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의 도구화와 상품화
[원효-맑스의 대화⑥] 과학적 진리와 동양의 도(道)
    2020년 07월 07일 10: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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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맑스의 대화⑤]신자유주의 체제 모순과 불평등

1. 경이롭고 두려운 최근 과학기술의 성과

경이로우면서도 소름이 돋는 최근의 과학기술 성과 세 가지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은 생명을 창조하고 자신의 영생을 도모하는 신의 지위에 올랐다. 그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로 인하여 딥러닝의 위력에 감탄한다. 딥러닝의 발전 속도 또한 눈부시다. 알파고 제로(AlphaGo Zero)는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 리(AlphaGo Lee)에게 100전 100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딥러닝으로는 강 인공지능(Strong AI)을 만들 수 없다. 계속 빅데이터를 공급해야 하고 에너지가 엄청나게 많이 소요되며, 무엇보다 인간의 뇌처럼 시냅스가 삭제되고 추가되면서 소프트웨어에 따라 하드웨어가 변하는 뇌신경가소성((神經可塑性, neuro-plasticity)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뉴로모픽 칩은 인간의 뇌신경세포와 시냅스를 재현할 수 있다.

풍경1: 예쁜 꼬마 선충(Caenorhabditis elegans)은 뇌신경세포가 302개, 세포가 959개에 불과하지만 인간과 유전자가 40%가 동일하고 수명이 짧아 생명과 인공지능에 대해 연구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에 이 벌레의 뇌신경세포를 모두 매핑(mapping)하여 유전자를 염색체 구조 안에 위치하게 하여 이 가상 뇌를 레고 로봇에 재현하였더니 어떤 지시와 정보도 프로그래밍하지 않았음에도 살아있는 선충과 똑같이 움직이고 행동하였다. 알고리즘을 설정하지 않고 지능만 부여했음에도 먹이를 구하러 다니고 천적을 피하여 도망을 가고 짝을 찾아 다녔다.(http://openworm.org)

풍경2: 2020년에 인간의 영생을 도모할 수 있는 획기적 길이 열렸다. 우리 얼굴의 세포만 하더라도 잠깐 사이에도 수천, 수만 개의 세포가 교체된다. 복사기처럼 새 세포가 예전세포를 그대로 복사하지만 텔로미어는 조금씩 짧아지며 이것이 다 닳으면 세포의 복제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에 세포의 주인공은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텔로미어를 젊은 상태로 재설정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미국의 생명공학기업인 에이지X 치료학(AgeX Therapeutics)의 연구원인 이지은이 주도하는 미국의 연구팀은 초백세인 114세 여성과 43세의 건강한 사람, 조로증에 걸린 8세의 환자의 피를 기증받아서 이 혈액세포에서 형질전환세포주(LCL)를 추출하여 이를 재프로그래밍하면서 세포의 수명을 결정하는 텔로미어의 길이를 재설정하는 데 성공하였다.100세가 넘는 이의 세포를 8세의 세포로 재설정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Jieun Lee et.al., “Induced pluripotency and spontaneous reversal of cellular aging in supercentenarian donor cells””, Biochemical and Biophysical Research Communications, XXX(XXX)XXX, February 2020.)

풍경3: IBM이 2014년에 개발한 뉴로모픽 칩 ‘투르노스TrueNorth’는 ㎽(밀리와트)급 전력으로 54억 개의 트랜지스터를 내장한 4096개의 프로세서를 구동한다. “Brainchip Holdings는 2019년 말에 Akida라는 NSoC (neuromophic system on chip) 프로세서를 출시하였는데, 아키다 칩에는 120만 개의 뉴런과 100억 개의 시냅스를 집적하였다. 인텔과 IBM의 뉴로모픽 칩보다 100배나 높은 효율을 나타낸다.”(https://www.brainchipinc.com/) 뉴로모픽 칩은 인간의 뇌처럼 머지않아 인간의 뉴런 869억 개와 320조 개의 시냅스를 칩에 구현할 것이다. 아니, 그 1/10분을 구현하는 칩을 10개 병렬하면 인간 뇌의 수준에 이르거나 이를 넘어설 것이다.

