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
    앞으로 그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
    [기고] '백선엽 영웅 만들기' 어떻게 전개되어 왔나
        2020년 07월 13일 10: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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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일 노환으로 숨진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은 오랫동안 반공과 친미, 대북강경을 외치는 보수강경파들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2003년부터 지금까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이라는 신분으로 예비역뿐만 아니라 현역 군인들에게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의 최대 약점은 해방전 만주군에서 복무한 경력이다. 특히 백선엽은 독립군 토벌을 주임무로 하는 ‘간도특설대’ 정보반에서 근무한 전력이 있다. 이러한 과거 때문에 그는 죽은 후가 아니라 살아 생전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는 치욕을 겪기도 했다.

    그런 반면에 해방 후에 그가 걸어온 길들은 분에 넘치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히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백선엽=친일파’라는 이미지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를 ‘6.25 전쟁영웅’이라고 과도하게 칭송하는 분위기를 연출하려 애써왔다. 본 글에서는 백선엽의 해방 후 행적과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각종 프레임들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어떤 모습의 군인이었는지, ‘백선엽 영웅 만들기’는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① 박정희의 은인

    백선엽하면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그가 1948년 ‘여순사건’으로 촉발된 ‘숙군’ 과정에서 체포된 박정희 소령을 구명한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물들이 존재한다. 먼저 1978년 미국 하원이 발간한 ‘프레이저 보고서’에는 백선엽의 개입으로 박정희가 풀려났다고 씌여 있고 2015년 김종필이 중앙일보에 연재한 ‘증언록 소이부답’에도 백선엽 대령이 박정희 소령을 구해줬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백선엽이 박정희의 ‘형집행정지 석방’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당시에 숙군으로 사형이 집행된 장교들 중에는 제15연대장 최남근 중령이 있었다. 최남근은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 7기생으로 백선엽의 2기 선배였다. 그와 최남근, 김백일(5기)은 간도특설대에 같이 근무했으며 1945년 12월 월남하여 군사영어학교를 통해 함께 임관할 정도로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백선엽은 1989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군과 나’ 40회에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어갔던 최남근을 2010년 중앙일보가 연재한 백선엽 회고록 ‘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의 147회에서는 꽤 많은 분량에 걸쳐 언급함으로써 그에 대한 자신의 복잡한 감정의 일단을 드러냈다.

    2010년 백선엽 회고록의 144회를 보면 당시 그는 숙군의 총책임자였다고는 하나 “사형이 확정된 사람을 살려주는 일에 아무런 생각 없이 앞장설 수 있는 처지”는 결코 아니었다. 월간조선 1989년 12월호에 실린 김안일 당시 특무과장의 인터뷰에도 “그때는 죽이기보다 살리기가 훨씬 어려웠다”는 말이 나온다. 그만큼 ‘숙군’이란 하나의 광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백선엽은 박정희의 석방을 위해서는 일찍이 최남근에게는 볼 수 없었던 그런 위험을 각오한 채 상관들을 설득했고 불명예제대 이후에는 육군본부에 일자리까지 마련해 주었다.

    전역 후 중화민국 주재 한국대사로 부임한 백선엽은 1961년 5월 23일 중화민국 주재 미국대사인 ‘에버렛 드럼라이트(Everett F. Drumright)’를 만났다. 미 대사는 본국으로부터 ‘5.16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소장에 대한 정보 수집의 지시를 받고 백선엽을 접촉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 국무부에 보고된 비밀전문에는 백선엽이 드럼라이트에게 “자신은 박정희의 재판을 관할한 군법회의의 멤버가 아니었다며 자신은 박정희가 어떻게 한국육군에 복직했는지 상세한 내용은 잘 모르며 그저 박정희의 경력 정도만 안다.”고 말한 것으로 나온다. 이러한 발언은 백선엽 본인 스스로 이응준 총참모장의 재가와 ‘윌리엄 로버츠(William L. Roberts)’ 주한미군사고문단장의 동의를 얻어 박정희의 석방을 진행했다고 말한 2010년 회고록의 내용을 뒤집는 것이다.

    제임스 하우스먼의 생전모습 (출처- KBS)

    이는 백선엽 이외에 또 다른 인물이 박정희의 석방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암시한다. 또 다른 인물이란 바로 ‘제임스 하우스먼(James Harry Hausman, 1918~1996)’을 말한다. 하우스먼은 주한미군사고문단 소속의 육군 대위로 1946년 7월부터 한국에서 근무를 해왔다. 숙군작업 당시 그의 공식 직책은 ‘국방부 참모총장 고문관’이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고문관도 비공식적으로 겸임하고 있었다.

