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민주적 다함께, 트로츠키 더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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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01월 31일 03:4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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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 나오는 것처럼 ‘다함께’가 개량주의, 우경화로 몰아부치는, 뚜렷하게 사회주의나 혁명을 외치지 않는 많은 이들 중에는 웬만한 다함께 소속 회원들과 비교가 안 될만큼 관록 있는 활동가들이 많다.

    다함께(와 그 전신 IS)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그들보다 더 투철하게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싸워 왔던 그들이, 다함께가 주문처럼 읊어 대는 그 사회주의와 혁명 이론을 몰라서 안 읊어 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함께 외에는 없다.

    90여 년 전 사회주의 실험이 시도되기도 전이라면 혹 뚜렷하게 사회주의나 혁명을 외치지 않는 이들이 진짜 개량주의, 우경화로 매도되어 마땅할지도 모르겠지만,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로 끝난 후에도 아무런 치열한 분석과 반성 없이 원전과 이론만 붙잡고 교조주의적, 원리주의적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민중과 역사에 대한 가장 큰 ‘죄악’이다.

       
    ▲ 파병연장 반대 시위 중인 ‘다함께’ 회원들 (사진=다함께 홈페이지)
     

    이러한 측면에서 그나마 완전 자유롭지만은 않은 여타 교조적 좌파 소그룹들과는 달리, 다함께는 이러한 ‘죄악’으로부터 아주 마음 편하게 벗어날 수 있는 틀을 창조하여 면죄부를 스스로 부여하고 있기에 먼지 속에 있는 책 어구들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가며 쓸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 어차피 그 대화 상대는 대중이 아니라 활동가이기 때문에.

    즉, 옛 현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이 만연한 ‘국가자본주의’였다면서 그들은 수많은 좌파들을 고민하게 하는 고통에서 아주 쉽게 벗어나 ‘지금까지 사회주의는 없었다’는 방어막을 가지고 마음껏 원론을 들이대며 끊임없이 개량주의적 분자들을 창조해내며 스스로 구태의연한 운동권적 도덕률의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영국으로 유학 간 신학도

    수많은 학생들이 대학교 1학년 때 어떤 정파가 주도하는 동아리, 학회, 비합 서클에 가입했는가에 따라서 똑똑하지 못 하고 고민 없이, 독립적으로 생각하지 못할 경우 자연스럽게 NL이 되고, PD가 되며, ND가 되곤 했다.

    신이 이끌었다고 하지만, 주변이 온통 빨간 십자가인 나라에서는 기독교인이 되고, 주위에 이슬람 외 종교를 접할 수도 없는 나라에서는 무슬림이 되듯, 자주적이고 비판적 사고가 모자란 경우 좀처럼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관념이 진실이라고 믿으며 평생을 그 관념의 우리 안에 갇혀 살게 된다.

    영국으로 유학 간 신학도 한 명이 지극히 개인적, 환경적 요인으로 선택한 한 이론과 그 이론을 따르는 외국의 한 정파가 트로츠키주의의 모든 것인 양 받아들여지고 그와의 연결이 국제주의를 실천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황당하지만, 그 정파 ‘숭상’을 자랑스럽게 외치는 ‘광신도’들을 만들어내, 그들이 만들어내는 교과서 암기문을 당당하게 올린 것을 보는 것은 매우 황당한 일이다.

       
    ▲ 현재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중앙위원이며 요크대 교수인 알렉스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 1950~ )
     

    캘리니코스 책을 안 읽었다는 말에 놀랐다는 전지윤과 다함께 회원들이 난 더 놀랍다. 캘리니코스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은 자신들의 교과서 암기 테스트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필요할 뿐이다.

    알고 비판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우리가 주체사상파를 비판한다고 주체사상을 다 섭렵하는 시간 낭비를 할 필요도 없고, 이명박 정권을 비판한다고 이명박의 자서전을 읽을 필요는 없다.

    전지윤이 절대적 기준이라도 되는 양, 전국적 정치신문의 예까지 들며 낡은 이론을 그렇게 당당하게 되풀이할 수 있는지 솔직히 놀라웠다.