2. 계몽의 빛과 구세주로서 과학

중세시대에 두통이 걸려 신부를 찾아가면, 신부는 악마가 머릿속에 있어서 그러니 기도하거나 면죄부를 사야 악마가 나간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과학기술 혁명 이후 의사는 그것은 뇌세포에 산소와 영양분이 덜 공급되어서 그런 것이라며 이를 촉진하는 두통약을 처방하고 산소가 많은 해변가나 숲을 산책하라고 권한다. 이처럼 과학/기술은 계몽의 빛이다. 인간이 연금술, 페스트, 마녀사냥으로 얼룩진 주술의 정원에서 탈출하여 환한 빛의 세상으로 나아가게 한 것은 과학/기술과 계몽사상이다.

78억 명의 인류가 먹고 살만한 물질적 풍요를 안겨 준 것, 산업혁명의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 교통수단과 인터넷을 통해서 인류가 한 마을이 되게 한 것, 거의 모든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게 한 것 또한 과학의 힘이다. 더불어 우리에게 여가를 선사하고 여성해방을 앞당긴 것 또한 과학이다. 옛날엔 겨울에 솜이불을 빠는 데만 엄청난 시간과 힘이 필요하였다. 양잿물을 붓고 다리가 쥐가 나도록 구정물이 사라질 때까지 발로 밟고, 다음 날까지도 팔이 아프도록 물기를 짜서 빨랫줄에 널었다. 명태처럼 얼고 녹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며칠을 말려야 했다. 하지만, 이제 세탁기에 넣고 그 시간 동안 음악 감상을 할 수 있다. 물론, 여성들이 온몸을 사슬로 묶고 연대하는 등 주체로서 가부장제에 맞서 투쟁을 한 대가이지만, 과학기술도 일등공신의 역할을 했다. 여성들은 가전제품의 도움을 받아 힘든 가사노동에서 벗어나 취미생활을 하고 여가를 즐기게 되었다.

3. 과학의 도구화/상품화와 디스토피아 매개로서 과학

과학기술은 또 한 편에서는 디스토피아로 가는 매개다. 히로시마와 떨어진 원자폭탄과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드론을 비롯한 살인무기들, 과학기술이 만든 문명의 이기로 인한 환경파괴로 인한 기후위기, 인간을 지배하고 인류문명의 종말을 이끌 가능성이 농후한 강 인공지능 등은 지옥으로 가는 묵시록의 장면들이다. 먼저 과학/기술에 대한 맑스의 말을 들어보자.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과 불가분한 모순이나 적대관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기계 그 자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본주의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기계는 그 자체로서는 노동시간을 단축하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서 노동일을 연장하게 되고, 그 자체로서는 노동을 경감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서 노동강도를 높이게 되고, 그 자체로서는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승리이지만 자본의 손 안에 있게 되면서 인간을 자연력에 예속시키며, 그 자체로서는 생산자의 부를 증대시키지만 자본의 손 안에 있게 되면서 생산자를 빈민으로 만들기 때문이다.”(K. Marx, <Capital> Ⅰ.)

마르크스는 기계(과학기술)가 이중적이며,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의 자본주의적 사용이 문제임을 갈파했다. 위의 인용문에서 ‘기계’를 ‘과학기술’로 대체해도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언덕을 평지로 만드는 작업을 삽질로 하는 것보다 불도저를 이용하면 수십 배의 시간과 에너지를 단축한다. 하지만 자본가가 자본을 유기적으로 구성하여 임금을 줄이고 이윤을 늘리고자 인간의 육체적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면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외려 늘어난다. 기계를 사용하면 인간의 육체적 노동은 줄어든다. 하지만 자본가가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성을 향상시키고자 하면 노동의 강도는 더욱 높아진다. 경운기를 이용하여 황무지를 밭으로 바꾸는 것은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자연에서 원료를 추출하여 기계를 만들고, 컨베이어벨트로 움직이는 분업 체계에서 인간이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예에서 잘 알 수 있듯, 인간은 기계, 더 나아가 자연에 종속된다. 결국 기계, 혹은 과학기술을 사용하여 얻은 이익은 자본가가 차지하고,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노동강도는 높아지고 임금은 줄어든 노동자는 점점 더 가난해진다.

