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적 유토피아 향한 지성의 낙관
    [책소개] 『21세기를 살아가는 반자본주의자를 위한 안내서』 (에릭 올린 라이트. 유강은(옮김)/ 이매진)
        2020년 07월 26일 02: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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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를 잠식하라 ― 현실적 유토피아 꿈꾼 어느 사회학자의 마지막 유산

    코로나19는 21세기의 세계를 어디로 끌고 갈까. 60년 만에 발광 플랑크톤이 돌아오는 언택트 시대, 우리는 이제 ‘포스트 코로나 뉴 노멀’이라는 예견된 위기를 맞닥트렸다. 더 늦기 전에 일자리 소멸과 빈곤부터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까지 폭주하는 자본주의에 맞설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럴 때 2019년 세상을 떠난 사회학자 에릭 올린 라이트가 유산으로 남긴 작은 책을 펼치자. 바로 《21세기를 살아가는 반자본주의자를 위한 안내서》다.

    세계적 사회학자이자 독창적인 계급 실증 분석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분석마르크스주의자 라이트는 급성 골수성 백혈병에 걸린 몸으로 마지막 열정을 쏟아 이 작은 책을 남겼다. 2010년 《리얼 유토피아》를 출간해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뒤, 변화된 현실을 반영해 장 제목이 똑같은 대중용 해설서와 전문가용 학술서를 함께 내기로 했다. 2016년에 쓰기 시작한 새 책에는 자동 붕괴라는 환상과 국가 계획이라는 폭압이 사라진 자리에서 자본주의의 구체적 대안을 찾자는 제안을 담으려 했다. 틈새를 발견하고 국가를 활용해 자본주의를 길들이며, 점진적 변혁으로 ‘현실적 유토피아’를 만들어가자는 전략이었다. 책 말미에는 마이클 부라보이(Michael Burawoy)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사회학과 교수가 쓴 후기를 덧붙여 라이트가 걸어간 학문과 실천의 여정을 돌아보고 삶을 기렸다.

    현실적 유토피아 ― 21세기를 살아가는 반자본주의자들의 구체적 환상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의 대안은 없다고 선언될 때, 라이트는 자본주의의 틈새에 자리잡은 제도적 형태 중에서 자본주의하고 불화하는 요소들을 바탕으로 제도를 설계하고 경제 프로그램을 기획해 현실적 유토피아를 실현하려 한다. 라이트는 자동 붕괴와 국가 계획에 기대는 ‘파괴적 단절 변혁’ 대신에 ‘공생적 변혁’과 ‘틈새 변혁’을 선호한다. 공생적 변혁은 자본주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단기적 양보를 통해 사회주의의 씨앗을 뿌리는 개혁주의의 길을 가리키는데, 스웨덴식 계급 타협, 보편적 기본 소득, 참여 예산, 일터 민주주의 등을 포함한다. 틈새 변혁은 자본주의 사회의 틀 안에서 협동조합이나 피투피 협력, 도서관과 위키피디아 같은 대안적 제도를 발전시키는 길을 말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반자본주의자를 위한 안내서》는 간결하고 예리한 언어를 사용해 ‘유토피아 없는 계급 분석’에서 ‘계급 분석 없는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길을 정리하고, 다른 세상의 구성 요소들이 지금 여기 자본주의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반자본주의의 전략적 논리를 제시한다. 역효과가 많고 실행 불가능한 ‘자본주의 분쇄하기’를 거부하는 한편, 좌파 정당이 집권해 사회주의 요소들을 도입하는 ‘자본주의 해체하기’, 자본주의의 폐해를 중화하는 ‘자본주의 길들이기’, 국가 외부의 사회운동들이 노동자와 시민의 권리를 지키는 ‘자본주의에 저항하기’, 체계 바깥에서 소규모 대안 공동체를 꾸리는 ‘자본주의에서 벗어나기’를 모두 결합한 ‘자본주의 잠식하기’는 민주적 숙의와 참여적 실험을 통합해 민주사회주의를 향한 민주적 이행을 시작하는 전략이다. 라이트에게 사회주의의 본질은 민주주의인 셈이다.

    평등, 민주주의, 연대 ― 실행 가능한 반자본주의의 기획의 토대들

    특유의 낙관주의와 두려움 없는 현실주의는 라이트의 전매특허다. 라이트는 민주사회주의로 가는 길에서 특정한 주체를 확정하는 대신 투쟁의 조건을 분석한다. 사유화된 삶, 파편화된 계급 구조, 경쟁하는 정체성에 갇힌 계급은 새로운 체제를 건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싸움을 추동하는 도덕적 전망은 평등/공정, 민주주의/자유, 공동체/연대라는 가치로 구성된다. 그래야 연대를 벼릴 수 있는 정체성들, 현실적 목표로 이어지는 이해관계, 다양한 정체성을 가로지르는 정치적 통일을 창출해 정당부터 풀뿌리 공동체까지 포괄하는 다원적이고 실행 가능한 반자본주의를 기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기본 생존을 보장받고, 행복한 삶에 필요한 수단에 다가갈 ‘동등한 접근권’을 갖고, 자기 삶을 좌우하는 결정에 의미 있게 ‘참여’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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