    ‘돈 오버도퍼’는 저서 ‘두 개의 한국(The two Koreas)’을 통해 하우스먼이 이승만에게 건의하여 박정희가 감형을 받았다고 말한다. ‘김동춘’은 ‘보수의 기원’에서 그의 역할을 좀더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저자는 ‘하우스먼은 숙군작업을 매일 점검했으며 박정희에게 거래를 제안했고 그 대가로 박정희는 육군본부 정보국의 문관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는 2010년 백선엽 회고록 145회에도 나와 있듯이 당시 미국군이 한국군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우스먼은 한국 언론과의 생전인터뷰에서 이런 사실들을 숨김없이 얘기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서 1989년 경향신문 연재 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 41회에는 백선엽이 박정희의 구명을 위해 육군본부 정보국 고문관이었던 ‘리드(John P. Leed) 대위 → 하우스먼 대위 → 로버츠 준장’으로 이어지는 미군의 조직계통에 양해를 구했다고 쓰여져 있다. 그런데 2010년 중앙일보 연재 백선엽 회고록 145회에는 이들 미군 장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하우스먼 대위가 누락되어 있다. 1997년 하우스먼의 추모식에도 참석했던 백선엽은 그의 존재가 끝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② 전쟁영웅

    연세대 명예교수 김동길은 2020년에 발간한 ‘인물현대사 백년의 사람들’에서 ‘다부동 전투’의 백선엽을 ‘살수대첩’의 ‘을지문덕’과 ‘한산도대첩’의 ‘이순신’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백선엽과 ‘다부동 전투’에 대해 김동길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1950년 8월과 9월에 벌어진 다부동(경북 칠곡군) 전투에서 제1사단장 백선엽이 발휘한 뜨거운 애국심이 없었더라면 대구는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을 것이고 낙동강과 부산도 모두 인민군에 의해 점령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한국군과 국제연합군은 동서 약 80Km, 남북 약 160Km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북한군을 막고 있었다. 지상군의 작전은 크게 중동부지역, 중서부지역, 동부지역, 서부지역, 남부지역으로 나눠 이루어졌다. 방어란 어느 한 쪽만 막는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을 동시에 사수해야 가능한 것이 상식일 것이다. 중서부지역의 ‘다부동’을 성공적으로 사수했더라도 만약에 중동부지역의 ‘영천’이나 동부지역의 ‘포항’이 함락되었다면 낙동강 방어선 전체에 위기가 봉착했을 것이다. ‘다부동 전투’가 ‘6.25 한국전쟁’에서 한국군이 거둔 대표적인 전과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김동길은 이처럼 특정 전투의 성과를 지나치게 부풀리고 있다. ‘다부동 전투’는 ‘낙동강 방어전투’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한 사람은 미 제8군 사령관인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1889∽1950)’ 중장이다. 그래서 미국은 이 방어선을 ‘워커라인’이라고 부른다. 워커 중장의 수성전략 아래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원수가 ‘인천상륙작전’이라는 기습공격을 성공시켜 전황을 일시에 뒤짚었다. 전쟁영웅이란 이런 군사전략가들을 말한다. 우리 역사의 ‘을지문덕’, 이순신’ 모두 일개 전투지휘관이 아니라 당대의 전략가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6.25 한국전쟁’의 모든 전쟁전략은 미국군에게서 나왔다. 백선엽을 비롯한 한국군 장교들은 미군의 전략가들이 구상한 작전을 최전선에서 잘 수행한 전술형 지휘관이었을 뿐이다. 미국으로부터 우리가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같은 구조 아래에서는 한국군 고급지휘관들의 전문성을 크게 발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한국군에는 백선엽에 버금갈만한 능력을 발휘한 지휘관들조차 많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전략형 지휘관을 키우려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가 꼭 필요. (출처-부산시청)

    전쟁 초기에 우리 스스로 군사전략을 수립한 경우가 있다. 바로 ‘한강방어선’을 주창한 김홍일이다. 6월 26일 오전에 국방부 회의실에서 신성모 국방부 장관 주재하에 열린 ‘군사경력자회의’에서 김홍일 참모학교장이 한강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지연작전을 펼칠 것을 제안했다. 시흥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된 김홍일은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이 작전은 승패를 떠나 철저하게 미지상군이 투입될 시간을 확보하는데 주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노회한 술수를 잘 쓰는 사람이었지만 김홍일에게 ‘오성장군(五星將軍)’이란 휘호를 내린 것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백선엽의 ‘군과 나’ 1988년 6회에는 다부동 전투에서 사단장이 돌격명령을 내리고 앞장 서서 적진에 돌진했다는 신화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일화를 통해 백선엽은 자신의 뿌리가 일본군에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백병전(白兵戰)이야말로 일본육군이 1905년 러일전쟁에서 확립한 군사사상이기 때문이다.

