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조 경제투쟁이 양극화 주범이라고?
        2006년 09월 28일 01: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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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조운동-성찰과 비판’이라는 기획꼭지 이름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계급관계상 상대방인 자본과 정부는 성찰하고 비판받을 자세가 한 치도 없는데, 노동조합만 반성하라는 훈계로 들리니 말이다. 그래도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한 충고로 받아들이겠노라고 마음먹고 차분히 읽어보니 ‘이건 아니다’ 싶어졌다. 복습삼아 언급하자면, 이재영 기자 글의 뼈대는 이러했다.

    “노조 조직률이 10%수준이니 전체 노동자를 대표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전체 노동자의 1/3은 동남아 수준의 임금을 받는다. 노동조합 너네는 이를 돌파하기 위해 무슨 짓을 해왔냐?”고 일단 묻는다. 그리고 “아쉽게도, 너희들은 일관되게 기업노조를 유지한 채 경제투쟁에만 몰두해 왔었다. 그 결과 너희들의 의지나 의도와 상관없이 사회양극화를 부추겼다”고 답해버린다.

    우선 이 글이, 올 6월 말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등이 대대적으로 산별노조로 전환한 것을 ‘환영’하면서 이제까지의 기업(별)노조가 무엇이 문제가 있었는지를 짚어보는 것이라는 것을 환기하자. 이 말은 이재영 기자의 의도가 “배부른 자들의 임금인상투쟁은 이제 그만하자”는 논리에 날개를 달아주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이재영 기자가 앞으로 “이제 산별노조가 됐으니, 구성원의 ‘실리’만 추구하지 말고 정치적인 투쟁에 나서길 기대한다”고 끝맺을 것으로 예상하게 됐다. 그런데, 이것이 맞아도 그다지 수긍할 수 없다.

    먼저 구성원이 자기 실리를 추구하는 행동을 천박한 것으로 가치 부여하는 태도가 문제다. 왜냐하면, 그런 논리라면 이번 산별노조로의 전환에 찬성한 10만 여 노동자들의 선택도 ‘천박하다’고 얘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2006년 6월 30일 선택 당시, 조합원 입장에서 사실 절박함이 있었다.

       
     

    1997년 IMF 이후 일상화된 구조조정에 고용을 둘러싼 비정규직과의 갈등, 더 나아가 취업희망자와의 경쟁, 여기에 특히 2007년 복수노조와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가 도입된다는 절박감 말이다. 교육을 통해 현재의 상황을 알게 된 노동자들은 일단 초기업적으로 뭉치는 것이 ‘실리적으로도’ 유리하겠다는 본능을 발휘했다. 이런 조합원들의 의식을 천박하다고 할 셈인가?

    내가 ‘본능’이라고 표현했던 것은, 여럿이 뭉치는 게 유리하겠다는 선택을 한 이면에 뭉쳐서도 별로 이득이 없으면 혼자서 제 살 길을 찾는 선택을 언제든 할 수도 있는 ‘역동성’을 가졌다는 뜻이다. 자본주의에서 혼자서 제 살길을 찾는 방법이란 무엇이겠는가.

    1997년 IMF 이후부터 한국의 노동조합들은 심지어 임금과 노동조건 악화를 감수하고 해고만 피하는 ‘양보교섭’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6백만에 이르는 노동자가 월 1백만 원도 못 받고 회사 다니면서 “당신 나와라, 내가 그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줄서 경쟁하는 상황에, 자기고용을 지키는 것을 가장 큰 ‘실리’라고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는 거꾸로 고용 보장을 위해 회사에 잘 보이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할 여지를 주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알아서 혼자 살게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 아니던가. 따라서 본격 산별노조 시대에 경제투쟁보다는 정치투쟁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주장되는 것은 ‘비현실적’인, 그래서 틀린 얘기가 된다. 산별노조운동이 지속가능하려면 구성원에게 경제적 실리를 끊임없이 주지 않고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현대자동차와 어느 조그만 회사 노동자의 임금수준이 같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자. 아니면 그 조그만 회사가 그 수준의 임금을 못줘 사회적 제재를 당해 망할 경우 그곳 노동자가 같은 수준의 임금을 줄 수 있는 회사로 쉽게 옮길 수 있다면 어떠한지 보자.

    아마 한 노동자가 반드시 한 회사에 고용돼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은 많이 희석될 것이다. 기준에 못 미치는 임금을 주는 회사를 박차고 나와도 되고, 정리해고를 무기로 임금 깎자고 하는 자본가 밑에 굳이 ‘충성’할 필요도 없게 된다. 그런 혜택을 받기 위해 그 노동조합에 가입만 해도 된다.

    이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가치에 근거한 사회적 임금체계개편과, 사회적 차원에서의 고용안정 시스템 마련, 그리고 실직 뒤 재취업 때까지의 직업훈련과 생활비 지원 등의 재원마련 등 ‘사회적’ 논의를 거쳐야 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논의의 주도권을 노동조합이 갖자는 발상이 다름 아닌 산별노조 운동이고, 노동자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게 만든 것이 산별노조 규약이다. 위의 모든 의제들이 구성원의 경제적 요구들이고 실리를 주는 의제들 아니던가.

    중요한 것은, 임금체계개편과 사회적 고용안정방안, 그리고 그에 따른 재원마련 등의 의제와 요구로 경제투쟁을 벌이는 것. 이것은 그 자체로 당연히 총자본의 사회적 총이윤을 ‘일정부분’ 뺏어내는 싸움이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회적인 투쟁이며 정치적인 투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도대체 왜 굳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영역을 인위적으로 나누는 관점을 <레디앙> 독자들에게 강요하는지 이재영 기자에게 묻고 싶어졌다.

    아마 “노동조합의 경제투쟁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지 않느냐”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과 산별노조의 유기적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했어야 했다. 즉, 산별노조시대에 진보정당은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야 했단 말이다.

    그래서 나는 민주노동당의 주요 당직자까지 했던 사람이 산별노조시대 진보정당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과거를 훌훌 털고 산별노조 운동으로 전진해가려는 ‘동지들’의 과거나 야단치고 있으니 그것이 참 아쉬울 따름이다.

    <레디앙>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산별노조가 요구하려는 의제를 논의조차 하지 않겠다고 두산이나 현대 등 재벌사 등이 산별중앙교섭에 참석하지 않고 있는 마당에, 성찰과 비판의 화살을 자본과 정부를 향해야 하는 인지상정을 발휘해줬으면 한다. 그리고 기회가 닿는다면, 기업(별)노조 체제를 강요해왔던 법제도를 도대체 누가 만들었던 것인지 그것도 한번 상기시켜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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