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법 금융과 돈세탁 전초기지
    사악한, 야비한, 은밀한 돈 모이는 곳
    [책소개] 『머니랜드』 (올리버 벌로 / 북트리거)
        2020년 07월 04일 10: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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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탐사 언론인 올리버 벌로가 불법 금융과 돈세탁의 은밀한 세계를 파헤친다. 그는 슈퍼리치들이 부정하게 얻은 부를 조세 당국 및 공무원의 감시에서 차단하기 위해 은닉해 두는 가상의 나라를 ‘머니랜드’라고 명명하고, 그 실체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우크라이나의 전직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자국에서 약탈한 자금의 경로를 뒤쫓는 취재는 전 세계 조세 피난처들의 실태 분석으로 이어진다.

    그의 취재로 부자와 권력자의 돈세탁을 조력하는 전 세계적 자산 보호 산업의 비밀이 하나씩 드러난다. 벌로는 런던과 취리히, 월 스트리트의 영리한 금융인과 법률가, 부동산 중개인들이 갈고닦은 조세 회피 및 탈세, 돈세탁 수법을 낱낱이 보여 준다. 런던 시티의 무국적 달러화와 무기명 채권에서부터 파나마의 유령 회사, 저지섬의 신탁, 리히테슈타인의 재단까지, 머니랜드를 육성한 금융공학의 실체를 밝혀 내며 우리가 믿고 있는 제도가 정말 공정한 것인지 되묻는다. 세계 곳곳을 흘러 다니며 민주주의를 잠식하는 더러운 돈의 맨얼굴을 폭로하는 책이다.

    “사악한 돈과 야비한 돈은 어떻게 머니랜드로 모여드는가”
    영국의 탐사 언론인, 검은 돈의 흐름을 집요하게 뒤쫓다

    ‘헐리우드 스타의 집 투어’라고 들어 보았는가. 할리우드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클라크 게이블이 살던 집, 스칼렛 조핸슨의 단골 미장원 등을 구경시켜 주며 할리우드를 누비는 소규모 버스 투어이다. 이 책의 저자 올리버 벌로는 2016년 ‘런던도둑정치관광단’이라는 단체에서 동료 언론인 및 활동가들과 ‘헐리우드 스타의 집 투어’에서 착안한 독특한 투어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그는 2016년 5월 런던에서 반부패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구소련 및 제3세계 도둑 정치가들 소유의 부동산을 둘러보는 관광 코스의 가이드로 나섰다. 이를테면 석유 부국 나이지리아의 전 주지사가 사들인 벨그레이비어 저택, 블라디미르 푸틴의 옛 동료들이 소유한 웨스트민스터 저택을 찾아가는 식이었다. 벌로는 사전 모집한 관광객을 이끌고 국제적 규모로 자행되는 은밀한 돈세탁의 실체를 눈앞에서 확인시켜 주는 한편, 해외로부터의 자본 유입이 런던의 경제를 어떻게 왜곡시키는지 낱낱이 폭로하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머니랜드』는 ‘런던도둑정치관광단’의 전 세계 버전이다. 목표는 도둑 정치가들이 은닉한 돈의 자취를 좇는 것으로 동일하지만, 무대는 훨씬 광범위해졌다. 벌로의 취재는 도널트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직 선거대책위원장 폴 매너포트의 기소에서 시작된다. 폴 매너포트는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같은 부패한 지도자들을 고객으로 두고 미국 정부에 로비를 펴면서 수백만, 수천만 달러를 받아 미국 조세 당국과 은행을 속이다 들통이 났다. 벌로는 매너포트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부자와 권력자의 비밀을 숨겨 줌으로써 세계를 궁핍화하고 있는 시스템”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 시스템은 바로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머니랜드이다.

