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궁화=일본꽃'이란 주장을 비판한다
    [푸른솔의 식물생태]『두 얼굴의 무궁화』 단상①
        2020년 07월 28일 10: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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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에 [푸른솔의 식물생태 이야기] 칼럼을 게재하고 있는 조현래(필명) 씨가 무궁화를 다룬 책에 대한 진지하고 신랄한 비판 글을 보내왔다. 무궁화가 일본꽃이며 잘못된 국가상징이라는 주장을 펴는 책이다. 조현래 씨는 이 주장이 친일파 또는 친일 잔재의 척결이라는 과잉 목적의식이 현실과 실제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비판한다. 박정희 정권이 무궁화를 권위주의와 국가의 상징으로 과도하게 선전하고 국민들에게 주입식으로 강요한 것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고 필요하지만, 그것이 현실과 사실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서는 비판으로서의 기능도 못할 뿐더러 오히려 더 부정적인 효과를 낳을 것이라는 게 조현래 씨의 주장이다.  두 가지 전선에서의 비판이 필요하다는 의견인 셈이다. 글이 상당 분량이 되어 부득이하게 수회에 나눠 게재한다. 관심을 부탁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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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궁화가 ‘나라꽃’이라는 과잉된 이데올로기의 껍질을 벗고, 식물로서 우리의 역사에서 부대꼈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조속히 성찰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사진1> 강효백, 『두 얼굴의 무궁화』, 이담(2020)

    1. 글을 시작하며

    이 책의 추천사를 쓴 황교익씨는 “강효백 교수는 무궁화 논쟁에서 질 것이 뻔하다. 대중의 안정감과 자부심에 심한 손상을 입히는 논쟁이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강효백 교수가 질 수 밖에 없는 것,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이해하는 주류적 견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면, 그것은 대중의 문제가 아니라 책의 대부분이 무지와 왜곡에 근거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은 “무궁화는 일본의 신의 꽃”(p.105)이고, “무궁화를 한국의 나라꽃으로 날조한 일제”(p.75)에 의해 우리가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궁화가 나라꽃(國花)인가? 법적 규율에 의하여 국가적 상징(national emblem)으로 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무궁화가 국화(國花)는 아니다. 그러나 다수 국가기관의 문양이나 애국가의 후렴구 등으로 인해 ‘무궁화=나라꽃’이라는 인식이 광범위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국가주도의 권위주의 체제에서 국가권력을 강화시키는 상징으로 활용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i) 중국의 문헌에서 비롯한 옛 문헌에 대한 과장된 해석, (ii) 식물학계의 견해와 맞지 않는 한반도에 고유한 자생종이라는 주장, (iii) 일제의 탄압에 대한 사실의 과장 내지는 왜곡 등이 거침 없이 사용된 것과 관련이 있다. 무수한 원예용 품종 개발을 했고 보급과 식재를 운동적 차원으로 벌였지만, 결과적으로 공동체의 다수는 여전히 무궁화를 잘 알지 못하고 무궁화로부터 꽃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잉된 이데올로기가 제거되고, 사람과 꽃(식물)이 맺는 관계의 하나로서 무궁화를 제자리 매김하는 것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는 민족사에서 무궁화가 등장하고 매개된 역사적 내용에 대한 재고와 성찰, 식물로서의 무궁화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가 식물(그중에서 무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성숙된 인식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 무궁화에 관한 또 하나의 책이 등장했고, 이 책은 또 다른 이데올로기로서 ‘무궁화=일본꽃’이라는 등식을 제기한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에서 존재했던 무궁화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왜곡하여 없는 것으로 치부하거나, 비하 또는 격하하거나 친일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거나, ‘무궁화=나라꽃’이라는 이데올로기로 국가권력의 강화를 시도했던 과거의 권위주의 체제가 무궁화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막았던 것 이상으로 식물에 대한 공동체의 성숙된 인식을 방해한다. 말로는 ‘반일’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그가 사용하는 논리의 칼끝은 민족의 상징으로서 무궁화를 인정한 도산 안창호, 한서 남궁억, 호암 문일평 그리고 삶의 최후까지 일제와 비타협적 투쟁의 끈을 놓지 않았던 단재 신채호와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향하게 한다

