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군, 진저우에 이어
동북의 창춘을 점령하다
[국공내전㊷] 랴오선 전역2 : 공산당, 창춘 수비장군 정동궈를 포용해
    2020년 07월 01일 10:3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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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산을 둘러싼 공방전

1848년 10월 7일 새벽, 동북 야전군 사령원 린비아오와 정치위원 뤄룽환, 참모장 류야러우는 기병의 호위 속에 진저우 서북쪽에 위치한 마오산(㡌山)에 올랐다. 그들은 그곳을 전방 관찰지휘소로 쓰기로 하였다. 린비아오가 산에서 진저우를 관찰하니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에는 하천이 흘렀다. 그들은 지형을 놓고 돌격방향을 골똘히 연구했다. 진저우성과 그 주변에 국군 15만명이 포진하고 있었고 공격하는 해방군은 25만명이었다. 대규모 격전이 벌어질 것은 불을 보듯 훤하였다. 그러나 린비아오는 진저우 공격보다 타산의 방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타산은 진저우와 진시 사이에 있는 100여호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다. 진저우에서는 30킬로미터, 진시에서는 5킬로미터 거리여서 대군이 몰려들기 좋은 조건이었다. 이 좁은 장소가 진저우 회전의 성패를 좌우하는 주 전장이 되었다. 구원 오는 국군이 타산을 점령하면 진저우를 수비하는 판한지에 휘하의 부대와 함께 공격하는 해방군을 협격할 수 있었다. 해방군이 타산을 방어해 내면 국군이 진저우 구원에 실패하는 셈이니 고립된 성은 함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랴오선 전역에서 가장 처참한 시산혈해의 대격전이 이곳에서 펼쳐졌다.

타산의 동쪽으로 진저우만(錦洲灣)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바이타이산(白台山)이 자리잡고 있다. 만과 산 사이의 폭은 12킬로미터이며 중간에 폭 8킬로미터의 개활지가 있었다. 이 좁은 곳에 국공의 병력이 각각 십만명 넘게 몰려들어 각축을 벌였다.

1948년 10월 10일, 국군 “동진병단” 3개군 9개 사단이 타산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39군 2개군은 15일에 도착하여 아직 참전하지 않았다. 먼저 군단장 췌한첸이 지휘하는 54군이, 그 뒤에 동진병단 사령관 호우징루가 지휘하는 7병단이 교대로 공격에 나섰다. 국군은 강력한 화력을 동원하여 해방군 진지를 두들겼다. 엄폐호 뚜껑은 박살나고 갱목이 산산이 흩어져 날아갔다. 철조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함포와 대포로 맹폭하자 해방군이 미리 구축한 진지는 흙더미로 변하였다. 국군은 소가 싸우는 것처럼 돌격하고 물러서기를 반복하였다. 수비하는 해방군을 철저히 소모한 뒤 진지를 점령할 태세였다. 국군은 희생자가 커지자 두 부대가 교대로 타산의 해방군 진지에 돌격하였다. 10월 10일, 국군은 열 번에 걸쳐 돌격을 거듭했으나 막대한 희생자만 남기고 물러났다.

10월 11일, 국군은 항공기와 함포로 돌격부대를 엄호하였다. 수천발을 포격한 뒤 밀집대형으로 잇따라 돌격했으나 여전히 주 진지를 점령하지 못하였다. 해방군의 기관총 사격에 희생자만 부지기수로 늘어날 뿐이었다. 국군의 양익 돌격부대가 마을로 진입하여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날은 국군이 진지 여러 곳을 점령하여 도로 빼앗으려는 해방군과 밀고 밀리는 접전을 펼쳤다. 국군은 계속 병력을 투입하여 타산을 지나는 철도선 부근에 교두보를 구축하였다.