    역외 부동산, 역외 회사, 역외 은행 계좌, 역외 금융 거래…
    역외 비밀주의의 마법은 어떻게 가능한가

    “머니랜드는 무슨 가죽 의자에 앉아서 하얀 고양이를 쓰다듬는 악당 두목 한 명에게 조종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 거듭 강조하는 것은 머니랜드가 단순한 음모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벌로의 분석에 따르면 머니랜드는 하나의 시스템이며, 각국의 제도상 허점과 사법관할구역 간의 차이를 교묘하게 악용함으로써 나타난다. 이를테면 영국 본토보다 영국령 저지섬의 세율이 낮다는 점은 머니랜드를 육성하는 커다란 유인이 된다. 영국 본토에 있는 자산을 저지섬으로 옮김으로써 조세를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사법관할구역의 규제 및 제도는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어김없이 틈새가 존재한다. 세법상의 맹점, 조세 조약의 허점 등 그 틈새를 비집고 검은 돈은 법인세나 소득세가 낮은 곳, 본국의 금융 규제를 피할 수 있는 곳 등을 찾아 역외(域外, offshore)로 몰려든다.

    역외는 국외(foreign)와 다른 개념이다. 물리적으로는 사법관할구역 안(국내)에 현존하면서도 법적으로 사법관할구역 밖(국외)에서 경제적 실체가 존재할 경우를 일컫는 말로, 이 개념이 없으면 애초에 머니랜드도 존재할 수 없었다. 벌로의 말마따나 “사람들이 역내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도록 허락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바로 역외이다. 1960년대 런던의 금융가인 시티에서 ‘발명’된 유로달러화가 최초의 역외 거래인데, 미국 금융 당국의 규제가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힘입어 유로달러화는 덩치를 불려 나갈 수 있었다. 이 책은 규제 당국이 역외를 쉽사리 건드릴 수 없는 것은 “돈이 자유롭게 오가는 반면에 법률이 자유롭게 오가지 못하는” 불일치 때문이라고 역설한다.

    민주주의적 감시를 피한 자산 보호 산업의 제1원칙
    “자본을 몰래 배치해 최대한의 보호를 얻어 낼 것”

    전세계적 돈세탁 작전을 실행하는 ‘자산 보호 산업’은 어떻게 작동하고 있을까? 머니랜드를 굴러가게 하는 핵심 산업은 자산 ‘숨기기’로, 가장 흔하게 이용되는 방법이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령 회사를 통해 소유권을 흐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런던의 할리 스트리트에 명목상의 회사를 두고, 그 회사를 다시 리히텐슈타인, 맨섬, 미국 델라웨어주 케이맨제도, 라이베리아 등 역외 사법관할구역 소유로 등록하는 것이다. 이렇게 법인 구조물을 연쇄적으로 겹싸기한 뒤, 금융 비밀주의의 중심지로 정평이 난 스위스 은행의 비밀 계좌를 덧붙이면 자산의 기원과 그 소유권 모두를 숨기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그 밖에 신탁이라는 법적 구조물을 이용해 재산을 양도할 수도 있는데, 신탁에 맡긴 자산은 소유권과 수익권이 분리되어 운영되기 때문에 증여세나 상속세를 회피할 때 유용하다. 특히 신탁의 존속 기간이 무한대나 다름없는 미국 네바다주를 찾아가면, 오랜 세월 동안 한 푼의 증여세도 내지 않고 수익자로 설정된 후손이 자산의 이득을 취할 수 있다(네바다주에서는 무려 365년이나 신탁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회사나 자본이 아니라, 아예 ‘자기 자신’이나 ‘자녀’의 사법관할구역을 옮겨 가는 전략도 있다. 이를테면 세인트키츠네비스 같은 나라에서 시민권을 구입하거나 아프리카의 후진국에 거액의 돈을 주고 외교관 신분증을 발급받아, 이중국적으로 조세 회피를 하는 것이다. 자녀를 옮겨 가는 방법에는 ‘대리 출산’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수법까지 존재하는데, 실제로 중국 공산당의 최고위층 인사는 대리모 계약으로 일본 여성을 통해 아이를 출산한 뒤 자녀에게 일본 국적을 취득시켜 자산을 우회 상속했다. 저자는 점점 더 교묘해지는 조세 회피, 탈세, 돈세탁 수법을 일컬어 “과세 당국 대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진화론적 군비 경쟁”의 결과라고 역설한다. 저자는 전 세계적인 층위에서 머니랜드의 실상을 폭로하면서, 검은 돈의 흐름을 읽어 내는 틀을 제시한다.

