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간파 군인을 회상하며
    [한국전쟁 70주년 기고] 유동열 ①
        2020년 06월 25일 01: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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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 군부는 이 전쟁을 헤쳐나가면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반공 친미’성향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경비대 시절의 군은 극좌에서 극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인 조직체였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이 불안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던 조직을 사회의 거센 격량에 휩쓸리지 않고 반듯하게 ‘나라의 군대’로 만들려고 노력했던 이들은 없었던 것일까?

    지금부터 필자가 ‘중간파 군인’이라 부르는 어떤 사람의 옛날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Ⅰ. 대한제국 기병 참령의 고상한 생각

    1879년 평안북도 박천에서 태어난 유동열은 24살이던 1903년 11월 30일에 일본육사 기병과를 15기로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견습사관이 된 유동열은 후일 제2대 조선총독이 될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조슈벌)이 사단장이던 일본군 근위사단에 배속되었다. 1904년 2월 6일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동원령을 선포하면서 그가 복무하던 근위사단은 ‘구로키 다메모토’(黒木為楨, 사쓰마벌)이 이끄는 제1군에 배속되어 한국으로 출병하게 되었다.

    유동열은 견습기간을 마치고 3월 12일 대한제국 기병 참위(소위)로 정식 임관과 함께 ‘원수부 관전무관’이라는 영예를 안고 러일전쟁에 종군하게 된다. 그가 속한 일본군 제1군의 본대는 3월 14일부터 29일까지 평안남도 진남포 상륙을 마치고 평양에서 12사단을 합류시킨 후 평안남도 안주까지 계속 북상하였다. 평안북도 정주에 와서야 러시아군을 처음 만난 일본군은 곧 압록강 접경의 의주에 이르렀다. 포병으로 참전한 박두영의 회고에 따르면 유동열이 속한 기병부대가 첨병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러일전쟁의 일본군 진격로(출처- 다카네자와마치역사 통사편2). 제1군의 진격로는 박지원의 연행길과 청일전쟁의 일군 진격로와 닮았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구련성(九連城)에 진을 친 러시아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던 일본군은 마침내 주력부대가 5월 1일 새벽 포병의 강력한 화력지원에 힘입어 압록강을 돌파했고 그날 오후 청의 구련성에 입성했다. 구련성 점령은 5월 6일 창덕궁 주합루에서 일본이 ‘전첩(戰捷)축하회’를 성대하게 개최할 정도로 지상전에서 일본군이 얻은 귀중한 수확물(만주 진격의 교두보 확보)이었다. 1군이 5월 11일 봉황성(오골성)마저 점령하자 일본군은 요양(遼陽) 점령을 위한 재정비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한일 간에 관전무관들에 대한 국내 복귀가 논의됐다. 유동열은 요양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본국 귀환 명령을 받고 8월 12일 육군무관학교 학도대 구대장을 시작으로 국내에서의 군생활에 들어갔다.

