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회견을 보며
    [기고] 인권변호사 박원순을 자기모순에 빠뜨린 파워 엘리트의 관행
        2020년 07월 14일 02:3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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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 그에 대한 성추행 고소 등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는 뜨겁다. 그의 사회적 정치적 무게가 컸던 만큼, 그에 대한 성추행 의혹의 충격도 크다. 피해 호소인의 절규와 목소리에 대한 연대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 사건들에 대한 기고와 의견이 있다면 반영할 생각이다. 13일 피해 호소인 측의 기자회견에 대한 원시님의 기고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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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7월 13일)을 듣는 내내 괴로웠다. 진실과 화해라는 두 단어를 곱씹었다. 강용석 집단은 여기에서 논외로 치자. 피해자가 바랐던 것은 박원순의 죽음이 아니라, ‘책임과 사과’를 동반한 진실과 화해였다.

    아직도 진실이 무엇인지 다 알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박원순 시장의 죽음이 오늘 기자회견과 연관이 있다면, 그는 ‘진실과 화해’를 실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인권 변호사로서 자기 정체성을 정면으로 부정해버린 셈이다. 죽음이 투명한 해법이 아니라 오히려 불투명한 미궁이 되었다.

    괴롭고 답답한 또 하나의 이유는, 각박하고 예의가 없는 사회적 구조, 지배자들의 잘못된 정치 관행을 타파하지 않은 채 희생양만을 찾는 정치행태들 때문이다. 박원순 시장이 피해자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서울시장직을 그만뒀다고 하더라도 그가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하에서 민주와 인권을 위해 싸운 공로는 결코 폄훼되지 않았을 것이다.

    각박하고 예의가 없는 것은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피해자 편에 서고 박 시장 조문은 가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박하고 예의가 없는 것’의 실체는 CCTV에 잡힌 박원순 시장이 죽음을 향해 혼자 걸어가는 모습에 있다고 본다.

    누가 30년 인권변호사 박원순을 그렇게 혼자 쓸쓸하게 죽게 방치했는가? 어떤 사회적 질병이 그의 목숨을 앗아갔는가,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 자가 각박하고 예의가 없는 자이다.

    그의 글 전체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지만, 전우용 역사학자가 말한 “한국 여성운동사에서 박원순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대목은 타당한 주장이다. 그런데 1993년 우조교를 성희롱한 신정휴 교수와 동일한 행동을 박 시장이 자기 여비서에게 하고 말았다. 전우용 역사학자는 이러한 모순을 우리 사회에 문제제기 했어야 했다. 정의당 류호정 의원에 대해 “예의없다”라고 하는 것에 앞서서.

    인권변호사 박원순도 자유롭지 못한 이 강고한 권력 남용 체계를 누가 만들었는가? 박 시장의 여비서가 4년간 성희롱 성추행의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게 만든 그 은밀하고 철옹성 같은 서울시청 지배구조를 누가 만들고, 그것을 ‘좋은 정치’인 양 선전했는가? 이게 더 각박하고 공동체적 예의가 없는 것들이다.

    강용석 집단은 논외로 치자. 위 문제는 민주당도, 민주당을 비판하는 진보정당 정의당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정치적 숙제다. 나에게 이번 박원순 시장 뉴스에서 가장 비참한 장면은 CCTV에 잡힌 그 걸음걸이였다. 고개를 숙이고 자기정체성을 숨기며 죽음을 재촉하는 그 걸음걸이. 지난 30년간 박원순을 스스로 부정하고 죽음을 향해 갔던 그 걸음이 잊히지 않는다.

    정말 각박한 것은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피해자를 생각해서 조문을 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자기모순을 저지를 수 있는 박원순 변호사에게 그 마지막 순간까지 친구도 없었고, 공동체의 힘으로 그의 잘못을 교정할 수 있었는데도 그것 자체를 그가 부정해버렸다는 사실이고, ‘모든 것을 혼자 안고 가야 한다’는 그러한 사고방식이며, 이런 사고와 행동을 만들어낸 정치 관행이다. 이런 정치 관행이 지난 30년간 민주화 운동이 만들어낸 정치적 상식인가?

    기자회견 내내 괴로운 이유는 박원순이 걸어온 길을 나 역시 어느 정도 봐왔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타도하자는 대자보와 그와 관련된 대자보를 제외하고, 1990년대 서울대에서 가장 많이 읽힌 대자보가 바로 신교수의 우조교 성희롱 사건이었다.

