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
앞으로 그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②
[기고] '미국을 위한'이라는 옷이 더 어울렸던 사람
    2020년 07월 16일 09: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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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 앞으로 그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①

④ 과거에 대한 집착

우리의 방위체제는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과 1954년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 및 ‘한미합의의사록’의 틀 속에 갇혀 있다. 이것이 바로 한미동맹을 지탱하는 ‘삼발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54년의 두 협정은 남북한의 현상유지를 바라는 미국이 한국군에 대한 미국군의 작전통제권 행사를 재확인하고 한국군은 지상군 위주의 전력으로만 운용될 수 있도록 하며 해군과 공군은 한반도 위기 발생시에는 당시 일본에 주둔중인 미국의 제7함대와 제5공군이 대신하도록 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미국은 한국을 소련에 대응하는 전진기지로만 생각한 것이고 그 이상의 행동, 다시 말해 이승만 행정부의 ‘북진통일’의 욕망을 저지하기 위해서 한국 해공군의 성장을 억제하려 한 것이다. 이같이 54년 체제로 인한 불합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1987년 민주화 이후 역대 정권들은 작전통제권을 환수하고 국방개혁을 통해 육해공 3군 간의 불균형을 개선함으로써 좀 더 효율적인 안보체제를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백선엽은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국방개혁에 일관되게 반대함으로써 미래가 창창한 후손들의 생존권을 좌지우지하려고 했다. 제임스 하우스먼의 회고록에 따르면 백선엽은 ‘6.25 한국전쟁’을 ‘내가 치른 전쟁’, ‘내 전쟁’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과거 역할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노태우 행정부에서 추진한 ‘한국동란기념사업계획’의 일환으로써 김영삼 행정부에서 건립된 ‘전쟁기념관’은 바로 그러한 욕망의 산물이다. 이 사업의 추진동력을 얻기 위해 1988년에서 1989년에 걸쳐 경향신문에 백선엽 회고록이 연재되기도 했던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 <한국전쟁(The Korean War: A History)>은 이 사업의 핵심기획자가 백선엽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권영근, 김종대, 문정인이 공동 저술한 <김대중 정부의 국방>에 따르면 당시 국방부는 1군사령부와 2군사령부, 한미연합사 지상구성군사령부의 통폐합을 통해 비대화한 지상군 조직을 효율화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 작업은 김대중 행정부 국방개혁의 핵심과제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백선엽을 비롯한 예비역 장성들의 강력한 반대로 좌초되고 말았다. 이들이 나름의 논리와 근거를 갖고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국군의 1호 대장인 백선엽은 ‘내가 역사적으로 큰 일을 했는데 내가 지휘했던 군대를 없애?’라는 태도로 군개혁을 무시했다. 그때 좌초된 ‘군사령부 통합’이 문재인 행정부에 와서야 비로소 결실을 맺었으니 그가 우리군에 얼마나 큰 짐을 지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

통합 사령부를 만들기 위해 장장 수십년의 세월을 소비해야 했다. (출처- 중앙일보)

백선엽이 1군사령부의 해체를 막으려 한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합의의사록’ 체결의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 바로 1군사령부였고 그가 초대 사령관이었기 때문이다. 2010∽2011년의 중앙일보 연재 회고록에서 백선엽은 1953년 5월의 미국 방문외교를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회고록을 통해 그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자신의 공헌도가 크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을 만나 한미 간에 상호방위조약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2020년 1월 31자 조선일보는 아예 한 발 더 나아가 ‘그가 아이젠하워를 설득했다’고 더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2018년 11월말 국립외교원 정책연구과제로 제출된 보고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서 건국대 김계동 교수는 당시 미국을 공식방문 중이던 백선엽에 대해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역할보다는 뒤에 후술할 미국의 ‘이승만 제거계획’에서의 역할에 주안점을 두고 서술하고 있다. 하여튼 미국에 건너가 나라의 생존을 위해 분투했다던 백선엽이 국방부가 추진했던 국방개혁 앞에서는 왜 개인의 명예와 자존심을 우선시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장 큰 백미는 이명박 행정부가 추진했던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 작업이다. 2009년 3월 23일자 조선일보가 처음 보도했으며 국방부 인사기획관실이 작성한 문건 ‘백선엽 장군 명예원수 추진계획’은 월간조선 2012년 6월호에서 보도되었다. 당시 ‘6·25전쟁 60주년기념사업위원회’는 ‘백선엽 장군 명예원수 추대 및 회고록 발간’을 기념사업으로 추진했다. 2010년 1월부터 중앙일보에 연재한 백선엽 회고록도 명예원수 추대를 위한 분위기 조성용이었다. 광복회뿐만 아니라 군원로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그가 원수의 반열에 오르기에는 부적합한 인물임은 1950년 6월 25일 개전 당시 백선엽의 행적에 대한 상반된 증언만 봐도 알 수 있다.