    그런데, 전국적 신문이 그렇게 중요하면, 반론을 전국적 신문에 쓸 것이지 왜 인터넷 신문에 올리는지 모르겠다.

    나도 <레디앙>이 아니라 그들 사이트에서 ‘자유롭고 민주적인 토론’을 마음껏 하고 싶은데, 그들 사이트에는 게시판조차 없으니 도대체 내부에서조차 ‘민주적’으로 토론은커녕 기초적인 견해조차 수집되고 있는지 궁금하고 또 궁금할 따름이다.

    다함께 안에 ‘민주적인 토론’이 있나?

    민주집중제의 사전적 정의가 궁금해서 써 달라고 한 것인가? 난 솔직히 다함께 자신이 그 글을 쓰면서 부끄럽지 않았는지가 매우 궁금하다. 행동이야 통일된 것 이상으로 다 똑같지만, 다함께 어느 토론회에서든 진정으로 민주적인 토론이 있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길 바란다.

    이미 런던에서 만들어진 그 틀 내에서의 토론이 무슨 자유롭고 민주적인 토론인가? 전지윤의 글조차 전체가 철저하게 그 틀 안에 있다는 것은 아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묻고 싶다. 민주적으로 자유롭게 토론과 논쟁의 결과가 파업 철회라고 해도 민주집중제라고 할 수 있을지. ‘민주적 토론과 찬반 투표를 통해 파업을 철회한다’고 하면, 그건 평조합원의 의사가 아니라거나 개량주의 노조 집행부에 맞서서 파업을 선동하며 결정 실행의 통일성을 저해하는 것을 당연시 여길 것 아닌가?

    그리고 테러 조직들을 잘 모르나본데, 그들의 전략 전술이 틀렸을 뿐이지, 다함께보다는 훨씬 민주적으로 토론한다. 행동의 통일이야 더 철저하니 말할 나위도 없고.

    이 모든 모순은 그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상에서 비롯된다. ‘노동계급의 급진 좌파적, 혁명적 일부가 독자적으로 조직되어 투쟁에 참여해야 한다 … 혁명적 조직은 (노동 계급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얼마나 잘 배워 올바른 투쟁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느냐에 따라 계급의 지지를 받으며 혁명적 대중정당으로 성장할 수 있다 …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른다’ 등등.

    전지윤을 비롯한 다함께가 앞 글에서처럼 누구나 예전에는 한 번쯤 써 보고, 읽어봤을 아주 원칙적인 말들을 논쟁에서의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근거라도 되는 양 쉽게 할 수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즉, 이 세상에 러시아 혁명 직후 수년 간 이외에는 사회주의 체제란 존재한 적이 없고, 모든 자칭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국가들은 모조리 모종의 자본주의 체제였으니, 그냥 원론적 수사를 나열하며 혁명의 전위인 양 사회주의를 선전 선동해도 반박을 받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개량주의자’들도 이 정도의 말은 지금도 언제 어디서든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 있다. 개량주의가 아니라 혁명주의, 우경화가 아니라 좌경화를 외쳐야 이 판에서 비판받지 않는다는 것을 몰라서 주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함부로 출세주의, 개량주의를 뒤집어 씌우지 말라! 이제 이런 사변적 원칙과 원론을 되풀이하며 외쳐댄다고 운동권적 도덕률에서 우위를 점한다고 착각하는 시대는 지났다. 오히려 전지윤이 비판하는 이들이 훨씬 더 진솔하고 책임성 있는 활동가이다.

    적어도 자신의 이론을 현실을 떠나 반복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을 거부하고, 이론과 현실의 괴리, 현실에서의 한계 속에서도 노동 대중에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싸우는 책임성을 가진 이들이기 때문이다.

    북한 국가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은 더 이상 진보가 될 수 없다는 논리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사회주의는 수립된 적이 없다며 현실 사회주의 비판을 회피하고 순수 이론으로 숨는 주장 또한 비판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좌파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다함께는 트로츠키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다

    다함께는 트로츠키의 가장 큰 가르침이자, 트로츠키 사상의 핵심 거의 모두를 거부하면서 자칭 트로츠키주의자라고 하여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트로츠키의 이름조차 더럽히고 있다.