    1980년대와 90년 초반까지 군사독재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 민주화 운동의 핵심과제였다. 93년 김영삼 민간정부가 수립된 이후, 녹색 생태운동과 여성운동이 새로운 민주화 운동으로 등장했다. 우리 일상공간에서 발생하는 반민주적 반인권적 요소들, 성희롱과 성폭력의 체계를 타파하자는 운동이 바로 1993년 신교수의 권력남용과 우조교 성추행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93년 서울대 화학과 신정휴 교수가 우OO 조교를 성희롱,성추행하고, 재임용에서 탈락시켜 버렸다. 서울대 대학원생과 학부 학생회, 박원순 변호사 등이 우조교를 변호해, 1998년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당시 대학 사회에서 교수의 제왕적 권력남용과 5년간 법정투쟁을 했던 이가 박원순 변호사였다. 그런데 22년 후, 박원순이 비판했던 그런 행태를 그 자신이 재현했다는 피해자 증언을 오늘 듣게 되었다. 왜 이런 자기모순이 발생했는가? 이 쓰라린 사실 자체만으로도 괴롭다.

    괴로운 이유가 또 하나 있다. 박원순의 유서가 언론에 공개된 이후에, 난 노무현, 노회찬의 유서와 박 시장의 유서들을 다시 읽어봤다. 박원순의 유서에서는 ‘왜 그런 결단을 했는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인권변호사가 ‘자기 변론’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럴 경황도 없었다.

    그래서 박원순 변호사가 과거에 가족들에게 보내는 ‘유언장’을 인터넷에서 찾아 읽었다. 가장 눈에 들어온 대목은 박원순이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고, 누나들과 여동생이 집안사정으로 대학에 가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막내 여동생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어야 했다는 내용이었다.

    지금도 여성권리가 신장되었다고 하나, 많은 여성들이 박원순 막내동생처럼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직장생활을 하고, 아이들 교육비 때문에 파트타임, 비정규직 노동을 하고 있다.

    박원순 시장의 여비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공무원들은 특히 ‘승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업무뿐만 아니라 직장 상사와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참고 또 견디며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박원순 시장의 비서실 직원이 피해자가 아니라, 박시장과 호흡을 맞추며 ‘동료애’를 발휘하면서도 다른 여러가지 형태의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박원순 시장이 여비서로부터 더 존중받고 더 존경받을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을 더 괴로워해야 하지 않을까?

    박원순 시장이 왜 죽음을 선택했는가? 이 피해자의 증언과 인과관계가 있는가, 없는가도 그의 죽음으로 인해 오리무중이 되고 말았다. 민주당과 정치권은 이것을 악용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 민주주의가 더 암담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오늘 기자회견에서 나왔듯이, 4년간 피해자의 고통을 어느 누구도 제대로 듣질 못했다 하니, 도대체 우리가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지, 과거 우리의 민주화 운동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암담해진다.

    코로나19 상황에도, 그 여비서였던 공무원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직장에 나가 돈을 벌어야 하고, 자아실현을 위해 참고 견디며 일하고 있다. 새 아파트는 15층, 20층 건설되지만, 하루에 10명 넘게 일터에서 죽고 있다. 지금 민주당 안에는 과거 ‘노동 해방, 민중 해방’을 같이 외치던 사람들이 많고, 국회의원도 많고, 청와대에도 많다. 사람도 정치도 변하는 것은 알겠고, 인정도 한다.

    하지만 일터가 죽음의 현장으로 전락하고, 여성들의 신체적 정신적 안전도 보장하지 못한 게 정말 ‘각박하고 예의가 없는’ 사회 아닌가? 진실과 화해는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쓰라린 기자회견이었다.

    1993년 10월 19일 서울대 신교수 성희롱 대책위원회 기자회견(사진=한국여성단체연합)

    * 아래는 서울시장의 위력에 의한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 중에서 대독한 피해자 증언문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련했습니다. 너무 후회스럽습니다. 맞습니다. 처음 그때 저는 소리 질렀어야 하고, 울부짖었어야 하고, 신고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랬다면 지금의 제가 자책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수없이 후회했습니다. 긴 침묵의 시간, 홀로 많이 힘들고 아픕니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힘없고 약한 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었습니다.

    안전한 법정에서 그분을 향해 이러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습니다. 힘들다고 울부짖고 싶었습니다. 용서하고 싶었습니다.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법의 심판을 받고 인간적인 사과를 받고 싶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고소장을 접수하고 밤새 조사를 받은 날, 저의 존엄성을 해쳤던 분께서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내려놓았습니다. 죽음, 두 글자는 제가 그토록 괴로웠던 시간에도 입에 담지 못한 단어입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실망스럽습니다. 아직도 믿고 싶지 않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많은 분들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50만명이 넘는 국민들의 호소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은 제가 그때 느꼈던 위력의 크기를 다시 한번 느끼고 숨이 막히도록 합니다.

    진실의 왜곡과 추측이 난무한 세상을 향해 두렵고 무거운 마음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지만 저는 사람입니다. 저는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저와 제 가족의 고통의 일상과 안전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필자소개
    정의당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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