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랴오선 전역-1'
    공산당, 전투를 일으키다
    [국공내전 ㊶] 마오쩌둥, 린비아오에게 진저우 공격을 재촉하다
        2020년 06월 24일 08: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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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원과 산둥, 그리고 서북과 화북에서 승리를 거듭하자 해방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시바이포의 마오쩌둥은 밤잠을 잊은 채 정치공세와 군사공세 방침을 짜는 데 고심했다. 산둥에서 쉬스유가 지난을 공격하는 등 전황이 계속 유리해지자 마오쩌둥은 마침내 동북에서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공산당은 이미 1948년 9월에 정치국 회의를 통해 동북에서의 전략적 결전을 결의한바 있었다.

    마오쩌둥의 구상은 요서지방에서 결전하여 동북에 주둔한 국군의 퇴로를 끊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이 방안을 “문을 닫아걸고 개를 때리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마오쩌둥의 발상은 언제나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장정 때 마오쩌둥은 쭌이 회의에서 주도권을 쥐자마자 구이저우에서 츠수이(赤水)를 네 번 건너는 작전을 실행하였다. 국군의 의표를 찔러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그때 홍군은 구이저우와 윈난을 휩쓸고 다니며 구이양(구이저우성의 성도)까지 위협하여 장제스를 혼비백산하게 하였던 것이다.

    사도적수(四渡赤水: “츠수이를 네 번 건넌다.”는 뜻)라고 부르는 이 신출귀몰한 용병으로 홍군은 일방적인 패주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상당히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선 지휘관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핵심 지휘관이던 린비아오까지 반발하게 되었다. 린비아오는 그때 “마오쩌둥의 군사지휘권을 펑더화이에게 넘기자.”는 주장을 하다 마오에게 혼쭐이 난 일이 있었다.

    1947년 내전에서 일방적으로 밀릴 무렵 마오쩌둥은 류보청과 덩샤오핑에게 따베산 진격을 명령하여 장제스를 심리적 공황에 빠뜨렸다. 류덩의 대군은 적지 한복판으로 진격하느라 큰 강을 건너고 산을 넘느라 죽을 고생을 하였다. 진로를 차단하는 국민당군과 수없는 전투를 치르며 병사 태반을 잃고 따베산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 결과 국군의 중원 배치를 흔들었으며 국방부장인 바이충시와 30만 대군을 창장 유역에 묶어두는 전략적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마오쩌둥의 동북 전투 구상은 요서 지방의 요충지 진저우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진저우는 동북과 허베이 등 화북지방을 연결하는 동북의 목구멍과 같은 곳이었다. 진저우에는 선양과 창춘으로 보급물자를 보내는 공군기지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진저우를 점령하면 국군의 육상 후퇴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요서 회랑의 후퇴로를 틀어막으면 동북의 50만 국군은 ‘독안의 쥐’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린비아오의 판단은 달랐다. 창춘과 선양을 방치하고 적의 근거지에서 가까운 요서지역을 공격하는 것은 모험이었다. 장거리 원정을 하면 보급선이 길어진다. 거기에 작전 의도가 쉽게 드러나 속전속결을 하기도 어려워진다. 화북에 있는 푸쭤이 휘하의 국군과 선양에 있는 웨이리황과 랴오야오샹 국군의 협격에 걸릴 위험성도 있었다.

    동북 해방군 사령 린비아오

    린비아오의 성격은 다른 지휘관들과 달랐다. 그는 마오쩌둥과 다르게 신중하고 과묵한 성격이었으며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린비아오는 일년 전 쓰핑전투에서 마오의 사수명령을 어기고 전략적 후퇴를 결행한 일이 있었다. 애써 선점했던 동북의 근거지를 모두 내주고 일거에 쑹화장 너머 하얼빈까지 죽 밀려 버렸다. 생각하기에 따라 엄청난 후퇴이자 전략적 패배였지만 린비아오가 옳았다. 그는 동북 민주연군의 주력을 보존했을 뿐 아니라 만주 곳곳에 근거지를 건설하여 일년만에 권토중래했던 것이다.

