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론> 질문 대답하기 정신없는 우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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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9월 29일 10: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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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순과 정운찬

    조순 선생에 대해서는 말년에 하도 정치적으로 오락가락하셔서 그냥 그저그런 한 물간 1세대 미국 유학생에 불과하다고 생각을 하다가, 최근 한겨레 신문에 올리는 글들을 보면서 완전히 생각을 고쳐먹고 나도 초긴장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FTA 입국, 들어본 적도 없다”는 구절로 끝을 맺는 FTA에 반대하는 조순 선생의 글은 한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물론 우리말은 “–다”로 끝나기 때문에 대부분의 글의 싯적 운율을 가질 수 있지만 조순선생의 최근 글은 마지막에 가면 묘한 운율들을 가지고 있다. 한학 공부로 시작했던 옛 지식인의 힘을 느끼면서 묘하게 전율하게 된다.

    이에 비하여 경제학 교과서 앞은 “개방이 좋다”고 시작했지만 사람들이 교과서 뒤를 읽어보지 않아서 “지금 이대로의 한미 FTA를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서울대 정운찬 선생의 말은 어딘가 힘이 없고, 자꾸 경제학 교과서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경제학 교과서는 개방이 좋다고 시작하지는 않고, 알프레드 마샬의 부분균형으로 시작해서 경제성장론으로 끝난다.

    2. 성장, 발전, 축적

    경제학자들은 성장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라고 생태주의자들이 흔히 이야기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성장’이라는 개념은 생물학에서 들어온 개념인데, 1920년대 생물학에서 성장이라는 말이 들어오기 전에는 ‘축적(accumulation)’이라는 말과 ‘발전(development)’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축적은 아담 스미스가 유행시킨 단어이고, 발전은 존 스튜아트 밀의 아버지이자 평생 말더스와 논쟁을 했던 제임스 밀이 유행시킨 단어이다.

    케인즈가 활동하던 시절까지만 해도 ‘성장’이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 성장론(theory of economic growth)이라는 이론이 경제학에 처음 등장한 것은 40년대 후반의 일이고, 그 때까지는 성장이라는 단어가 경제학의 대표주자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해롯과 도마는 케인즈의 전통 하에 있는 사람들인데, 이 해롯-도마 모델이 최초의 성장론인데, 이전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결론과 비슷하다. "죽어라고 해봐야 성장이 계속되지는 못한다" 이게 최초의 성장론의 결론이다.

    아담 스미스에서 맑스까지, 혹은 리카도에서 힐퍼딩과 로자 룩셈부르크를 거쳐 피에로 스라파까지, 어떤 경제학자도 자본주의가 끝까지 별탈없이 갈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예외를 들자면, 아담 스미스의 제자 정도로 폄하되는 장 밥티스티 세이 (‘세이의 법칙’의 바로 그 세이이다) 정도라고 할 것이다.

    축적론은 자본의 크기에 관한 이야기이고, 성장론은 ‘부가가치의 총합’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실상 비슷한 이야기이지만, 아무도 그 내부를 알지 못하는 경제시스템이라는 ‘블랙박스’를 외부에서 관찰할 때 벌어지는 이야기에 해당한다.

    3.

       
      ▲ 콘테이너 선박 (사진 = 연합뉴스)
     

    40년대 후반, 케인즈주의자의 일부가 경제성장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가졌지만 결론은… 시장 사회는 장기적으로 답없다… 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장기적 성장’에는 관심이 없고, 일국 경제 혹은 한 사회가 어떻게 잘 먹고 잘 살 것인가에 더 관심을 가졌고, 이런 흐름에 8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이론이 ‘발전경제학’이다.

    박정희가 사용했던 ‘도약기(take-off period)’ 같은 개념들은 성장론에서 나온 개념이 아니라 발전경제학에서 나온 얘기들이다.

    성장론은 30년에 한 번씩 유행한다는 묘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해봐야 별 볼 일 없다”는 해롯-도마의 “면도날 궤적” 문제를 푼 사람이 천재라는 별칭이 따라다니는 솔로우라는 사람이다. 거시 문제를 접근할 수 없다는 신고전학파의 딜레마를 나름대로 해결한 솔로우는 이후 미분방정식을 모르면 성장 문제를 말할 수 없는 혹독한 조건을 만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주류경제학의 관점에서 가장 표준적인 모델은 솔로우 모델이다.

    그런데 이 솔로우 모델의 결론도 자본주의 경제를 구해주지는 못한다.

    g(성장률) = n(인구증가율)+ d(감가상각률)

    간단하게 표현하면 이게 솔로우 모델의 결론이다. 장기적으로 경제성장률은 인구증가율과 같게되고, 만약 자본의 감가상각이 존재한다면 그만큼 높아진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이 균형이 된다면, 결국 새로 태어나는 경제구성원에게 줄만큼만 더 필요하게 된다는 것이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성장모델이 제시하는 답이다…

    꿱… 누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90년대까지 시카고 학파를 포함한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죽어라고 성장해야 분배를 포함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모델을 제시하지 못했다. 자본주의의 지지자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곤란한 일이다. 아니, 그럼 결국 사회주의를 하거나 다른 방식의 전환이 없다면 ‘다이나믹 자본주의’는 이론적으로 증명불가능하다는 것인가?

