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흘러간 세월 남긴 것 없는 자들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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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9월 25일 01: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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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이석행 민주노총 전 사무총장이 뉴라이트 신노동운동연합(신노련)의 권용목 상임대표에게 보내는 글이다. 권용목 대표는 87년 전국을 뒤흔든 민주노조 운동의 실질적, 상징적 중심에 있던 사람으로 민주노총 초대 사무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전 총장은 23일 신노련의 공식 출범식을 지켜보면서 이 글은 써서 보내왔다. <편집자 주>

    나의 옛 친구 권용목!

    밤이 깊었는데도 잠이 오질 않습니다.
    TV를 통해 그리워하던 친구를 만났다는 반가움보다 뭐라 말 할 수 없는 짠한 마음이 몇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가슴 구석구석을 뒤 흔들고 있기 때문이오.

    부득이 글이라도 써야 할 것 같은 지금이기에 오래간 만에 옛 친구의 이름을 속으로 불러봅니다.

    "권용목…."

    80년 초 내가 외롭고 고독하게 겨우 지탱하며 활동하고 지내올 때, 87년 7월의 당신은 방어진의 커다란 파도가 되어 나에게 그리고 이 땅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벅찬 희망으로 다가왔지요.(필자는 전두환 독재 시절이던 80년대 초 진주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해, 탄압을 받으면서 노조활동을 해왔다. 편집자)

    나의 자부심이었던 친구, 권용목

    그 이후 나는 그대가 나와 함께하는 동지요, 친구라는 게 긍지이고 자부심이었지요. 현대중공업 동지들이 투쟁할 때면 전국의 동지들은 한숨에 자기 단위사업장의 산적한 현안을 제쳐놓고 울산으로 달려가 함께 싸웠던 기억이 바로 엊그제 같건만…

       
      ▲ 87년 울산 노동자투쟁  

    ‘만세대 전투’로 불리던 싸움 때, 자욱한 최루탄과 전경의 곤봉 세례, 피아간 돌멩이가 난무하여 전쟁터를 방불케 했던 울산, 그 아수라장을 주먹밥 머리에 이시고 이리 저리 뛰어 다니시며 노동자 아들딸들을 격려하시던 우리들의 어머님!(권용목씨의 모친. 편집자)

    주먹밥 한 덩어리 받아 손에 들고 최루탄 분말과 눈물에 말아 콧물 흘리며 먹으면서도 마냥 행복해 하던 우리 동지들! 카랑카랑 하신 목소리로 노동자 승리를 독려하시던 아버님(권처흥 권용목씨 부친. 편집자) 생각이 새삼 모락모락 나의 마음에 뭉게구름으로 피어 다가옵니다.

    그대가 현대자본의 하수인 제임스 리로부터 식칼테러(89년 1월. 회사 쪽의 사주를 받은 50여명이 현대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 등에 난입 노동자들에게 식칼을 휘두르는 등 폭력을 행사한 사건. 이 사건으로 권용목 등 23명이 병원에 입원했다. 제임스 리는 테러의 배후 조종자로, 회사 편에 서서 노조를 파괴하는 전문가였으며 이 사건으로 구속됐다. 편집자)를 당했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 이 땅 노동자 전체가 당한 테러로 규정하고 분연히 일어서서 싸웠던 노동자 학생들… 그때 88년 4월 2일로 기억되는 날, 나는 진주 경상대학교 칠암 캠퍼스에서 처음으로 노-학 연대 투쟁이라는 것을 했지요.

    노동해방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던지겠다던 그대

    한명의 노동자가 뇌진탕으로 의식불명이 됐고, 나흘 만에 겨우 깨어났지만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길지 않은 인생을 마감하는 죽음 앞에서 나는 가슴 터지는 통곡만 한없이 하였지요.

    지역에서 여러 명의 노동자가 심한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하였고, 치료비 마련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것이 엊그제 같았던 88년의 4월. 그리고 얼마 후 울산 태화강에서 전국 노동자들이 식칼테러 규탄대회를 했지요.

    그날 단상에서 오른팔은 깁스하여 목 끈으로 의지하고, 한쪽 발도 깁스한 채 목발 하나로 지탱한 채 권용목 그대는 단상에서 외쳤습니다. “노동자들이 해방되는 세상을 위해서라면 다리와 팔이 아니라 목숨까지 던질 수 있다고. 아니 노동자들에게 바치겠노라”고.

    함께 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을 감동케 했던 그날의 그대가 미치도록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는 밤입니다. 그리고 단상에서 마주한 나에게 부상당한 진주지역 동지들을 걱정하며 전국노동자들의 연대의 투혼에 해맑은 웃음으로 감사를 표하던 세심했던 그때 그대의 배려가 오늘밤 나의 잠을 다 빼앗아 간 듯 합니다.

    우리 사이에 흐르게 된 먼 강

    민주노총건설을 논의하면서 그대는 또 한번 동지들을 모아내는 역할을 했었지요. 분분했던 건설의 경로와 과정 그리고 시기, 기억하리라 생각합니다. 민주노총 건설에 제조업 노동자이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의제를 관철시키기 위해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현장을 누비던 그때가 회상됩니다. 어렵사리 민주노총을 건설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우리는 조수원 동지를 잃었지요.

    병역특례 노동자들의 살인적 학대의 사슬을 끊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졌던 조수원 동지의 싸늘한 시신을 부여안고 처절한 안타까움과 불타오르는 증오를 토해내며 함께 외쳤던 "수원아, 일어나라. 수원이를 살려내라."