10월 13일, 양군은 치열한 격전을 거듭하였다. 국군은 새벽 네시 반부터 잇따라 맹공을 펼쳤으나 해방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었다. 전투가 없었던 12일에 해방군은 부상자까지 동원하여 참호를 파고 철조망을 매설하는 등 방어공사를 벌였다. 해방군은 대전차호를 구축하여 국군의 탱크 공격을 좌절시켰다. 국군이 돌격하기에 해방군의 진지 정면이 너무 좁았다. 해방군은 넓이 1킬로미터의 정면에 중기관총 16정, 경기관총 49정, 그리고 수천문의 휴대용 신관과 박격포를 배치하여 국군의 육탄돌격에 맞섰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포화 속에서 돌격하는 국군과 방어하는 해방군 사이에 희생자가 급증했다. 돌격하는 국군쪽 희생자가 훨씬 많았다. 타산 공격을 맡은 62군단장 린웨이초우는 예비 사단까지 전투에 투입했으나 해방군의 육탄방어에 막혔다.

박스 안의 별표 지역이 타산. 후루다오와 진저우 사이에 있다.

해방군 진저우성 총공격을 개시하다.

10월 13일, 해방군이 타산에서 악전고투를 거듭하고 있을 때 동북 야전군 주력이 맡았던 진저우 외곽전투는 이미 끝이 났다. 수비부대가 섬멸당해 진저우 성이 해방군의 포위공격에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그날 늦은 밤, 참모장 류야러우는 전화로 진저우 공격부대에 통지했다. “공성 준비를 마무리하라. 내일 오전에 진저우를 총공격할 것이다.” 그때 장제스도 진저우 성이 매우 위태롭다는 것을 알았다. 장제스는 밤중에 호우징루를 급히 호출하여 전화로 명령했다. “새벽까지 타산을 떨어뜨려라. 그러면 정오쯤 까오차오(高橋)도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다. 해질녘까지 구원군이 진저우에 도착해야 한다.”

진지와 존망을 함께, 타산 방어전의 구호이다.

10월 14일 아침 6시, 장제스의 독려를 받은 호우징루는 부대를 지휘하여 타산의 해방군 진지에 맹렬한 돌격전을 펼쳤다. 쌍방은 이날 가장 참혹한 진지 쟁탈전을 벌였다. 동북 야전군 2병단 사령원 청즈화가 사령부에 보고했다. “전투가 격렬하고 부대에 사상자가 매우 많습니다.” 사령부는 청즈화에게 타산을 고수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진저우를 총공격하기 직전 타산의 전투가 가장 격렬했다. 타산의 어떤 진지는 주인이 아홉 번 바뀌었다. 공성전투가 끝나기 전 타산이 뚫리면 국군 “동진병단”이 진저우를 공격하는 해방군에 파도처럼 밀려들 판이었다. 타산에서 진저우까지 불과 한 시간, 동북 야전군 공성부대는 앞뒤로 적을 맞아 린비아오가 그토록 우려하던 협격을 당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랴오선 전역의 모든 계획이 어긋날 뿐 아니라 쓰핑전투의 악몽이 재현될 수 있었다.

그때 지휘소의 린비아오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탁자 위의 있는 지도를 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마을 타산을 주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과단성 있게 참모장인 류야러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류야러우는 전화기를 들지 않은 채 한참 동안 린비아오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린비아오가 말했다. “공격명령을 내리시오. 그리고 청즈화에게 전하시오. 우리는 타산을 지켜야 하오. 사상자 숫자에 관계치 말라 하시오.”

타산 점령에 실패한 국군 부대는 초조하게 전차부대의 참전을 기다렸다. 10월 14일 오전 10시, 공격군이 고대하던 전차부대가 마침내 진시(후루다오)에 상륙했다. 그때 타산을 수비하던 해방군의 후방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포성이 울렸다. 진저우성에 대한 총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1948년 10월 14일 10시, 류야러우는 총공격 명령을 하달했다. 둥북 야전군은 600문의 대포를 집중하여 진저우 성안 예정된 목표를 맹렬하게 포격했다. 포격이 끝나자 진저우 성안이 불바다가 되었다. 성벽 곳곳이 허물어져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해방군은 이미 성 아래 곳곳에 교통호를 파 성벽에 바짝 접근한 상태였다.

