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웨이리황, 장제스의
    진저우 철군 명령에 반대
    [국공내전㊵)] 옌안 철수 후 첫 정치국 회의···마오, 동북 대공세 결심
        2020년 06월 17일 08:0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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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제스가 반란평정 검토회를 열어 그동안의 실패를 검토하고 개선책을 모색한 반면 공산당은 전면 공세를 위한 새로운 방침을 제기하였다. 1948년 9월 8일부터 13일까지 중공은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허베이성 핑산현 시바이포에서 개최하였다. 중공 중앙이 옌안에서 철수한 뒤 처음 소집한 정치국 회의였는데 공산당은 ‘9월 회의’로 부르고 있다. 회의에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주더를 비롯하여 류샤오치, 런비스, 펑전, 둥비우 등 정치국원과 덩샤오핑, 허룽, 예젠잉, 쉬샹첸, 루딩이, 네룽전, 보이보, 쩡산(曾山), 덩잉차오, 텅다이위안, 랴오수스, 랴오청즈(廖承志), 천보다, 류란타오(劉瀾濤) 등 중앙위원과 후보 중앙위원, 리웨이한과 양상쿤 등 주요 실무자 10여명이 참석했다.

    마오쩌둥은 회의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제기했다. “인민해방군을 500만명으로 확대해야 한다. 내전 5년 안에 국민당 통치를 타도하고 전 중국을 해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군대는 전진해야 한다. 전투방식은 유격전에서 정규전으로 바꿔야 한다.” 마오쩌둥이 보고한 방침은 저우언라이와 주더 등 당 지도부가 이미 검토를 끝낸 것이어서 그대로 채택되었다. 회의는 또 기율 강화를 강조하고 보고와 집행에 대한 제도를 보완하였다.

    이 회의는 유리하게 변화된 형세에 맞춰 공세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내전 초기 공산당은 대외적으로 대화를 강조하였다. 평화적으로 연합정부를 구성하자고 호소하며 내전의 책임이 국민당에게 있음을 강조해 왔다. 전황이 유리해진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공산당은 노골적으로 “국민당을 타도하고 전 중국을 해방하자.”고 선언하였다. 이제는 대규모 회전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가 필요했다. 전투방식도 내전 초기에 운동전으로 치고 빠지며 매복, 습격, 교란등 유격전 방식을 혼합하였다면 앞으로는 본격적인 정규전을 펼치려 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장 지휘관들의 재량권보다 중앙군사위원회의 지시 및 방침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기율이 필요하였다.

    마오쩌둥은 내전에서 승리하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을 설정하였다.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쫓겨간 뒤 신중국을 세운 것이 1949년 10월 1일이다. 1946년 7월에 내전이 시작된 것으로 계산하면 5년 후는 1950년 7월이 된다. 마오쩌둥과 공산당 지도부는 전황이 우세해졌다고 하여 서두르지 않았다. 단계에 맞게 차근차근 준비하여 장제스의 국민정부를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오쩌둥이 급변하는 전황 속에서 일희일비하지 않고 치밀하고 냉정하게 전략과 계획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생산 증대는 날로 늘어나는 해방군 병력과 광대한 면적으로 확대된 해방구의 전시경제를 위한 것이었다. 개전 초기 130만명이던 해방군은 1948년 하반기에 이미 300만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해방구는 타이위안을 제외한 산시성 전체, 칭다오 등을 제외한 산둥성 대부분, 베이핑과 텐진, 바오딩 등 몇몇 거점을 제외한 허베이성 상당부분, 시안 등 남부를 제외한 섬서성의 상당부분, 창춘과 선양, 진저우 등 몇몇 거점을 제외한 동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밖에 안후이성과 허난성, 후베이와 내몽골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공산당 해방구가 자리잡고 있었다. 심지어 공산당은 멀리 손길이 잘 닿지 않는 신장위구르 지역에도 해방구를 건설하고 있었다. 국민정부가 온전히 통치하는 지역은 쓰촨과 윈난 등 서남 지역과 후난, 저장, 장쑤, 장시, 푸젠 등 강남 지역이었다.