    아무리 힘들어도 항상 온화한 웃음으로 형들도 아우들도 단결케 했던 우리들의 영원한 동생 수원이가 지금 더 보고 싶어지는 밤입니다. 오늘 내가 이렇게 지난 날의 몇 가지 그대와 함께했던 일들을 곱씹는 것은 먼저 우리 사이에 이렇게 먼 강이 흐르게 된 원인을 우선 나로부터 찾고자 함입니다.

    그대가 힘들어하고 고독해 할 때 함께 하지 못한 나이기에, 그대가 깊은 고민에 빠져 번민 할 때 옆에서 지켜주지 못한 나이기에, 지금 나는 무한한 책임감과 연민에 사로 잡혀 있다오.

    이 땅에서 해고노동자로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피 마름의 고통, 더욱이 한 두 해도 아닌 평생을 그렇게 해고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불가능한 참으로 참담한 상황일 것입니다.

    점점 먼 길만 찾아간 그대

    동병상련을 경험하고 있는 나이기에 이해하려 부단히 애를 써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그대가 노동운동을 뒤로 접고 정치에 입문했을 때 나는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대가 큰 그릇으로 자리매김 하기를.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함을 보면서 나 또한 적잖은 실망을 하였지요. 그렇지만 그곳에서 그대가 다시 당당히 서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점점 그대는 먼 길만 찾는 것 같았습니다. 정몽준 선거캠프에서 역할을 한다기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엔 그럴 리가 없다하며 믿을 수가 없었지요. 한걸음에 달려가 말려도 보고 싶었지요. 핑계라 하겠지만 그때 나는 ‘영어의 몸’으로 복역 중이어서 더욱 안타까웠다오.

    하지만 정치인으로 입문한 그대가 정치에서 성공하길 늘 바라던 차에 이번에는 그대가 ‘뉴라이트 신노동연합’이라는 노동조직을 건설하면서 노동계로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하였지요.

    요즈음 나는 동지들이 불러주면 교육이라 한답시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소일하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친구가 운영하는 소규모공장에서 어쭙잖은 손놀림으로나마 다섯 식구의 생존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소.

    그래도 이야기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어서

    집에 들어와 쑥쑥 커가는 세 명의 아이와 마누라를 보고 있노라면 가장으로서 책임감 때문에 더 이상 해고노동자로는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지요. 그러기에 나도 번민하면서 여러 가지 상상도 하고 꿈도 꿔보지만 그때마다 70년대부터 평생을 더한 시련도 견뎌내면서도, 조금도 내색하시지 않는 ‘70 민노회’(70년대 민주동운동동지회. 박정희 유신 시절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운동을 했던 노동자들의 모임으로 99년 출범. 남상헌 민주노동당 당의장(고려피혁), 최순영 민주노동당 의원(YH), 박순희(원풍), 이총각(동일), 민종덕(청계) 등이 참여. 편집자)선배님들을 생각하면서, 또 찾아뵈면서 그분들의 말씀을 명심보감으로 정신에 담아 타산지석으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 신노련 창립대회 소식을 알리는 화면과 지면을 통해 그대를 보았습니다. 모습은 예전 그대로 인 것 같은데 한마디한마디 토해내는 웅변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더군요. “세상은 변합니다. 고로 사람도 변해야 하는 것.”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권용목 대표! 이건 아닌 것 같군요. 언제 우리 노동자들이 자본을 적으로만 규정하여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단 말입니까? 아마 87년 이후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자본을 적으로 규정하고 타도의 대상만으로 삼았다면 솔직히 게임은 이미 끝이 났을 겁니다. 자본이 모조리 타도되어 망했든지 노동자들이 한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대한민국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굳이 일일이 그대가 쏟아낸 오늘의 웅변에 대해 반론하지 않겠습니다. 반론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거든요. 하지만 그대 뒤를 이어 민주노총 사무총장의 직책을 수행한 옛 동지로서 넘지 말아야할 ‘선’에 대하여 몇 가지 얘기를 하고 넘어가야 될 것 같습니다.

    이제 나이 오십, 마음이 급해지긴 하겠지만

    첫째, 더 이상 민주노총 조합원 동지들과 민주노총을 희망으로 생각하고 있는 수백만의 노동자들의 이름에 덧칠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 신노련을 노동운동이라 칭하지 말고 솔직하게 정치적 꿈을 가진 흘러간 활동가들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정치조직이라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23일 창립대회를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인사들 면면에서 그대가 누구와 어떤 지향으로 무엇을 도모 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답이 이미 나와 있기에 어떤 다른 이유도 대입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특정 정당의 정치적 전위조직에 불과하다고 확신하기에 더 이상 그럴듯한 포장으로 노동운동을 사칭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누구 말대로 세월이 흘러가기는 갔나 봅니다. 그러나 흘러간 세월만큼 우리는 그 무엇도 남겨 놓지 못했나 봅니다. 그리고 나이도 이제 오십 줄에 접어들고 있지요. 그러다보니 마음이 급해지기도 하네요.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소신과 지조는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중언부언 나의 맘과 생각을,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써 보았습니다. 자연인으로 만나 ‘쐬주’ 잔 한잔 기울이는 그날이 오기를 희망하면서 줄일까 합니다.

    다소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더라도 옛 동지의 우정을 진심으로 받아 주기를 소망해봅니다. 끓는 가슴 달래면서 표현하다 보니 찬물을 두어 주전자 비웠습니다. 늘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2006년 9월23일부터 24일 01:35까지
    민주노총 노동자 이석행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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