    그는 쓰핑 철수 과정에서 ‘후퇴장군’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마오쩌둥으로부터 여러번 심한 질책과 잔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북은 마오쩌둥의 가장 큰 본전이었다. 병력과 장비는 충실하였고 공업지역이라 물자도 풍부했다. 근거지의 넓이나 안정성 등을 고려할 때 동북에 비견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린비아오의 창춘 공격 방침은 군사가로서의 상식에 따른 것이었으며 신중한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마오쩌둥의 진저우 공격 구상에 공산당 지휘관들까지 반발할 정도였으니 국군 지휘부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국군 지휘부 중 해방군의 진저우 공격을 예상한 이는 없었다.

    마오쩌둥은 이미 2월에 진저우를 중심으로 한 요서지역 공격에 대한 구상을 밝혔다. 1948년 2월 7일, 그는 린비아오에게 전보를 보내어 대군을 남하시켜 베이닝 철도(베이핑-하얼빈)를 공격하여 차단하라고 요구했다. 마오는 “아군의 전략적 이익으로 보아 장졔스군을 둥북에 가두고 각개섬멸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방침을 제기했다. 그 다음 단계로 동북 야전군이 남하하여 베이닝 선에서 작전을 하라고 요구했다. 마오쩌둥의 주장은 진저우를 먼저 공격하라는 것이 분명했지만 린비아오는 부대가 후방에서 남하할 때 겨우 편도의 차량 연료만 가지고 있음을 생각했다. 후방 운수선이 너무 길어지고 화북의 푸쭤이 집단군이 관내(관내라 함은 산하이관 안쪽을 일컫는다)에서 북상할 것을 걱정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먼저 해방군 보급기지에서 가장 가까운 창춘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마오쩌둥의 승인을 얻었다.

    5월 하순 린비아오는 2개 종대로 창춘을 공격해 보았다. 하지만 창춘을 점령하는 것이 생각했던 것처럼 만만치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정동궈가 지휘하는 국군의 저항이 생각보다 강했던 것이다. 린비아오는 창춘을 장기간 포위하여 고사시키기로 하였다. 식량과 물자의 공급을 철저히 차단하면 창춘의 국군은 제풀에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면 난징의 장제스가 선양의 국군을 움직여 창춘을 구원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웨이리황은 장제스가 거듭 명령을 하여도 선양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구상대로 되지 않자 린비아오의 생각도 변하였다.

    7월, 린비아오는 둥북국 요원들과 토론 끝에 남하하여 작전할 것을 결심했다. 그는 즉시 마오쩌둥과 중공 중앙에 전문으로 보고했다. 비로소 린비아오와 마오쩌둥의 작전 의도가 일치하게 된 것이다. 마오쩌둥은 7월 22일 회신 전문을 통해 동의하고 분명하게 지적했다. “먼저 진저우, 탕산(唐山) 작전을 고려해야 한다.” 마오쩌둥의 전문을 받은 뒤에도 린비아오는 여전히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린비아오는 여전히 화북의 푸쭤이 집단군이 북상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푸쭤이 집단군은 50만명에 이르렀으며 장제스가 병력이동을 단행하면 60만명으로 증가할 위험도 있었다.

