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산당, 마침내 중원 결전을 결정
    [국공내전㊺] 화이하이 전역(淮海戰役) 1: 전역 앞둔 국민정부의 혼선
        2020년 07월 22일 10: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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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내전은 규모가 클 뿐 아니라 복잡하게 전개된다. 여러 나라가 개입하게 되고 정치세력들도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국공내전에 직접 개입한 나라는 미국과 소련, 그리고 북한이다. 홍콩이 있으니 영국도 약간은 개입했을 것이다. 가장 깊숙하게 개입하고 중요한 영향을 끼친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2차대전 때부터 중국에 주둔해 왔다. 연합군 중국 전구 사령관은 장제스였으나 부사령관인 미국인들의 영향력이 막강하였다.

    미국은 군대와 고문관들, 그리고 교관들을 파견하여 장제스와 국민정부를 도왔다. 소련은 2차 대전 말기에 점령했던 동북을 공산당에 인계하였다. 무기와 장비는 물론 점령지까지 동북 민주연군에 내주고 철수하였다. 내전 초기에 전력이 압도적으로 열세이던 공산당이 저항하는 데는 소련의 역할이 컸다. 북한은 동북 민주연군의 후방 역할을 하였다. 국군이 남만주를 석권하던 시절 북한은 공산당 부대의 우회로였다. 동북 민주연군은 북한을 통해 산둥성으로 이동하거나 보급품을 주고받았다. 부상병들을 보내 치료를 받았으며 무기와 물자를 지원받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은 전에 비교적 상세하게 쓴 일이 있다.

    내전의 전투 양상도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동북 전장의 주도권을 위해 화북 쪽을 공격하는가 하면 베이핑, 텐진 방면의 국군 지원군을 막기 위해 따로 부대 배치를 해야 하였다. 중국의 영토가 광대하다 보니 전선이 일정하지도 않았다. 마치 드넓은 운동장에서 기마전을 벌이는 것과 같았다. 한 쪽에서 승리하면 다른 쪽으로 달려들어 지원을 한다. 그러면 아무리 힘센 기마라 하더라도 협공을 받아 무너지게 마련인 것이다.

    중국 내전에서 가장 복잡하고 중요한 곳은 중원지역이었다. 중국에서 중원은 본래 황허 중하류 지역을 일컬었다. 그중에서도 주로 허난성 일대를 가리켰는데 중원은 뤄양, 카이펑, 안양 등 중국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였다. 내전 시기에는 허난성을 중심으로 허베이성 일부, 산둥성 일부, 장쑤성 일부, 후베이성 일부 등을 중원이라 불렀다. 즉 허난성과 그 주위를 둘러싼 지역을 모두 중원이라고 통칭한 것이다.

    동북의 결전이 유례없는 대규모이고 내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그래도 지역에 국한된 싸움이었다. 국공이 창춘, 선양, 진저우 등 세 거점을 놓고 다투어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중원 결전은 복잡하기 짝이 없어 지도를 한참 들여다 보아도 전체적인 그림이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직접 전투를 수행했던 국공 양당의 수뇌부나 일선 지휘관들은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을까? 일선 지휘관들이나 병사들은 자신들이 처해있는 상황이 어떤지, 무엇 때문에 이동을 해야 하고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통신장비가 월등한 국민정부 쪽도 휘하부대의 상황이나 고위 지휘관의 생사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어쨌든 산둥과 동북의 싸움이 끝났으니 이제 싸움은 중원으로 옮겨 붙게 되었다.

    정저우 점령을 알리는 공산당 신화일보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동북의 결전에서 승리한 공산당과 마오쩌둥의 다음 구상은 베이핑 등 화북지역과 쉬저우를 중심으로 한 중원의 남부지역이었다. 베이핑은 오랜 고도이자 화북의 중심도시였으며 쉬저우는 난징을 지키는 관문이었다. 동북 야전군의 다음 목표가 베이핑과 텐진 등 화북의 중심지일 것이라는 것은 국공의 지휘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동북 야전군이 베이핑으로 진격하려면 산하이관을 넘어야 하였다. 산하이관은 역사적으로 중원에서 동북 지역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다. 만주에서 발흥한 청나라도 산하이관을 두고 명나라와 한참동안 싸웠다. 동북 야전군이 산하이관을 넘어 베이핑으로 진격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되었다.