11시 30분, 공성부대들이 돌격하기 시작했다. 해방군은 곳곳에서 성의 제1방어선을 넘어 2방어선에 접근해 갔다. 국군은 공격부대에 여러 차례 돌격하며 해방군을 밀어내려 애를 썼다. 국군은 기관총 사격으로 해방군의 돌격을 저지했다. 공산당은 진저우 공성전에서 여러 명의 전투 영웅이 탄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 분대장이나 전사들로 이들은 홀로 수류탄이나 폭파통을 쥐고 보루를 폭파한 뒤 희생되었다. 어떤 사람은 홍기를 들고 무너진 성벽을 기어오르다 총탄에 맞아 부상당했으나 끝까지 기어올랐다. 그는 성벽 위에서 홍기를 휘두르며 “동지들, 돌격하라.”하고 외친 뒤 총격에 희생되었다. 이런 영웅들의 행적은 전쟁 중인 병사들을 고무하기 위해 전체 해방군에 전파되었다. 어쨌든 승세를 탄 공격군의 사기가 훨씬 높을 수밖에 없어 진저우성의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1948년 10월 15일 정오, 수비하던 국군 병력은 6개 연대 1만 5천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들은 4평방 킬로미터의 옛성 진지 안에 압축되어 최후의 저항을 계속했다. 이곳도 철조망과 보루, 엄폐호 등으로 방어공사가 되어 있었지만 노도처럼 밀려드는 해방군의 공세에 병력은 금방 소모되었다. 전선 지휘소에 있는 린비아오는 공성부대에 명령하였다. “해지기 전에 잔적을 반드시 섬멸하라.” 오후 2시에 옛성 진지에 대한 총공격이 개시되어 불과 15분만에 해방군은 남문쪽 성위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성안으로 해방군이 노도처럼 밀려들어 저항하는 국군을 작은 규모로 분할했다. 포위망을 좁히며 공격하는 공격부대에 국군 일부 병력이 돌파하여 성밖으로 탈출했으나 미리 배치해 둔 해방군에 모두 잡혔다.

진저우 포위를 보도한 공산당쪽 신문

진저우 전투 기록화

1948년 10월 15일 18시, 마침내 진저우성이 함락되었다. 31시간의 저항 끝에 국민당 수비군 은 모두 섬멸되었다. 동북 초비사령부 부총사령 겸 진저우 지휘소 주임 판한지에 중장과 제 6병단 사령원 루쥔첸 중장등 수많은 지휘관과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다. 판한지에는 함락되기 전날 대세가 이미 글렀다고 판단했다. 그는 한밤중에 부인과 병단 사령원 루쥔첸, 참모장 리루(李汝)와 함께 성을 나왔다. 그들은 다음날인 15일 진저우성 동남쪽 10킬로 지점인 천자툰(陳家屯)의 소로에서 해방군의 검문에 걸려 포로가 되었다. 진저우성 공방전에서 수비하던 국군 10만명은 모두 섬멸되었다.

그날 저녁 린비아오는 지휘소에서 판한지에와 루쥔첸을 접견했다. 린비아오는 판한지에에게 진저우 전투에 대한 감상을 물어보았다. 판한지에는 기가 꺾인 채 천천히 말했다. “진저우를 공격하다니 예상치 못한 일이오. 재능과 지략이 없으면 결심할 수 없는 일이오.”하고 탄식했다. 판한지에는 “진저우는 멜대와 같소. 한쪽에 동북을 메고 한쪽에는 화북을 메지요. 이제 진저우를 잃었으니 국군은 멜대의 균형을 잃었소.” “귀군의 포화가 예상보다 맹렬했소. 아군은 처음부터 압도당했소.”하고 말하였다.