    마오쩌둥의 전문을 받은 7월 22일, 린비아오는 중앙군사위원회의 마오쩌둥에게 다시 전문을 보냈다. “화북의 아군으로 하여금 따퉁(大同)(따퉁은 산시성에 있는 도시로 산시, 허베이, 내몽골 접경지역에 있다)을 포위 공격하게 해 주십시오. 푸쭤이가 따퉁에 구원군을 보내면 그때 진저우 공격에 나서겠습니다.” 푸쭤이 집단군이 따퉁 지원에 나서면 진저우에 구원병을 보낼 여력이 없을 것으로 계산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즉시 반응했다. 7월 23일 화북 야전군 3병단 사령인 양청우에게 쑤이위안(綏遠)성의 구이쑤이(歸綏 현재 내몽골 성도인 후허하오터의 옛이름)와 바오터우 등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양동작전을 구상한 후허하우터와 바오터우

    마오쩌둥은 이 전문을 린비아오에게 보내어 중앙군사위가 요청에 응하였음을 알렸다. 그러나 린비아오는 여전히 미적거렸다. 8월 6일 린비아오는 다시 중앙군사위에 전문을 보냈다. “양청우 부대가 먼저 움직인 뒤에 우리도 병력을 출동시키겠습니다.” 뭔가 미진했던지 그는 8월 7일 다시 전문을 보냈다. “양청우 부대가 움직이면 우리도 행동시간을 정하겠습니다.” 참고 있던 마오쩌둥의 화가 폭발했다. 1948년 8월 9일, 마오쩌둥은 중앙군사위 명의의 전문에서 린비아오를 엄중하게 비판했다. “당신들이 양청우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행동하겠다 하는데 그게 과연 정당한 일이냐?” 마오의 비판을 받자 린비아오는 찔끔했지만 여전히 다른 이유를 들면서 출동이 연기되고 있음을 알렸다. “올해는 비가 너무 옵니다. 대군이 남하해야 하는데 군량 공급이 어렵습니다.” “정자툰(鄭家屯)쪽 군량 수송도로 보수가 끝나고 비가 그쳐야 병력을 출동시킬 수 있습니다. 양청우 부대의 출동만을 기다린 것은 아닙니다.”

    8월 12일, 마오쩌둥은 다시 린비아오에게 전문을 보냈다. “당신들이 출동 일시를 결정하지 못하는 게 적정 때문이냐, 양청우 부대가 아직 출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냐? 분명히 지적해 둔다. 남쪽의 적정(여기서 남쪽의 적정이란 푸쭤이 부대의 동향을 지칭)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양청우 부대가 출동하기만 기다리는 것도 옳지 않다. 당신들 또다시 군량문제를 말하는데 물론 적의 동향과 군량은 중요하다. 그러나 양청우 부대만 출동시켜 푸쭤이가 대군으로 그를 쫓으면 그것이 전국의 전황에 어떤 유리함이 있는가? 양청우 부대에 대응한 뒤 푸쭤이 부대가 당신들과 맞서면 그것이 우리에게 이익인가? 우리가 2개월 전에 출동 준비를 하라고 하였는데 지금 와서 식량문제를 거론하는가?” 마오쩌둥이 이렇게 질책하자 린비아오는 더 이상 미룰 방법이 없었다.

    린비아오는 부대배치를 단행했다. 동북 야전군 휘하 병력 12개 종대 중 5개 종대를 진저우 및 요서지방 공겨군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나머지 부대는 선양의 웨이리황 집단군을 견제하거나 창춘 공격군으로 배치했다. 여전히 주력을 창춘, 선양쪽에 남겨둔 것이다. 그러자 마오쩌둥이 다시 린비아오에게 방침을 수정하라고 지시했다. 마오쩌둥은 9월 7일 전문을 보내어 “창춘, 선양에 있는 두 적을 그렇게 중시할 필요가 없다. 주력을 진저우, 위관(榆关), 탕산쪽으로 배치하라.”

