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사회당’에서
    ‘이르쿠츠크파’의 길로
    [한국전쟁 70주년 기고] 유동열 ③
        2020년 07월 28일 03: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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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70주년 기고] 유동열 ① : 중간파 군인을 회상하며

    [한국전쟁 70주년 기고] 유동열 ② : 상해로 가지 않은 상해 임시정부 참모총장

    이제 유동열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참여한다. ‘이르쿠츠크파’가 ‘상해임정’과 ‘한인사회당’에 대한 반대의 태도를 확고히 했다는 점에서 그의 변신은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활동과는 많이 다른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이 당시 ‘이르쿠츠크파’에 참여하게 되는 사람들은 유동열뿐만이 아니었다. 상해임정 출신의 안병찬과 장건상이 매우 적극적이었고 나중에는 여운형과 김규식(후보당원)도 참여한다. 이것은 당시 임시정부에 대한 민족해방운동진영의 불만이 매우 컸음을 말한다. 유동열이 1922년 4월초 길림성 액목현의 한인청년회에서 한 강연에서 ‘독립 선언한 지 4년인데 상해임시정부가 하등의 주의방침도 없이 형식에 얽매여 정권만 다투고 있다’고 비판한 것에서 당시 상해임정의 실태를 잘 알 수 있다.

    실제 상해임정의 정치노선은 국무총리 이동휘의 ‘독립대전쟁(급진론)’과 ‘반독립전쟁론’인 대통령 이승만의 ‘외교독립’, ‘독립전쟁 시기상조론’인 노동국총판 안창호의 ‘실력양성(완진론)’으로 나뉘어 있어 전체 민족해방운동을 단합된 노선으로 이끌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나 1919년 2월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서는 임시정부 수립 때부터 계속 문제가 되어 오다가 이승만이 상해임정에 처음 부임한 1920년 12월 8일부터는 이를 둘러싼 대립이 격화되었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창립되던 1921년 5월에는 그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1920년 상해임정 대통령 이승만 공식 사진. 그의 부임으로 갈등만 더욱 증폭됐다.(출처- 이승만기념관)

    또 하나의 논란은 한인사회당원이자 국제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인 박진순(박이반 표도로비치)과 한인사회당원이며 상해임정 전권대사인 한형권이 국제공산당과 모스크바 레닌 정부로부터 받은 금화 40만루불이었다. 1차 도착지인 원동공화국 수도인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박진순과 김립은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쳐 1920년 겨울 상해로 이 자금의 일부를 들여왔다. 이들이 도착하자 자금의 집행기관을 둘러싸고 상해의 사회주의자들은 분열하고 말았다. 한인사회당은 상해 사회주의자들의 전체조직인 ‘한국공산당’에서 탈퇴함으로써 자금의 소유권한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분명히 했으나 이 결정으로 인한 후폭풍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한인공산당 잔류파가 이에 반발하여 대거 ‘이르쿠츠크파’에 가담함으로써 그들의 세력 확대에 도움을 주게 된 것이다. 안병찬, 조동호, 여운형, 김만겸(김이반), 최창식이 그들이며 북경의 장건상도 이에 합세하게 된다. 이들의 막내는 바로 1920년 11월 상해로 망명한 당시 20살의 박헌영이다. 박헌영은 상해에서 김단야, 임원근, 조봉암과 교유하고 있었다. 이들 젊은이들은 나중에 스스로를 ‘화요회’라고 부른다. 미래에 이들이 민족해방운동을 이끄는 주역으로 성장한다는 점에서 한인사회당의 방침은 분명 아쉬운 지점이 있다.