    그 중 구사회주의 체제를 모종의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트로츠키 사상에 가장 배치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국가자본주의론’의 허구성과 폐해에 대해 자세히 논의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 문제는 단순히 체제 자체를 규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체제를 자본주의로 규정함으로써, 그리고 소련을 미국 등과 같은 질의 자본주의 최고 단계의 제국주의로 규정함으로써 전 세계적 차원의 문제를 분석하고 대처하며 행동하는 데 있어서 어마어마한 오류를 낳은 중요한 문제라는 것만 강조해 둔다.

    전 세계의 트로츠키주의 조직들 중 ‘국가자본주의론’을 주장하면서 트로츠키주의 조직이라고 하는 조직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외에는 몇 없다.

    어이가 없는 것은 다함께의 모 조직인 영국 SWP는 소련 국가자본주의 / 소련 제국주의를 서구 자본주의 /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보다 훨씬 혐오하여, 영국 등 서구에서는 공동전선은커녕 무원칙한 대중추수주의와 말 그대로의 개량주의의 일관된 길을 걸은 반면, 소련 ‘국가 자본주의’의 붕괴와 양 제국주의가 충동할 때에는 철저하게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를 지지하거나 투쟁을 방기하는 반마르크스주의적, 반사회주의적 원칙을 견지해 왔다는 것이다.

    전지윤과 다함께가 무비판적으로 ‘숭상’하는 토니 클리프와 그 분파는 한국 전쟁 당시,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가 스탈린주의적 국가사회주의 북한과 전쟁을 벌일 당시 한국전쟁을 제국주의 대리 전쟁으로 규정하며, ‘제국주의 전쟁 반대, 북한 방어(정치적 방어가 아니라!)’를 거부하고, 제 4인터내셔널 영국 지부를 포기하며 SWP를 만든다.

    ‘기생’의 역사

    그러나, 탄압 국면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급진 계급운동보다 오른쪽에서 헤매다 고립된 그의 분파는 입당 전술에 의거, 의견그룹의 형태로 그들의 언어로 ‘스탈린주의 동전의 다른 한 면인 사민주의 개량주의 정당’인 ‘숙주’ 노동당에 ‘기생’하기 시작한다.

       
    ▲ 국제사회주의자 그룹과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창설자인 토니 클리프(Toni Cliff, 1917~2000)
     

    그러나, 그의 분파는 노동당에 ‘기생’해서 노동당을 ‘혁명정당’으로 건강(?)하게 만들지도 못 했으며, 그로부터 뛰쳐나와서도 그 특유의 정치적 모호성으로 대중이 급격히 급진화했던 베트남전을 전후한 시기 이후로는 별다른 급진적 대중을 획득하지도 못 하고, 한국에서처럼 반전 국면에서 약간의 좌파 교수들과 청년 학생 외 노동자 계급 대중에게는 별다른 영향도 못 미치고 있다.

    한국전쟁시 북한 방어를 거부한 클리프 일파는 1차 베트남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온갖 당 이론가들을 동원 ‘제국주의 대리 전쟁’이라며 제국주의 침략 전쟁 반대를 거부했다.

    그러다가 전 세계를 휩쓴 반전 물결로 ‘계급이 당보다 더 왼쪽에 있게 되자’, 2차 베트남 전쟁시에는 객관적 상황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와 (스탈린주의 소련이 후원하는) 베트남 인민’ 사이의 전쟁 구도라며, ‘베트남 인민 전선에게 승리를! 미 제국주의에게 패배를’이라는 완전히 변화된 구호를 외친다. 물론 어떤 설명도 반성도 없었다.

    그러나 SWP는 이렇게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인민들이 설사 잘못된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에 입각했다 하더라도 반제 / 반자본주의 투쟁에 나서고,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고통받고 있을 때 온갖 이유를 붙여 투쟁을 방기하던 것과는 정반대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시에는 미국이 직접 자금과 무기를 대고 직접 훈련시킨 무자헤딘을 지지하면서 ‘소련에게 죽음을! 무자헤딘에게 승리를!’의 구호를 별다른 고민 없이 외친다.