과학은 자본주의 체제와 결합하며 디스토피아의 매개 역할도 하고 있다.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와 기후위기다. 과학기술은 환경을 해치는 수많은 기계를 만들었고, 기계들은 자연을 파괴하는 막대한 쓰레기와 오염물질을 양산하고 있다. 2018년에 3억 5천 9백만 톤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생산되었고,(https://www.statista.com/) 2010년에만 4백 80만 톤에서 1천 2백 70만 톤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바다로 흘러들어갔다.(Jenna R. Jambeck et al., “Plastic waste inputs from land into the ocean”, Science, 2015) 세계는 매년 360억 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고 이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https://ourworldindata.org/)

우리는 미세먼지와 중금속으로 오염된 공기를 마시고 나노 상태로 분해된 플라스틱을 흡입한 물고기와 중금속과 항생제가 축적된 가축들을 먹고 있다. 온난화로 극지방과 고산지대의 빙하가 녹고 해안지방이 침식하고 대형 산불이 자주 발생하고 슈퍼태풍이 불고 온대와 냉대 지방의 식물들이 고사하고 동물들도 38%가 멸종위기에 놓였다.

기술결정론 또한 허구의 이데올로기이다. 기술이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세계관 등 여러 요인들이 얽혀서 사회를 변화시킨다. 대형 토목사업을 하려는 사회적 필요와 노벨의 아이디어가 결합하여 다이너마이트가 발명되었지만, 그것은 대규모로 인간을 살상할 수 있는 전쟁시대를 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이다. 파시즘을 피해 온 망명 과학자들과 미국의 과학자들이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도모하기 위한 ‘억지 전략’의 일환으로 원자탄을 개발했지만, 그것은 수만 명을 즉시에 죽이고 수백만 명을 방사능에 관련된 각종 질병을 앓게 만들고 인류의 멸종도 야기할 수 있는 대량살상무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기술은 예상치 못한 결과나 부작용을 야기하기에 기술로 기술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발상은 위험하다. 근본적으로 기술결정론이나 환원론은 과학기술이 야기하는 문제에 대해 미시적으로만 인과를 따지기에 그 범주 바깥의 인과관계를 고려하지 못하며, 이는 늘 오랜 시간 뒤에 위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과학기술이 인간에 대한 통찰, 윤리와 도덕을 상실할 때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괴물은 언제든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과학 자체가 도구화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독일군 장교의 명령에 따라 화학자가 유태인을 가장 빨리 죽이면서도 그 시신에서 비누 한 장이라도 더 나올 수 있는 화학물질을 개발할 때 과학은 피와 살과 영혼을 가진 인간을 비누로 전환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은 자본의 이윤추구의 도구, 국가의 경쟁력과 군사력, 폭력 강화의 도구로 전락하였다. 인간 자신이나 자연이 목적이 되지 못한 채 자본을 더 축적하고 국가의 엘리트들이 더 많은 권력을 갖기 위하여 과학기술을 동원하고 이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과학기술이 상품화하고 생명이 산업화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2015년 세계 제약 시장의 규모는 자동차나 반도체 시장의 두, 세 배를 능가하는 1조 720억 달러(약 1,286조 원)에 달한다.(https://www.statista.com/) 유전자공학은 신약개발이나 장기 공급에 이르기까지 수 천 조 원의 이상의 가치를 지녔고, 이미 미국과 특정 선진국이 이를 독점하고 있기에 선진국과 후진국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셀레라 게노믹스 등이 인류 공동의 자산인 생명과학 유전자에 대해 수천 건의 특허를 내고 있고, 이것으로 엄청난 돈을 벌고 있다.