    또한 한인사회당은 상해에 주재 중이던 러시아 공산당원 보이틴스키와 김만겸과도 척을 지게 된다. 보이틴스키는 동북아 사회주의운동을 조직화하기 위한 임무를 갖고 상해에 왔으며 그 일환으로 한국공산당 설립에 참여했다. 한편 한인사회당의 박진순도 국제공산당으로부터 보이틴스키와 똑같은 임무를 위임 받고 상해에 도착했다. 이들뿐만 아니라 러시아공산당 시베리아국과 원동국도 독자적인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렇게 같은 사업을 놓고 여러 주체들이 복잡하게 얽히게 만든 책임 소재는 분명 국제공산당과 러시아공산당에 있지만 이런 혼선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는 한인사회당이 받게 된다. 1921년 1월 15일 결국 동북아혁명의 창구는 국제공산당 원동비서부로 단일화되었고 전권위원에 슈먀츠키, 책임비서에 보이틴스키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제공산당 원동비서부는 시베리아국 산하 동양국(인원 포함)을 이관 받아 창설되었기 때문에 일원화됨에 따라 생기는 장점이 모두 희석되어 버렸다. 원동비서부가 특정 정파에 대한 편향성을 노골적으로 갖게 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동양국의 한인지부를 겸하던 이르쿠츠크 측의 전로한인공산당은 국제공산당 원동비서부의 한인지부로 격상되었다. 앞으로 원동비서부는 이르쿠츠크파를 중심에 놓고 사업을 진행하게 된다. 반면 국제공산당의 후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 한인사회당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동시베리아의 정세도 급박하게 돌아갔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등이 결성한 ‘정치중앙’이 1920년 1월 5일 백위파 정부의 마지막 거점이던 이르쿠츠크를 점령했다. 백위파 정부가 쓰러지자 이르쿠츠크 볼셰비키의 다수는 ‘정치중앙’을 몰아내고 소비에트권력을 즉시 재건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러시아공산당 이르쿠츠크주 위원장이며 소수파인 ‘알렉산드르 크라스노쇼코프’는 다수파의 의견을 시기상조라고 비판하며 ‘정치중앙’과의 협력을 강조하였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동시베리아 및 원동지역의 모든 민주세력이 연합하는 ‘완충국가(Buffer state)’ 수립안을 1월 20일 승인하였다. 이에 반발한 ‘이르쿠츠크군사혁명위원회’는 21일 ‘정치중앙’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크라스노쇼코프는 바이칼호 동쪽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체제의 ‘원동공화국’ 수립 작업에 들어갔다. 그의 노력으로 1920년 7월 15일 일본은 사실상 원동공화국을 승인하고 ‘치타’를 위시한 프리바이칼지역에서 완전히 철군하는 내용의 ‘곤고타협정’에 서명하였다. 이에 고무된 러시아공산당 정치국이 8월 13일 ‘원동공화국 테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완충국가를 둘러싼 갈등은 쉽게 가라앉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동시베리아와 원동지역에서 ‘10월혁명’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를 둘러싼 볼셰비키 내부의 노선투쟁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갈등으로 한인들의 통합노력은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미 다수파가 이르쿠츠크의 권력을 장악한 바로 그 다음날 적위군 장교 남파벨(남만춘)을 중심으로 러시아공산당 이르쿠츠크주위원회 한인부가 출범하였다. 이제 이르쿠츠크 볼셰비키가 굳이 한인사회당을 지지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청산리전투가 진행되던 10월 22일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이 치타를 장악하였다. 지금까지 왕래를 할 수 없었던 두 사회주의세력 -이르쿠츠크의 한인볼셰비키와 치타의 한인사회당원- 이 치타 해방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영역 확장 경쟁을 시작할 것이다. 1920년 12월 이르쿠츠크의 한인볼셰비키들은 ‘전한공산당’ 창립을 위해 각 지역에 전권위원들을 파견했다. 이들에게 안병찬, 장건상, 유동열 같은 이는 민족해방운동의 명망과 상징성을 갖춘 인물들로서 기반이 부족한 그들로서는 우리편으로 반드시 만들어야만 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르쿠츠크 및 치타에 가까운 곳인 하얼빈과 길림을 거점으로 하는 유동열이 이렇게 주변정세가 급변함을 모를 리 없다. 그는 몽골 ‘니슬렐 후레(울란바토르)’의 한인사회당 연락망인 이태준과의 서신 교환을 통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인섭의 수기에도 나와있듯이 그는 1918년 9월 백위파의 하바롭스크 함락으로 인해 중단되어버린 군관학교 건설과 군대 양성에 여전히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업에 대한 이르쿠츠크 측의 의견이 긍정적이라면 함께 못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3월 1일 이르쿠츠크에서 전조선인공산당조직대회를 소집한다는 내용의 1921년 2월 19일자 매일신보 기사.