    ​ 이 글은『두 얼굴의 무궁화』가 무궁화를 일본꽃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범한 중요한 사실 왜곡과 논리 조작으로 보이는 부분 중 주요한 것을 먼저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책에서 검증 가능한 허위, 왜곡과 논리 조작으로 판단되는 개별 문구를 일일이 대조하며 개별적으로도 살펴 볼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무궁화에 관련한 옛 문헌과 무궁화가 나라꽃으로 인식되는 과정의 역사에 대한 비판과 성찰 및 향후 미래세대를 위해 식물과 국화(國花)에 대한 총체적 관점 모두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보다 많은 사실이 드러나야 하고 개별 역사적 사건과 문헌에 대한 보다 면밀한 성찰이 수반되어야 하며 더 많은 전문가들의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두 얼굴의 무궁화』는 잘 알지 못하는 일본의 역사와 식물 그리고 우리의 식물과 역사적 사실 중에서 잘 알려지지 않아 일반인은 검증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허위의 사실의 제시, 사실의 왜곡 그리고 논리의 조작으로 보이는 내용을  반복적으로 보여 줌으로써 이 책을 읽은 사람에게 흰색(백단심계) ‘무궁화’와 ‘일장기'(욱일기)가 대비되어 겹치는 이미지만을 강하게 남게 한다. 그리고 식물 무궁화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을 증폭시켜 놓는다. 그러나 그런 이미지가  강하게 남고 무궁화에 대한 적대감이 느껴지는 그 책의 독자들이라면, 다음과 같은 상식적인 사실을 상기해 보시기를 부탁드린다. 그의 주장이 모두 정확하고 무궁화에 대한 식재와 인식이 일제에 의해 고의적으로 만들어진것이라면, 왜 일제는 왕궁과 대중이 모이는 전국의 곳곳에 무궁화가 아닌, 일본왕벚나무(쇼메이요시노자쿠리, Prunus x yedoensis Matsum.)를 그토록 많이 열심히 심었을까? 그리고 아래의 글을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2. 무지와 왜곡이 빚은 참사

    1) 식물의 종(species)을 알지 못하는 그는?(식물에 대한 무지와 왜곡)

    “현대 일본의 각종 문헌은 ‘부상’을 부용 또는 부용·부상화 식으로 살짝 뒤틀어 부르고 있으나 역시 무궁화와 같은 과, 목, 족, 속의 식물이다.”(p.97) 그래서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무궁화는 부상화로서 진짜 일본의 국기”(p.96)라는 것이다.

    그가 식물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 드러나는 부분이다. 분류 계급군에 대한 순서도 엉망이지만 그는 종(species)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소나무(Pinus densiflora, 松)와 잣나무(Pinus koraiensis, 海松子)가 같은 과이고 같은 속의 식물이라 하더라도 종이 다르면, 다르게 번식하고 생존하며, 그에 따라 사람들과 맺는 관계도 차이가 생긴다는 인식은 그에게 없다. 같은 속이면 같이 취급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부상(扶桑)이 무슨 식물일까? 무궁화를 한자로 木槿(목근)이라 하는 것처럼 扶桑(부상)은 현재 우리가 ‘하와이무궁화(Hibiscus rosa-sinensis)’라고 부르는 식물을 일컫는 오래된 한자어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붉은색의 꽃을 피우는 목근이라는 뜻으로 ‘朱槿'(zhju jin)이라고도 한다. 하와이무궁화는 이름에 나타난 ‘하와이’가 원산지가 아니라 무궁화와 마찬가지로 중국 남부가 원산(동남아를 포함하기도 함)이다. 무궁화(木槿)에 비해 훨씬 더 온난한 지역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노지 식재 자체가 쉽지 않다. 우리의 역사에서 식물명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기록이 보일 뿐이다.

    扶桑(부상)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산해경』에 기록된 것인데 신성한 땅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했고 나무의 이름으로도 해석되기도 했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나라를 신성한 땅이라는 뜻으로 扶桑(부상)이라 했고, 그러한 의미로 식물 ‘하와이무궁화'(=부상)를 널리 식재했으며, 숭배하는 수준으로 이를 다루었다.

    위 책의 저자가 말레시아의 국화를 ‘무궁화'(p.171)라고 할 때, 사실은 그 식물이 ‘하와이무궁화'(Hibiscus rosa-sinensis)라는 점을 그가 모르는 것은 식물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일본의 옛 문헌에 나타나는 扶桑(부상)에 대한 기록을 무궁화 즉, 木槿(목근)에 대한 기록으로 대체하거나 뒤섞어 마치 일본에 상상도 못할 정도로 무궁화에 대한 기록과 예찬 그리고 숭배가 넘쳐난다고 기술하는 것은 왜곡이다. 그의 책에서, 일본의 옛 문헌에 나타난 무궁화에 대한 기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일이 그 내용을 찾아 ‘扶桑'(부상)과 ‘木槿'(목근)에 대한 것으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한다. 그가 일본의 문헌에서 무궁화를 기록했다는 것을 ‘하와이무궁화’라고 바꾸어 놓고 읽어 보시라. 그의 주장이 얼마나 실제와 배치될 수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1> 그는 일본의 무궁화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에 대해 근거와 출처를 제대로 달아 놓지 않거나, 야후저팬이나 위키피디아 따위의 인터넷상의 정보를 근거로 제시하기 때문에 부상과 목근으로 나누어 일일이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만일 위와 같은 취급이 억울하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扶桑(부상)과 木槿(목근)에 대한 기록을 나누어 설명하시라. 중국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그리고 일본에서도 두 식물은 서로 다른 것으로 오래전부터 인식되어 왔다.