    산둥성을 평정한 화동 야전군과 중원에서 주도권을 쥔 중원 야전군의 다음 목표는 쉬저우였다. 쉬저우가 난징의 관문이었으므로 다음 전장이 쉬저우와 그 부근일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1947년 3월, 국군은 공산당의 수도인 옌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압도적인 병력을 앞세워 싱겁게 옌안을 점령했던 것이다. 그런데 불과 일년 반 만에 전세가 뒤바뀌어 화북의 중심인 베이핑과 국민정부의 수도인 난징이 위협받게 되었다.

    수도 옌안을 내주며 마오쩌둥은 공산당에 대한 지도력을 더욱 확고히 세웠다. 일년 동안 섬북을 전전하면서 불굴의 투지와 담대한 구상으로 내전 승리에 대한 믿음을 당과 군대에 확고히 심은 것이다. 그러나 장제스는 패하면 패할수록 지도력이 희미해졌다. 국민정부의 군대 구성이 군벌 연합체인데다 직계와 다른 파벌 간의 갈등, 그리고 잡패군을 차별대우했기 때문에 패할수록 원심력이 강하게 되었다. 졸렬한 작전지휘는 장제스의 권위를 더욱 떨어뜨렸다. 장제스는 휘하 지휘관들을 믿지 못하고 만기친람식으로 전투에 직접 관여하였다. 장제스가 관여하면 할수록 전선 지휘관들은 피동적이 되어 전투에서 수세에 몰렸다.

    중원에서 벌어진 전투는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서로 대병력이 맞붙기도 하였지만 서로 간의 포진이나 이동도 지금까지와 달리 복잡한 모습을 보인다. 지난의 전투와 정저우 함락, 동북의 결전과 중원 결전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에 어려움이 따른다. 내전을 다룬 드라마에서는 장제스가 있는 난징과 마오쩌둥이 있는 시바이포, 해방군이 점령한 선양과 푸쭤이가 수비하고 있는 베이핑, 그리고 각 전장을 넘나들며 수시로 장면이 바뀐다. 동시에 여러 곳을 다루는 것은 일일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것 같다. 글을 그렇게 쓰면 읽는 이는 말할 것도 없고 쓰는 필자도 뭐가 뭔지 모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시기순으로 사건을 기록하지만 중요한 사건은 계속 이어 쓰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중요한 장면은 함께 다뤄서 서로 별개의 사건이 되지 않도록 쓸 것이다.

    중원지역의 결전을 중국에서는 화이하이 전역이라고 부른다. 베이핑과 텐진을 둘러싸고 벌인 싸움은 핑진 전역이라고 부른다. 화이하이 전역과 핑진 전역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화이하이 전역은 11월 6일 시작되었다. 핑진 전역의 개시일은 11월 29일이다. 화이하이 전역을 주로 맡을 화동 야전군이 지난 전투를 끝낸 것이 1948년 9월 24일의 일이었다. 동북 야전군이 동북의 중심도시 선양을 점령하여 랴오선 전역을 마친 것이 그해 11월 2일이었다. 그 사이 화북 야전군 쉬샹첸 부대가 10월 5일 산시성의 성도인 타이위안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완전히 포위하였다. 서북 야전군은 화북 야전군의 작전에 호응하기 위해 관중지역의 다리현(大荔縣)을 공격하여 국군 2만 5천명을 섬멸하였다. 중원 야전군은 10월 22일 허난의 중심도시 정저우를 공격 점령하여 중원 결전에서 중요한 교통축을 확보하였다. 주도권을 쥔 공산당은 승리를 가속화하기 위해, 수세에 몰린 국민정부는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각각 중원의 결전에 대비하게 되었다.

    1948년 전쟁을 피해 베이핑으로 온 동북의 난민들

    아래와 위의 원 지역은 지난과 난징. 별표 중 위가 쉬저우 아래가 벙부

    화이하이 전역과 쉬벙회전

    중국에서는 중원의 결전을 화이하이 전역이라고 부르지만 타이완은 쉬벙회전이라고 부른다. 처음 작전을 수립할 때에 썼던 명칭이 전사(戰史)에서 그대로 통용된 것이다. 국민정부 쪽이 썼던 명칭이 더욱 간결하고 이해하기가 쉽다. 쉬벙이라 하면 장쑤성 북부도시 쉬저우와 안후이성 북부도시인 벙부(蚌埠)를 이야기하는 것이니 그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라는 뜻이다. 벙부는 베이핑에서 상하이로 가는 징루(京瀘)철도와 화이난(淮南)철도(1)가 교차하는 곳으로 내전 때 전략적 요지였다.