린비아오는 루쥔첸에게 창춘을 수비하는 60군 군단장인 정쩌성(曾澤生)에게 전문을 보내라고 권하였다. 60군과 루쥔첸의 93군은 모두 윈난군에 속해 있어 두 사람 사이에 우의가 두터웠다. 루는 정쩌성에게 부대를 이끌고 기의하라는 전문을 기초했다. 루쥔첸이 정쩌성에게 기의하라는 전문을 기초했다는 설에는 다른 주장도 있다. 루쥔첸이 당시 장제스 정권에서 일하던 루한(盧漢)의 친척이어서 그에게 화가 미칠까봐 기의 권고를 한사코 마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한은 1949년말에 공산당에 귀순하였다. 루쥔첸은 운남성에서 유일하게 전범이 되어 전범 개조소에서 사상개조를 받았다. 그는 석방된 뒤 전국 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판한지에는 국민당 고위 지휘관 가운데 문무를 겸비했다는 평을 들었다. 항일전에서는 지략과 함께 용감히 싸워 ‘대담한 장군’이라는 세평을 들었다. 인민해방군 총사령인 주더가 중일전쟁 시절 태행산을 지키는 그에게 “태행산의 병풍”이라는 별명을 붙여 줄 정도였다. 그러나 장제스의 무능한 전쟁 지휘와 압도적인 열세 앞에서 무력하게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는 전범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1960년 특사로 풀려났다. 판한지에는 다음해인 1961년 베이징 교외에서 원예사로 일하다 그해 정치협상회의 문사위원으로 활동했다. 1964년에는 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의 자녀들은 미국에 살았는데 판한지에가 사망한 뒤 중국에 왔다. 자녀들은 부친의 유해를 타이완으로 가져가 안장했다고 한다.

호우징루는 진저우가 떨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곧바로 진시와 진시(후루다오)로 병력을 물렸다. 해방군이 진저우성을 깨뜨린 15일, 장제스는 비행기로 다시 선양에 왔다. 장제스는 비행기를 창춘에 보내어 정동궈(鄭洞國)에게 손수 쓴 명령서를 공중에서 투하하게 하였다. 부대를 이끌고 포위를 돌파, 남쪽으로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군율에 따라 엄중한 제재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동북 야전군 지휘부 좌로부터 류야러우 린비아오 뤄룽환

공산당 중앙은 진저우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크게 기뻐했다. 마오쩌둥의 대담한 구상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즉시 축하 전문을 기초하여 동북 야전군에 발송했다. “린비아오, 뤄룽환, 가오강, 천윈 등 모든 동지들, 그리고 동북 인민해방군 전체 동지들의 위대한 승리를 경축한다. 당신들은 이번에 적 10만명을 섬멸하고 진저우를 해방하는 위대한 승리를 하였다. 이번 승리는 당신들이 추계공세 때부터 만들어온 것이다. 앞으로 새로운 승리를 계속하리라 믿는다. 당신들은 계속 노력하여 동북의 장제스 비적군대를 모두 섬멸하기 바란다. 동북 인민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싸우자!” 마오쩌둥은 진저우 작전을 크게 칭찬하였다. 마오는 10월 19일 중앙군사위 명의의 전보를 보냈다.“부대의 정신이 좋다. 전술도 좋고 당신들의 지휘도 옳았다. 크게 칭찬하고 위로한다. 포상을 기다리기 바란다.”

정동궈 창춘과 운명을 함께 하다.

대군이 비참하게 패배하면 그 불행은 지위 여하를 가리지 않는다. 어떤 이는 장렬하게 싸우다 죽기도 하고 어떤 이는 부상을 입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살아남은 이들은 요행히 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주하거나 포로가 된다. 또는 투항하거나 귀순을 하기도 한다. 수많은 국군 지휘관들이 비참한 패배를 당했지만 또 한 명 비운의 지휘관이 있다. 정동궈(鄭洞國)는 국군의 항일명장이다. 그는 황푸군관학교 1기생으로 타이얼좡 전투를 비롯하여 쉬저우 회전, 쿤룬관 대첩등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항일전에 참전했다.

