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쉬운 구조조정 아니라 산업전망 필요
    [한국 항공산업의 구조적 문제⑤] 항공산업의 재편
        2020년 06월 23일 09:2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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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편의 글을 통해 한국 항공산업의 구조적 문제를 검토했다. 공급 과잉, 수요 증가의 한계, 열악한 재무구조, 공항의 만성적자 등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면 항공산업의 재편이 불가피하다. 또, 필수공익사업 명목의 기본권 제한, 이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재벌 오너의 갑질과 질 낮은 일자리, 재벌 배불리는 복잡한 소유 구조와 다단계 하청 등 노동자의 입장에서도 근본적 개선이 필요하다. 때문에 코로나19로 촉발된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은 단지 한계기업 몇 개 퇴출시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방송화면 캡처

    코로나 위기와 그렇지 않은 위기?

    정부는 기간산업 지원책을 발표하면서 하나의 기준을 제시했다. 코로나19 이전에 위기가 발생한 기업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고 통상의 기업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밟겠다는 것이다.

    사실 정부의 이런 기준은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았을 뿐 코로나19 사태 초기부터 있었다. 지난 4월 5일 산업은행은 이스타항공을 인수하려는 제주항공에 2천억 원의 인수자금을 지원했지만, 정작 이스타항공이 요청한 구제금융은 거절했다.(이미 이스타항공 노동자들의 임금체불액만 백억 원을 넘어서고 있었다.) 또, 코로나19 사태 초기 발표한 3천억 원 규모의 금융지원 외에 LCC(저비용항공사)에 대한 추가 지원을 거부하기도 했다.

    언뜻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런 구분은 사실 정당성이 없다. 지난 글 ‘한국 항공산업의 구조적 문제③ 낮은 수익성, 상존하는 유동성 위기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국적사들은 위기에 빠졌다. 별도기준으로 2019년 대한항공의 당기순손실은 5,687억 원, 아시아나항공은 7,629억 원을 기록했다. 같은 시기 부채비율은 각각 813%, 1,795%에 달한다. 현재 대한항공은 기간산업안정기금 지원 1호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위기냐 아니냐의 측면에서 대한항공과 다른 LCC를 구분하기는 힘들다.

    정책의 실패

    이런 구분은 정부가 항공산업의 위기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보여준다. 항공사, 특히 LCC 난립으로 과당 경쟁과 수익성 악화, 부실이 생겼다는 것이다. 때문에 선별 지원을 통해 몇몇 기업을 퇴출시켜 시장을 안정화하는 방향이 설정된다. 그러나 이는 항공산업의 공급과잉을 만든 책임을 은폐한다.

    항공산업에서 ‘공급과잉 → 무분별한 과당 경쟁 → 수익성 악화 → 항공사 파산과 인수합병’이라는 흐름은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세계 최대 항공산업 국가인 미국이 대표적인데, 1978년 항공자유화 조치 이후 1985년까지 신규 항공사만 118개사가 등장했다가 공급과잉으로 99개가 퇴출되고, 이후 인수합병을 거쳐 4대 항공사 중심으로 재편됐다. 2000년대 들어 지금까지 수다한 항공사의 인수합병이 반복되고 있는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다.

    공급과잉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와 파산의 흐름은 항공자유화와 규제완화의 필연적 결과다. 정부는 경쟁을 촉진한다는 명목으로 허가를 남발했다. 정치권은 지역 개발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목으로 이를 부추겼다. 항공산업의 위기는 감염병이 아니라 규제완화, 시장 만능주의가 만들었다. 공급과잉은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다. 한계기업 몇 개를 퇴출시키는 대증요법이 아니라 그 증상을 만든 근본 원인에 대한 치료, 즉 산업정책의 전환이 필요하다.

    경영의 실패

    항공사들은 과당, 출혈경쟁으로 손실을 자초하고, 비정상적으로 부채를 쌓았다. 중단거리 노선이 대부분 중복되는데도 장기적 성장 전략 없이 눈앞의 돈벌이에만 매달렸다. 항공재벌은 항공사-자회사-지상조업사-협력업체로 이어지는 복잡한 다단계 하청구조를 이용해 수익을 편취했고, 질 낮은 일자리를 양산했다. 이렇게 열악한 일자리를 감내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코로나19 위기가 오자 가장 먼저 일자리에서 밀려나고 있지만, (사실상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원청기업인) 항공사들은 일말의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될 정도로 고용구조는 엉망이 되어 있다.

    산업정책의 실패가 구조적 위기를 만들었다면, 항공사들의 그릇된 경영이 그 위기를 키워왔다. 비정상적인 재벌 소유구조와 다단계 하청, 근시안적인 경영을 바꾸지 않는다면 코로나19 위기 극복 이후에도 항공산업의 위기는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손쉬운 구조조정이 아니라 산업전망이 필요하다

    항공산업은 58조 원 규모의 국가 기간산업으로 항공 직접 관련 일자리만 약 26만 5천 개, 연관 산업 포함 약 84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고 알려진다. 때문에 항공사의 인력 구조조정은 대규모 일자리 위기로 이어지고, 전체 경제에 큰 타격이 되어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코로나19 위기 이전 항공산업은 여러 부문에서 인력 부족이 심각했다. 항공산업 일자리라면 흔히들 조종사와 객실승무원만을 떠올리지만 2019년 기준으로 국적사에 속한 조종사는 6,876명, 객실승무원은 15,102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대부분은 정비, 지상조업, 공항운영업 등의 일자리다. 앞선 연재글에서 살펴보았듯 지상조업사나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만성적인 인력 부족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왔다. 또, 숙련 정비사가 부족하고, MRO(항공정비) 산업이 발달하지 못해 항공기 정비의 해외의존도가 매우 높다. 인천공항의 경우 개항 대비 이용객은 264% 늘었지만(2018년 기준), 출입국 심사인력은 49% 증가에 불과해 늘어난 시설만큼의 용량 확대가 이뤄지지 않았다. 산업정책에 따라 일자리 창출 여력이 충분하다는 의미다.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고 항공수요가 회복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 시기를 거치면 유휴인력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다. 섣부른 기업 구조조정으로 위기를 키울 것이 아니라 MRO 산업 육성, 항공인력 교육훈련 인프라 구축 등 장기적인 성장 전망을 마련해야 한다.

    코로나19 위기 이후 매각협상이 지연되고 있는 이스타항공의 경우, 지금껏 임금체불 액수만 24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다. 공공운수노조가 최근 이스타항공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이스타항공 노동자들은 회사가 4대보험까지 미납하면서 대출길조차 막혔고,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자살충동까지 느끼고 있다고 답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우리는 기업 지원이 결국 기업과 재벌은 살리고, 노동자의 희생을 극대화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때문에 정부는 이번 코로나19 대응에서 지원 기업의 고용 안정, 도덕적 해이 방지, 이익의 사회 환원 등을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자리 지키기가 코로나19 위기 극복의 핵심’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항공산업의 재편은 과거 위기 대응과 달라야 한다. 노동자의 일방적 희생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고용안정에 최대한 노력하고, 올바른 산업 정책 속에서 일자리 창출을 도모하고, 그릇된 소유와 지배구조, 경영을 바꾸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필자소개
    공공운수노조 정책기획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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