 안”을 꺼렸다고 한다. 해방군이 전투의 주도권을 갖기 어렵고 병력과 장비가 우세한 국군의 장점이 부각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야가 좁은 -중국 군사평론가들의 시각이다. – 장제스는 쉬저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쉬저우를 중심으로 벙부와 사이에서 결전하는 궈루구이의 작전계획을 승인했던 것이다.

    화이하이 전역 중공측 지휘부 좌로부터 쑤위 덩샤오핑 천이 류보청 탄전린의 모습이다

    전선을 시찰하는 화동여전군 지휘부 지도를 든 이가 쑤위이다.

    화이하이 전역 참전부대 현황

    ▲ 인민해방군

    화동야전군, 중원 야전군 23개 종대, 63-66만명, 민병 40만명 별도
    총전적위원회 : 덩샤오핑, 류보청, 천이, 쑤위, 탄전린

    1. 화동 야전군

    16개 종대 및 4개 여단 추가 40만명
    사령원 대리 및 정치위원 대리 쑤위
    부정치위원 탄전린
    참모장 천스지
    정치부 주임 탕량

    2. 중원 야전군

    7개 종대 및 3개 여단 추가 20여만명
    사령원 류보청
    정치위원 덩샤오핑
    부사령원 천이, 리센녠
    부정치위원 장지춘
    참모장 리다

    ▲ 국민정부군

    총사령관 : 류즈
    부총사령관 : 두위밍, 손쩐(孫震) , 류루밍(劉汝明) , 펑즈안(馮治安), 리옌녠(李延年)
    참모장:리수정(李樹正)

    전진 지휘부 (현장 지휘부)

    주 임 : 두위밍
    부주임 : 쑨웬량, 자오자샹(趙家驤)
    참모장 : 쉬스춘(舒适存)

    국민정부군 총병력 80만명, 실제 참전병력은 50만명 정도임

    제1수정구 (쉬저우 직속부대)

    북부전선 부대

    2병단 사령 치우칭첸 (12만명)
    7병단 사령 황바이타오 (10만명)
    13병단 사령 리미 (5만명 이상)
    16병단 사령 쑨웬량 (4만명)
    제3수정구 (3만명)
    사령 펑즈안
    부사령 장커샤(張克俠) 허지펑(何基灃)
    기타 통신, 보급, 병원, 교통경비 등 4만명

    남부전선 부대

    6병단 사령 리옌녠 (8만명)
    8병단 사령 류루밍 (4만명)
    12병단 사령 황웨이 (12만명)

    전선 지원 나선 해방군 측 노무자들

    <주석>

    1. 일점양선(一点兩線)은 쉬저우를 중심으로 진푸철도, 룽하이 철도 연선에 병력을 배치한다는 뜻이다.

    2. 일반적으로 중국 동부지역을 말한다.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내전시기의 화동지역은 장쑤, 안후이, 저장, 장시, 산둥, 푸젠성과 난징시 그리고 상하이시를 가리킨다.

    3. 수강필수회(守江必守淮): 창장을 지키기 위해서는 화이허와 그 남쪽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4. 이 내용은 당시 국군 작전청장이던 공산당 지하공작원 궈루구이의 회고록에서 발췌한 것이다.

    5. 두위밍은 장제스가 동북 때문에 쉬저우 부대배치를 소홀히 하였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부대배치에 관여하였다. 두위밍이 이처럼 비판하던 시기는 그가 전범으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어 정치협상회의 문사위원으로 활동할 때였다. 중국에 있어 장제스에 대한 비판이 가능하였다.

    6. 장화이(江淮)지역은 창장과 화이허 사이의 지역, 즉 장쑤성과 안후이성 일대를 말한다.

    <국공내전>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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