    1904년 8월 21일 일본 내각회의에서는 ‘한국주차군확장안’을 의결하여 유동열의 직속상관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9월 4일 요양 점령을 마친 바로 다음 날에 사령관에 임명되어 10월 13일 부임하였다. 그는 오직 군인만이 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일본육군의 강경파 대장으로 3.1운동을 비롯한 각종 항일투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사람이다. 이미 제1차 군제개혁(1904년 9월 24일)으로 ‘광무개혁’의 핵심이던 황제 직속의 ‘원수부’가 폐지됨에 따라 군령권을 행사하게 된 군부는 군사고문인 ‘노즈 진부(野津鎭武)‘의 영향력 아래 친일화가 가속화되고 있었다. 제2차 군제개혁(1905년 2월 22일)으로 한성의 친위대(親衛隊)가 해체되고 지방의 진위대(鎭衛隊)는 18개 대대에서 8개 대대 규모로 대폭 축소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유동열은 이갑을 비롯한 동기생들이 결성한 비밀모임인 ‘효충회(忠會충을 받든다)’에 참여하여 군부 내 배일세력의 입지 확장을 모색했다. 이 모임에는 이동휘(사관양성소1기)와 노백린(일본육사11기) 등의 무관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이광수의 미완성 작품인 ‘무명씨전’은 주인공 A(이갑 추정)을 중심으로 한 바로 이들 효충회 회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동열 전 미군정청 통위부장 (1946년)
    일본의 통감부가 작성한 문서에는 영리하며 지혜(간지 奸智)가 많다고 적혀 있다.
    기병장교로 말을 타고 한성 시내를 돌아다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1907년 7월 3일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일본이 고종에게 양위를 압박하자 시중에는 ‘어가동도(御駕東渡 황제가 일본에 잡혀간다)’는 소문이 돌며 정국이 요동쳤다. 효충회는 무력을 동원해 고종을 보호하고 친일파 대신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의 발빠른 대응으로 실행에 이르지 못했다. 시위대(侍衛隊) 제1연대 3대대와 징상평양대(徵上-황제 소집)의 산발적인 저항 속에 7월 20일 고종이 양위식을 가졌다. 다음날인 21일 정령(대령) 어담, 참령(소령) 이갑과 정위(대위) 임재덕이 전격적으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8월 1일의 군대 해산에 반대하는 강화군민봉기의 배후로 13일에는 이동휘 전 참령이 체포되었다. 곽태종은 이 당시를 “결사대 60명을 조직 일군과 싸우겠다고 상경까지 했다가 유동열 이갑 선생들의 만류로 해산했다”고 회고했다. ‘곽림대’의 ‘안도산’에는 안창호가 역량 부족을 이유로 이들의 거사를 적극 만류한 것으로 나온다.

    한편으로 일본은 러일전쟁에 참전한 일본육사 출신 장교들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으로 대하기도 했다. 1897년 3월에 임관한 이동휘가 6년 2개월만에 참령으로 진급한 반면 1904년 3월에 임관한 유동열이 군대의 규모가 축소되는 상황 속에서도 불과 2년 4개월만에 참령에 진급한 것은 일본육사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들은 1904년의 군제개혁으로 일본군 장교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왔다.

    유동열은 일본으로부터 러일전쟁 참전의 공으로 훈6등 단광욱일장(單光旭日章)과 상금 150원을 받았고 군대 해산 직후에는 훈5등의 쌍광욱일장(雙光旭日章)과 상금 350원을 받았다. 그는 백여 년 후의 후손들이 만들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릴 팔자였다. 그러나 유동열과 이동휘, 노백린, 이갑은 현실에 순응하길 거부했다.

    유동열은 공개단체인 서우학회(1906년)와 서북학회(1908년) 활동을 열심히 하고 앞으로 모든 항일조직의 어머니가 될 비밀결사 신민회(1907년)에 가담했다. 1909년 3월의 ‘경성(京城) 정계의 현 정세’라는 일본의 정보보고서에는 서북학회가 현 정부의 전복을 꾀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허헌의 회상에도 “이갑씨가 유동열이와 짝을 지어 정변을 일으켜 차기 정권을 자기들 2,30대 청년 정객들 손에 웅켜쥐려고 밤낮 획책 분주하고 있었다…….(이완용)내각을 쫒아내고 후계 내각을 조직하려 들었으나….”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와 동지들은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상황은 이미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는 그에게 마음을 고쳐먹으라는 협박을,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일본에 잠시 가 있으라는 회유를 하고 있을 만큼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살기 위해 잠시 일본에 머물던 유동열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던 1909년 8월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다. 오랫동안 고민해왔을 ‘고상한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그 ‘고상한 생각’이란 신민회원 이승훈이 한 말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이미 첫째 아들이 일본에 유학중인 상황이었는데도 그는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버렸다.