    <사진2> 부상(하와이무궁화, Hibiscus rosa-sinensis): 촬영자-서영<들꽃카페 >

    ​2) 부상(扶桑)과 무궁화가 같다고?!(단재 신채호에 대한 무지와 왜곡)

    扶桑(ふそう, 하와이무궁화)과 木槿(ムクゲ, 무궁화)이 일본의 옛 문헌과 현재의 각종 자료들에서 엄연히 다른 식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 扶桑(부상)을 무궁화로 보아 일본 문헌과 자료를 끌어 오려니 저자 스스로도 멋쩍었나 보다. 그는 느닷없이 ‘扶桑(부상)=무궁화’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를 호명한다.

    “5. 부상(扶桑)은 무궁화 나무로서 일본을 지칭한다. – 신채호,『을지문덕전』” : 강효백, 아주경제 2019.5.7.자 글 중에서.

    단재 신채호의 『을지문덕전』(1908, 국한문혼용본 및 한글본)은 고구려 장수이었던 을지문덕이 수나라 양제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민족의 영웅으로서 그를 기리기 위한 글이다. 설마 그곳에 아무 관련도 없는 부상과 무궁화 그리고 일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겠는가? 당연히 나오지 않는다. 저런 내용을 단재 신채호가 주장한 바도 없다. 이런 식으로 『두 얼굴의 무궁화』에 인용된 문헌 출처와 근거는 이미 정해 놓은 주장을 위해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던져져 있기에 사실을 확인하기조차 쉽지 않다.

    그런데 저자는 단재 신채호가 무궁화에 대해서 언급한 실제 자료를 찾아냈고, 아주 자랑스럽게 “부상(扶桑)은 무궁화나무로서 일본을 지칭한다”(p.62)는 근거로 활용하고 있다. 다소 길더라도 문장 전체를 살펴 보자.

    ​”우선 『조선상고사』 ‘구미호와 오제’의 문구이다. 단재는 다음과 같이 흔히 일본을 지칭하는 부상(扶桑)이 무궁화라는 사실을 밝혔다.”(p.92)

    ​“이 나무 이름은 부상(扶桑)이라 한다. 또 일명 무궁화나무라고도 한다. 세상 사람들이 부상을 뽕나무의 일종으로 아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무궁화는 부여의 신성한 나무인데 그 잎이 뽕나무 비슷하다 하여 부상이라 일컫는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부상은 우선 5색이 나지 않고 오직 무궁화만 5색이 나니, 천지간에 나서 천궁 아래서만 자라난다. 바람·비·눈·서리·벌레·새·짐승 또는 사람들의 침해도 받지 않으므로 다섯 가지 정기를 독차지하였으니, 능히 5색을 갖추어 변치 않는 것이다. 오제의 신이 이를 사랑하여 늘 여기 와 노는데 실로 신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그 자리를 알지 못하며 비록 안다 해도 그 신을 능히 부릴 수 없나니, 그 신을 이미 알고 그 신을 능히 부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하나뿐이다.”(p.92) [원문 대조 : ‘부여의’ 추가 및 ‘침략’은 ‘침해’의 오기이므로 정정함]

    ​저자의 확언에 찬 기술에도 불구하고 부상과 무궁화에 관련된 글이 나오는 『구미호와 오제』는, 필자가 신채호로 동일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조선상고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시다시피 『조선상고사』는 우리의 고대사를 민족적 관점에서 새로이 밝히기 위해 정식의 역사서로서 기술된 것이다. 그런 역사서에 괴기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구미호’나 ‘오제’에 관한 이야기가 왜 실렸겠는가?

    『조선상고사』에 내용이 있다는 저자의 주장과 달리 『구미호와 오제』는 신채호가 생전에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유작으로 북한에서 1966년에 발굴한 것이다. 이야기거리가 될 만한 것을 모아 소설형식으로 작성한 것이다. 단재 신채호의 『구미호와 오제』의 끝 부분은, “의사씨의 말- 원래 신화란 모두 피란한 것으로서 읽을 것이 못 되나 옛 사람의 사상과 습속은 이로써 짐작할 수 있으니 고사를 연구하는 이는 이를 무시할 수도 없다”고 기록했다. 단재 신채호는 ‘의사씨’의 말을 빌어 글 내용을 스스로 고증한 것이 아니라 신화로 내려오는 것인데 옛 사람의 사상과 습속을 짐작한다는 차원에서 정리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무궁화의 두 얼굴』의 저자가 위 글을 근거로 단재 신채호가 일본을 지칭하는 부상(扶桑)이 무궁화라는 사실을 “밝혔다”(!)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구미호와 오제』는 ‘수궁’이라는 사람이 그의 스승 ‘태화 선인’과의 대화를 기록한 일종의 신화소설(괴기소설)이다. 인용된 글의 바로 위 문단은 제자 ‘수궁’이 스승 ‘태화 선인’에게 “오제는 천신의 조력자인데 어떻게 선생이 이를 부렸으며 오색나무는 무슨 나무이기에 신이 이 나무에 의기합니까?”라고 묻는 내용이다. 그리고 스승 ‘태화 선인’이 답한 내용이 저자가 인용한 문단이다. ‘태화 선인’은 ‘수궁’의 이러한 질문에 오색나무=부상(扶桑)=무궁화나무라고 답하였다.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는 여기까지만 읽고 환호한다. 그리고 논리가 자신이 원하던 방향으로 비약한다. 단재 신채호가 부상=무궁화라고 했으니 일본의 문헌과 자료에서 扶桑(부상)은 곧 무궁화닷!!!