    린비아오는 마오쩌둥의 지적대로 병력을 배치하였다. 그런데 마오쩌둥이 보기에 린비아오 등 동북 야전군 수뇌부의 전선 지휘소 위치가 옳지 않았다. 동북 야전군의 근거지인 하얼빈에서 불과 30킬로 떨어진 쌍청현(雙城縣)에 설치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이것도 지적했다. “당신들이 진저우 등 베이닝선 작전에 동의하였고 주력이 이미 그쪽으로 출동했을 텐데 지휘소가 왜 거기에 있는가? 진저우 부근으로 이동해야 하지 않는가? 지휘소가 가까이 있어야 구체적인 지휘가 가능한데 당신들 하는 것으로 보아 진짜로 결심한 것 같지 않다. 진저우 공격에 전력을 집중하기 바란다.” 린비아오는 하는 수 없이 9월 21일 전용열차를 타고 치치하얼 등을 거쳐 진저우 전선으로 떠났다.

    표시 부분은 산해관. 진저우 등 주요 도시는 붉은 원 표시

    동북 야전군, 진저우 공격에 나서다.

    요서지방의 요충지 진저우 공격 작전에 린비아오는 동북의 정예병력 70만명을 총동원했다. 해방군의 병력은 충분했다. 6개 종대와 3개 독립사단 등 주력은 진저우 포위와 철도 거점을 장악하여 공격 임무를 맡았다. 4개 종대 병력은 진저우 북쪽 신민(新民)에 배치하여 국군 주력이 있는 선양을 견제하였다. 만약 선양의 웨이리황이 원군을 보낼 경우 차단하여 요격할 계획이었다. 16만명은 창춘을 계속 공격하며 소수 부대로 창춘을 증원하여 주공방향이 창춘인 것처럼 것처럼 꾸몄다. 진저우 등 요서방면 공격을 은폐하여 국군 수뇌부의 판단을 흐리려는 작전이었다. 린비아오는 창춘 공격 훈련을 가장하며 “훈련을 잘 받아 창춘을 깨뜨리자.”는 구호까지 정해 국군 수뇌부를 현혹하게 하였다. 린비아오는 카이위안(開元)에 1개 종대를 배치하여 창춘의 포위망이 돌파될 것에 대비했다. 개미 한 마리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주도면밀한 병력배치였다.

    1948년 9월 12일, 창춘을 공격하는 부대를 뺀 나머지 대군이 호호탕탕 요서지방으로 짓쳐 들어갔다. 동북 야전군의 병력출동은 랴오닝성 이현(義縣)에서 허베이성 루안현(灤縣)에 이르는 넓이 300킬로미터의 광대한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대병이 출동하는데도 해방군의 진격은 질풍같았다. 밤에는 야영하며 노도처럼 진격한 해방군은 10월 1일 벌써 진저우를 철통같이 포위했다. 다른 부대는 베이닝 철도의 각 거점을 점령하여 국군의 후퇴로를 장악했다.

    국군, 선양과 후루다오에서 구원병을 파견하기로 결정하다.

    동북 야전군이 진저우를 비롯한 요서지역을 전격 공격하자 장제스는 깜짝 놀랐다. 창춘과 선양을 건너뛰어 진저우를 공격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동안 장제스는 동북 초비사령관 웨이리황에게 주력을 진저우로 철수시키라고 계속 요구하였다. 병력을 압축시켜 진저우에서 수비를 강화하고 화북의 푸쭤이 집단군과 서로 호응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웨이리황과 동북의 지휘관들은 장제스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웨이리황이 견결하게 자신의 방침을 고집하여 국군은 선양을 중심으로 진저우와 창춘을 고수하고 있었다. 국군은 동북 사령관 웨이리황이 있는 선양과 주변인 번시,테링, 신민등에 30만 병력을 배치하여 수비하고 있었다. 창춘에는 부사령관 정동궈가 수비병 10만명을 지휘하고 있었고 진저우와 그 주변에는 역시 부사령관인 판한지에가 15개 사단 15만명을 지휘하고 있었다.

    지휘부 사이에 이견이 있다 할지라도 8개월 가까이 방침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절대적으로 조건이 불리한 동북에서 해방군의 공격이 임박하였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70만 대병이 짓쳐 내려올 때까지 결과적으로 수수방관한 꼴이 되었다. 거기에 진저우를 수비해야 할 진저우 지휘소 사령관 판한지에는 이제 갓 부임하여 현지 사정을 잘 몰랐다. 적장들은 물론 휘하 지휘관들도 잘 몰랐으니 아무리 유능한 지휘관이라 하여도 지휘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리 없었다.