    Ⅱ. ‘붉은 파’의 군사부장

    유동열은 북경과 청도, 길림성 밀산현을 중심으로 여러 활동을 하였으나 군자금 확보가 여의치 않았다. 직접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1910년 10~11월경 국내에 들어왔다가 일경에 체포되었고 그후 1913년 3월 ‘105인 사건’ 재판에서 무죄판결로 풀려난 다음에는 완전히 고국을 떠났다. 이때 유동열은 ‘독립군 양성기지’로 몽골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만주와 연해주는 일본으로부터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1913년말 길림성 목릉현에서 열린 신민회 회합에서 몽골에 군사학교를 설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1914년 가을 그는 울란바토르에 도착하여 군사학교 설립에 들어갔으나 약속된 설립자금이 오지 않았다. 동행한 김규식과 이태준은 일단 몽골에 잔류했지만 유동열은 북경으로 되돌아왔다. 몽골로 오기 전 성낙형과 논의하던 비밀조직 결성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1914년 8월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일본과 적이 된 독일과 연대하고 중국과 연합할 목적으로 1915년 3월 신한혁명당을 결성하였다. 교통부장인 유동열은 만주 봉천의 거점에서 우호세력을 조직하고 성낙형은 고종의 전권을 위임받아 한중밀약을 체결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했으나 7월말 성낙형이 체포됨에 따라 계획은 실패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2월혁명이 일어났다. 일본의 압력으로 임시정부는 4월 이동휘를 구속했다. 한인 사회에서 이동휘를 석방하라는 목소리가 커지던 191710 러시아에서 다시 혁명이 일어난 후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지원으로 11월말 이동휘가 풀려났다. 이동휘의 석방은 원동지역에서도 볼셰비키가 권력의 중심에 가까이 다가섰다는 것을 의미했다. 12월 13일 볼셰비키 지도자 알렉산드르 크라스노쇼코프가 ‘3차 원동지역 노동자병사소비에트 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데 이어 1918년 1월 5일 ‘원동 인민위원 소비에트(이하 원동 소비에트)’ 의장에도 선출됨으로써 볼셰비키가 이 지역의 중앙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바이칼호 동쪽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원동지역은 분리주의 성향이 강한데다 주민의 대다수가 농민층으로 원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조직이 매우 취약한 곳이었다. 따라서 10월 혁명 이후에도 각 지역에 존재했던 반볼셰비키 성향의 ‘젬스트보(마을자치회)’의 힘은 여전히 강했다. 국제정세도 원동 소비에트 정부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일본이 블라디보스톡에 해군함대와 육전대를 파견해 견제에 들어갔고 영국과 미국도 이에 합세했다. ‘원동 소비에트’의 지지기반 확대가 절실한 가운데 한인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공간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크라스노쇼코프(1880-1937) 멘셰비키의 존경을 받을 만큼 정치적으로 유연했던 원동의 볼셰비키 지도자로 레닌의 지지를 받았으나 이르쿠츠크 ‘시베리아 볼셰비키들’의 강한 견제를 받았다.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김애림(김알렉산드라)은 러시아 한인2세로 1914년부터 우랄산맥 서쪽 페름지방의 벌목장에서 통역으로 일하며 가난한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애써온 노동운동가로 한인과 중국인 등 소수민족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지도자였다. (‘자유시사변’에서 체포된 독립군들이 ‘벌목장 노역’이라는 형벌을 받았던 것을 곱씹어보면 그녀가 얼마나 열악한 곳에서 활동했는지 알 수 있다.) ‘원동 소비에트’ 외무의원과 하바롭스크시당 서기의 중책을 맡은 김애림은 반혁명세력과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러시아혁명을 지켜내야 하는 볼셰비키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던 한인혁명가들 사이의 소통과 협력의 역할을 자임했다.