    그런데 단재 신채호의 『구미호와 오제』는 바로 이어 말한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부상은 5색이 나지 않고 오직 무궁화만 5색이 나니”!! 부상은 무궁화이지만,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부상”은 5색이 나지 않으므로 오색나무도 무궁화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태화 선인’은 부상(扶桑)을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무궁화(=오색나무)와 같은 의미를 갖는 부상인데 이는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부상이 아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부상인데 이는 5색이 나지 않고 무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

    ​여기서 잠깐 조선시대 서명응(1716~1787)이 저술한 『본사』(本史)의 ‘扶桑'(부상)에 관한 부분을 살펴 보자. “扶桑生南方 而南凉郡 尤盛 木高四五尺 枝柯叢生柔弱 葉深綠 沃若婆娑 類桑葉 花有紅黃白三色 而紅者尤貴 皆吳出 大如蜀葵 重敷光澤 有蘂一條 長出花外”(부상은 남쪽 지방에서 자라는데 (중국의) 남량군에서 더욱 무성하게 자란다. 나무의 높이는 4~5척이며, 가지가 떨기로 자라는데 유연하다. 잎은 진한 녹색으로 광택이 있으며 아름답고 뽕나무 잎과 유사하다. 꽃은 홍색·황색·백색 세 가지 색이 있으며, 홍색인 것이 더욱 귀하다. 모두 오출이며 크기는 촉규와 비슷하고 거듭 광택이 퍼져 있다. 꽃술 한 가닥이 길게 꽃 밖으로 뻗어 나온다). 서명응의 『본사』(本史)에 기록된 ‘扶桑'(부상)은 형태에 관한 기술에서 정확히 알 수 있듯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하와이무궁화'(Hibiscus rosa-sinensis)를 일컫는 것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공광성 외, 『나무열전』, 국립수목원(2017), p.311 참조]. 지금은 원예종이 보다 많이 개발되어 다양한 색의 꽃이 있지만 당시에는 단색으로 붉은색, 노란색 및 흰색의 3가지 꽃색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이시진(1518~1593)이 저술한 『본초강목』(1596)도 ‘扶桑'(부상)에 대해 “扶桑産南方 乃木槿別種 其枝柯柔弱 葉深綠 微澀如桑 其花有紅黃白三色 紅者尤貴 呼爲朱槿”(부상은 남방 지역에서 나고, 목근의 별종이다. 가지는 부드럽고 약하며, 잎은 짙은 녹색이고 뽕잎처럼 약간 껄끄럽다. 꽃은 붉은색, 노란색, 흰색 세 가지인데, 붉은색이 더욱 귀하고 ‘주근’이라 부른다)고 기록했다. 그 내용이 『본사』의 것과 유사하다. 즉, 부상은 단색으로 된 3가지 꽃색이 있다고 알려져 있어, 하나의 꽃에서 다양한 색이 나는 무궁화는 차이가 있었다.

    옛 문헌에서 알려진 이와 같은 기록에 비추어 『구미호와 오제』에서 ‘태화 선인’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부상은 우선 5색이 나지 않고 오직 무궁화만 5색”이 난다”고 한 것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부상(즉, 하와이무궁화)은 5색이 나지 않으므로 무궁화와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의 주장과 달리 단재 신채호의 『구미호와 오제』에 나타난 기록은 결코 부상=무궁화라고 밝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말하는 부상과 무궁화는 같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문단의 처음에 있는 “​이 나무 이름은 부상(扶桑)이라 한다. 또 일명 무궁화나무라고도 한다”라는 언급은 무엇일까?

    다시 서명응의 『본사』(本史)에서 ‘扶桑'(부상)에 관한 다른 부분을 조금 더 살펴 보자. “東海日出處 扶桑樹 長數天仗 大二千圍尺 葉赤理 狀類桑葉 五色華通年 朝開暮落 隨日之出入 如是者 凡十株同根相倚 故名扶桑”(동해에 해가 뜨는 곳에 부상수가 있다. 길이는 수천 장이며 크기는 둘레 이천 척이다. 잎은 붉은색에 무늬가 있는데 모양이 뽕나무 잎과 비슷하다. 다섯 가지 색깔의 꽃이 1년 내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데,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따른다. 이와 같은 나무 열 그루가 같은 뿌리에 서로 의지해 있으므로 부상이라 한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扶桑(부상)은 길이가 수천 장에 이르고 크기가 둘레 이천 척에 이르고 있으므로 현실에서 실재하는 나무가 아니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扶桑(부상)과 다르게 꽃색도 5가지이다. 이것은 전설 속의 신비한 나무로서 ‘扶桑'(부상)이다. 이 扶桑(부상)은 꽃의 색깔이 5가지로 『구미호와 오제』에 나오는 (세상에서 흔히 말하지 않는) 부상(扶桑)과 일치한다.