    진저우 수비사령관 판한지에

    그는 내전 발발 당시 국방부 참모차장으로 있었다. 얼마 후 그는 쉬저우 초비 부사령관으로 있다가 육군 부총사령으로 부임했다. 그는 산둥성의 1병단 사령으로 있다가 러허성 정부 주석으로도 있었다. 1948년 7월이 되어서야 그는 동북의 진저우로 왔다. 그해 9월 장제스는 판한지에를 동북 초비 부사령관겸 진저우 지휘소 주임으로 임명했다. 부임하자마자 해방군의 대규모 포위 공격에 직면한 것이다. 판한지에도 중일전쟁에서 역전의 경험을 쌓은 노장이었다. 하지만 갓 부임한 그에게는 진저우성과 주변 지역의 방어공사, 군수물자 비축을 하기에 너무 부족한 시간이었다. 동북 야전군의 전광석화같은 기습에 놀란 판한지에는 즉각 난징의 장제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948년 9월 24일, 판한지에의 구원요청을 받은 장제스는 웨이리황을 난징으로 불렀다. 장제스는 웨이리황에게 즉각 출동하여 진저우를 구원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웨이리황은 “성을 포위하고 구원군을 매복 공격하는 게 공산군의 의도”라며 완곡하게 거부의사를 밝혔다. 장제스로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선양의 병력을 진저우로 철수하라고 해도 듣지 않더니 구원 요청까지 거부하는 게 아닌가? 웨이리황은 이미 창춘을 구원하라는 명령도 여러 차례 해태하였다. 계속 명령을 거부하는 웨이리황을 제쳐두고 장제스는 공군을 동원하여 49군 2개 사단을 수송기로 증원하게 하였다. 하지만 2개 연대를 보낸 뒤 9월 28일 해방군이 진저우 비행장을 포격으로 봉쇄하여 공중수송도 중단되고 말았다.

    장은 여전히 웨이에게 선양에서 선진선(沈錦線: 선양-진저우간 철도)으로 공격하여 전진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참모총장 구쭈통(顾祝同)을 선양으로 보내 장의 명령을 집행하도록 독전하게 하였다. 구쭈통은 선양에 있는 기간에 동북 지휘관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회의에서 즉각 출병할 것을 요구하고 선진로를 따라 전진하여 진저우 포위를 풀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웨이는 여전히 견결하게 반대하였다. 웨이는 전군이 섬멸 당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여 구쭈통과 여러 차례 언쟁을 벌였다. 1948년 9월 29일, 국군 지휘부 사이에서 논쟁을 벌이는 사이 동북 야전군은 창리(昌黎)、베이다이허(北戴河)와 랴오닝성의 쑤이중(綏中)、싱청(興城)을 잇따라 점령하고 요서 회랑을 차단했다. 진저우, 이현에 대한 포위를 완성한 것이다.

    그때 장제스는 정신을 지난 전투에 쏟고 있었다. 화둥 야전군이 9월 16일 지난 전역을 일으켰던 것이다. 장제스는 지난을 돌보느라 둥북의 상황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저 웨이리황에게 선진루를 통해 요서 지역으로 출병하여 진저우 포위를 풀라고 요구할 뿐이었다. 하지만 웨이는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웨이리황은 “진저우 포위는 산하이관 내에서 푸쭤이 집단군이 출병하여 직접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북의 부대가 진저우 포위를 푼 뒤에 현지 부대와 합류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동북에서 해방군 대병을 마주하고 있는 웨이리황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진저우는 화북의 국군이 지원하기에 가까운 거리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서로 논쟁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으니 우군의 사기만 떨어뜨리는 꼴이 되었다.