    또한, 이들은 소위 ‘소련 국가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라면 제국주의가 직접 지원해도, 저항 주체가 봉건적이고 반여성적이며 종교 근본주의적이어도, 반유대주의와 파시즘에 가까운 단체라 해도,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노골적으로 주장해도 무조건 지지의 대상이었다. 물론 이러 저러한 ‘립서비스’는 항상 잊지 않고 덧붙였지만.

    소련의 붕괴는 그들에게는 위대하고도 위대한 ‘제 2의 러시아 혁명’이었다. 국가사회주의의 붕괴는 다른 이유에서 필연이었지만, 그들에게 이 붕괴는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이기에 전혀 다른 이유에서 극찬해야 할 것이었다.

    반소 시위대의 다수가 조직화된 노동자 계급이 아니었고, 더더군다나 사회주의를 외치는 전형적인 노동자 계급 혁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평소에 ‘민중’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며 비판하던 SWP는 ‘노동 대중’이라는 희한한 명칭까지 붙여가며 반소 시위를 혁명으로 칭송하였다.

    물론, 이제 노동자 자신들이 쟁취한 체제는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라 자신들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은 시작될 것이라는 립 서비스는 잊지 않았지만,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때를 대비해서 ‘노동 대중은 사회주의라는 이름 하에 자본주의에서 살아 왔기에 사회주의를 잘못 알고 있으며, 혁명정당이 부재하였기 때문에’ 운운의 변명을 붙여놓기는 했지만.

    극우 파시즘도 찬양한 SWP

    중국 천안문 사태에 대한 과장과 왜곡 역시 러시아의 경우와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당시 중국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시위 지도부, 시위 참가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노동 대중의 요구는 안타깝지만 ‘더 왼쪽으로의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시장 요소 도입’, 심지어는 아예 ‘미국식 자유’와 ‘자본주의’였다.

    하지만 SWP에게는 이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고, 국가에 대한 저항,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주장을 하든 노동자 계급이 얼마만큼 조직적으로 저항했는지만이 중요했다.

    SWP는 예전부터 일관되게 소련과 동유럽의 국가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라면 거의 모든 종류의 운동에 대해 찬양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스탈린 시기 우크라이나 지역의 극우 파시즘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민족주의 반란도 스탈린주의에 반대했다는 것만으로 지지하였다.

    자본주의 체제로의 복귀 혁명을 공개적으로 내건 바웬사의 자유노조 운동도 그 어느 반체제 운동보다도 ‘조직화된 노동자 반체제 운동’이라는 형식에 들떠 무비판적 지지의 대상이었다.

    반면, 피로써 쟁취했던 수많은 반제국주의적, 반자본주의적 혁명들은 소련 국가자본주의의 확산이라며 극단적으로 폄하된다. 특히 노동자 계급 형성이 미진하여 그에 따라 노동자 계급 운동이 발전하지 못했거나 아예 노동자 계급이 거의 없는 지역에서의 혁명은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 과정’의 여부에 의해서만 판단되어 철저히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규정하여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SWP에 따르자면, 동유럽 국가들은 모두 ‘소련 제국주의의 탱크로 만들어진 국가자본주의’이며, 중국 혁명은 ‘농민과 지식인들의 농민 혁명’에 불과하며, 쿠바 혁명은 ‘마르크스도 모르는 극소수 게릴라들의 운 좋은 반란 성공’에 불과하다.

    당연히 더 의심스러운, ‘노동자 계급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이집트, 리비아, 볼리비아 등지에서의 실험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지지의 대상이지만, 지식인과 농민 혹은 빈민 등의 주도로 혁명세력이 권력을 획득하고 난 뒤에는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 과정이 없거나 자본주의 소련이 뒤에서 후원하기 때문에’ 다 국가 자본주의이며 타도의 대상이다.

    더군다나 세계 혁명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다 국가자본주의 국가가 되어 버리니 혁명의 운명은 사실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베트남 혁명이 성공하기 전까지는 지지하다가도 세계 혁명이 없으므로 베트남 국가자본주의 타도가 되는 것과 같은 논리는 전 역사, 전 세계에 적용되어 왔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재 다함께가 미국의 약한 고리를 건드리고 있다는 것만으로 베네수엘라를 찬양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 가소롭다. 그들의 희망과는 달리, 차베스는 사회주의를 겉으로는 외치지만,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 하며, 시장 철폐, 노동자 계급 혁명, 일당 국가 체제 등 원론적 사회주의를 확고하게 거부하고 있다.