    이 전설의 출발에는 괴기소설의 일종인 중국의 『산해경』(山海經)이 있다. 『산해경』의 해외동경 부분은 부상(扶桑)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下有湯谷 湯谷上有扶桑 十日所浴 在黑齒北 居水中 有大木 九日居下枝 一日居上枝”(그 아래에 탕곡이 있으며 탕곡 위에는 부상이 있다. 열 개의 태양이 목욕을 하는 곳이다. 흑치국의 북쪽에 있으며 물속에 있다. 그곳에 나무가 있으니 아홉 개의 태양이 그 나무 아래에 산다. 나머지 한 개의 태양은 그 나무 위에 산다). 『산해경』에 기록된 扶桑(부상)이 땅이름(지역)을 말하는 것인지 나무의 종류를 말하는 것인지가 모호하여 옛부터 여러 논란이 있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곽박(郭璞, 276~324)은 위 扶桑(부상)에 대해 “扶桑 木也”(부상은 나무이다)라고 주(注)를 달았다. 扶桑(부상)을 나무의 이름으로 볼 경우에도 열 개의 태양이 목욕을 하는 전설상의 신비한 나무를 일컫는 것으로도 사용했고, 『본초강목』에서 본 것처럼 후대에 이르러 현실에서 존재하는 특정한 식물로서 扶桑(부상, 하와이무궁화)를 뜻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과 배경에 근거하여 『구미호와 오제』로 돌아가면, ‘태화 선인’이 말하는 전체적인 취지는 전설상의 신비한 나무인 扶桑(부상)=오색나무=무궁화나무이고,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扶桑(부상)은 오색나무도 무궁화도 아니라는 취지이다. 이렇게 살피면 단재 신채호가 『구미호와 오제』에서 ‘태화 선인’의 입을 빌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동북아에서 전설 또는 신화로 내려오는 신비한 나무인 扶桑(부상)은 무궁화를 말하는 것이고, 일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扶桑(부상)은 무궁화가 아니어서 우리 것과 일본의 것은 구별된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의 주장과 전혀 다르다. 이렇게 보면 단재 신채호는 일종의 무궁화 예찬론자(?)이다. 그러한 해석이 맞냐고? 『구미호와 오제』에서 인용된 ‘태화 선인’의 대답 중 두 번째 문장에서 “무궁화는 부여의 신성한 나무인데”고 한 것은 그러한 인식를 뒷받침한다. 부여는 고조선 다음에 이어지는 우리 민족이 형성한 국가 중의 하나이었다. 『구미호와 오제』는 무궁화를 우리 민족이 형성한 국가에 있는 신성한 나무라 하고 있는 것이다(『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가 인용 글에서 ‘부여의’를 누락한 것이 단재 신재호가 무궁화를 민족의 상징으로 표시한 것을 의도적으로 숨기려 했다고 의심한다면 억측이 될 것인가?)

    단재 신채호가 무궁화를 민족의 상징으로 활용한 것은 다른 문헌에서도 확인된다. ​단재 신채호가 적은 『꿈하늘(夢天)』이라는 미완성 단편소설에 무궁화에 관한 노래가 있다(이 작품도 북한이 해방 후 중국으로부터 입수하여 1966년 정리 발표한 것이다. 이것이 신채호의 작품이라는 것은 이후 독립기념관과 단재기념사업회에서 인정되었고, 대한민국에서 발간한 『단재 신채호 전집』에도 수록되었다).

    <허허, 무궁화가 피었구나>

    이꽃이 무슨 꽃이냐
    희어스름한 머리(白頭山)의 얼이요
    불그스름한 고운 아침(朝鮮)의 빛이로다.