    김애림은 볼셰비키당 예카테린부르크(Yakaterinburg)위원회 소속으로 페름(Perm)에서 활동했으며 2월혁명 후 조직의 결정으로 7월에 옴스크(Omsk)를 거쳐 연해주로 돌아와 10월혁명에 참여하였다. 뒤에서 후술하겠지만 지도상의 첼랴빈스크(Chelyabinsk)에서 체코군이 봉기하면서 러시아는 내전에 휘말리게 된다. 앞서 ‘크라스노쇼코프’에서 설명했듯이 시베리아의 중심도시인 이루쿠츠크(Irkutsk)의 볼셰비키들은 하바롭스크(Khabarovsk)의 볼셰비키들과는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였다.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가들은 1918년 1월초 크라스노쇼코프를 만난 자리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았고 ‘원동 소비에트’ 의장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김애림의 후원으로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가들을 소집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1918년 2월 북경에 있던 유동열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하바롭스크에 집결했다. ‘한인정치망명자협의회’라고 명명된 이 회합에는 한글로 번역된 공산당선언과 볼셰비키의 강령과 규약 등을 담은 자료들이 배포되었다.

    참석 인사들은 무장투쟁조직 건설(안)에 대해서는 지지했으나 러시아혁명과 볼셰비키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좌우로 나눠졌다. 이동휘 등은 “볼셰비키주의에 찬동하여 고려혁명을 그 길로 촉진시키자”는 주장을 하였고 이동녕 등은 독립운동에만 전념할 것을 요구했다. 유동열은 이동휘의 발언을 지지했다. 그는 고국을 떠난 자신의 삶을 회고했다. 망명지인 중국과 몽골에서 추진했던 독립군 양성사업을 돌아보며 마지막에 가서는 외부세력에게 배신만 당한 자신의 씁쓸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유동열은 소비에트정부와 연대하는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이니 조선혁명정당을 만들어 독립투쟁을 이어나가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1918년 4월 28일 이동휘를 지지하는 이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을 창당하였다. 원래 김애림은 당의 명칭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당명을 준용해서 ‘한인사회민주노동당다수파’로 제안했다. 이에 김립이 한인은 다수파와 소수파로 나눠진 일이 없기 때문에 다수파(볼셰비키)란 말은 불필요하다는 의견을 냈고 유동열은 노동당은 농민의 지지를 받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토론 끝에 당명을 ‘한인사회당’으로 결정하였다. 당강령은 볼셰비키당의 정강에 근거해서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기관지 ‘자유종’도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김애림이 아주 중요한 문제제기를 했는데 그녀는 자신이 볼셰비키 책임자이기 때문에 한인사회당의 직책을 맡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고려혁명은 자신과 같은 러시아 국적자가 아니라 한인이 주도해야 한다는 뜻이었다(후일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태도와는 매우 다르다). 당은 이동휘, 유동열, 김립 등의 독립운동가들, 한인볼셰비키인 김애림과 옴스크에서 온 우랄노동자동맹 출신 한인들, 그리고 일부 러시아 한인2세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국적자들인 한인사회 지배층들과는 긴장관계가 조성되었다. ‘원호’라고 불린 한인 지배층들은 2월혁명 이후 임시정부의 권력기반인 ‘젬스트보’와 ‘사회공안위원회’에 많이 진출해 있었고 제헌의회선거에서 사회혁명당을 지지했다. 시베리아 및 원동지역의 분리주의 성향에 영향을 받아 ‘한인자치’를 추진하던 이들은 반대로 중앙집권을 추구하고 ‘쿨락(부농 Kulak)’에 적대적인 소비에트정부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반면 한인지배층들에게 극심한 차별을 받던 한인(여호, 러시아 미귀화자)들은 한인사회당의 지지기반이 되었다.

    유동열은 한인사회당 군사부장과 군사학교장 그리고 기관지 ‘자유종’의 편집위원(한문번역)을 맡았다. 군사부의 신설은 한인사회당이 항일무장투쟁을 통한 조국독립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유동열이 훈련교범인 일본육군의 ‘보병조전(步兵操典)’을 열심히 번역했고 한인사회당이 ‘하바롭스크’에 군사학교를 설치했다는 두 가지 기록을 놓고 볼 때 군사부의 최우선과제는 ‘간부 육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교관은 중국의 무관학교 졸업생과 중국군 복무자들을 우선적으로 초빙하려 했고 장기적으로는 남만주(서간도)지역 독립군 양성소의 교관들과 생도들을 모두 흡수해 ‘한인사회당 부설 군사학교’를 명실상부한 독립군 간부양성기지로 키우려 했다.