조나스 소크(Jonas Salk)는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하여 대략 5조 원의 특허료 수입을 벌 수 있는 상황에 있었지만, 소아마비로 고통 받을 어린이를 위하여 이를 무료로 개방하였다. 특허를 내라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가 말했다. “태양을 특허낼 것인가?” 마찬가지다. 생명은 인류 공동의 자산인데, 몇몇 기업들이 독점한 기술과 정보로 막대한 돈을 벌고 있다. 유전자 조작으로 맞춤아기를 생산하여 인간이 획일화할 수 있다. 또 생명산업과 함께 생명권력이 등장했다. 어떤 미치광이가 히틀러 수 십 명을 복제해서 다시금 나치즘과 같은 일을 한다면 얼마나 끔찍한가. 생명을 조작하고 인간의 수명과 건강을 관장하는 생명권력이 주권권력, 훈육권력과 결합하며 작동하고 있다.

과학은 불평등과 계급갈등을 심화한다. 과학기술을 다루는 이들은 고연봉 고학력자이다. 높은 임금을 주고 이들을 관리하는 자본은 연구투자와 특허를 통하여 과학기술을 독점하여 막대한 이윤을 획득한다. 과학기술이 고도화할수록 노동을 숙련노동과 비숙련노동으로 이원화하며, 이에 비례하여 임금 격차가 더 벌어진다. Al와 자동화로 대다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박탈당할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이를 공유하지 않는다면, 소수의 로봇 소유자가 노동자를 농노처럼 부리는 새로운 봉건제가 도래할 수도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호모 데우스의 문제다. 이미 인간이 생명을 창조하고 조작하는 신의 경지에 올랐다. 예쁜꼬마선충과 같은 기계 생명을 창조하거나 유전자를 조작해서 새로운 종의 생명체를 만드는가 하면, 전자 알고리즘과 생명공학의 알고리즘을 결합하여 바이러스도 제작하였다. 스페인독감에 걸려서 5천만 명이 죽고 현재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50만 명이 넘게 사망한 것처럼, 이 새로운 바이러스가 실험실을 빠져나와 어떤 위기를 야기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인간이 산업화와 도시화로 지구상 생명들의 균형을 깨고 환경위기와 기후위기를 야기하고 있는데, 이에 더하여 인간이 만든 생명이 통제의 범위를 벗어난다면 그 혼란의 양상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인간이 신의 경지에 오른다면, 그 오만이 제2의 바벨탑을 부를 수도 있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적인 영역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주 쉬워졌다. 7, 80년대에는 대학교에서 사찰을 할 때 형사나 국가정보원의 요원들이 목적하는 인물을 따라다니며 감시해야 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패킷 감청을 하며, 우리가 다녀간 모든 곳이 핸드폰의 유심에 저장되며, 카드를 사용하고 검색하거나 방문한 사이트가 모두 빅데이터로 입력이 되어 있다. 우리는 정보를 알려고 노력한 만큼 우리의 정보도 노출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 때처럼 국가와 자본은 빅 데이터나 다른 정보를 활용하여 권력을 작동하고 이윤을 획득할 수 있다.