    화이하이 전역이라는 이름은 쑤위가 중앙군사위원회에 처음 작전계획을 보고할 때 썼던 이름이다. 화이하이 지역이라 하면 화이허(淮河) 북쪽과 황해안 사이에 쉬저우를 중심으로 장쑤, 허난, 안후이, 산둥성 경계지역의 중원 말씨를 쓰는 곳을 말한다. 간단히 줄여 말하면 화이하이 전역은 난징을 비롯한 국민당 통치지역을 지키는 관문인 쉬저우를 놓고 벌어진 싸움이었다.

    1948년 쉬저우로 행군 중인 국군 병사들

    쉬저우는 우리 말로 하면 서주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유명한 도시이다. 유비가 서주자사 도겸에게 근거지를 얻어 처음 기반을 가졌던 곳이 쉬저우의 소패성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 적이 있었으니 서초패왕 항우가 바로 쉬저우에 도읍을 정했던 것이다. 당시의 이름은 팽성이었는데 초한지에 늘 등장하는 도시였다. 중국사에서 쉬저우는 6,000여년 동안 ‘남쪽 나라의 관문, 북쪽 나라의 자물쇠’라고 불러왔다. 즉 쉬저우 남쪽에 있는 국가나 북쪽에 있는 국가 모두 전략적으로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요지라는 뜻이다. 쉬저우는 현재 890만명이 거주하는 대도시이며 내전 당시에도 손꼽히는 큰 도시였다.

    국군 쉬저우 초비사령관 류즈

    국군 쉬저우 초비사령부의 사령관은 류즈 상장이었다. 류즈는 이 내전기에서 한번 소개한 인물로 “무능하나 오로지 장제스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쉬저우를 맡은 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긴다리 장군’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긴다리 장군’이란 중일전쟁 때 한번 전투에서 패하자 천리를 달아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류즈는 군벌들과 전쟁할 때 ‘상승장군’ ‘복장’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으나 대체로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장 중요한 쉬저우에 류즈를 앉힌 것은 장제스의 실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장제스는 동북에서도 사령관인 웨이리황과 계속 갈등을 빚어 사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동북 해방군에 당하였다. 장제스가 쉬저우 초비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할 때 류즈는 “저에게 관직을 받으라 하면 받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바치라 하시면 도리상 어쩔 수 없습니다.” 하였다고 한다. 태도는 좋지만 지휘능력은 이와 별개여서 중원 결전에서도 류즈는 그 존재감이 희미하였다. 류즈의 무능은 중원 결전에서 국군의 패배에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런 것을 보면 전쟁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쑤위, 중앙군사위에 화이하이 전역을 건의하다

    해방군이 지난을 공격하여 점령한 뒤 국군은 옌타이 등 요지를 잇따라 포기하여 산둥에는 칭다오 등 몇 개 거점만 남게 되었다. 칭다오가 황해안에 치우친 항구도시인 점을 감안하면 산둥성이 사실상 공산당 천하가 된 것이다. 지난 전투를 총괄 지휘한 화동 야전군 사령원 쑤위는 이미 다음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산둥병단 사령인 쉬스유 휘하의 해방군 부대가 지난성을 점령하던 1948년 10월 24일, 쑤위는 중앙군사위원회에 비밀 전보를 발송하였다.