    공산당이 보유한 병력도 모병, 기의 및 투항으로 인한 국군 포로의 편입 등으로 끊임없이 확대되어 이미 국공 양쪽이 대등한 상황이었다. 1948년 11월에 이르면 국군이 290만명, 해방군이 300만명으로 형세가 역전되었다. 430만명으로 시작했던 국군의 병력이 섬멸과 투항, 그리고 탈주 등으로 계속 줄어들었던 것이다. 국군이 지속적으로 신병을 징집했던 것을 감안하면 개전 초기의 병사들보다 신병들이 점차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국군의 전투력 약화로 이어져 대규모 회전을 앞두고 있는 국민정부의 불안요소이기도 하였다.

    기율을 강조하게 된 데에는 동북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주더 등 핵심 당지도부는 동북의 작전을 둘러싸고 린비아오 등 현지 지휘관들과 여러 차례 이견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중공 중앙은 1948년 1월과 3월에 ‘보고제도의 확립에 대하여’라는 지시와 보충지시를 통해 기율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북에서 계속 문제가 발생하였다. 화가 난 마오쩌둥은 1948년 8월 9일 전보를 보내어 린비아오 등 동북국 관계자들을 힐책하였다. “당 전체가 잘 지키고 있는데 유독 동북만 문제가 있다. 당신들은 도대체 언제 종합보고를 할 셈이냐?” 그러자 동북국은 “동지들이 모두 바빠서 그랬습니다.”하고 변명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덧붙여 마오쩌둥의 화를 키웠다. “각 부분 동지들이 상황을 모두 파악하지 못해 종합적인 보고가 곤란합니다.” 마오쩌둥은 8월 15일 다시 전보를 보내어 엄중하게 비판하였다. “다른 지역이라고 당신들하고 다를 게 뭐냐? 따베산에 있는 덩샤오핑 동지는 환경이 그렇게 열악한데도 규정에 따라 보고만 잘 한다. 당신들은 보고를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거냐? 당신들 마음대로 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니까 이런 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자 동북국은 8월 15일과 19일 두 번에 걸쳐 종합보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동북국은 당시 해방구가 가장 넓고 장비가 우수하며 병력도 많았다. 전황도 안정되어 이미 국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으로서는 동북의 린비아오나 펑전 등 주요 지도부들을 다잡을 필요가 있었다. 기율을 강조하는 김에 중요한 문제는 아예 중앙의 비준을 거치지 않으면 공포하지 못하게 못을 박기도 하였다. 각 지역 해방구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중공은 중앙국 산하에 지역 분국을 두고 있었으며 군사위원회 산하에 지역분회와 전선위원회를 두고 있었다. 해방군도 각지의 독자성을 띈 편제와 명칭에서 점차 통일성을 부여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가고 있었다. 처음 내전이 시작될 때는 팔로군, 동북 민주연군, 신사군 등 각양각색의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서북, 동북, 화둥, 화북, 중원 야전군으로 개칭하였다가 나중에는 일련번호를 붙여 제1야전군 등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국공내전 3대 전역

    국공내전의 향방을 가른 세 개의 전투가 있다. 요서 지방의 전투, 중원 지역의 화이하이 전투 그리고 베이핑을 둘러싼 전투가 그것이다. 군사용어로는 랴오선 전역(遼瀋戰役: 요심전역), 화이하이(淮海) 전역, 핑진(平津 )전역이라고 부른다. 이 전투들을 국공내전의 3대 전투(전역)로 부른다. 지금까지의 전투가 국지적이고 산발적이며 상대적으로 소규모였다면 3대 전투는 수십만명끼리 맞붙는 대규모 결전이었다. 3대 전투는 공산당이 작심하고 결판을 내려고 계획한 것들이었다. 3대 전투가 시작된 1948년 하반기부터 1949년 초까지 국공은 그야말로 시산혈해의 대격전을 벌여야 했다.