    ‘백병주의’ 또는 ‘백병총검주의’라고도 하는 이 전술은 사격을 통해 적에게 가까이 접근한 다음 ‘백병전’으로 승리를 결정짓는 공격방식이다. ‘백병주의’는 화력에 기반한 근대 군사사상의 전통과 비교해 볼 때 시대에 무척이나 뒤떨어진 군사개념이다. 이 이야기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왜 국방부가 ‘포방부’라는 비아냥까지 들어가며 포병전력 증강에 심혈을 기울여왔는지 숙고해 보아야 한다. 백선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도 이제 사망한 만큼 ‘6.25 한국전쟁’에 대한 좀더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 서술이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③ 군내 사조직의 수장

    한국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 장교들은 만주군 출신과 일본군 출신의 학도병과 지원병 출신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입대 전 경력과 출신지를 중심으로 인맥이 만들어졌다. 이후 전쟁을 거치며 한국군의 규모가 비대해지고 장교들 간에 격차가 생기면서 군내에 본격적으로 파벌이 만들어졌다. 정일권을 주축으로 한 함경도파와 백선엽을 주축으로 한 평안도파가 양대 세력이었다. 이외에 이형근을 중심으로 한 파벌이 있었고 이범석의 지지세력으로 의심을 받은 군인들은 ‘족청계(조선민족청년단)’라고 불렸다.

    제1공화국은 파벌로 나누어진 군 상층부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통제했다. 이승만은 각 파벌의 수장인 정일권, 백선엽, 이형근 세 사람을 모두 대장으로 진급시켰다. 제1공화국의 육군 대장은 ‘원수(元帥)’나 다름없는 상징성이 강한 계급이었다. 세 사람 이후 대장이 탄생하는데 7년이 넘게 걸렸다. 4호 대장은 바로 ‘5.16군사정변’의 주역인 박정희이다.

    이승만은 육군의 대장3총사에게 연합참모본부총장(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1군사령관(지상작전사령관)을 교대로 맡기면서 서로를 견제하게 만들었다. 군부를 분할통치하는 구조로 만든 것이다. 헌병총사령부(사령관 원용덕)와 육군특무부대(부대장 김창룡)가 이들을 뒤에서 감시했다.

    악수하는 이승만과 백선엽- 이승만에 대한 군부의 지지는 확고했다. (출처; 경향신문)

    이승만 행정부가 군부를 강하게 통제한 것은 군부가 정치자금의 공급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1951년의 국민방위군사건이 대표적이다. 군에서는 미국의 군사원조를 전용하여 자유당에 정치자금으로 제공하였고 반대급부로 정권은 정치자금 조성에 성의를 많이 보인 군인들을 보호해 주었다. 나름의 공생관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당연히 군내 각 파벌로도 원조자금이 유출되었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원조물품을 둘러싼 부정부패가 매우 심하였다.

    군사원조물품이 제대로 집행이 되지 않다보니 군부대들은 소위 ‘후생사업’이란 명목으로 병사들을 사역에 동원했다. 산의 나무를 베어 숯을 만들어 팔거나, 제재소를 운영하여 목재로 만들어 판다든지, 군용차량으로 민간업자의 일을 도와주고 비용을 받는다든지 등의 여러 방법으로 모자란 부대경비를 벌충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또다른 부패가 발생하는 것은 물론이다.

    파벌의 폐혜는 군이 사병집단화한다는 것이다. 이 당시는 지휘관의 임기나 진급의 법제화가 되어 있지 않다 보니 육군참모총장의 의지에 따라 장성의 진급이나 보직 배치가 이루어져 파벌을 형성하거나 유지하기 쉬운 구조였다. 더욱이 참모총장 자체가 파벌의 수장이거나 특정파벌 출신이었기 때문에 파벌에 속하지 않는 군인은 진급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1962년 8월 미 대사관이 국무부에 보고한 한국 군부의 파벌과 관련한 기밀문건을 보면 파벌의 수장들은 구성원들에게 “혜택과 진급, 적절한 사면” 등을 줌으로써 결속력을 키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특히 백선엽에 대해서는 “다른 참모총장들보다도 더욱 부패한 것으로 유명했다”고 적고 있다.

    파벌의 폐해와 부정부패, 그리고 3.15부정선거에 군이 개입하면서 4월혁명이 일어나자 군내에는 정군운동이라는 것이 태동하게 된다. 연합참모본부총장이던 백선엽이 이 시기에 물러난 것은 ‘하극상’에 의한 퇴진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군개혁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생긴 파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평안도파와 함경도파는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각각 ‘텍사스토벌작전’과 ‘알래스카토벌작전’으로 불리기도 하는 반혁명사건으로 일소되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사람들이 이들 파벌의 그늘에 가려있던 경상도 출신의 군부세력이다. 백선엽이 하나회의 할아버지인 셈이다. (2편 계속)

    필자소개
    국방 평론가.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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