    군사부는 6월말까지 100여 명의 병력을 확보했는데 이들이 바로 일제강점 이후 처음으로 조직된 독립군부대인 ‘한인사회당 적위군’이다. 볼셰비키적군의 조직체계를 따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부대는 애초에 ‘적위군’보다는 ‘독립군’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군사부에 민족주의자들이 합류하는 것은 이미 ‘한인정치망명자협의회’에서 합의된 사항이었다. 서간도에서 무관학교 졸업생들이 계속해서 합류하고 있었고 한인사회당에 우호적인 홍범도부대의 합류가 기대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원동의 적군부대 중에는 중국인, 세르비아인, 헝가리인들의 각 민족별 부대도 있었다.

    Ⅲ. 일제강점기 최초의 독립전쟁

    5월 14일 유럽러시아(우랄 근처)와 시베리아의 접경지역에 위치한 ‘첼랴빈스크에서 브레스트조약에 따라 석방된 체코슬로바키아군 포로와 헝가리군 포로 간의 충돌이 있었다. 이 여파로 체코군들이 도시무기고를 장악하고 볼셰비키군을 무장해제했다. 이들은 열차를 타고 동쪽인 시베리아로 진출 5월 26일에는 일부가 ‘이르쿠츠크(Irkutsk)’까지 도착했다. ‘체코군 봉기’는 러시아내전의 시발점이 되어 백군의 봉기와 제국주의 열강의 무력간섭으로 이어졌다.

    6월 5일 ‘원동 소비에트’는 전시상황을 선포하고 14일 ’원동 적군 사령부’를 창설하였다. 그러나 29일에는 체코군의 봉기와 이에 편승한 일본군의 지원에 의해 ‘블라디보스톡’의 소비에트권력이 붕괴했고 7월초에는 백군이 ‘우수리스크’까지 진출했다. 모스크바 레닌정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원동 소비에트’는 체코군만 막을 수 있다면 여전히 승산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우수리카자크’의 대장인 ‘칼미코프’가 이끄는 백군은 우수리강을 따라 ‘하바롭스크’를 향해 북상하며 세를 넓혔다. 7월 11일에는 또 다른 백군이 ‘시베리아 중앙집행위원회’의 수도인 ‘이르쿠츠크’를 함락함으로써 ‘시베리아 볼셰비키’와의 연대도 힘들어졌다. ‘원동 적군 사령부’는 13일 전시동원령 선포를, ‘원동 소비에트’는 ‘철의 규율을 강조하며 항전의지를 불태웠다. 7월 15일부터는 ‘우수리스크’의 북쪽 요충지인 ‘스파스크’에서 적군과 ‘칼미코프백군’과의 대치가 이어졌다.

    시베리아 출병 일본군의 진격로 (검은 표시) [출처- 박환 독립운동가의 길을 가다 도서출판 선인]

    8월 2일 일본이 출병선언을 하고 12일 블라디보스톡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뒤를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도 군대를 보냈다. 일본군은 병력만 7만명이 넘었고 사령관 ‘오타니 기쿠조 (大谷喜久藏)’가 미국을 제외한 나라의 작전권을 행사했다. 한인사회당 지도부 간에는 의견이 엇갈렸다. ‘지금 상황에서 전쟁에 참가하는 것은 일본만이 아니라 연합군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는 한인사회당의 정치방침(항일)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볼셰비키의 방침대로 병력을 빨리 확충해서 전투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견이 간부들의 지지를 받았다. 한인사회당은 간부들을 각 지역으로 보내 ‘적위군’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8월 24일 일본군 제12사단이 중국과의 국경지대인 ‘포그라니치니’ 부근에서의 전투를 기점으로 우수리철도 주요 연선의 거점을 확보하면서 북진하기 시작했다. 내전 당시에는 ‘그로데꼬보’로 불린 ‘포그라니치니’는 중국의 관문인 ‘쑤이펀허(수분하 綏芬河)’와 바로 연결되는 국경관문으로 독립군에게는 두 지역이 한 동네나 다름없었다. 이곳은 독립운동가들이 이쪽 지역에서 서로 국경을 넘을 때 가장 많이 애용하는 이동로이기도 했다. ‘포그라니치니’에 일본군이 들어서자 한인사회당은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남만주(서간도) 독립군들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지도상에서 보이듯 포그라니치니는 여전히 러시아의 전략요충지이다.(출처- 한겨레신문)