    전장에서의 어떤 시간은 천금과 같다. 장제스의 명령이 여전히 실행되지 않는 사이 이틀이 흘렀다. 1948년 10월 1일, 둥북 야전군은 진저우와 함께 포위하고 진저우 외곽의 이현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4시간 동안 격전을 벌인 끝에 루쥔첸(盧浚泉)이 지휘하는 93군 산하 2사단을 모두 섬멸하고 이현을 점령했다.

    장제스, 선양과 후루다오에서 대병을 출동시키다.

    1948년 10월 2일, 장제스는 급히 비행기로 선양에 날아왔다. 진저우가 발등의 불이 된 것이다. 장제스는 선양에서 직접 군사회의를 주재했다. 웨이리황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자신이 동북과 화북의 전투를 지휘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장제스는 진저우 포위를 풀기 위해 병력 증파를 결정하고 직접 부대배치를 단행했다. 장제스는 화북과 산둥에서 해운을 이용하여 병력을 증파하기로 하였다. 국군이 장악하고 있는 후루다오에 7개 사단을 이동시켜 이미 배치되어 있는 4개 사단을 더해 11개 사단으로 구원병단을 편성하기로 하였다. 국군은 이 병단을 ‘동진병단’이라고 불렀다. 이 병력을 화북의 17병단 사령관인 호우징루(侯鏡如)가 지휘하게 하였다.

    그리고 선양에 있던 5개군 11개 사단과 3개 기병사단으로 하여금 ‘서진병단’을 편성하여 랴오야오샹이 지휘하게 하였다. 서진병단은 장우, 신리툰을 공격 점령하여 동북 야전군의 보급선을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진저우에서 동진병단과 함께 진저우 공격군을 협격할 계획이었다. 장제스는 이 두개 병단으로 하여금 동쪽과 서쪽에서 각각 출발하여 진저우에서 해방군을 협격, 결전을 치를 생각이었다. 창춘에 있는 정동궈 휘하의 10만 국군은 요서지역의 전투상황에 따라 포위망을 돌파, 선양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

    장제스와 웨이리황

    웨이리황은 묵묵히 장제스의 회의 주재와 부대 배치를 지켜볼 뿐이었다. 장제스는 측근인 랴오야오샹을 따로 불러 “이번 기회에 진저우를 공격하는 적과 결전을 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동북의 사정을 잘 아는 랴오야오샹은 장제스에게 “지금 동북의 형세가 만만치 않다.”고 완곡하게 만류하였으나 장제스의 태도가 워낙 강경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날 저녁 장제스는 사단장 이상의 지휘관 회식을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전투에 대한 두려움만 없다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격려했다. 장제스는 몇명 군정요원을 접견하고 3일 총총 선양을 떠났다. 동북의 구체적인 전투지휘는 초비사령부 부주임인 두위밍에게 맡겼다. 그리고 구원군 사령관인 랴오야오샹과 호우징루는 자신이 직접 통제할 생각이었다. 장제스는 동분서주하며 홀로 중요한 전투지휘를 도맡아 하였지만 그것이 바로 국군의 약점이었다. 장제스의 전투지휘 능력은 군벌들과의 투쟁에서 크게 빛이 났지만 그것은 1920년대의 일이었다.

    1948년 10월 6일, 장제스는 순양함 “충칭호(重庆号)를 타고 후루다오의 54군 사령부에 와 부대를 순시했다. 장은 진저우, 후루다오의 부대와 진저우 증원의 작전 임무를 배치했다. 그는 도열한 지휘관들에게 말했다. “이번 전쟁은 중대하다. 화북의 2개 군과 옌타이 1개 군이 도착한다. 선양의 5개 군과 협력하여 진저우 공비를 협격하기 바란다. 뒤이어 선양의 아군 주력이 진저우에 도착할 것이다. 여기 있는 장병들 임무가 중대하다. 몇십만명 생명이 모두 여러분에게 달려있다. 살신성인할 결심으로 공비를 격멸하기 바란다.” 장은 후루다오 부대를 호우징루(侯镜如) 사령관이 지휘하도록 지시했다. 호우징루가 도착하기 전에는 췌한첸(阙漢骞)이 타산과 진저우 공격을 지휘하도록 했다. 또 해군 사령관으로 구잉칭(桂永清)을, 3함대 사령관으로 마지좡(馬纪庄)을 임명했다. 장제스는 해군에게 육군이 타산을 공격할 때 함포로 육군 공격을 지원하라고 지시하였다.

