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해로 가지 않은
    상해 임시정부 참모총장
    [한국전쟁 70주년 기고] 유동열 ②
        2020년 07월 07일 09: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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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간파 군인을 회상하며 : 유동열 ①

    Ⅰ. 붉은 의병대의 탄생

    이 전투에 참전한 한인 병사들의 부대 규모와 피해 상황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가장 최초인 기록인 ‘십월혁명십주년과 쏘베트고려민족’(1927년 출판)에는 100여 명이 참전하여 과반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적혀 있다. 1965년에는 고려인 학자 김승화가 1918년 6월말에 이미 100명으로 부대가 편성되어 있었던 자료를 발굴하여 저서에 인용하였다.

    한편 일본군 조선헌병대사령부가 1918년 10월에 두 차례 보고한 내용에는 “전일과 유동열은 각 자 100여 명을 이끌고….. 동지 30명이 전사”와 “조선인군대를 모집하여 그 수가 약 400명”이라는 구절이 있다. 필자는 내전 종식 이후 러시아 내에서 볼셰비키혁명 과정에서의 한인의 기여도가 평가절하되는 상황이었음을 감안할 때 러시아 자료에서는 ‘의도적으로 한인사회당 적위군의 규모를 줄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원동지역의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죽거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1918년 9월 16일 김애림(김알렉산드라)이 처형되었다. 총 두 자루를 휴대한 채 하바롭스크 거리를 활보하던 그녀의 모습을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백위군은 18일에 ‘블라고베셴스크’를 함락한 데 이어 ‘알렉세예프스크(자유시)’마저 무너뜨리고 이제 ‘제야’로 진격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원동 인민위원 소비에트’는 마지막 회의를 열어 해체를 결정하고 활동가들은 각지로 흩어져 지하활동을 하기로 하였다. 11월 18일에는 블라디보스톡의 볼셰비키 지도자 ‘콘스탄틴 수하노프’(1894~1918)도 처형되었다. 그는 연해주 ‘남부 우수리스크 관구’ 책임자였던 백위파 ‘알렉산더 수하노프’의 아들로 블라디보스톡의 소비에트를 이끌어 오다가 6월 29일의 체코군 봉기 때 백위파에 의해 체포되었었다.

    유동열 등은 하바롭스크가 함락되기 직전인 9월 2일 탈출을 감행하다 김애림과 같이 카자크 백위군에 체포되었다. 탈출로를 아무르강으로 정했으나 탑승한 배가 반혁명군의 함정에 나포됨으로써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체포된 한인사회당원들은 하바롭스크로 압송되었지만 유동열과 김립을 마지막으로 모두 풀려났다. 만약을 대비해 만든 중국인 여권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유동열은 하바롭스크 남쪽의 ‘농평(크라스나야 레치카)’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지 않은 것은 잘한 판단이었다. 유동열의 집으로 갔던 김립은 일본군의 추격을 받고 있었다. ‘농평’에는 이번에 같이 싸웠던 동지 안홍근의 집이 있었다. 그는 안홍근의 가족들은 안중근의 인척이기 때문에 배신하지 않을 것이란 판단을 했을 것이다. 안홍근의 부친이 아무르강에 작은 쪽배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그 배를 타고 만주로 탈출했다.

    한인사회당은 지하당으로 전환하였다. 정신적 지주인 이동휘와 당의 두뇌인 김립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이 조직에 아직 희망이 있다는 뜻이었다. 조직의 중심을 하바롭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 이 지역의 볼셰비키들과 연계하여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에 맞춰 조직원들을 재배치하였다. 만주의 독립운동조직들과도 접촉을 강화하기로 하였다. 옴스크에 조직원을 파견해 모스크바 레닌 정부와의 연결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간부들 간에는 서신 연락을 피하는 대신 사람을 파견하기로 하였으며 보안을 위해 ‘동주(東洲)’라는 암호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파르티잔의 수도’로 불렸던 ‘수청(水淸)지방’은 연해주에서도 오지였다. 이곳은 하바롭스크에서 연해주 동쪽 해안지대로 뻗어내린 ‘시호테 알린 산맥’의 끝자락에 펼쳐진 산악지대였다. ‘원호’(러시아 귀화자)가 적고 ‘여호’(러시아 미귀화자)가 많아 러시아인과 한인, 한인과 한인 사이에 차별과 갈등이 심했고 탄광이 있어 일찍부터 노동자층이 존재했다. 수청사람들은 1908년 ‘연추(延秋)’에서 결성된 의병대인 ‘동의회(同義會)’가 국내 진공작전을 펼칠 때 적극적으로 참여했었고 1918년 4월에는 신영동에서 한인 최초의 소비에트를 만들어 토지개혁을 시도하기도 했다.