    마오쩌둥과 주더, 그리고 저우언라이는 여전히 허베이성 핑산현 시바이포 마을에서 내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저우언라이는 부주석 겸 총참모장, 주더는 인민해방군 총사령을 맡고 있었다. 이 세 사람이 의논하여 결정하면 그대로 전략이 되거나 방침으로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오쩌둥이 대부분의 방침을 세우고 주더와 저우언라이가 함께 보완하면 저우언라이가 세부적인 여러 가지 일을 챙겼다. 세 사람의 관계는 홍군 시절과 장정 시기의 쭌이 회의(1)뒤부터 쭉 이어졌다. 마오쩌둥과 주더는 징강산의 홍군 창설 시기부터 주마오 홍군이라고 부를 정도로 밀접한 관계였다. 그후 주더는 줄곧 인민해방군의 총사령이자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저우언라이는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며 이때부터 마오의 장량이자 유비의 제갈량이 되었다.

    국민당은 난징에 국방부와 참모본부가 있었다. 국방부장은 허잉친, 참모총장은 구쭈통이었다. 국민정부 지휘부는 부침이 있었다. 그동안 장제스의 심복 중 심복인 천청이 참모총장을 맡고 있었으나 동북의 실패로 물러나 있었다. 중일전쟁 때 기용되었던 허잉친이 국방부장을 맡았지만 중요한 전투는 장제스가 직접 지휘했다. 장제스는 그야말로 동분서주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국방부와 참모본부에 앉아 직접 전투를 지휘하는가 하면 비행기를 타고 동북이나 화북 전선에 직접 가서 독려하거나 지휘하기도 하였다. 1948년 하반기 국군의 주요 최고 지휘관들은 동북 초비사령부에 웨이리황, 쉬저우에 류즈, 화북에는 푸쭤이가 있었다. 해방군의 창장 도하를 막는 임무는 주장에서 바이충시가 맡고 있었다. 그리고 두위밍이 전적 총지휘라는 직함으로 동북이나 쉬저우에서 현지 지휘를 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동북의 부총사령인 정동궈가 창춘에서, 판한지에는 진저우에서 수비를 맡고 있었다.

    1948년 9월, 중공 중앙은 시바이포 정치국 회의에서 전략적 결전을 전쟁 방침으로 삼고 첫 번째 회전 장소로 동북을 선택했다. 중공이 동북을 결전 장소로 고른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다. 공산당 휘하의 해방군 가운데 동북 야전군이 가장 강하였으며 기반도 가장 튼튼하였다. 1948년 8월, 동북 야전군은 동북 지방의 토지 97퍼센트, 인구 86퍼센트를 장악하고 있었다. 국민 정부군은 4개 병단 44개 사단(2)이었으며 지방 보안대를 합쳐 55만명이었다. 국민당 부대는 선양, 창춘, 진저우 등 서로 연결되지 않은 대도시를 수비하고 있었다. 베이닝 철로(베이징-하얼빈) 일부가 인민해방군 통제 아래 있어 창춘, 선양에서 산하이관으로 통하는 육상교통이 차단되어 있었다. 따라서 국민당 군은 보급을 모두 공중 수송에 의지하게 되어 물자가 매우 부족했다. 당시 동북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인민해방군 군사력이 국군보다 강한 지역이었다. 동북 지역은 중국에서 중공업이 가장 발달한 지역이었으며 전국 최대의 식량 생산지역이었다. 그래서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도 가장 먼저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배하여 투항한 뒤 국공 양당 군대가 다투어 진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결전을 지휘할 최고 지휘관은 동북 야전군 사령인 린비아오와 정치위원 뤄롱환이었다. 그리고 유야러우가 참모장으로 린비아오를 보좌했다. 동북 야전군 각 병단 지휘관으로 1병단 사령원은 샤오징광, 정치위원은 황커청이 맡고 있었다. 2병단 사령원은 청즈화, 정치위원은 샤오화였다. 각 병단 휘하에는 12개 종대가 있었는데 1개 종대는 보통 4개 정도의 사단을 지휘하였다.