정동궈는 1943년 인도에 파병할 때 1군단장으로 가서 미군과 합동작전을 펼쳤다. 그는 인도와 버마 등에서 일본군과 싸워 여러 차례 승리하여 인도 주둔 중미 연합군 부사령관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1945년 귀국 뒤 충칭에서 크게 환대를 받았으며 장제스는 북버마 전투의 영웅인 그에게 청천백일 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중일전쟁이 끝난 뒤 국방부장인 허잉친과 함께 난징에 가서 일본 주둔군 사령관 오카무라로부터 항복을 받는 자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의 군인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정동궈 현대 중국에서 항일명장으로 존경받고 있다.

1946년 2월, 동북의 국민당 보안사령장관인 두위밍이 병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정동궈가 사령관 대리로 두위밍을 대신하였다. 정동궈는 베이닝(베이핑-선양) 철로를 따라 수십만 국군을 인솔하여 동북으로 밀고 나아갔다. 그 뒤 선양, 안산, 잉커우, 랴오양, 푸순 등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으며 두위밍이 돌아왔을 때는 일선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쓰핑을 점령할 때는 직접 전선에 나가 지휘하여 승리했다. 쓰핑의 승리는 동북의 전황에 결정적이었다. 마오쩌둥이 쓰핑을 “중국의 마드리드로 만들라”(스페인 내전에서 인민전선 정부가 마드리드에서 프랑코군에 결사적으로 저항했던 사건을 말한다

)며 사수를 명령했지만 린비아오는 주력을 보전하기 위해 과감히 후퇴명령을 내렸다. 이때 동북의 국공 군대는 쑹화장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으며 정동궈는 창춘에 지휘소를 차려놓고 국군을 지휘했다. 정동궈는 다시 진저우에 지휘소를 차려놓고 러허(熱河)를 공격했으며 두달간 격전 끝에 러허를 점령하여 공산군을 밀어냈다. 두위밍의 남만주 석권은 정동궈가 없이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1947년 7월 두위밍의 위병이 재발했다. 두위밍은 병을 치료하러 상하이로 가고 정동궈가 다시 사령관 대리를 맡았다. 그러다 천청이 동북에 와서 동북 행원 주임겸 보안사령관이 되자 정동궈는 부주임으로 내려앉았다. 천청이 연전전패를 거듭하여 4개월 동안 10만명을 잃게 되자 장제스가 직접 선양에 와서 군사회의를 소집하였다. 그 자리에서 웨이리황을 동북 초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정동궈와 판한지에, 랴오야오샹등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1948년 2월 동북 해방군이 잇따라 랴오양, 안산, 파쿠, 잉커우 등을 점령하고 3월 중순 쓰핑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웨이리황은 정동궈를 창춘에 보내어 국군 철수를 지휘하게 화였다. 정동궈는 사령관이 바뀌어도 동북에서 궂은 일만 도맡아 하였다. 국군이 창춘, 선양, 진저우 등 몇 개 거점으로 압축되었을 때 정동궈는 장제스에게 창춘을 과감히 포기하자고 건의했다. 국군 주력을 선양과 진저우 사이에 집중 배치하자는 안이었다. 그러면 수비와 공격을 모두 할 수 있고 세가 불리할 때 철수하기도 쉽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동북의 국공 간 형세로 보아 충분히 일리가 있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정동궈의 안을 장제스와 웨이리황 모두 반대하였다. 장제스는 지린성의 중심 도시인 창춘을 포기할 경우 국제적으로 불리한 정세가 된다고 생각하였고 창춘을 고수해야 해방군의 남진을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웨이리황도 창춘이 있어야 선양과 진저우에 대한 해방군의 압력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장제스는 정동궈를 지린성 주석 겸 1병단 사령관을 겸임하여 창춘을 고수하게 하였다. 웨이리황도 가장 믿음직한 정동궈가 최전방인 창춘을 수비하는데 이견이 있을 리 없었다. 1948년 3월 하순, 마침내 해방군이 창춘을 겹겹이 포위했다. 국군 주력은 선양과 그 서쪽에 배치되어 있어 창춘은 고립무원의 도시가 되었다. 누가 보아도 창춘은 희생양이 될 게 뻔했다. 그때 정동궈의 부하들이나 측근들이 모두 그에게 다른 길을 찾으라고 권했다. 다른 길이라면 창춘 수비사령관을 사직하던가, 병을 핑계대던가, 아니면 공산당에게 투항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충직한 그는 비행기를 타고 창춘으로 들어갔다. 그의 일생 중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 닥쳐온 것이다.