    이 꽃을 북돋우려면
    비도 맞고 바람도 맞고 피’물만 뿌려 주면

    그 꽃이 잘 자라리
    옛날 우리 전성한 때에
    ​이 꽃을 구경하니 꽃송이 크기도 하더라

    ​한 잎은 황해 발해를 건너 대륙을 덮고
    또 한 잎은 만주를 지나 우쓸리에 늘어졌더니

    어이해 오늘날은
    ​이 꽃이 이다지 야위었느냐
    ​이 몸도 일찍 당시의 살수 평양 모든 싸움에

    팔뚝으로 비짱삼고 가슴이 방패 되어
    ​꽃밭에 울타리 노릇 해
    서방의 더러운 물이
    ​조선의 봄’빛에 물들지 못 하도록

    ​젖 먹은 힘까지 들였도다
    ​이 꽃이 어이해
    ​오늘은 이 꼴이 되었느냐

    자, 이쯤에서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에 묻는다. 평생을 비타협적 투쟁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가 타국 여순의 차디 찬 감옥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단재 신채호도 “무궁화를 한국의 나라꽃으로 날조한 일제보다 열 배 더 나쁜 자”, “이들(옛 매국노)보다 백배 나쁜 자” 나아가 “무궁화 관련 ‘가짜 텍스트’를 조작 유포한 종일 매국 지식인”(p.76)이 되는 것인가? 아이러니하게도 나름 선한 일을 하려다 지옥의 문 앞에서 줄지어 대기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참고2>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필요하다면 하나의 식물 그리고 중국 옛 문헌에라도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기대야 했었던 단재 신채호가 처한 상황. 고민과 노력에 백번 공감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히 단재 신채호의 무궁화에 대한 인식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무궁화는 황해 발해를 건너 대륙을 덮은 적이 없고, 만주를 지나 우수리에 늘어진 적도 없으며, 단재 신채호와 달리 지식인들의 무궁화에 대한 인식에는 소중화주의의 퇴행적 사고가 짙게 배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우리의 공동체를 이루는 다수의 대중이 무궁화를 공동체를 연결하는 매개로 인식한 경험을 공유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그러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드러내고 함께 성찰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실 왜곡에 근거한 과잉된 이데올로기의 주입에 대해서는 단연코 아니라고 반대하고자 한다.

    <사진3> 무궁화(Hibiscus syriacus)

    3) 무궁화를 ‘무궁화’라고 한 옛 문헌이 없다고?(우리 옛 문헌에 대한 무지와 왜곡)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는 말한다. “후일 일제와 식민사관에 의해 원문에 마음대로 괄호 열고 ‘무궁화’를 넣고 괄호 닿고 변조한 무궁화 가짜 텍스트 말고는 한글로나 한자로나 ‘무궁화’, ‘無窮花’로 표기된 사례는 전혀 없다.”(p211) 그리고 또 말한다. “이상희가 쓴 『꽃으로 보는 한국 문화3』는 근세조선에 들어와서는 한글로 ‘무궁화’라고 쓴 예를 여러 군데 볼 수 있다며 『동의보감』; 木槿-무궁화를 그 한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허준의 1613년 『동의보감』은 전부 한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글은 단 한글자도 없는 한자전용 한의학 서적이다.“(p.212)”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옛 문헌에서 무궁화(Hisbiscus syriacus)를 한글로 또는 한자로 표현한 것은 없고 한글 ‘무궁화’ 또는 한자어 ‘無窮花’는 일제와 친일파 윤치호가 만들어 낸 이름이라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무궁화를 한글 또는 한자로 표기한 옛 문헌들(다 찾지는 못하였다. 접근 가능한 것만을 중심으로 추렸다).

    – 『동국이상국집』(1241) : 槿花, 無窮, 無宮
    – 『항약집성방』(1433) : 木槿, 無窮花木
    – 『사성통해』(1517) : 木槿花, 무궁화
    – 『훈몽자회』(1527) : 槿, 蕣英, 木槿花, 무궁화
    – 『동의보감』(1613) : 木槿, 무궁화
    – 『주촌신방』(1687) : 木槿, 무궁화
    – 『역어유해』(1690) : 木槿花, 무궁화
    – 『사의경험방』(17세기) : 木槿, 무궁화
    – 『산림경제』(1715) : 木槿, 舞宮花
    – 『방언집석』(1778) : 木槿花, 무궁화
    – 『본사(1787)』 : 木槿, 無窮花
    – 『화암수록』(18세기 말) : 木槿, 蕪藭花
    – 『재물보』(1798) : 木槿, 무궁화
    – 『물보(1802) : 木槿, 무궁화
    – 『광재물보』(19세기 초) : 木槿, 무궁화
    – 『몽유편』(1810) : 木槿, 무궁화
    – 『물명고』(』1824) : 木槿, 椴, 무궁화, 櫬, 蕣, 日及
    – 『동언고』(1836) : 木槿, 무궁화, 無窮花
    – 『오주연문장전산고』(185?) : 木槿花, 瘧子花, 裹梅花, 無窮花
    – 『자류주석』(1856) : 橓, 槿榮, 무궁화
    – 『명물기략』(1870) : 木槿, 목근, 無窮, 무궁, 無宮
    – 『의휘』(1871) : 槿花/무궁화/無窮花
    – 『국한회어』(1895) : 無窮花, 무궁화
    – 『일용비람기』(19세기) : 木槿, 蕣, 무궁화
    – 『자전석요』(1906) : 槿, 木槿, 무궁화

    이 많은 옛 문헌의 저자들이 일제에 의해 유포된 식민사관에 찌든 친일파이고 이미 고려시대 말기부터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이었다고 해야만,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의 주장이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황당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저자는 “동아일보 1925년 10월 21일 2면 ‘근화가 무궁화로 변해 국화가 되기까지’ 참조.”(p.212)라고 하였으므로, 일제강점기 때의 『동아일보』 기사를 근거로 그가 그러한 생각을 한다고 추론해 볼 수는 있을 듯하다.