    동북 야전군은 본래 동북 민주연군으로 불렀다. 내전이 발발할 무렵 동북 민주연군은 30만명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쓰핑에서 패배하여 하얼빈으로 철수한 뒤 동북의 해방군은 오히려 숫자가 늘었다. 농촌을 근거지로 하여 토지개혁과 함께 모병을 거듭한 결과였다. 랴오선 전투를 시작할 무렵 동북 야전군은 야전부대에 70만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동북 야전군은 12개 보병종대, 1개 포병종대, 1개 철도종대, 15개 독립사단, 3개 기병사단 등 모두 54개 사단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그밖에 지방부대가 30만명이었으니 규모면에서 국군을 압도하였다.

    이에 맞서는 국군 부대는 총병력 55만명이었는데 정규군이 48만명이었다. 동북 전선에는 중일전쟁에서 명장으로 이름 높은 웨이리황이 총사령관으로 부임해 있었다. 그 휘하에는 부총사령으로 두위밍, 정동궈, 판한지에 등이 있었다. 제1병단 사령관은 정동궈로 창춘에서 해방군의 포위공격을 받고 있었다. 9병단 사령관은 랴오야오상으로 그의 휘하 부대들은 기동부대 역할을 맡고 있었다. 판한지에는 6병단 사령관으로 진저우 수비를 맡고 있었다. 사령관인 웨이리황은 선양에 지휘소를 차려놓고 베이닝 철로를 중심으로 한 대도시 수비 위주의 전략으로 일관하였다.

    마오쩌둥 동북의 결전을 결심하다.

    마오쩌둥이 동북에서 국군과의 대규모 결전을 하기로 구상한 것은 1948년 초의 일이었다. 1948년 2월 7일 마오쩌둥은 둥북 야전군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장제스 군을 동북에 가두고 각개 섬멸하는 것이 유리하다.” 마오는 또 동북 야전군이 남하하여 베이닝 선 작전을 펼 것을 요구했다. 베이닝선은 베이핑에서 하얼빈을 잇는 철도이다. 베이닝 선을 차단하면 국군이 육상으로 후퇴하는 퇴로를 막을 수 있게 된다. 마오쩌둥의 주장은 진저우 등 요서지방을 먼저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북 야전군 사령원 린비아오의 생각은 달랐다. 내전 드라마에서 린비아오는 마오쩌둥의 전보를 읽으며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참모장인 류야러우가 무슨 내용이냐고 묻자 과묵한 린비아오는 “전투가 천리 밖 책상에 앉아 구상하는 것처럼 되겠소?” 하고 대꾸했다. 마오쩌둥의 구상이 시기상조일 뿐 아니라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각 표시가 진저우. 원 지역 표시 중 지명이 없는 곳 중 텐진 옆은 탕산. 진저우 오른쪽은 잉커우

    린비아오는 창춘을 남겨두고 진저우를 공격하는 데에 부담을 가졌다. 창춘에도 십만 이상의 국군 정예 병력이 있다. 진저우는 동북 해방군의 입장에서 가장 먼 거리에 있었다. 그 오른쪽인 선양에는 웨이리황의 지휘소가 있고 주변인 번시, 잉커우, 천황다오 등에 국군의 거점들이 있었다. 진저우는 베이핑에 가까이 있어 여차하면 푸쭤이의 화북 국군이 북상할 수도 있었다. 진저우에 주력을 보내어 공격하려면 해방군의 보급로도 한없이 길어진다. 린비아오는 해방군이 편도의 차량 연료만 보유하고 있는 것을 걱정했다. 당시 해방군이 만주 대부분을 석권하고 있었지만 후방 보급기지는 여전히 북방의 하얼빈이었다. 린비아오는 고심 끝에 창춘을 먼저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구상에 따르지 않는 린비아오가 못마땅했지만 작전계획을 승인했다.