드론, 레이저 무기, 나노무기, 생화학무기, 신종 바이러스들이 생명공학 무기로 활용될 경우 인류는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것과 전혀 다른 양상의 전쟁과 집단학살이 일어날 수 있다. 물론 윤리적이고 법적인 차원에서는 제한하겠지만, 앞으로 코로나처럼 무증상 상태에서 감염시키고 니파처럼 77.6%를 죽이는 바이러스를 만들고 이것이 특정 인종의 단백질에만 작용하도록 유전자 조작을 가하여 퍼트린다면 그 인종만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이처럼 과학기술은 여러 역기능과 부작용을 야기하기에, 이를 미리 예측하고 이에 대해 대안을 세워야 한다. 과학기술이 권력이나 자본과 결합할 때 이는 가공할 만한 파괴를 가져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규제해야 하고 국가나 자본이 아니라 시민사회가 과학기술을 통제해야 한다.

http://airesearch.com/tag/digital-life-form/

* 디지털로 창조한 생명인 예쁜 꼬마 선충 (Caenorhabditis elegans)의 모형도. 이 벌레의 뇌신경세포를 모두 매핑(mapping)하여 유전자를 염색체 구조 안에 위치하게 하여 이 가상 뇌를 레고 로봇에 재현하였더니 어떤 지시와 정보도 프로그래밍하지 않았음에도 살아있는 선충과 똑같이 움직이고 행동하였다.

4. 과학과 궁극적 진리의 화쟁

과학은 “무엇을 발견해내는 특별한 능력이자 발견한 것들로부터 나오는 지식의 체계로, 이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것들이나 그 새로운 것들을 현실에서 구현해내는 것”(리처드 파인만, <과학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과학을 “미지의 자연과 우주에 대하여 패러다임에 따라 객관적인 관찰과 측정을 거쳐서 보편적인 방법에 의해 체계적인 실험을 통하여 허위를 버리고 진리를 채택하고 이것을 다시 검증해서 진실로 입증된 것으로 축적되는, 검증과 반복이 가능하고 반증에 열려 있어 오류와 불완전함을 스스로 수정하는 기제를 내재한 지식체계”라 정의한다.

과학적 진리와 동양의 도(道)는 어떤 관계인가. 갈릴레이, 뉴턴, 아인슈타인, 스티브 호킹이 그랬던 것처럼 기존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서 물질의 실체에 좀 더 가까이 다다르는 이들이 있다. 우주만 하더라도 갈릴레이는 천동설을 떠나 지구가 태양을 도는 행성의 하나일 뿐이라고 밝혔다. 뉴턴은 중력에 의하여 지구나 달이 질서 있게 운행하는 것을 밝혔다. 아인슈타인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중력에 의해 휜 공간에 구덩이로 빨려 들어가는 쇠구슬처럼 움직이는 것이라고 밝혔다. 스티브 호킹은 블랙홀에서 빛이 허수의 시공간에서 임계속도인 광속보다 빨리 움직이며 사건의 지평을 넘어 빠져나올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것도 기존의 본질에 비하여 조금 우주의 실체에 더 가까이 이른 것뿐이지 진정한 실체에 접한 것은 아니다. 힉스입자나 암흑물질에 대해 규명이 되면, 끈이론이 가설을 넘어 검증이 가능하면 원자의 구조나 천체의 원리는 달라진다. 그러니 인류의 과학이 앞으로 수만 년 더 발달한다 하더라도 물질의 진정한 실체인 참에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 이처럼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서 보면 누구도 궁극적 진리에 이를 수 없다.

그림1: 일심이문의 화쟁 모형

삼재(三才)사상과 원효의 화쟁을 결합해서 궁극적 진리와 과학의 화쟁을 모색한다. 봄날의 산은 필자에게 혼돈이다. 이 풀과 저 풀의 구분을 할 수 없기에 독초를 먹고 복통을 일으키거나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의 선비, 어머니는 이것은 취나물이고, 이것은 얼레지라고, 취 가운데서도 요것은 개미취요, 요것은 참취며, 이것은 곰취고, 저것은 미역취라고 구분한다. 어머니는 그 풀을 이파리 모양과 빛깔, 줄기의 생김 등에 따라 취, 얼레지, 질경이 등으로 가르고, 다시 이것은 먹는 풀이고 저것은 못 먹는 풀이며, 이것은 날로 먹으며 저것은 푹 익혀서 먹는 것이라고 이용을 달리 한다. 이렇듯 원래 풀은 하나지만 우리가 허상이나마 인간의 틀로 범주를 만들어 나누어놓아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다.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상주(常住)를 논한다면 다른 것을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체(體)라 하고, 무상(無常)을 논한다면 다른 것을 따라서 생멸하는 것을 상(相)이라 하니 체는 상(常)이요 상(相)은 무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일심이 무명(無明)의 연을 따라 변하여 많은 중생심을 일으키지만 그 일심은 항상 스스로 둘이 없는 것이다. (……) 비록 심체가 생멸하나 늘 심체는 상주하여 이는 심체가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는 심체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성질이며 움직임과 머묾이 같지도 않으면서 다른 것도 없는 성질인 것이다.”(원효, <대승기신론소 기회본(大乘起信論疏記會本)>)