    ​”근화를 훈화(薰花)라고도 하고 혹은 목근화(木槿花)라고도 하엿스니 목근화를 그 당시 무궁화 비슷이 발음하여 오든 모양이람니다. 이는 지금 일본에서 무궁화 즉 근화를 ‘ムクゲ’로 부르는 것을 보아도 그 당시 발음이 ‘무궁화’ 비슷이 혹은 화뎐되여 ‘무궁화’라고 속향에서 불러 내려 왓는지도 모른다고 학자들은 말함니다. 그러나 근화 즉 무궁화를 지금과 가치 (無窮花)라고 쓰게 되기는 극히 짧은 근대의 일이라 함니다. 아마 지금부터 이십오륙전 조선에도 개화풍이 불게 되여 양인의 출입이 빈번하게 되자 그 때의 선진이라고 하든 윤치호(尹致昊)씨 등의 발의로 ‘우리 대한에도 국가(國歌)가 잇어야 된다고’ 한편으로 양약대도 세우고 한편으로 국가도 창작(?)할 때 태여난 上帝가 우리 皇上도으사 海屋籌를 山가치 싸흐소서 權이 環瀛에 떨치사 億千萬歲에 永遠無窮하소서라는 노래의 부속되여 생겻다고 하는(?) ‘東海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달토록’이라는 애국가의 후렴인 ‘無窮花三千里華麗江山’이라는 구절이 끼일 때에 비로소 근화 즉 무궁화를 ‘無窮花’라고 쓰기 시작한 듯합니다”(『동아일보』, 1925.10.21.자 기사 중에서).

    위 『동아일보』 기사는 이제 과거의 것으로 하나의 사료(史料)이다. 그러한 기사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fact)이지만, 그 사료의 내용이 진실하거나 타당성이 있는지 문제는 별개의 것으로 별도의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신문기사는 지금도 오류가 많은데 취재 방법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1925년에는 오죽했겠는가? 한자어 ‘無窮花’가 개항기에 비로소 생겨났다는 위 기사 내용은 앞서 살핀 옛 문헌의 기록에서 확인되듯이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위 『동아일보』 기사를 자세히 보면, (i) ‘무궁화’라는 한글 명칭은 한자어 木槿花(목근화)의 옛 발음(그 당시)에서 유래한 듯하고, (ii) 그것을 한자로 ‘無窮花’로 쓰기 시작한 것은 개항기인 듯하다는 것이다. 개항기에 쓰기 시작한 것은 한자 표기라는 것이고, 그것도 ‘듯합니다’라는 추정이다. 그런데 『두 얼굴의 무궁화』는 “즉 구한말 윤치호가 ‘무궁화(無窮花)’를 쓰기 전 ‘근(槿)’, ‘목근(木槿)’, ‘근화(槿花)’말고 한글로나 한자로나 ‘무궁화’, ‘無窮花’로 쓴 문헌은 단 한 건도 없다”(p.212)라는 확신으로 비약하여, 잘못되었던 기사의 내용은 다시 확대 왜곡되어 제시된다. 이러한 사료읽기는 진실과 타당성 여부를 확인하여 결론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정해진 결론을 위해 일부만을 차용하거나 논리 비약과 왜곡조차 감내하고자 할 때 주로 발생한다. 불행하게도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나타나는 사료읽기의 상당 부분은 이러하다.

    위에서 살펴본 문헌은 한글명 ‘무궁화’와 한자어 ‘無窮花’만이 나타나는 것에 한정한 것이다. 더 있겠지만 하나도 없다는 그의 주장과 달리 필자가 찾은 것만 문헌이 25개나 된다. 무궁화를 일컫는 다수의 한자어까지 포함하면 다양한 역사서, 개인문집 및 시 등에서 무궁화를 언급한 논한 자료는 수없이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동의보감』(1613)은 한자전용 한의학 서적이기 때문에 한글은 한 글자도 ​없다고 한다. 아래 <사진4>와 <사진5>는 『동의보감』의 탕액편(湯液編) 권지3(卷之三)의 목부(木部)에 나오는 내용이다. 판본은 상이하지만, 한자어 木槿(목근)에 대한 한글명으로 분명하게 ‘무궁화’라고 기재되어 있지 않은가?