    5월 하순 린비아오는 2개 종대로 창춘을 공격해 보았다. 그러나 창춘에는 국군에서 내로라 하는 항일명장 정동궈가 10만 병력으로 수비에 임하고 있었다. 해방군은 공격 초기에 창춘 비행장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지만 정동궈의 투지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샤오징광 휘하의 해방군 16만명이 맹공했지만 국군의 수비는 견결하였다. 창춘을 점령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자 린비아오는 장기간 포위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꿨다. 식량과 연료 등 생필품 공급이 차단된 만큼 얼마 버티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7월이 되도록 창춘의 전황에 변화가 없자 린비아오는 고민에 빠졌다. 그는 동북국 요원들과 토론한 끝에 마오쩌둥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심했다. 요서지방의 진저우 등을 먼저 공격하여 국군의 부대 배치를 교란하기로 한 것이다. 중공 중앙에 전문으로 보고하니 마오쩌둥은 즉시 회신했다. 마오는 “먼저 진저우, 탕산(唐山) 작전을 고려해야 한다.” 9월 7일 마오쩌둥은 다시 전문을 보내 지시했다. “창춘, 선양에 있는 두 적이 서로 돌보지 못한다. 진저우, 위관(榆关), 탕산에 전념하라.” 마오쩌둥의 지적은 진저우를 공격하더라도 창춘, 선양의 국군이 감히 지원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시바이포 정치국 회의에서 마오쩌둥과 중공 중앙군사위는 구체적인 방침을 굳혔다. 동북 야전군 주력을 베이닝선(베이핑-선양)로 남하시켜 진저우를 공격 점령하기로 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이를 두고 “문을 잠그고 개를 때리는 전법”이라고 설명했다. 진저우를 점령하여 선양과 창춘의 적이 후퇴할 퇴로를 차단하겠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의 전략은 대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병력이 우세하다고 하여도 적의 주력을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은 모험이다. 진저우 공격이 창춘처럼 교착되면 선양의 국군 주력과 화북의 푸쭤이 집단군이 협격할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동북은 워낙 전력이 우세하여 국군을 섬멸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동북 야전군이 동북을 완전히 장악하면 동북의 공업이 나머지 해방구 부대를 지탱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과 중공 중앙은 랴오선 전역이 일단 승리하면 동북 야전군을 산하이관 안으로 진격시킬 계획이었다. 그래서 화북의 인민해방군과 함께 베이핑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럼 동북에서 국군을 지휘하고 있는 장제스와 웨이리황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항일명장 웨이리황

    웨이리황(衛立煌 위립황)은 황푸 출신이 아닌데도 요지인 동북 초비사령관에 발탁되었다. 그만큼 장제스가 웨이리황의 지휘능력을 높게 샀던 것이다. 웨이리황은 안후이성 허페이(合肥) 출신으로 스물살 때 쑨원의 경호부대에서 사병으로 근무했다. 그는 하급 지휘관 시절 광시계 군벌과 싸워 승리한 뒤 쑨원에게서 사진 한 장을 받았다. 쑨원은 자신의 얼굴이 있는 사진에 “웨이리황 동지에게 드린다. 쑨원”이라고 써서 주었다. 웨이리황은 그 사진을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다고 한다.

    그는 순전히 자신의 능력과 투철한 항일정신으로 최고지휘관 반열에 서게 되었다. 웨이리황은 중일전쟁 중 1937년 산시성 북부 신커우(忻口)회전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워 공산당 인사들의 감명을 샀다. 이 전투는 산시성 주석인 옌시산 휘하의 국군과 웨이리황 휘하의 제2집단군, 그리고 공산당 계열의 팔로군이 함께 작전했다. 당시 국공합작으로 팔로군이 웨이리황 산하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10만명이 사상당하고 일본군은 2만명이 사상하여 국군의 피해가 훨씬 컸지만 중국은 이 전투를 중요한 승리로 기록하고 있다.