    유동열은 아마도 북만주를 담당한 이성(이재복)이나 하얼빈을 거쳐 국내로 침투한 조훈을 만났을 것이다. 사전에 접촉이 없었다면 그가 이르쿠츠크파의 ‘전한공산당 창당대회’ 자격심사과정을 쉽게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조훈이 수령한 사업비가 5천엔이었고 여비는 10만루블을 받았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이들의 당시 소속기관인 러시아공산당 시베리아국 산하 동양국(후일 국제공산당 원동비서부)이 이 사업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실제 이 기관이 이르쿠츠크 전로한인공산당측의 ‘전한공산당대회’ 소집에 막대한 자금을 썼다는 김동한의 진술이 남아있다.

    유동열은 1921년 4월 15일자로 상해임정에 사직서를 제출하며 그동안 형식적으로 갖고 있던 참모총장과 총사령관 직위를 내려놓았다. 4월 17일에는 북경에서 박용만과 신숙의 주도로 반상해임정을 표방한 ‘군사통일회의’가 조직되었다. 학무총장 겸 구미주차위원장 김규식과 교통총장 남형우의 사직서도 수리되었다. 이르쿠츠크파의 창당대회가 진행되던 5월 11일에는 완진론의 중심인 안창호마저 사퇴하였다. 마치 잘 짜인 각본이 있는 것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된 흐름들은 이승만 체제의 상해임정이 민족해방운동을 이끌고 나가기에는 명백한 한계에 도달했음을 뜻했다.

    이인섭의 회상에 따르면 유동열은 이르쿠츠크파가 주도한 ‘전한공산당 창당대회’ 참가를 위한 여정 중에 치타를 잠시 방문했다고 한다. 그는 중동철도의 주요한 역인 하얼빈에서 기차를 타고 만주리를 거쳐 치타로 왔을 것이다. 이인섭은 유동열에게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정파의 갈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정파싸움에 휘말리지 말 것을 여러 차례 당부했다. 이는 참석하지 말라는 표현을 완곡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유동열은 속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대답을 남겼다. 이미 그의 결심은 굳어진 상태였다.

    5월 4일 이르쿠츠크 전로한인공산당 측이 주도하는 ‘전한공산당 창당대회’가 시작되었다. 중앙위원은 11명이 선출되었으나 투표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누구인지는 추정만 가능하다. 유동열의 중앙위원 선출 여부는 학자마다 다르게 해석한다. 여운형의 조서에 유동열이 이때 중앙위원에 선출된 것으로 나오므로 이를 인용하는 경우도 있고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고려공산당 창립대회는 15일에 폐막했다.

    그러나 대회 진행과정에서 한인사회당을 지지하는 많은 참석자들이 추방 당했고 이들이 자신들을 쫓아낸 자들을 당중앙으로 인정할 이유는 없었다. 한인사회당도 5월 20일 상해에서 ‘전한공산당 대표회’를 소집하여 고려공산당을 창당했다. 사람들은 이름이 같은 두 당을 구분하기 위해 먼저 창당한 당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뒤에 창당한 당을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부르게 된다.