    『동의보감』은 1613년 초간본이 간행된 이후 여러 차례 중간본과 복간본이 간행되었다. 17세기 이후 동아시아에 중요한 의학서적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별도로 간행되었고 일본에서 별도로 간행되었다. 국가 사고(史庫)에서 보관하던 초간본도 상당히 많이 남아 있고(대개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각 판본들도 남아 곳곳에서 보관 중이다. 당대에 한·중·일의 동북아 3국에서 의학서적으로서 권위를 확보하였기 때문에 각 간행본은 신중을 기해 이루어졌고 각 판본 사이에 표기의 차이는 거의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비교를 위하여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사진4>과 서울대규장각 한국학연구소 소장본<사진5>을 함께 게재한다. 아니, 굳이 초간본이나 여러 판본을 비교할 필요도 없다. 그냥 서점에 가면 『동의보감』의 번역본이 여러 종류가 있고, 대부분의 번역본에는 원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단 한 차례라도 『동의보감』을 읽은 사람이라면 한글 명칭이 없다는 따위의 주장은 감히 할 수가 없다. 시쳇말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동의보감』의 표기 방법은 한글로 번역한 언해본도 국문과 한문을 함께 쓰는 국한문혼용체도 아니다.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한자전용의 한의학 서적이 맞다. 그런데 한글 이름이 왜 있냐고? 12세기 중국의 송나라가 몽고족의 침입으로 남쪽으로 이동하는 등 국제 정세가 복잡해지자 당시 고려는 중국으로부터 약재를 수입하는 것이 불안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로 하여금 왕실부터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사용할 주요 한약재를 한반도에서 나는 향약으로 대체하는 것이 절실했다(현재의 표현을 쓰자면 약재의 ‘국산화’).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에 성립한 조선도 상황은 마찬가지이었다. 13세기 고려 시대에 편찬된 『향약구급방』(1236년 추정)은 한자전용 한의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약재의 채집과 유통의 편리를 위해 한약명(식물명 포함) 중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사용할 때에는 당시 고려에서 사용하는 명칭(향명)을 함께 한자 명칭에 병기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 초기의 『향약채취월령』(1431)과 『향약집성방』(1433)에서도 유지되었고, 조선 중기의 『동의보감』(1613)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주요 한의서인 『촌가구급방』(1538), 『주촌신방』(1687), 『사의경험방』(17세기), 『광제비급』(1790), 『제중신편』(1799), 『의종손익』(1868), 『의휘』(1871), 『방약합편』(1884) 및 『의방합편』(19세기) 등이 모두 그러하다. 문헌마다 차이가 있는 것은 한글 창제(1446) 이전에 간행된 문헌의 경우 향명이 이두식 차자(借字)로 표기되었던 반면에 한글 창제 이후에는 한글로 표기되었고, 문헌이 편찬된 시대별도 그 고유 명칭도 변화가 있어 왔다는 것이다.

    이왕 『동의보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무궁화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1~2가지 사실을 더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木槿(무궁화)라는 표제하의 약재 설명 끝 부분에 ‘本草'(‘本艸’, 본초)라고 기록된 것은 인용된 글귀에 대한 출처 문헌을 의미한다. 이는 종종 오해되듯이 중국 명나라 때에 이시진에 의하여 편찬된 『본초강목』(本草綱目, 1596)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 ‘本草'(본초)는 중국 송나라 때에 편찬되었던 당신미(唐愼微, ?~?)의 『경사증류비급본초』(經史證類備急本草, 1082)을 비롯하여 이를 확대 증보한 『대관경사증류비급본초』(大觀經史證類備急本草, 1108)』, 『정화신수증류비용본초』(政和新修證類備用本草, 1116)』와 『소흥교정경사증류비급본초』(紹興校定經史證類備急本草, 1159)』를 총칭한 소위 『증류본초』(證類本草)라고 일컫는 문헌을 뜻한다. 이러한 점은 『동의보감』, 『증류본초』 및 『본초강목』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명확하다. 또한 『동의보감』의 편찬은 1596년에 시작되었는데 그 해에 중국에서 『본초강목』이 간행되었으므로 당시의 문물이 교류되던 사정에서 『본초강목』은 애초에 참고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도 하였다. 즉 『동의보감』은 중국이 자랑하는 의학서인 『본초강목』의 영향 없이 별도로 작업되고 완성된 저작이었다. 행여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와 그 추종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이어가기 위해 『동의보감』까지 비하하거나 낮추어 취급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역시 허망한 기대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동의보감』의 각 약재명의 머리 부분에 ‘唐'(당)이라는 표식이 된 부분이 있다. 이것은 해당 약재가 국내에서 야생하는지 여부가 당시에는 확인되지 않았고 재배에도 성공하지 못하여 여전히 중국(唐)으로 수입되는 약재라는 것을 뜻한다. 『동의보감』의 木槿(무궁화)의 머릿부분에는 ‘唐'(당)이라는 표식이 없다. 따라서 1613년 당시 무궁화는 이미 국내 재배가 이루어져 중국으로부터 수입할 필요성이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의 식물 종이 우리 민족과 맺어온 관계를 논하면서, 정작 우리의 기록과 문헌의 내용을 살피지 않고 일본의 것만을 주로 본다면 그것은 가히 ‘일본바라기’라 할 만하지 않은가? 일제가 심어 놓은 식민사관의 주요 논리 가운데 하나로, 한국의 역사가 주체적인 역량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외세의 간섭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타율성론’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식물 하나를 파악하여 그에 대한 관계를 맺고 그에 대한 기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것으로 취급하고, 오로지 일본의 문헌을 근거로 그 내용이 우리에게 이식되어 현재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을 믿음으로 하여 우리의 것은 아예 살펴 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면, 그의 말과 글에서 수백만번 반일을 외치더라도 일제가 심어 놓은 식민사관으로부터 자유로을 것인가? 그것은 극일(克日)은 커녕 반일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친일적(!)인 것은 아닌가? 묻노니 누가 진정한 ‘종일 매국노’인가?

    <사진4> 허준, 『동의보감』, 1613년 간행(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사진5 허준, 『동의보감』, 1613년 간행(서울대규장각 한국학연구소 소장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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