    한인들은 처음에는 쫓겨들어온 러시아 빨치산들을 도와주다가 차츰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이들 무장부대들을 ‘붉은 의병대’라고 불렀다. 한인빨치산들은 ‘홍호적(紅鬍賊)’이라고 불리던 마적들과도 싸워야 했다. 그러나 홍호적으로부터 마을들을 지켜내면서 주민들과 ‘붉은 의병대’들의 관계가 더욱 굳건해졌다.

    사진 : 최선학(최파벨)과 알렉산드르 파데예프(샤샤)의 학생시절 모습(뒷줄) 두 친구 모두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내전이 끝나고 파벨은 한인 최초의 해군장교가 되었고 샤샤는 스탈린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가 되었다.

    Ⅱ. “각각 하는 길이 다른 고로”

    1919년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기대로 들끓었다. 대종교 계통의 독립운동가들은 2월 27일 길림에 ‘대한독립의군부’를 설립하고 3월 11일 ‘대한독립선언서’를 국내외 각 지역에 발송하였다. 이동휘와 유동열도 참여한 이 선언서는 ‘3.1독립선언서’와는 다르게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로 끝맺음을 할 정도로 독립전쟁을 대단히 강조하는 선언문이었다. 이들은 국제사회에 대한 청원만으로는 광복이 오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독립의군부’는 3월(추정) ‘조선독립군정사’(통칭 길림군정사)로 개편한 후 무장투쟁을 강화하기 위해 경험이 많은 유동열을 최고책임자인 독판으로 임명했다. 길림군정사는 같은 대종교 계열이면서도 대중에 기반한 조직인 서일의 ‘독립군정회’와 결합하여 10월 ‘대한군정부’, 12월 ‘대한군정서(통칭 북로군정서)’로 빠르게 변화해 나갔다. 당시의 상황이 그만큼 긴박했음을 보여준다. 길림군정사는 대한군정서 길림분서의 형태로 존속하며 유동열의 활동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길림성의 지배자는 독군 ‘맹은원’(孟恩遠)으로 그는 원세개의 집권기반인 ‘천진소참’(天津小站)의 ‘신건육군’(新建陸軍) 출신이었다. 그는 1917년 한때 길림의 독립을 선포했던 적이 있었고 1918년에는 ‘원동소비에트’와 ‘한인사회당’이 일본과의 투쟁을 함께 하자는 협의를 요청할 만큼 일제에 무조건적으로 경도된 인물은 아니었다. 1919년 7월 맹은원이 길림성독군에서 해임되고 장작림이 만주의 지배자로 등극한 이후인 1920년 5월에도 길림성장 서정림(徐鼎霖)이 일본의 독립운동세력 탄압 요구에 협조하지 않을 만큼 이 지역은 민족해방운동의 활동공간이 제한적이나마 확보되어 있어서 일본군의 침탈로 활동의 제약을 받고 있던 연해주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여기저기서 민족해방운동의 구심점이 될 지도기관의 수립 발표가 이어졌다. ‘길림군정사’도 그러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유동열은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소비에트형태)와 국내 ‘한성정부’의 조각에 각각 참모총장과 참모부총장으로 인선되었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군무부장으로 추천받은 3인 중에 1명으로 포함되기도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하나로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상해임정)에서 유동열은 참모총장으로 인선되었고 8월 29일 의정원의 승인을 통과하였다.