    1948년 10월 7일 장제스는 충칭함을 타고 텐진 탕구(塘沽)항으로 돌아갔다. 장은 배 위에서 하얀 장갑을 끼고 이곳 저곳을 순시하다 먼지를 발견했다. 그는 큰소리로 해군 사령관 구잉칭을 꾸짖었다. “해군이 타락하고 썩은 게 이 모양이구나. 나라를 망치려는 겐가?”

    린비아오, 마오쩌둥의 질책을 받고 진저우 공격을 결심하다.

    10월 1일, 동북 야전군이 이현을 점령하고 있을 때 린비아오는 전용 열차로 장우(彰武)에 도착해 있었다. 장우는 선양 서북쪽에 위치한 현으로 전장인 이현, 신민 등과 가까운 곳이었다. 그때 중앙군사위에서 전보 한 통을 보냈는데 “푸쭤이 휘하의 화북 국군 4개 사단이 후루다오에 상륙했다.”는 소식이었다. 후루다오에서 진저우는 코앞으로 린비아오와 동북 야전군에게는 매우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후루다오에 이미 배치된 국군과 합하면 9개 사단이 진저우를 증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베이핑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는 화북 국군이 50여만명이었다. 푸쭤이가 마음만 먹으면 대병을 증원할 수도 있으니 진저우에서 협격 당하는 것이 현실로 되었다.

    전보를 받아들고 린비아오는 오랜 시간 상념에 잠겼다. 그러더니 비서를 불러 전보 한 통을 발송하게 하였다. “푸쭤이가 원병을 보내어 협격 당할 우려가 있으니 창춘을 주공 목표로 삼아 증원하는 것은 어떤가? 판단 후 지시하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 직후 린비아오는 정치위원인 뤄룽환과 참모장 유야러우를 찾아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푸쭤이가 후루다오, 진시에 대병을 증원했소. 계속 진저우를 공격해야 할지, 아니면 병력을 되돌려 창춘 공격에 집중해야 할지 중앙군사위원회에 방안을 보고하고 지시를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소.” 두 사람이 보기에 린비아오의 심중에 동요가 생긴 것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진저우 공격은 마오쩌둥은 물론 중앙군사위원회와 여러 차례 조정을 거친 방침이었다. 그동안 진통도 많았으며 마오쩌둥의 질책을 여러 번 받았다. 세 사람은 숙의를 거듭한 뒤 진저우를 계속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린비아오는 비서에게 전문을 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미 전문이 발송된 뒤였다. 세 사람은 급히 전문을 작성하여 중앙군사위에 보냈다. “우리는 계속 진저우를 공격하겠다.”

    동북해방군 정치위원 뤄룽환. 우측은 영화 건군대업에서 배우가 분장한 모습

    류야러우. 동북해방군 참모장

    10월 3일 린비아오의 첫 번째 전보를 받은 뒤 마오쩌둥은 즉시 회신을 보내왔다. “사오월에 당신들은 충분히 창춘을 공략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지 않았다. 7월에도 당신들은 창춘을 공략할 수 있었는데 하지 못했다. 현재 진저우를 공격하기 위한 부대배치가 끝이 났는데 이제 와서 재고하자고 하는가? 적정 변화라는 게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돌아가 창춘을 공격하겠다고? 당신들 생각이 매우 옳지 않다고 본다.”