빛이 원래 하나이나 이를 명(明)과 암(暗)으로 가르고 다시 명도와 채도, 파장으로 세분하여 빨, 주, 노, 초로 나누듯, 세계의 실체는 원래 하나이나 그러면 인간이 이를 이해할 수도 이용할 수도 소통할 수도 없으니 이데아와 그림자, 본질과 현상, 주(主)와 객(客), 노에시스(noesis)와 노에마(noema) 등 둘로 나누어 본다. 이처럼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은 실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하고 이용하고 소통하기 위한 것이니 하나가 둘로 갈라지는 것은 용(用)이다.

아무리 궁극적인 진리에 다가갔다 하더라도 둘로 나눈 것 ― 또는 이에 이름 붙인 언어기호 ― 로는 세계의 실체를 드러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근대 서양의 주류 철학자들은 세계를 둘로 나누고 이를 통해 진리에 이르려 했다. 그러니 셋을 두어 둘의 허상을 해체하여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체(體)이다.

그럼 이들은 어떤 관계를 가질까? 우리는 나무의 본질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무가 광합성 작용을 하거나 탄소 동화 작용을 하는 걸 보고 나무의 본질을 유추한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없다. 그 사람이 말하고 행동을 하는걸 보고 “정의롭다, 정의롭지 못하다, 선하다, 악하다, 아니면 성질이 급하다, 급하지 않다”라는 식으로 판단한다. 우주도 마찬가지다. 우주의 본질은 알 수 없다. 별의 움직임과 폭발 등 우주의 작용을 보고 우주의 본질을 유추한다. 이처럼 체(體, 본질, 실체)는 용(用, 작용, 운동, 행위와 실천, 우리말로 ‘짓’)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러나 근대 과학이 범했던 오류는 용(用)을 통해서 드러나는 본질을 참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필자는 체(體)를 ‘몸’과 ‘참’으로 구분한다. 몸은 용(用)을 통해서 드러난 본질이다. 참은 용을 통해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채 숨어 있는 본질이다.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의 성품이 어떨 것이라고 판단하지만, 더 자주 만나다 다른 품성을 겪고 나서는 그 판단을 수정한다. 그처럼 자연, 우주, 사람 모두 작용과 운동을 통해 본질을 유추하지만, 아직 작용하지 않거나 작용을 했더라도 인간이 관측하지 못하면 그 실체에 대해 알 수 없다. 용을 통해 드러난 것만으로 몸을 유추할 뿐이며 참은 숨어 있다. 달이 떨어지지 않은 채 지구를 도는 작용을 볼 때는 둘 사이의 중력이 본질인 듯하지만, 중력에 의하여 시공간이 휘어지는 작용을 볼 때는 상대성의 원리가 실체인 듯하고, 양자얽힘 작용을 보면 양자의 입자성과 파동성이 관찰자에 의하여 결정되는 불확정성이 물체의 본질인 듯하다. 이처럼 체는 용을 통해 드러나는 한편 숨어버린다. 근대 과학이나 근대 학문 체계는 그 용(用)을 통해서 드러난 부분인 몸을 본질, 본성, 실체, 진리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용(用)이 상(相, 현상, 형상, 우리말로 ‘품’)을 만든다. 광합성과 증산작용을 하는 데 따라 식물의 형상이 만들어진다. 높은 온도와 충분한 물속에서 광합성과 증산작용을 활발하게 하는 열대 지방의 식물은 너른 이파리를 가지지만, 그 반대인 사막의 선인장은 이파리가 아주 작거나 가시 형태를 한다. 그렇게 달라진 형상이 고무나무와 선인장의 특성을 그러낸다. 인간 또한 직립의 자극과 뇌를 많이 쓰는 지능작용으로 뇌가 커진다. 뇌가 커진 인간은 대뇌피질이 없는 원숭이와 다른 본성을 갖게 된다. 이처럼 체(體)는 용(用)을 통해서 드러나고, 용은 상(相)을 만들고, 상은 다시 체를 품는다.