    대회가 끝난 5월 18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하 이르쿠츠크파)은 당시 가장 시급한 현안과제였던 한인군대를 지휘할 기관인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정식으로 조직하였다. 아마도 국제공산당 원동비서부가 사령관을, 이르쿠츠크파는 군정위원을 추천한 것으로 보인다. 사령관에 ‘네스트로 칼란다라쉬빌리’, 군정위원에 유동열과 최고려 이들 3명으로 구성된 이르쿠츠크파의 최고군사기관이 수립된 것이다.

    23일 폐막한 상해파 고려공산당(이하 상해파)도 군사부 위원으로 김동한, 박일리야(박윤천), 박그리고리(박기석), 이용, 김규면을 선출했다. 이들은 전한군사위원회 소속 대한의용군으로 이르쿠츠크파의 고려혁명군과 수개월째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이미 이용은 이르쿠츠크파 군대의 수배를 받고 있었고 김규면은 체포된 상태였다. 당의 분열이 고스란히 무장부대의 분열로도 이어진 것이다.

    ‘고려혁명군정의회’ 지도부인 유동열 일행은 캅카스기병 600명을 이끌고 원동공화국 수도인 치타에 있는 인민혁명군 총사령부를 향해 출발했다. 5월 23일 치타에 도착한 유동열 일행은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라핀과 한인무장부대의 통합과 이후 활동에 대해 협의하였다. 치타에서의 업무협의를 마친 그들이 이제 가야 할 곳은 고려혁명군이 주둔한 자유시였다.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지도부는 7일부터 임시군정의회의 지도부로부터 업무를 인수받기 시작하였다. 칼란다라쉬빌리는 3월 하순 임시군정의회의 설립 때 이미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실제 부임은 이번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앞길에는 서광이 비추는 듯했다. 이들의 자유시 도착을 전후로 해서 마자노프에 주둔중이던 홍범도, 안무, 최진동이 병사들을 이끌고 대한의용군을 떠나 자유시로 왔기 때문이다. 이제 연해주에서 온 부대들의 연합체인 사할린의용대만 굴복시킨다면 이르쿠츠크파의 고려혁명군은 전체 독립군에 대한 지휘권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김홍일에 따르면 박일리야는 이동휘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했고 사할린의용대는 박일리야를 중심으로 굳게 단결하고 있었다고 한다.

    국제공산당 극동비서부 전권위원 슈먀츠키(뒷줄 가운데 콧수염)와 몽골혁명가들. 크라스노쇼코프의 정적이었던 슈먀츠키는 이르쿠츠크파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뒷줄 세 번째 남자는 린칭인 엘벡도르지로 남만춘의 동생 남마리아의 남편이다.

    당시 국제공산당 원동비서부의 동방정책은 모험주의적인 성향의 무장투쟁노선이었다. ‘고려혁명 임시군정의회’는 3월 하순경 3개월 이내에 대한의용군과의 통합작업을 마무리한 후 조중국경지대로 진출, 길림성 안도현과 무송현을 근거지로 하여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상류(백두산) 일대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미 몽골인민당의 의용군은 4월 28일 러시아적위군과  연합하여 일본의 후원을 받던 웅게른슈테른베르크가 지배하던 수도 ‘니슬렐 후레를 향해 진격을 하고 있었다. 몽골인민당이 수도에 입성한 것은 7월 8일의 일이었다.

    이를 볼 때 이르쿠츠크파의 지지를 받는 고려혁명군과 상해파의 지지를 받는 대한의용군의 갈등은 노선상의 차이가 아니라 지휘권을 둘러싼 갈등이란 것임을 알 수 있다. 의외로 이 문제는 좋게 해결될 수도 있었지만 대화의 상대방이 모두 군인이라는 게 문제였다. 군인들의 사고방식은 ‘작전’이다. ‘작전’이 종료되면 오직 승자와 패자만이 남을 뿐이다. 군인들의 ‘전술교범’에는 대화와 타협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계속)

    필자소개
    국방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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