2020년 코로나 사태 후 ‘한미우호협회’와 가진 ‘서면인터뷰’에서 백선엽은 ‘1950년 6월 24일 육군보병학교 고급장교 보수교육과 관련한 시험공부를 신당동 자택에서 밤늦게까지 하고 자다가 25일 아침 7시경 사단 작전참모의 전화를 받고 나서 삼각지에 살던 1사단 수석고문관의 지휘차량에 탑승해 수색 소재 1사단사령부를 거쳐 파주 사단 전방지휘소로 갔다’고 답변했다.

이에 대해 2020년 7월 7일자 시사인(668호)에서 박경석 예비역 준장은 “개성의 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전날 서울 육군회관 파티에 외출 나갔다가 6·25가 터진 그날 오전까지 부대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단장이 없는 동안 닥친 전쟁에서 1사단은 속수무책 후퇴했다. 임진강 남쪽의 일부 병사들이 고향 집으로 달아나버릴 정도로 부대는 엉망진창이 됐다.”는 사실이 묻혀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언젠가는 누구의 말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분명하게 밝혀질 것이다.

⑤ 미국에게 백선엽은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7월 12일(현지시간) 트위터 계정을 통해 백선엽을 애도하는 성명을 냈다. 7월 14일자 한국일보 2면에 실린 성명에서 미 NSC는 “1950년대 공산주의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백선엽 장군과 모든 영웅 덕분에 오늘날 한국이 번영하는 민주공화국이 됐다”고 말한다.

미국이 백선엽을 높게 평가한 것은 그가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고 박영석 예비역 준장의 회고에 따르면 조선경비대 제5연대장 시절의 백선엽은 정신훈화 시간에 “자유민주주의에 의한 독립정부를 수립해야 하고 공산당은 우리 민족에게는 하등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먼저 반공으로 굳게 단결해야 한다”고 훈시했었다고 한다. 반공으로 무장되어 있고 간도특설대의 정보반 경력이 참작되어 백선엽은 1948년 4월부터 통위부 정보참모로 근무하기 시작했고 정부 수립 이후에도 육군본부 정보국장 직책을 계속 수행한다. 그는 정보국장으로 있으면서 여순사건 이후 숙군의 총 실무책임자로서 좌익이라고 의심되는 군인들을 군에서 대대적으로 제거하였다.

1993년 고 김정렬 국방부 장관의 사망 후 발간된 회고록인 <항공의 경종> 중 ‘박정희 소령의 고난’편에는 자신의 박정희 구명 요청에 백선엽이 부정적이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대해 백선엽은 1998년 조선일보 조갑제 기자의 박정희 전기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135회에서 김정렬에게 박정희가 아니라 박원석 대위의 선처를 부탁받았다고 해명했다. 백선엽은 5.16군사정변 직후 드럼라이트 중화민국 주재 미국대사에게 ‘박정희는 대구 출신이며 대구는 예전에 좌익과 공산주의자들의 온상이었다’고 말했고 “박정희가 비밀리에 공산주의자들과 커넥션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이 같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얘기했다. 이런 일화들을 볼 때 그는 미국이 신뢰할만한 반공주의자였다.

이승만은 1954년 미국의회연설에서 제임스 밴 플리트를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미국이 백선엽을 주목한 것은 그가 가진 비정규전의 경험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이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으로 방향을 정한 이후 백선엽, 김백일 등의 간도특설대 출신들은 ‘여순사건’과 ‘6.25 한국전쟁’ 등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백선엽은 ‘여순사건’에는 ‘토벌사령부 참모장’으로 진압작전에 참가했고 ‘6.25한국전쟁’에서는 ‘백야전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지리산 일대의 토벌작전을 지휘했다.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미 제8군 사령관 역시 그리스내전에서 군사고문단장을 한 게릴라전의 전문가였기 때문에 백선엽을 직접 발탁했다. 진압과정에서 백선엽 역시 ‘민간인 학살’에서 자유롭지 못한 오점을 남겼다. 결국 이런 부분들은 미국이 폭력이 동반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승만 정권의 안정화에 얼마나 큰 관심을 쏟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미국과 이승만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이승만 행정부는 휴전에 반대하고 단독으로 북진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북진을 하겠다는 것은 작전통제권을 환수하겠다는 의사표시였다. 미국은 ‘에버레디 작전계획(Operation Plan Everready)’을 수립하였다. 플랜B로 상황이 전개될 경우 한국군을 동원(쿠데타)하여 이승만 행정부를 교체할 계획을 만든 것이다. 쿠데타의 조연으로는 이용문과 백선엽 등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한반도에 정전체제가 수립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과 미국은 최악의 상황만은 피하게 되었다. 이 갈등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백선엽의 친미주의 성향을 우려하는 기록물을 남기게 된다. 그는 제임스 밴 플리트에게 보낸 1953년 3월 23일자 서한에서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던 백선엽에 대해 “완벽한 신임을 할 수 없는 배경에는 백 장군이 너무 미군에 치우쳐 있어 국군을 대변하지 못하고, 특히 “나(이승만)의 명령보다는 미국의 지침을 더 따른다”는 불만을 나타내었다.