    쑤위는 중앙군사위에 보낸 전문에서 “지난 전투가 오늘 중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다음 행동으로 화이하이 전역을 즉시 시작할 것을 건의합니다. 이 전역은 두 개의 단계가 될 것입니다. 제1단계는 쑤베이(蘇北) 병단이 양화이(兩淮) 지역(2)을 공격하여 점령합니다. 그 후 승세를 타고 바오잉(寶應), 까오유(高郵)를 점령합니다. 다음으로 주력부대로 하여금 지원 오는 적을 섬멸합니다. 양화이 작전이 끝나면 즉시 2단계 작전을 진행합니다. 2단계는 3개 종대로 하여금 하이저우(海州), 롄윈강을 공격 점령하게 하고 마치면 전군이 휴식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쑤위가 보고한 작전의 주요 목표는 쉬저우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있는 국군 황바이타오의 7병단, 리옌녠(李延年)의 제9수정구(綏靖區)(3) 병력을 섬멸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쉬저우 공격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 계획에 마오쩌둥과 중공 중앙군사위는 즉시 동의하였다. 과거에 마오쩌둥은 쑤위에게 창장을 넘어 남하하여 장제스의 점령지로 출격하라는 명령을 한 일이 있었다. 중원에서 바이충시의 부대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류보청, 덩샤오핑의 중원 해방군에 대한 압력을 줄이려는 의도였다. 그때 쑤위는 마오쩌둥에게 그 위험성을 들어 이의를 제기하고 창장 북쪽에서 몇 번 전투를 치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마오쩌둥은 쑤위를 불러 복안과 계획을 들은 뒤 흔쾌히 자신의 방침을 수정하였다. 즉 “창장 북쪽에서 적을 섬멸한다.”는 방침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제 쑤위는 자신의 주장을 펼칠 기회를 맞은 셈이었다.

    9월 25일 저녁 7시, 마오쩌둥은 중앙군사위 명의의 전문을 기초하였다. “우리는 화이하이 전역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쑤위의 부대는) 장기간 휴식하지 말고 전투 후에 휴식과 부대 정돈을 하라. 전역은 10월 10일 전후하여 개시하라.” 마오쩌둥은 이 전문을 화동 야전군 사령부와 쉬스유, 탄전린, 왕젠안, 류보청, 천이 등에게 보냈다. 협동작전을 할 중원 야전군 및 화동 야전군 산둥병단 등에 함께 보낸 것이다. 쉬스유 휘하의 산둥병단 부대는 지난 전투에서 격전을 치렀다. 다른 부대들도 국군 지원군을 저지하거나 견제하느라 출동하여 사실상 화동 야전군의 모든 부대가 작전에 나선 뒤였다.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화동 아전군은 즉시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그 뒤 전역에 대한 구체적인 부대배치 등 토론이 계속 진행되었다. 1948년 10월 11일, 마오쩌둥은 화동야전군 지휘부에 화이하이 전역을 3단계로 나누는 구상을 전문으로 통보했다. 첫 번째 단계는 황바이타오 병단을 섬멸하고 신안쩐(新安鎭), 자오좡(枣庄) 린이(臨沂) 등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중원 야전군은 정쉬선(鄭徐철도: 정저우-쉬저우간)을 공격, 쑨웬량(孫元良)병단을 견제하여 국민당 지원 병력의 화동 야전군에 대한 압력을 줄이도록 하였다.

    2단계로는 5개 종대 병력으로 하이저우, 신푸(新浦), 롄윈강 등에 있는 국군을 공격하여 점령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국군은 칭다오에 있는 2개 사단을 해운으로 증원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하였다. 공격목표에 있는 국군이 3개 사단에 지나지 않으므로 병력을 나누어 지원올 가능성이 있는 국군 치우칭첸 병단과 리미 병단을 견제하라고 하였다.

    3단계는 양화이 방면에 작전하라고 하였다. 즉 화이허 양안에서 전투하라는 것이니 쉬저우 공격이 이미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면 3단계 작전에 소요될 시간은 1개월 반에서 2개월 반이 걸릴 것으로 예측하였다. 마오쩌둥은 이 전보에서 12월까지 화이하이 전역을 완결하고 다음 해 그러니까 1949년 1월에는 휴식과 정돈을 취하라고 하였다. 그후 중원 야전군과 협력하여 창장변에 있는 국군 거점들을 소탕하고 1949년 가을에는 도강작전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였다.

    마오쩌둥은 언제나 당면의 임무와 중장기적인 임무를 함께 제시하였다. 화이하이 전역에서도 쑤위는 처음에 황바이타오 병단을 포착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보고하였다. 그와 함께 하이저우 및 렌윈강 등 해운의 요지를 차지하여 쉬저우 공격의 발판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마오쩌둥은 한발 더 나아가 쉬저우 공격은 물론 화이허 양안의 작전까지 내다본 전쟁 지도를 한 것이었다. 이러한 마오쩌둥의 심모원려는 눈앞의 상황에 급급한 장제스와 뚜렷이 대비가 된다. 마오쩌둥의 통찰과 혜안은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전황은 쑤위의 계획이나 마오쩌둥의 전망보다 공산당 쪽에 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중원 야전군이 정저우와 카이펑을 쉽게 점령하자 상황이 변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원 야전군이 국군 장간(張淦)의 3병단과 황웨이(黄维)의 12병단을 견제하여 국군의 쉬저우 전장 이동이 늦어졌다. 화동 야전군의 작전에 유리한 조건이 조성된 것이다.