용을 통하여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 알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참이다. 원래 체는 하나이다. 이를 인류는 이데아, 궁극 진리, 일심(一心), 진여(眞如), 도(道)라고 불렀다. 이를 인간이 나름대로 범주나 준거를 정하여 이데아와 그림자, 진리와 허위, 이렇게 둘로 나눠서 코스모스로 만들어 이해하였다. 이것이 근대과학체계이다. 하지만, 이는 참과 다르며 허상이다. 이에 셋을 두어 다시 원래 카오스였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한다. 소리를 진동에 따라 도/레/미/파/솔/라/시/도라고 구분하는 것이 근대 과학 체계라면, 도와 레 사이에도 무한한 소리가 존재한다고 인식하고 그 소리 그 자체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 탈근대의 과학이다.

원자핵과 양성자, 중성자, 전자, 쿼크 등이 모여 원자를 이루고 원자는 서로 결합하여 물질의 본질과 특성을 갖는 분자라는 1차 품(相1)을 형성한다. 분자들이 결합하여 2차 품(相2)인 물질을 형성한다. 이들은 운동을 하고 작용(짓, 用)을 한다. 이를 자연상태나 실험을 통하여 관찰하고 귀납적 결론에 이르거나 개별적 현상을 통해 그에 내재하는 보편 원리를 연역적으로 추론하여 물질의 몸(體2)에 다다른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의 틀 내에서 사고하고 관찰하고 실험한다. 갈릴레이나 아인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기존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서 물질의 실체에 좀 더 가까이 다다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기존의 본질에 비하여 조금 더 실체에 이른 것뿐이지 물질의 진정한 실체인 참(體1)에 이른 것은 아니다. 실험과 연구를 진행하고 우주의 천체에 대해 관찰할수록 새로운 소립자와 빛과 우주가 계속 발견되어 원자와 우주의 구조와 원리 또한 달라지는 것처럼 물질의 진정한 실체인 참에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해, 몸은 짓을 통해서 드러나고, 짓은 품을 만들고, 품은 다시 몸을 품으며 영겁 순환을 하지만, 참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처럼 모든 것이 무상하고 공하지만 허공과 이 원리는 존재한다. 이처럼 단순히 천체나 물질의 작용이 아니라 더 큰 단위에서 물질과 우주의 상호작용을 관장하는 원리가 바로 도(道)이다. 빅뱅이 일어나 힉스입자가 질량들을 나누어주고, 물질들이 우주 공간에 성간물질로 퍼지고, 그것이 온도 차에 따라 별을 만들고 은하로 뭉쳐져선, 중력과 에너지를 매개로 서로 관계를 맺고 운동하게 하는 것, 상대성원리와 양자역학을 모두 포괄하는 것, 막을 충돌시키고 초끈을 진동시키고 양자를 요동하게 하는 근본원리가 바로 참(體1)이자 도(道)다. 이것이 바로 궁극적 진리이자 진여실제이다.