창춘에 있는 그의 휘하 병력은 10만여명이었다. 창춘 시민 50만명이 거주했는데 완전히 포위되어 연료나 식료품을 구할 길이 없었다. 당시 외부로 통하는 통로는 비행장이 유일했다. 그러나 항공기로 60만명이 먹을 보급품을 전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어서 시민은 물론 병사들까지 모두 굶게 되었다. 드라마에 보면 최고지휘관인 정동궈도 멀건 죽을 마시고 있다. 그것도 아직 마시지 못하고 있는 부관이나 경호병에게 양보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국민당 지휘관인 그를 그렇게 그리고 있는 것을 보면 정동궈의 인품이 꽤나 괜찮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땔감과 먹을 것이 없으니 민심은 흉흉하고 군대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5월 하순, 견디다 못한 정동궈는 일부 부대를 성밖으로 내보내 식량을 구해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밖에 대기하고 있던 해방군이 즉각 공격에 나서 많은 병력을 잃었다. 해방군은 내친 김에 비행장까지 점령해 버렸다. 창춘은 밀가루 한 포대 들어오지 않는 고립무원의 섬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정동궈는 완강하게 버텼다. 샤오칭광이 지휘하는 해방군 10만명이 창춘성을 맹공했으나 곧바로 격퇴했다. 그러자 해방군은 물샐틈없이 포위망을 조여 성안에 수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병사중에도 각기병 환자나 야맹증 환자가 나날이 늘었다.

1948년 9월 중순이 되자 동북 해방군은 랴오선 전투를 일으켰다. 정동궈는 해방군이 남하하여 진저우를 포위하자 포위망을 돌파할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휘하 2개 사단을 출병시켜 돌파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해방군 포위부대의 완강한 포위망을 뚫을 수 없었다. 10월 중순이 되자 해방군이 진저우를 점령했다. 동북 국민당 부대는 관내로 왕래할 수 있는 길목을 잃어 버렸다. 창춘, 선양의 수십만 대군은 독안에 든 쥐 꼴이 되어 버렸다. 해방군이 진저우를 점령할 때에 장제스는 여러 차례 정동궈에게 포위망을 돌파하여 선양 쪽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정동궈 휘하의 국군은 이미 굶주린 지 오래되어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었다. 10월 16일, 정동궈는 돌파를 결심하고 부하들을 불러 계획을 상의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계획했는데 결정적인 시각에 정쩌성이 기의를 선포했다. 1948년 10월 17일, 60군 군단장 정쩌성은 휘하 3개 사단 2만 6천명을 이끌고 해방군에 귀순했다. 그날 저녁에 해방군은 창춘을 방어하던 60군을 조용히 접수했다.