    유동열과 상해임정은 우호적인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19년 8월 5일에 이미 왕삼덕(전삼덕)을 상해에 파견하여 길림군정사의 상황을 보고케 함으로써 ‘상해임정’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1920년 1월 1일자 유동열 명의의 ‘급수군비서(急輸軍費書)’라는 군자금 모집 호소문에 나와 있는 안창호, 김구, 이춘숙, 안정근 등 임시정부 인사들의 연서명과 연호(대한민국 2년), 유동열의 직책(군사독판참모총장)만 봐도 상해임정과 유동열과의 관계가 적대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유동열을 통해 간도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추진하려 한 상해임정의 계획, 노백린과 유동열을 연해주에 보내 군사기관을 만들려는 안창호의 구상, 국무회의에서 유동열을 ‘임시파견러시아위원장’에 임명하자고 제의한 신익희의 발언을 보아도 상해임정의 요인들이 그를 존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유동열을 상해임정의 지지자라고 볼 수는 없다. 유동열은 상해임정의 참모총장이란 직책을 맡았지만 상해에 부임하지는 않았다. 그를 상해에서 본 적이 없다는 전 임정 외무차장 장건상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안창호의 일기에도 “군(유동열)이 회왕(會往)에는 상해에 내할 뜻이 없었으나”라는 구절이 나온다. 1919년 10월 11일자 독립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유동열은 “각각 하는 길이 다른 고로 상해에 갈 필요가 업다”고 말한다. 그는 좀 더 자세하게 “나는 생각기를 타인의 힘으로 독립되기 얼업고 독립이 되여도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 우리는 외교만 전뢰(全賴, 의지)하고 자신을 양(養)치 아니하면 아니될지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1920년 초에 일본의 상해 주재 총영사가 본국에 제출한 정보 보고서를 보면 이승만, 안창호, 이동녕 등은 이상파로 분류하고 있고 유동열, 이동휘 등은 무력파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볼 때 그가 상해행을 주저한 것은 정치노선의 차이, 다시 말해서 당시 상해임정의 다수파가 외교론자들이었기 때문에 상해에 부임할 필요성을 못느꼈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육사 출신의 장창국이 쓴 『육사졸업생』에 등장하는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는 한인 출신 장교들에게 꽤나 자상하고 배려심 많은 장군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우쓰노미야가 조선군 주둔사령관으로서 3.1 민족해방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무단통치의 수호자’라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다. 더 나아가서 그는 독립운동가들, 특히 상해임정 간부들에 대한 회유공작을 통해 민족해방운동의 전열을 흐트러 놓으려 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우쓰노미야는 밀정 이희간을 투입해 유동열을 회유하려 하였다. 이희간은 상동청년회 간사 출신으로 1905년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이 공작에는 신태현이라는 사람도 등장한다. 이희간이 유동열과 절친한 신태현을 먼저 공략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유동열과는 인척 관계로 하얼빈을 근거지로 민족운동을 하던 인물이었다. ‘우쓰노미야 다로’가 남긴 일기에 이 공작과 관련한 내용이 실려 있다.

    피고인 유동열의 영치금품 목록(1912년, 출처-국사편찬위원회)

    우쓰노미야는 1919년 12월 7일 ‘사이토 마코토(齋藤 實)’ 조선총독과 손병희와 유동열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12월 15일에 우쓰노미야는 사이토 총독에게 유동열 등을 귀순시키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요청했다. 유동열에게는 서울 방문을 요청하는 편지를 전달하였다. 12월 28일 이희간과 신태현 등이 우쓰노미야를 만났지만 유동열은 함께 오지 않았다. 1920년 1월 4일 우쓰노미야는 유동열의 답장 등을 가지고 참모와 면담했다. 편지에는 유동열이 (우쓰노미야의 제안을) 거절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결국 일제의 유동열 귀순공작은 실패한 것이다.