    웨이리황은 장제스가 공산당 근거지를 잠식하라고 한 밀명을 듣지 않았다. 그는 팔로군 인사는 물론 공산당 지도부와도 사이좋게 지냈다. 형식상 자신의 휘하에 있는 팔로군에 전혀 간섭하지 않고 독자성을 보장했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을 지원하는 데도 서슴지 않았다. 항일하는데 공산당과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심지어 공산당 근거지인 옌안에 실탄 100만발, 수류탄 25만발 등 무기를 보낸 일도 있었다. 국민당 부대 대부분이 이른바 ‘마찰전투’(3)에 임하고 있을 때 그런 행동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국민당 특무의 감시 속에서 장제스의 눈밖에 날 행동을 일삼았던 것이다. 웨이리황은 허난성 주석으로 있던 1939년부터 성을 방문하는 공산당 인사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호의를 아끼지 않았다. 저우언라이, 주더, 펑더화이, 린비아오 등 공산당의 핵심 당정 관계자들을 불러 만찬을 베풀고 함께 극을 관람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쌓았다. 공산당 인사들도 그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웨이리황이 옌안을 방문하였을 때 마오쩌둥은 “황허가 화북을 지키고 선생은 황허를 지킨다.”고 써서 주기도 하였다.

    그런 행적 때문에 웨이리황은 국민당 조사통계국등 정보 관계자들에게 “공산당을 비호하는 자”로 찍혀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다. 국민당의 정보 책임자인 다이리가 허난성 성도인 뤄양에 와서 웨이리황의 통공 행적을 조사하여 관련자들을 체포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탕언보 등 국민당 내 지휘관들이 웨이리황을 고발하기도 하였다. 탕언보의 행동은 웨이리황이 재직하고 있는 허난성 주석 자리를 탐낸 것이었다. 장제스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웨이리황을 전구 사령관에서 해임한 뒤 한직에 두고 감시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웨이리황은 항일전에서 전공이 워낙 뛰어났다. 그는 지금도 중국에서 국민당 내 항일 10대 명장 중에서 첫 번째로 평가받고 있다.

    장제스는 웨이리황의 지휘능력을 높이 사 1942년 버마전선에 중국 원정군 사령관으로 파견하였다. 그의 전임은 천청이었는데 천청이 실패를 거듭하자 그를 대신 보냈던 것이다. 동북에서도 패전한 천청의 뒤를 이었으니 묘한 인연이다. 버마에서 그의 임무는 버마-중국 간 도로를 수비하는 것이었다. 웨이는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하여 중국의 생명선인 육상 보급로를 지켰다. 버마공로를 둘러싼 버마회전에서 그는 미군과 영국군 인도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다. 이 전투를 주로 담당한 중국군은 3만 3천명이 전사하고 6만 7천여명이 사상하는 큰 희생을 치렀다. 그래도 중국군은 일본군 2만 5천명을 섬멸하는 등 대격전 끝에 승리하고 공로를 탈환하는 승리를 거뒀다. 그 후에도 웨이리황은 격전 끝에 윈난 서부를 수복하여 중국-인도 간 공로를 소통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아마도 그 때가 웨이리황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기였을 것이다. 그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한젠화와 재혼하여 세인의 부러움을 샀다. 한젠화는 본래 베이징대 문과 출신으로 재학 중일 때 ‘베이징 대학의 꽃’이라고 불렸다 한다.

    웨리이황과 한젠화 부부

    웨이리황, 장제스의 진저우 철군 명령에 견결히 반대하다.

    웨이리황은 장제스가 그 능력을 높이 샀지만 ‘용공분자’이기도 하여 경계를 받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장제스가 동북에 웨이리황을 기용한 것은 대표적인 인사 실패라고 할 만하다. 일본군과 싸울 때 그는 지략도 풍부하고 전투의지도 충만하였다. 그러나 공산당과 싸울 때 웨이리황은 별로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산시성에서 팔로군과 함께 항일전투를 할 때나 허난성 주석일 때 공산당 지도부와 쌓은 교분을 소중히 여겼다. 전쟁에서는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의지, 전투에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투지가 가장 중요한데 동북에서 그는 투지를 보인 일이 없었다. 이런 사람을 기용한 것은 치명적인 실수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내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국민당 인사들 중에는 웨이리황을 공산당과 내통한 첩자라고 의심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공산당은 공식적이던 비공식적이던 한 번도 인정한 일이 없었다. 내전 전후 웨이리황의 행적을 보면 친공인사로 보는 게 타당할 듯 하다.