60군과 7군 두개 부대 가운데 하나가 상대방으로 넘어가자 창춘 함락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수비군의 부대 배치는 엉망이 되고 포위망 돌파 시도는 무산되었다. 정동궈는 돌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했다. 해방군이 정동궈에게 저항을 멈추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당과 나라를 위해 죽으려고 결심하였다. 정동궈는 특무연대를 지휘하여 중앙은행 청사를 사수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장제스에게 편지를 써 저신의 결심을 알리려 하였다. 그러나 부하들이 정동궈와 함께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1948년 10월 19일, 신7군 군단장 리홍이 군 사령부 및 소속 3개 사단을 이끌고 투항했다. 정동궈의 사령부는 여전히 창춘은행 건물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때 공산당 부주석인 저우언라이가 정동궈에게 편지를 보내어 귀순할 것을 권했다. “그대와 나는 황푸의 사생이다. 그대의 충직함과 항일전에서의 공을 잊지 않았다. 인민들의 품으로 돌아오라.” 마음이 움직인 정동궈는 사람을 보내 해방군과 교섭했다. 그는 “하루이틀 저항한 뒤에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발표해 달라.”고 요청했다. 해방군은 정의 요구를 수락했다. 1948년 10월 21일 4시, 정동궈가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부대와 함께 무기를 내려 놓았다. 이로써 7개월간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버티던 창춘이 해방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창춘 점령을 기뻐하는 해방군 모습

뒷이야기 : 정쩌성의 귀순, 저우언라이와 만난 정동궈

정쩌성이 귀순하게 된 것은 공격군 사령인 샤오징광의 역할이 컸다. 샤오징광은 정쩌성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당신이 부대를 이끌고 기의하는 것을 우리는 충심으로 환영한다. 오늘부터 우리는 한집안 사람들이다. 우리는 기의부대에 대하여 해방군과 똑같이 대우해 주겠다. 어떤 차별도 없고 편견도 없을 것이다.” 정쩌성은 “공산당이 우리 60군 4만 장병들을 구해주는 것에 감사한다. 앞으로 명령에 절대 복종하고 교육과 개조를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하였다. 샤오징광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걱정할 게 없다. 당신은 일본군과 싸웠고 전공도 있다. 앞으로 어떤 요구나 의견이 있으면 솔직하게 이야기해 달라. 한집안 식구끼리 손발을 맞추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혁명에 나서자.” 그러자 정쩌성이 “우리 부대는 당신들 개편에 따르겠다. 하지만 너무 흩어 놓지는 말아 달라. 사단 이상 간부들은 당신들이 알아서 안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정쩌성 휘하의 60군은 중국 인민해방군 50군으로 개편되었다. 정쩌성은 50군 사령이 되었으며 앞장서서 부대의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사상개조에 나섰다. 개조에 참여했던 공산당쪽 인사는 “병사들과 하급장교들은 쉽게 개조가 되었다. 그러나 구 군대 의식과 반공의식에 쩔어 있던 고급 장교와 지휘관들은 개조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토로하였다. 정쩌성은 훗날 한국전쟁에도 참전하였다. 정쩌성은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으로 있던 펑더화이에게 신임을 받았으며 귀국 후 마오쩌둥을 접견하기도 하였다.

정동궈는 공산당 수뇌부에서도 특별히 생각했던 모양이다. 1950년 그는 병 치료차 상하이로 가는 길에 베이징에 들렀다. 저우언라이가 그와 접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자리에 배석해 있던 샤오징광과 샤오화가 정동궈에게 나와서 일하라고 권하였다. 두 사람 모두 린비아오 휘하 동북 야전군 고급지휘관 출신의 장군들로 정동궈가 지휘하던 창춘성을 공격한 주역들이었다. 그때 샤오징광이 사령원, 샤오화가 정치위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동궈는 예전의 적대관계가 있는데 군에서 일하는 것은 관계가 어렵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해 6월 정동궈는 수리부 참사와 전국 정치협상회의 문사 전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54년에는 마오쩌둥이 직접 그에게 국방위원으로 일하라고 권하였다. 마오는 정동궈를 집으로 불러 대접하며 친절하게 권하였다.

정동궈는 여러 번 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일했으며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부주석으로 활동하였다. 정동궈는 1991년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임종할 때 그는 가족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군인이다. 생사를 가볍게 여긴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생활하라. 내 한평생에서 나라 일이나 집안 일에 대하여 여한은 없다. 그러나 조국 통일을 못보아 애석하다. 나라가 통일되어야 국민혁명이 철저하게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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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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