2015년 중앙일보에 연재된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58회에는 1957년 이승만이 백선엽을 재차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누구 지시를 받나?”라는 이승만의 물음에 “작전지시는 유엔군 사령관으로부터 받고, 행정지시는 참모총장에게 받습니다. 옆에 있는 분은 제 상관입니다.”라고 당시 1군사령관이던 백선엽이 대답한다.

만주군 출신들과 일본육사 출신들의 차이점은 미국군과의 관계였다. 만주군의 성격이 일본 관동군을 보조하는 군사조직이기 때문이었는지 만주군 출신 장교들은 일본육사 출신에 비해 조선경비대 시절 미국군의 지휘를 잘 따른 편이다. 반면 일본육사 출신들은 미군들과 많은 갈등을 겪었다. 미군과의 갈등 때문에 군문을 떠났다가 나중에 특별임관으로 군에 복귀한 경우도 있었다. 백선엽은 만군 중위 시절에는 ‘소네하라 미노루(曾根原實)’ 소교(소령)의 지휘를 받았고 1군사령관 시절에는 ‘라이먼 렘니처(Lyman L. Lemnitzer)’ 미 극동군사령관 등의 지휘를 받았다. 백선엽은 이런 과거 경험 때문에 한국군이 스스로 작전통제권을 행사한다는 것을 상상조차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노무현 행정부에서부터 시작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계획에 백선엽은 반대 진영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2006년 9월부터 진행된 ‘북핵반대·한미연합사해체반대 천만인 서명운동본부’의 고문이었고 이 단체는 1,007만 여명의 서명을 받아 이명박 행정부의 ‘전시전작권 환수 연기’결정에 압박을 가했다. 문재인 행정부에 들어와서는 ‘대한민국 수호 예비역 장성단’의 고문으로서 ‘9.19 남북군사합의’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계획에 강하게 저항해 왔다. 전작권 전환은 그가 키워냈다고 자부하는 지상군의 역할이 줄어드는 것이다. 한국군의 가장 큰 취약점이 공군력과 정보전력이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의 이익은 한국의 이익이라고 사고하던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이익은 백선엽 개인의 이익이기도 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으로 이승만은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을 원용덕 계엄사령관이나 이형근 1군단장으로 교체하려고 했는데 미국은 강하게 반대하였다. 제임스 밴 플리트는 대신 백선엽 2군단장을 추천하였고 실제 이종찬의 후임으로 백선엽이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우리 군에서 유일무이하게 두 차례나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미국에게 백선엽의 친일경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출처-주한미군사령부)

2013년 8월 29일에 주한 미 육군은 백선엽을 미8군 명예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2016년엔 한국인 최초로 미8군사령관 이·취임식에 백선엽이 초대되었다. 2018년 11월 21일에는 백선엽의 백수(白壽ㆍ99세) 생일잔치가 미8군사령부 주최로 국방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미국은 왜 이리도 백선엽을 배려했을까? 국방전문가인 권영근에 따르면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볼 때 미,중,러,일 4대 강국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곳으로 이곳이 적대국의 수중에 넘어갈 경우 자국의 세력이 결정적인 방향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한미동맹을 중요시할 수 밖에 없고 미국과 오랫동안 긴밀한 관계를 가져온 백선엽을 통해 우리가 이렇게 한미동맹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한국 국민에게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백선엽도 이에 화답하여 “우리는 미국과 동맹을 포에버(forever), 포에버, 포에버 갖고 가야 한다.”고 늘 말해왔다.

⑥ 맺음말

이승만은 미국이 좋아하는 백선엽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견제했고 백선엽은 이에 순응했다. 박정희는 미국에게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말한 백선엽을 결코 권력의 핵심부에 들이지 않았다. 1987년의 민주화가 백선엽에게 기회가 되었다. 1989년 백선엽은 신군부가 해체한 성우구락부를 재건하여 만든 성우회의 초대회장에 올랐다. 민정당과 민주자유당에 참여하지 않은 처신도 도움이 되었다. 그대신 그가 소수정당들의 고문으로 참여했던 이력이 김대중 행정부에서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던 배경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행보가 가속화될수록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늘어만 갔다. 결정적인 계기는 이명박 행정부의 ‘백선엽 명예원수 만들기’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그에 관한 여러 의혹과 논란들이 봇물처럼 제기되었다. 필자는 고 채명신 예비역 중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그는 백선엽의 평양사범학교 후배로 군시절 절친한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명예원수 추대’에 반대하였고 죽어서는 장군 묘역이 아닌 사병 묘역에 묻혔다. 사실 이런 자그마한 행동들이 모이고 모여서 그 사람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반면 백선엽은 화려한 인생만을 살다갔을 뿐이고 많은 국민들은 그가 왜 현충원에 묻혀야만 하는지 쉽게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쉽게 잊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미국을 위한’이라는 옷이 더 어울렸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장례식의 사진(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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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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