    1948년 10월 27일, 중원 야전군 주력 4개 종대가 정저우에서 쉬저우와 벙부 전장으로 동진하여 진입했다. 이때부터 화이하이 전역은 화동과 중원 두 야전군이 함께 협력하게 되었다. 처음 구상보다 작전 규모가 훨씬 커지게 되었다. 정저우와 카이펑의 점령으로 중원 야전군에게 참전할 여력이 생긴 것이었다. 과거 두 야전군은 중앙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전략적인 협력을 하였다. 어느 한 쪽이 전투를 벌이게 되면 다른 한 쪽은 국군 부대를 견제하거나 일부를 출동시켜 함께 작전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대규모 결전에서 전략적 협동은 한계가 뚜렷했다. 편제상 인접한 다른 야전군 부대에 협력을 요청하는 것이고 자기 부대처럼 명령하거나 구체적인 지시를 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마오쩌둥과 중앙군사위원회는 두 야전군의 통일작전을 모색하고 단일 지휘부 구성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누구를 주장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는 미묘한 문제였다. 고금의 전쟁에서 지휘부 간의 갈등으로 싸움을 그르친 예가 적지 않았다. 개인보다 조직을 우선하는 공산당에서는 그런 문제가 비교적 적었다. 그래도 결전에서 효율적인 지휘를 하려면 서열은 반드시 정해 주어야 하였다. 내전 때 공산당은 주장을 정하는데 전장에 참가하는 부대가 많은 쪽, 전력이 강한 쪽, 전투에서 주공을 맡은 쪽을 판단 근거로 하였다.

    당시 쑤위는 화동 야전군 15개 종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거기에 화동 야전군의 지휘에 잠시 따르도록 한 중원 야전군 부대 1개 종대를 더하여 모두 16개 종대였다. 그에 비해 류보청, 천이, 덩샤오핑이 인솔하는 중원 야전군 참전부대는 4개 종대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작전을 건의한 당사자이자 주력을 맡을 쑤위가 통일 지휘를 맡는 것이 그간의 상례였다. 그러나 쑤위는 지휘권을 양보하였다. 10월 31일, 쑤위는 중앙군사위원회에 다시 전문을 발송하였다. 쑤위는 이 전문에서 “이번 전역의 규모가 매우 큽니다. 천이 사령과 덩샤오핑 정치위원이 통일 지휘를 하였으면 합니다.” 당시 중원 야전군 사령이던 류보청은 전선에서 한참 떨어진 허난성 서부에 있었다. 이런 것을 보면 쑤위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다. 쑤위는 나중에 인민해방군에 계급을 도입할 때도 원수 계급을 사양했다고 한다. “일을 이루었으면 그만이지 원수 계급이 중요한 게 아니다.”고 하여 마오쩌둥의 찬사를 들은 일이 있었다.

    11월 1일, 랴오선 전역이 끝나기 하루 전, 중앙군사위원회는 천이, 덩샤오핑, 쑤위 및 공산당 화동국과 중원국에 전문을 보냈다. 전문의 내용은 “천이와 덩샤오핑이 전역을 통일지휘하라.”는 것이었다. 11월 2일, 천이와 덩샤오핑은 중앙군사위원회와 쑤위에게 전문을 발송했다. “이번 작전은 우리가 지휘하겠습니다. 그런데 통신장비가 취약합니다. 직접적인 지휘는 쑤위와 탄전린 동지가 맡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하여 화이하이 전역은 천이와 덩샤오핑, 그리고 쑤위가 함께 지휘하게 되었다.

    장제스, 두위밍의 산둥 공격계획을 무산시키다

    국군에도 쉬저우 전투를 미리 예상하고 대비해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장제스가 가장 신임하는 지휘관 중 한 사람인 두위밍이었다. 두위밍은 쉬저우 초비 부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류즈가 무능하니 두위밍을 조수로 붙여준 것이다. 또 장제스가 꺼리는 광시계 군벌의 맏형격인 화중 초비사령관 바이충시를 견제하라는 의도도 있었다. 그는 장제스가 가장 믿고 쓸 수 있는 지휘관이었다. 장제스는 급할 때면 두이밍을 불러 중책을 맡겼다. 그러면서도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는 두위밍의 판단이나 계책을 외면하였다.