    웨이리황이 천청의 후임으로 동북에 부임했을 때는 린비아오 휘하의 동북 해방군이 동계공세를 한창 펼칠 때였다. 쓰핑을 잃고 요서지방의 요충지 잉커우를 비롯하여 남만주 대부분을 잃었지만 웨이리황은 반격하지 않고 수비에만 힘썼다. 각지의 수비군이 구원 요청을 보내도 웨이리황은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장제스가 전보로 파병 명령을 하여도 그는 선양, 진저우, 창춘 지역 등 거점을 고수할 뿐이었다. 장제스는 웨이리황이 출병명령을 어길 뿐 아니라 선양에만 머물러 꼼짝하지 않자 불만이 쌓여갔다. 웨이리황이 출병하지 않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동북에서 국군의 전력이 열세여서 수비로 일관하였다. 거기에 선양, 창춘, 진저우 등 거점들이 고립되어 있었으며 철도선까지 해방군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다. 그는 “포위한 뒤 구원군을 공격하는 게 공산군의 장기”라며 이에 말려드는 것을 극히 두려워했다. 명령은 장제스가 하지만 패배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휘하에 있는 동북의 고위지휘관들도 마찬가지여서 정동궈나 랴오야오샹도 웨이리황과 입장을 같이 하였다.

    1948년 3월, 장제스는 웨이리황에게 선양의 국군 주력을 진저우로 철수시키라고 명령하였다. 병력을 뒤로 물려 진저우를 비롯한 잉커우, 천황다오, 산하이관과 같은 요충지를 수비하려는 것이었다. 장제스의 이런 판단은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합리적인 것이었다. 병력이 열세면 전선을 축소하여 수비를 강화하는 것이 전쟁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미군 고문관들은 장제스에게 병력을 산하이관 안으로 철수하여 허베이성을 주로 수비하라고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북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장제스에게 통하지 않을 권고였다. 장제스가 주력을 진저우로 철수시키려 한 것은 미군 고문관들의 입장과 절충한 것이었다. 주력을 요서지방에 두어 화북의 푸쭤이 집단군과 함께 협력, 동북 야전군의 관내 진격을 차단할 심산이었다. 전황이 호전되면 나아가 동북을 탈환하고 후퇴해야 한다면 산하이관 안으로 물러선다는 현실적인 방침이었다. 그러나 웨이리황은 장제스의 방침을 견결하게 반대했다. 교통선을 확보하지 않은 상황에서 대병을 뒤로 물리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웨이리황은 장제스의 지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선양은 동북 국군의 본산이다. 주력을 두면 지킬 수도 있고 공격할 수도 있다. 선양의 병력을 나누면 둘 다 불가능하다.” 웨이리황의 이런 생각에 동북의 국군 지휘관들도 동의했다. 당시 진저우와 선양의 국군은 각각 고립되어 있었다. 두 도시 사이의 거점들을 동북 야전군이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선양에서 진저우로 철수하거나 대군을 보내려면 랴오허강과 신카이허(新开河), 랴오양허(遼陽河) 등의 큰 강들 도하해야 했다. 주위가 모두 적병 천지인 곳에서 부대들이 차단당하거나 분할 포위당하기 십상이었다. 도로 사정도 좋지 않았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도로가 녹아 진탕이 되었던 것이다. 중화기의 이동이나 차량을 이용한 철수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웨이리황은 선양을 고수하고, 부대정비와 훈련을 강화해야 하며,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장제스는 이미 국방부 작전청장인 뤄저옌(羅澤閻)을 시켜 국군 주력의 선양 철수방안을 짜놓고 있었다. 장제스의 판단과 결심이 섰으면 웨이리황은 마땅히 장제스의 방침에 순응해야 했다. 지금껏 장제스의 명령이나 지시에 불응한 지휘관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웨이리황은 달랐다. 고위 지휘관들을 모아 선양 고수의 의견을 모은 다음 부사령관인 정동궈를 난징으로 파견했다. 정동궈는 비행기로 난징에 날아가 장제스에게 동북 지휘관들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장제스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였다. 웨이리황이 그렇게까지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장제스는 분을 참으며 정동궈에게 지시했다. “즉시 돌아가 웨이리황에게 전하라. 선진로를 공격하여 개통시키라고 하라. 선양의 주력을 진저우로 철수시켜야 한다.” 웨이리황은 지휘관들을 다시 한번 모아놓고 장제스의 지시를 전했다. 장제스의 지시가 현실과 맞지 않으며 철수하다 매복에 걸릴 것이라는 자신의 판단을 설명했다. 그러자 지휘관들은 이구동성으로 “선양에 병력을 집중시켜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웨이리황은 다시 참모장인 자오자샹 등을 난징에 보내 장제스에게 선양 사수방안을 보고했다. 그러자 장제스도 더 이상 웨이리황을 설복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현상유지를 고집하는 동북의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서북에서 류칸이 전사하는 등 좋지 않은 소식이 잇따랐고 난징에서 총통 선거 등 국민대회가 열려 장제스도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이었던 것이다.

