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농사꾼과 밭 농사꾼
[낭만파 농부]'생식성장' 접어드는데
    2020년 07월 23일 10: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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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오후 늦도록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짧은 시간에 세차게 쏟아 붓거나 오늘처럼 종일토록 비가 내린 지가 벌써 열흘 가까이 되었지 싶다. 게다가 앞으로도 일주일 넘게 비가 내리리란 예보다. 정말이지 지리한 장마.

날씨를 두고 농사꾼처럼 변덕이 심한 부류가 또 있을까? 벼농사 짓는 나로서는 비가 많이 내린 전반기 날씨가 무척 고맙던 터였다. 물을 흠씬 대줘야 하는 국면에서 때를 맞춰 빗물을 뿌려줬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모내기 이후 벼가 뿌리를 내리는 ‘활착기’가 그렇다. 무엇보다 물을 깊이 대줘야 제초용 우렁이가 제구실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올라오는 잡초가 물속에 충분히 잠겨야 우렁이가 뜯어먹을 수 있다는 얘기.

덕분에 올해 김매기는 단 2시간 만에 끝낼 수 있었다. 써레질이 잘 못 돼 솟아올라 섬처럼 물에 잠기지 않은 두 어 곳의 잡초를 매준 것이 전부였다. 아마도 내 벼농사 이력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이 될 것이다. 지난해 기록을 들춰보니 사흘하고도 반나절이 걸렸더랬다. 가뭄 탓에 물이 모자라 저수지 수문 쟁탈전이 펼쳐지고, 물꼬싸움까지 벌어졌으니 그만 하길 다행이었다.

요즘 논의 모습

아무튼 김매기가 끝나면 전반기 농사는 얼추 마무리가 되는 셈이다. 아무리 단 두 시간에 그쳤지만 그래도 김매기는 김매기다. 한 고비를 넘겼으니 그냥 지나칠 순 없는 노릇. 올해도 어김없이 ‘양력 백중놀이’ 잔치판을 벌였다. 옛날 같으면 ‘세 벌 김매기’라고 해서 원래 백중인 음력 7월 보름 즈음은 돼야 호미를 씻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좋아졌다는 거. 그런데 하필 코로나19가 널뛰는 상황이라 널리 소문 안 내고 단출하게 치르기로 했다. 그래도 서른을 웃도는 사람이 몰려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고, 아이들은 계곡 물놀이에 신이 났다.

양력백중놀이, 물놀이에 신난 아이들

다시 논배미로 돌아가 보면, 벼는 한창 몸집을 키우는 한편으로 ‘새끼치기’를 통해 포기를 늘리는 국면을 지나고 있다. 머잖아 새끼치기(영양생장)를 마무리하고 이삭을 준비하는 생식생장으로 접어들게 된다. 이 때는 생식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을 흠씬 빨아들일 수 있도록 뿌리를 키워줘야 한다. 무엇보다 뿌리에 산소를 공급해야 하고 그러려면 ‘중간물떼기’라고 해서 논배미에서 물을 빼야 한다. 일주일 쩍쩍 금이 갈 만큼 논바닥을 말려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장마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날마다 빗줄기를 퍼붓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 아니겠나. 논바닥도 논바닥이지만 왕성한 광합성으로 생식에 필요한 양분을 만들어내야 할 이 때 햇볕 한 줌 구경하기가 힘드니 심란할 밖에.

하긴 사람 사는 세상, 모든 게 제 뜻대로 다 이루어질 수는 없지 않겠나. 더욱이 농사라는 게 팔 할은 하늘에 달려 있는 일인데. 그저 비를 자주 내려주신 덕분에 김매기로 고생하지 않는 것만도 고맙게 여기려 한다.

돌이켜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사실 같은 농사꾼이라도 무엇을 짓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모내기 뒤 자주 비가 내릴 즈음, 밭농사를 짓는 이들은 비를 원망했다. 양파, 마늘, 감자를 수확하는 철인데 비가 내리면 썩기 쉽고, 상품성이 떨어지는 탓이다. 그 점에서는 벼농사를 짓는 이들과 이해관계가 정반대로 엇갈리는 셈이다.

그래서다. 간절히 비를 바라는 논 농사꾼과 뽀송뽀송한 햇볕이 내리쬐기를 염원하는 밭 농사꾼. 여기에 선악의 잣대를 들이댈 순 없는 일 아니겠나. 둘이서 비가 내려야 좋네, 아니네 다툴 일도 아니다. 서로의 처지를 잘 안다면 날씨 얘기를 꺼내지 않는 게 순리다.

사실 지난해 이후 민감한 사회정치 현안이 꼬리를 물고 있지만 그 의견구도는 한결같다. ‘진영’의 이해가 작동하는 탓이겠지. 물론 논 농사꾼과 밭 농사꾼의 날씨 얘기처럼 서로 회피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고 감정으로 치닫기 십상이니 얘기를 꺼내기가 무척 버겁다. 젠장, 이번 생에서 내 정치적 지향을 실현하는 건 진작 포기했는데 자꾸만 까먹는다. 이미 포기했는데 더 두려울 게 뭔가.

[차남호쌀-매진안내] 성원에 힘입어 이번 2019년산 쌀은 모두 매진되었습니다.(찹쌀과 찰현미는 아직 남아 계속 주문받습니다) 올해는 코로나19 유행에 따른 ‘집콕’ 여파로 ‘집밥’ 수요가 늘어 조기품절 된 점 널리 헤아려주세요. 지금 논에서는 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고, 오는 10월말이면 햅쌀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 때까지 내내 건강하세요. 고맙습니다~^^*

오늘, 직거래 소비자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다. 정치는 포기했지만 경제적 생존까지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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