    세계혁명 아니면 다 국가자본주의

    결국 분명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아 다함께는 부르주아 국가 기구를 그대로 방치했네, 노동자 계급을 혁명의 중심으로 삼지 않았네 하며 전형적인 사회주의를 거부한 베네수엘라의 중남미형 사회민주주의적 실험에 태클을 걸고, 국가자본주의 운운할 것임이 틀림없다.

    구 소련과, 중국, 북한의 실질적 붕괴는 민주집중제의 결과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민주적으로 토론하고 투표를 통해 결정할’ 사안이 아닌 어마어마한 단위의 경제 영역조차 직접 생산자들의 토론과 통계와 계획만으로 완벽하게 ‘시장 체제’를 대체할 수 있다고 착각한 사회주의적 실험의 실패이지 결단코 자본주의의 축적의 위기에 의한 붕괴 따위가 아니다.

    이후 논의가 지속된다면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일단 구 사회주의 국가체제는 어느 면에서도 자본주의 체제와 아무런 유사점이 없다는 것을 다시 강조한다.

    현재 국가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 체제로의 이행에 대한 다양한 분야에서의 본질적, 근본적 변화에 대한 연구만 해도 수 천 개는 넘을 것이다. 학자들은 물론, 현실 사회주의와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를 온 몸으로 체험해 온 구 사회주의 사회의 주민들은 ‘한 자본주의로부터 또 다른 자본주의로의 옆으로의 게걸음에 불과하다’고 하는 다함께와 같은 이들의 주장에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모두가 코웃음을 치고 있다.

    현재 러시아에는 각종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이 있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현실과 이론이 하나도 맞는 것이 없기에 국가자본주의론에 입각한 조직은 발을 붙이지 못 하고 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분명 우리들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사회였다. 그러나 불평등과 번영, 자유가 없었다고, 현실 사회주의 사회를 모종의 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진보의 발전을 가로 막는 행위이다.

    부디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연구를 할 것을 부탁하는 바이다. 구 국가 사회주의 체제를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한 결과 얼마나 많은 오류가 있었으며, 그 오류를 깨닫지 못 하고, 비민주적, 무비판적, 비독립적으로 런던 발(發) 교과서를 암기하는 것, 그 암기를 되풀이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지양해야 할 진보의 모습이다.

    안쓰럽고 창피한 ‘다함께’

    현실 사회주의 체제를 자본주의로 왜곡한 것을 두고, ‘옛 동구권 몰락에 절망하지 않아도 되게끔 클리프가 만들어 주었다’는 전지윤의 말은 자랑스럽게 할 말이 아니라 정반대로 창피하게 생각해야 할 말이다.

    민족주의나 북한 국가자본주의 계급지배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이들에게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 없는 애정을 보내면서도, 자신들은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라는 이들에게 개량주의적 사회민주주의도 모자라, 의원이 되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처럼 출세주의자, 의회주의자 딱지까지 붙여 가며 핏대를 세우는 것은 보기에 매우 안쓰러울 정도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조순,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지지했던 과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한 채, SWP의 우경화 중의 우경화적인 노선을 그대로 따라해온 채, 뒷날에 민주노동당에 들어와 민주노동당을 숙주 삼아 ‘기생’해왔으면서, 함부로 다른 이들에게 개량이네 우경화네를 남발하며 마치 민주노동당의 주인인 양, 민주노동당을 사랑하는 양 행동하는 것은 정말이지 매우 파렴치한 짓이다.

    강남 지역위원회로 불법적으로 주소지를 대규모로 옮겨 접수한 그 부분은 은근슬쩍 넘겨 버렸던데, 당내 대표적인 종파적 행위인 이 정당하지 못한 행위에 대해 지적한 것을 말투만으로 비판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진정으로 날을 세워야 할 대상, 부분과 옹호하고 방어해야 하는 부분에 대한 혼동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잘 아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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