    비운의 장군 두위밍이 장제스와 함께 찍은 사진

    화이하이 전역이 시작되기 전 두위밍은 장제스에게 주목할만한 계획을 제기하였다. 두위밍이 보기에 화동야전군과 중원 야전군이 함께 쉬저우와 화이하이 저역으로 쳐내려올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었다. 두위밍은 화동 야전군이 지난 격전을 치른지 얼마 되지 않아 휴식하고 있는 점을 주목하였다. 그는 장제스에게 이 기회에 산둥지역을 공격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래서 지난을 비롯한 타이안(泰安)(4) 등을 수복하여 전황을 뒤집자는 것이었다. 수세에 몰려 있던 국군 입장에서는 참으로 대담한 발상이었다.

    두위밍의 계획대로라면 화중에 있는 바이충시가 중원 야전군을 견제해 주어야 하였다. 그러면 자신은 쉬저우 사령부 주력을 이끌고 산둥으로 쳐 올라가겠다는 계획이었다. 국군의 무기와 장비가 우세하고 병력도 대등한 만큼 해방군의 분할포위만 피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두위밍은 공격부대가 원형의 포진으로 차근차근 전진하여 해방군의 분할포위를 방지하자고 하였다. 두위밍 자신은 4개 병단 주력을 지휘하여 화동 야전군과 결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화동 야전군 일부를 포착하여 공격하면 적 주력과 결전할 기회가 온다고 판단한 것이다. 두위밍의 제안에 쉬저우 지휘부 사령관인 류즈와 참모장도 동의했다. 난징에 있는 장제스의 승인을 얻으면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로는 “나는 동의한다. 다만 총통의 재가를 받아오라.”고 하였을 것이다.

    두위밍은 난징으로 가서 장제스와 상의했다. 며칠 뒤 장제스가 이 작전에 동의했다. 바이충시의 동의까지 얻게 되자 두위밍은 즉시 작전준비에 들어갔다. 쉬저우 사령부는 병단 사령관 이상 지휘관 회의를 열어 1948년 10월 중순 행동을 개시하기로 하였다. 두위밍의 계획대로 이루어졌으면 마오쩌둥 및 쑤위가 확정한 공격날짜인 11월 8일보다 훨씬 먼저 국군이 포문을 열었을 것이다. 두위밍은 기계화사단을 앞세운 전격전의 명수로 중일전쟁에서도 여러번 승리하였다. 내전 초기 동북에서도 동북 민주연군을 정신없이 몰아쳐 린비아오의 부대를 쑹화장 너머로 쫓아 버렸다. 두위밍은 자신이 직접 출격하여 국군이 완전히 수세에 몰린 전황을 바꾸고자 한 것이다.

    1948년 10월 15일 새벽, 두위밍이 한창 전투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는 갑자기 장제스의 명령을 받았다. 쉬저우 비행장에서 대기하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른 두위밍이 비행장에 가서 난징에서 날아온 장제스를 만났다. 장제스는 두위밍에게 “즉시 진시(후루다오)로 가서 동북 국군의 철수를 지휘하라.”고 지시했다. 두위밍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장제스에게 간하였다. “지금 화이하이 지역이 동북보다 중요합니다. 동북은 웨이리황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장제스는 강경하게 고집을 피우며 두위밍에게 동북으로 가라고 계속 지시하였다. 여러 번 간해도 효과가 없자 두위밍은 부득이 동북으로 갔다. 두위밍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국군의 산둥 공격계획이 유야무야되어 버렸다. 그후 국군은 해방군이 공격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20여일간 사실상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해방군의 움직임을 보고 수비에 들어갈 준비를 할 뿐이었다.

    <주석>

    1. 화이난시에서 라이우시를 잇는 전장 214킬로미터의 철도선이다.

    2. 양화이(兩淮)는 창장 북쪽에 위치한 쟝쑤성 화이허의 남쪽과 북쪽지역을 말한다.

    3. 수정구(綏靖區) : 각주. 국민정부가 치안 유지를 위해 설치한 군사 행정단위이다. 지역 위수사령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4. 타이안은 5대 명산의 하나인 태산(泰山)이 있는 산둥성의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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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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