5. 세속의 과학과 초월의 과학 사이의 화쟁

인공지능이든 인간이든, 기계 바이러스든, 실수를 하거나 악용될 경우 인류 문명의 멸망도 야기할 정도의 위험을 안고 있다. 위기의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와 권력 때문이다. 여기에 신자유주의까지 더해지면서 자본의 야만을 규제하던 것들이 해체되고 권력과 자본의 카르텔은 더욱 공고해졌다. 반면에 이를 견제하던 시민사회와 공론장은 더욱 약해졌고 민주주의는 위기에 있다. 이 상황에서 난민처럼 철저히 배제된 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호모 사케르이다. 굶주려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어린이, 학살당하는 시리아의 시민, 납치되어 강제로 팔려가고 심지어 장기를 적출당하는 사람들, 빙하가 녹은 탓에 사냥을 하지 못하여 서로 살상을 하는 북극곰과 산불로 불에 그슬리거나 질식되어 죽어가는 호주와 아마존의 무수한 생물들과 원주민은 내일의 내 모습이다.

이제 죽어가는 생명에 응답해야 한다. 윤리로 규제하고 법적 통제도 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세속의 과학은 자본주의 체제와 결별해야 한다. 자본주의를 해체하거나 최소한 자본과 과학기술의 유착의 고리를 끊지 않는 한, 과학기술이 자본과 권력의 이윤과 이해관계와 탐욕을 충족시키거나 확대하는 방향으로 이용되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아울러, 생태계-지구촌-국가-지역을 하나로 엮어서 ‘하나의 생명, 혹은 온생명’으로 인식하고 정책을 펴야 한다.

초월의 과학의 대안은 석굴암의 과학을 21세기에 재현하는 것이다. 석굴암의 예는 21세기의 과학기술이 어떻게 가야 하는 지 방향을 알려준다. 석불사(석굴암)엔 가까운 동해변으로부터 습기와 염기를 가득 품은 바람이 불어오고 이는 석조물에 치명적이다. 이를 막기 위하여 일제는 석굴암을 해체하여 콘크리트로 지붕을 둘렀고, 한국 정부는 유리창으로 입구를 막았다. 외부와 내부 온도 차이로 생기는 결로 현상은 더욱 문제였다. 지금도 습기 제거기를 돌리고 있으나 그 진동으로 석불사의 그 아름다운 불상들은 하나둘 부스러지고 있다.

그러면 천여 년 동안 동해로부터 습기와 염분이 많은 해풍이 불어오는 산록에 있으면서도 석굴사는 어떻게 하여 전혀 부식되지 않았는가. 답은 자갈층과 통풍, 그리고 지하 샘이었다. 동해변에서 불어온 습기가 많은 바람이 석굴암의 차가운 자갈층 내부를 통과하면서 수증기는 응축하여 자갈층에 남고 공기는 차가워진다. 이렇게 차갑고 건조해진 공기만이 석굴암 내부를 향하여 흘러들어간다. 자갈층 내부에서 차가워진 공기는 밀도가 높으니까 자연히 아래쪽으로 흘러 석실내부는 언제나 뽀송뽀송한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다. 또, 지하수가 석굴암의 본존불 대좌 밑바닥의 암석 기초층을 관통해 흐르게 했다. 이로 굴 안에서의 위도에 따른 온도 차를 만들었다. 결로는 온도가 낮은 바닥에만 생겼고 불상엔 생기지 않았다.(이성규, <석굴암의 과학>)

이처럼 자연을 지배하는 과학에서 도(道)와 연기의 원리를 알아 자연의 순리를 따르며 연기된 무질서에 다가가는 것이 진정 새로운 과학의 길이리라. 우주 삼라만상을 인간의 잣대로 억지로 질서화할 것이 아니라 짓을 통해 그 연기된 무질서에 가까이 가려 해야 21세기의 과학은 실증적 사실을 넘어 진정한 실체에 다다를 것이며 인간과 전 우주가 하나로 공존하는 길을 열 것이다.

필자소개
한양대 교수. 민교협 전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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