    10월 4일, 두 번째 전문에 대하여 마오쩌둥이 다시 전문을 보내왔다. “당신들이 진저우를 계속 공격하기로 했다니 매우 좋다. 안심이 된다.” 그리고 “진저우와 진시에 병력을 집중해야지 나누면 안 된다. 창춘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지만 빨리 고쳐서 다행이다. 전에 우리와 당신들 간에 이견이 있었지만 완전히 해소되었다. 견결하게 집행하기 바란다.”

    1948년 10월 4일 아침 6시, 마오쩌둥은 회신 전문을 보냈다. “당신들이 진저우 공격을 결심했으니 매우 좋다. 위로를 보낸다.” “지금까지 우리와 당신들 사이에 의견이 달랐다. 하지만 지금은 같다.”

    파괴된 진저우시

    1948년 10월 5일, 린비아오를 비롯한 동북 야전군 지휘부는 진저우 서북쪽으로 15킬로 거리에 있는 망뉴툰(牤牛屯)에 도착했다. 린비아오는 지형을 관찰한 뒤 바로 군사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진저우 총공격과 구원 오는 적을 공격할 구체적인 방안을 수립했다. 2종대와 3종대, 6종대의 17사단, 포병종대 주력과 전차대대로 북쪽 돌격집단군을 편성했다. 이 집단군을 3종대 사령인 한셴추(韓先楚)가 지휘하여 북쪽에서 남쪽으로 돌격하게 했다.

    또 7종대, 9종대와 일부 포병으로 남쪽 돌격 집단군을 편성했다. 이 부대는 7종대 사령인 덩화(鄧華)가 지휘하게 하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돌격하게 하였다. 8종대 및 1종대 포병 연대로 동쪽 돌격집단군을 편성하여 8종대 사령인 돤수첸(段蘇權)이 지휘하게 하였다. 이 부대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돌격하게 하였다.

    4종대, 11종대 및 2개 독립사단을 따위산(打渔山)、타산(塔山)과 홍뤄셴산(虹螺蜆山)을 잇는 선에 배치하여 2병단 사령원 청즈화(程子華)가 지휘하게 하였다. 이 부대는 후루다오와 진저우 서쪽 방향으로 오는 국군 구원병을 저지할 예정이었다. 완이(萬毅)의 5종대, 황용성(黄永胜)의 6종대, 양싱추(梁興初)의 10종대는 신민(新民)서쪽과 북쭉 지역에 배치했다. 이 부대는 선양에서 지원오는 “서진병단”을 요격할 예정이었다. 리텐유(李天佑)가 지휘하는 1종대는 진저우와 타산 사이의 까오차오(高桥)에 배치하여 전투의 총 예비대로 쓰고 가능하면 북쪽의 진저우를 공격하거나 남쪽의 타산(塔山)을 지원할 예정이었다.

    타산은 베이닝선의 한 마을에 불과했지만 진저우와 진시(錦西)(진시는 옛지명으로 지금은 후루다오로 개칭)사이에 위치했으며 진시에서 10킬로미터, 진저우에서 30킬로미터 거리였다. 진시에서 진저우를 지원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1948년 10월 5일, 린비아오는 타산을 지키는 청즈화에게 강조해서 지적했다. “진저우를 공격하려면 진시 방면 적을 묶어둬야 한다. 두 도시 간 거리가 50킬로에 지나지 않는다. 적을 잡아두지 못하면 진저우 공격부대에 아주 큰 위협이 될 것이다.” 린비아오는 4종대에 전문을 보냈다. “당신들은 홍뤄센산 아래 해변 동쪽에서 서쪽까지 20킬로미터 지역에 강력한 방어공사를 해야 한다. 방어진지를 이용하여 적을 대거 섬멸, 진지앞에 시산혈해를 이루도록 하라. 전국을 진동시킬 수 있는 영광스러운 방어전을 반드시 창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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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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