    4. 하이에크주의자들…

    이 곤란한 문제에 대해서 성장론이 아닌 다른 거시담론에서 반박이 들어왔다. 그 사람이 바로 하이에크이다. 원래의 표준모델 즉 신고전학파 경제이론은 레옹 왈라스의 ‘일반균형’ 위에 서 있는데, 이 왈라스가 청년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왈라스 이론을 통하면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사회적 최적은 동일한 점에서 결정된다. 다만 그 최적치에 도달하는 메카니즘이 다를 뿐이다.

    하이에크가 비판의 칼을 집은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원래 왈라스가 사회주의라서 신고전학파 경제이론은 사실은 사회주의자들의 음습한 음모다…

    그래서 나온 말이 “어디에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정말 예언적인 말이지만, 이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장과정(market process)’라고 하는 개념이다.

    시장은 자유를 주고, 개인에게 창의력을 주고, 그리고 아름답고, 기타등등… 이렇게 해서 시장의 신화라는 것이 하이에크 이론 위에 서게 되고, 이런 논박 하에서는… 장기적 성장론이라는 것은 별 거 없다… 솔로우와 같은 거시경제학자들은 사실은 사회주의 이론가일지도 모른다는 음습한 음모론이 끼어들게 된다.

    냉전시대의 이론적 소산물들이다.

    5. 수확체감 법칙을 극복하는 다이내믹 찾기

    90년대 초반에 솔로우가 다시 “우리의 젊은 천재”라고 극찬했던 폴 로머가 등장하게 된다. 약간 복잡한 얘기지만 인구성장론보다 높은 수준의 성장률을 수학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축적요소’라는 장치를 거시경제학이 다시 만지작거리게 되는데, 인적자본이니 혹은 혁신이니 하는 말들이 이렇게 해서 다시 거시경제학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자본과 노동 외에 또 다른 요소가 사실 경제 시스템 내에 존재하는데, 이런 것들이 ‘수확체감의 법칙’을 극복하고 성장의 다이나믹이라는 것을 만든다… 이걸 내생성장론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한국과 홍콩의 높은 교육열 같은 것들로 인해서 생겨난 특수한 축적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사람의 말로 바꾸면 “하여간 열심히 하다 보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10년이 흘렀고, 내생성장론도 유행에서 한 물 갔다. 진짜 인구성장률 보다 높은 수준의 성장의 장기적으로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서 경제학은 여전히 합의된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6. 성장 동력…

    성장론을 진짜 전공하는 학자들은 우리나라에 많지 않다. 성장이 좋다, 성장을 꼭 해야한다는 그런게 성장론의 입증 목표가 아니라 내생성장론 이후에 다양한 축적요소를 찾거나 검증하는 일, 그리고 구체적인 작동 메카니즘 같은 것을 밝혀내는 일들이 성장론의 진짜 핵심이다.

    요즘 최근의 시도라고 한다면 외부적으로 이런 성장을 제약하는 생태적 요소를 어떻게 이론에 접목할 것인가 그리고 내부에서의 크든 작든 변화를 만들면 성장 궤적과 메카니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관한 문제들인데 여기에 대해서 이론적인 해법을 찾는게 미분방정식 틀 내에서 여간 만만한 일이 아니라서 다들 얼굴만 서로 쳐다보며 눈만 껌뻑껌뻑거리고 있는 것이 세계적 추세라고 하면 상황과 아주 다르지 않다.

    한 쪽에서는 세계화가 대세라는 둥, 금융화가 살 길이라는 둥 그러고 있지만, 진짜 거시경제학자들은 아담 스미스가 던진 “우울한 미래”에 대한 질문, 맑스가 던진 “자본주의의 종말” 그리고 중농학자인 케네가 던진 “농업의 한계와 경제의 한계” 같은 얘기들을 여전히 속시원하게 풀지 못해서 끙끙거리고 있다.

    요즘 ‘성장 동력’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이론적으로는 ‘불균형 성장이론’ 즉 ‘발전경제학’의 틀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이고, 사실은 경제성장론의 전통적인 주제는 아니다.

    불균형이라도 만들어서 특수 요소에 몰아주자… 경제사상사의 이론적 흐름만으로 본다면, 이건 아담 스미스의 고전학파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장 과정’을 얘기한 하이에크의 형이상학적 신비주의 전통도 아니고, 개발독재를 언뜻 연상시키는 “몰아주자” 이론에 불과하다.

    큰 흐름으로 본다면, “그냥 내버려두면 자본주의는 망한다”는 맑시스트들이 어떻게든 자본주의라는 수 십만 km 달린 중고차를 고쳐서라도 쓰자는 것 같아보일 정도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정신이 보통 아니다.

    표준경제학의 정신대로 말하자면, 경제성장은 결과이지, 목표가 아니고, 수단도 아니다. 게다가 몰아주기로 ‘동력 형성’을 한다는 것은 “왜 내걸 거기 몰아주지”라는 사회적 합리화 과정을 거쳐야하는데, 그런 것도 거의 없어, “일단 몰아줍시다”로 달려나간다.

    하여간 우리나라에서는 ‘곗돈’의 전통이 있어서 그런지 일단 몰아주기를 좋아한다. 성장동력이라는 개념은 생긴 것은 경제학 이론처럼 생겼지만 성장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주류경제학과도 별 관계가 없다. 오히려 학설사 내에서는 맑스의 자본론과 더 관계가 있다.

    이래저래… 요즘은 우파가 자본론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답하느라고 더 정신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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