    ‘원동 적군 사령부’의 지휘 아래 모든 민족부대들이 전선에 집결했다. 전선은 이제 ‘달레넨첸스크(이만)’로 확대되었다. 조상들은 적군을 ‘붉은 파’로 백군을 ‘흰 파’로 불렀다. 이제 ‘붉은 파’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앞으로 ‘러시아내전’에서 여러 번의 격전이 펼쳐질 최전선 ‘이만’에서의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 유동열과 전일이 병사들을 지휘했다.

    ‘한인사회당 적위군’ 병사들은 볼셰비키 적군 장교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나타나자 대오에서 뛰쳐나가 적을 향해 돌진하였고 백병전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남만주(서간도)에서 온 병사들은 후퇴명령이 하달됐음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일본군을 죽이겠다’며 전선을 이탈하지 않았다고 한다. ‘바젬스키(Vyazemskiy)’에서 전선이 재구축됐다. 그다음에는 하바롭스크 바로 남쪽의 ‘크라스나야 레츠카 (Krasnaya Rechka)’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한인사회당 적위군’은 이들 전투에서 너무 많은 손실을 보았다. 병사들의 지나친 전투의지가 오히려 피해를 키웠다. 병사들 하나하나의 사연을 알고 있는 지휘관들은 이들이 일본군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고 냉정을 찾게 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

    밤새 ‘크라스나야 레츠카’에서 대포와 함성소리가 들렸다. 많은 적위군들이 ‘하바롭스크역’에서 기차를 타고 후퇴하고 있었다. 한인사회당의 당원 모두가 이미 순차적으로 전선에 투입되며 최선을 다했으나 이제 하바롭스크의 함락은 기정사실이었다. 독립군들이 ‘조국독립의 방아쇠’라고 생각했던 연해주마저 일본군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대오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불과 10여 명이었다. 이제 ‘한인사회당 적위군’은 전투능력을 상실한 것이었다. 유동열은 허탈했다. 나라가 망한 후 여러 번의 실패를 거쳐 천신만고 끝에 만든 독립군부대가 몇 달만에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9월 4일 하바롭스크가 함락됐다. (계속)

    사진은 전일(全 一, 1893-1938년)의 외손녀 ‘신 이스크라’

    ‘전일’은 한인사회당 최고의 혁명가였다. 선전부원 ‘전일’은 1918년 8월 러시아내전에서 ‘한인사회당 적위군’을 지휘하였다. 하바롭스크 함락 후 ‘전일’은 블라디보스톡에서 활동 중이던 1920년 3월 29일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이후 ‘전일’은 장기간의 투옥과 석방을 반복하며 1934년까지 인생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다. 1934년 9월 석방된 ‘전일’은 러시아로 망명했으나 ‘스탈린 대숙청’ 시기인 1938년 5월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하바롭스크에서 총살됐다. 이것이 ‘전일’에 대한 대한민국의 공식기록이다. 한편 중국에서 기억하는 ‘전일’은 1932년 만주 연길현과 화룡현 일대에서 춘황(春荒, 보릿고개)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끌려간 후 1938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으며 그의 가족 모두 항일투쟁과정에서 희생됐다. 역사학자들이 이렇게 서로 다른 ‘전일’의 모습을 하나로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필자소개
    국방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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