    5월초가 되자 장졔스는 다시 웨이리황에게 선진로(沈錦路 선양-진저우)를 소통시켜 주력을 진저우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웨이는 여전히 동의하지 않았다. 9병단 사령인 랴오야오샹과 참모장 자오자샹(趙家驤)을 난징으로 보내어 장과 만나 이해득실을 가지고 설득하게 하였다. 그러나 장제스는 진저우 철수 의견을 고집하였다. 제53군과 6군의 207사단만 선양에 남겨 수비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한술 더 떠서 웨이리황을 직접 견제하려고 하였다. 진저우 철수부대와 선양 수비부대를 제외한 나머지 부대와 특종 병단을 더해 기동병단을 편성하라고 지시했다. 특종병단은 전차, 포병, 장갑차, 기병 등 본래의 기동부대들이었다. 이 부대를 직계인 랴오야오샹이 지휘하게 할 생각이었다. 웨이리황은 그렇게 되면 자신이 허수아비가 될 뿐 아니라 랴오야오샹이 선양의 주력을 끌고 갈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겉으로는 이에 따르는 척 하였지만 뒤로는 미온적으로 대처하거나 사실상 명령을 해태하였다. 나중에 해방군의 총공격이 시작될 때까지 기동병단은 끝내 설립되지 못하였다. 웨이리황이 장제스의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해태하게 되자 장제스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1948년 8월 4일에서 6일까지 국민정부 군사검토회가 난징에서 열렸다. 2년간의 전황을 검토하고 전략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그때도 웨이리황은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고수했다. 그는 전황판단을 이렇게 설명했다. “동북의 해방군이 10월에 공세를 시작하면 진저우와 선양을 포위할 것입니다. 따라서 선진로 공격을 포기해야 하며 경거망동하면 안됩니다. 해방군의 10월 공세에 대비해야 합니다. 10월 말까지 선양을 고수하면서 시국 변화를 기다려야 합니다. 선양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원칙입니다. 하지만 제2의 창춘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9월에 랴오선 전역이 시작될 때까지 국군 통수부는 동북 전략을 결정하지 못하였다. 장제스와 웨이리황은 지루하게 선진로 소통과 주력의 진저우 철수 문제로 갑론을박 했다. 그러다 9월에 지난의 싸움이 벌어지자 장제스의 신경이 온통 지난으로 향했다. 지난 전투가 산하이관 안의 가장 중대하고 큰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동북의 국군 철수는 잠복한 채 해방군의 총공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각주>

    1. 공산당이 장정 중 구이저우성 쭌이시에서 그동안의 군사방침을 놓고 토론하였다. 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왕밍과 리더(오토브라운) 등의 군사방침을 정면으로 비판하여 지휘관들의 지지를 얻었다. 마오쩌둥이 군사위원회의 지도권을 다시 확보한 회의이다.

    2. 이때의 사단은 대부분 여단규모로 1만명 정도였다. 병력 3만명에 이르는 사단은 정편 사단으로 부르며 장제스 휘하 국군중 정편 사단은 몇 개 되지 않았다.

    3. 국공합작 속에서 국민당군이 팔로군을 소규모로 공격하던 전투를 말한다. 국공 간의 근거지 다툼도 마찰전투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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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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