    부유층의 더 큰 선(善)과 나머지 모두의 손해를 가져오는 시스템을 되묻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약탈의 잔치를 어떻게 멈출 것인가!

    머니랜드 구성원들은 자국의 경제를 잠식하며 부를 쌓고, 국경을 넘어 돈을 소비하러 다닌다. 우스베키스탄 대통령의 딸 굴나라 카리모바는 외국의 통신 회사들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아 ‘굴리’라는 브랜드를 런칭해 경영하는 한편, 팝가수이자 외교관으로 국제 무대에서 활동했다. 산유국인 적도기니 대통령의 아들 테오로린 오비앙은 석유를 팔아서 번 돈을 빼돌려 슈퍼카 수집에 심취하는 등 초호화 생활을 즐기고 있다. 아프리카의 2위 산유국 앙골라의 사례는 더욱 비극적이다. 국민의 3분의 2가 하루 2달러 미만의 금액으로 살아가고 있는 비참한 상황에서, 부통령 보르니투 드 소우자는 딸의 결혼식 드레스 비용으로 뉴욕의 웨딩숍에서 20만 달러(약 2억 4,000만 원)를 지출했다.

    하지만 벌로는 비난의 화살을 그들에게만 돌리지 않는다. 후진국의 도둑 정치가들이 자국에서 훔친 돈을 안전한 국가에 투자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선진국의 최상급 은행가, 변호사, 회계사, 홍보 전문가, 로비스트 등이 조력한 것도 큰 문제라는 것이다. 사상 최대의 자금 세탁 스캔들로 불리는 ‘단스케 스캔들’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다. 2007년부터 2015년까지 9년간, 2,000억 유로(약 273조원)에 달하는 러시아의 검은 돈이 세탁된 곳은 바로 덴마크의 최대 상업 은행인 단스케은행이었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올리가르히 즐로쳬프스키는 자신이 운영하는 가스 회사에 미국의 로비스트 헌터 바이든을 이사로 초빙해 5년간 월 5만 달러(약 6,000만원) 이상의 급여를 지급했다. 헌터 바이든은 당시 미국 부통령이자 조만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와 격돌할 민주당 대선 주자 조 바이든의 아들로, 즐로쳬프스키가 거물 정치인 아버지의 후광을 노린 것 아니냐는 윤리적 논란을 일으켰다. 머니랜드를 움직이는 부정 이득의 톱니바퀴를 멈춰 세우기 힘든 이유는, 이렇듯 서구의 조력자들이 부정 이득을 묵인하는 한편 그 톱니바퀴에 편승해 이익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머니랜드에는 막대한 대가가 따른다. 머니랜드의 촉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민주주의를 잠식한다. 머니랜드의 반대편은 어떠한가. 억만장자와 부패한 정치인들이 유능한 금융인과 법률인을 동원해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막대한 자산에 방패를 치고 다니는 사이, 서민인 우리들만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있지 않은가. 국경을 초월한 자산 보호 산업이 성행하는 현실에서 과세의 공평성은 무너지고, 역진 과세가 될 우려마저 있다. 『머니랜드』는 우리를 보호해야 마땅한 제도들에 대한 신뢰를 뒤집으며, 세계를 다시 바로 세울 방법을 논의할 것을 촉구한다.

    “그 (더러운) 돈이 우리가 서 있는 곳을 빨아들이면, 결국 땅이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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