    이 시기의 유동열은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의열투쟁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20년 초의 안창호일기에는 ”유동열군은 ……. 작탄(炸彈)사업에 동정을 많이 하더라”는 보고가 담겨있고 1920년 8월 광복단원 김성택의 폭탄투척미수사건의 신문조서에는 ‘길림의 유동열에게 말하면 (폭탄을)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다’는 오동진의 발언 내용이 실려있다. 군정사의 기본방침은 마필과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투쟁을 하는 것이었지만 이에는 장기간의 시간이 필요했고 성사 여부가 불투명했다. 군정사에는 황상규처럼 즉각적인 투쟁으로 성과를 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길림군정사 회계과장인 그는 김원봉의 고모부이자 멘토이기도 했다. 오늘날로 따지면 의열단은 길림군정사가 창업보육을 지원하여 탄생한 벤처풍의 투쟁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에 들어서면서 상해임정에서는 국무총리 이동휘를 중심으로 독립전쟁으로의 노선 전환이 시도되고 있었다. 한편 블라디보스톡에서는 볼셰비키의 공세로 시베리아의 백위파 콜차크 정부가 무너진 데 고무된 반백위파가 1월 31일에 새 정부를 세움으로써 독립운동의 공간이 다시 열리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북경의 박용만, 신채호, 상해의 고창일, 만주의 유동열, 연해주의 문창범, 김하석을 포함한 13명이 6월 연해주의 ‘포그라니치니’에서 모여 무장조직의 통합과 투쟁에 관련한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4월초에 연해주 지역의 볼셰비키와 한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토벌을 단행함으로써 이 지역 항일투쟁의 기반은 다시 무너진 상태였다.

    사진 : 세르게이 라조(1894~1920) 기념우표(1948) 프리바이칼과 자바이칼 일대에서 활동하다 1919년 초부터 원동지역의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1920년 1월 블라디보스톡 백위파 정권의 타도를 이끌었으나 ‘연해주 4월참변’때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목숨을 잃었다. 죽은 후에는 소련의 국민영웅으로 등극했다.

    이 회합에 유동열이 참여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임시정부가 군사단체의 통일을 위해 그를 파견했다는 일본 측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지역이 연해주가 아닌 간도였다. 그는 지금 무장단체의 난립과 이들의 후원자인 종교세력 간의 갈등으로 인해 교통 정리가 시급한 간도를 뒤로 하고 박용만, 신채호 등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는 인물들과 반상해임정 성향의 대한국민의회 인사들의 연해주 회합에 참석했던 것이다. 유동열과 한인사회당의 관계는 여전히 이어져 있었다. 일제 측의 자료에는 1920년 8월에도 한인사회당의 간도조직인 신민단의 고문으로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일제는 이동휘, 유동열, 문창범 등 소위 ‘급진파의 수령’들이 무엇인가를 도모하고 있다고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회합에는 상해임정 국무총리인 이동휘와의 교감 아래 참석했을 것이다.

    이전과 다른 분위기 형성의 진앙지는 레닌 정부였던 것 같다. 1920년 7월 한인대표단도 참가한 코민테른(국제공산당) 제2차대회에서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가 채택되었다.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실망감에 젖어 있던 사람들은 이 소식이 알려지자 상해임정과 러시아소비에트정부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긍정적인 내용의 합의가 있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고, 일부 한인들 사이에는 상해임정이 러시아 영내로 이전할 것이란 소문도 퍼지고 있었다. 이들 뒷받침하듯 일본신문이 10월 상해임정과 러시아정부의 ‘공수동맹(攻守同盟)’ 체결설을 보도하였다.

    9월에는 박용만, 신채호, 이회영이 상해임정을 이탈한 신숙, 장건상과 함께 북경에서 ‘군사통일촉성회’를 결성하였다. 대한국민의회의 행보는 더 파격적이었다. ‘4월참변’ 이후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연해주에서 아무르주로 이동한 대한국민의회 간부들은 9월 15일 사회주의로의 방향전환을 결정하였다. 한인사회당원들은 그들의 변신을 애써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1920년 7월 귀화한인들이 만든 ‘전로한인공산당’이라는 무명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나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르쿠츠크파’라고 불릴 새로운 유령이 이렇게 소리 없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과연 그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제다이’가 될지 ‘시스’가 될지 어느 누구도 시베리아를 주목하지 않던 때였다. (계속)

    필자소개
    국방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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